LOGIN프리미엄 상영관 전용 라운지는 일반 관람객의 북적임과는 거리가 멀었다.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과 은은한 조명, 라운지에 퍼지는 쌉싸름한 에스프레소 향까지.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어른들의 공간 같았다.문제는 그 공간의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전광판이었다.해인이 웰컴 드링크를 고르는 사이, 전광판에서는 두 사람이 예매한 영화 의 예고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느릿하고 관능적인 첼로 선율을 배경으로, 화면 가득 얽혀드는 남녀의 적나라한 살색이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다.“컥.”커피를 한 모금 삼키려던 도윤의 목구멍에서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놀란 해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자, 도윤은 재빨리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며 시선을 애먼 허공으로 돌렸다. 하얗던 그의 귀 끝이 불이라도 붙은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미치겠군. 저런 걸 나란히 앉아서 보자고?’뒷목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을 느끼며, 도윤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윤해인 앞에서 당황한 티를 낼 수는 없었다.그는 짐짓 여유로운 척, 헛기침을 한 번 더 하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전광판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이거, 박찬… 아니, 그 유명한 예술 영화 감독 작품이네. 작년 해외 영화제에서 미장센으로 대상도 받은 검증된 영화지. 마침 보고 싶었던 거다.”뻔뻔하기 짝이 없는 도윤의 지식인 코스프레에 해인도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췄다.“아, 그, 그렇지? 나도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평론을 본 것 같아. 예매 잘했네, 뭐.”누가 봐도 예술성보다는 다른 곳에 시선이 꽂힌 예고편이었지만, 두 사람은 애써 예술을 논하며 서로의 시선을 회피했다.“관람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상영관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직원의 정중한 안내에 두 사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뻣뻣한 걸음으로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었다.“이쪽입니다. 편안한 관람 되십시오.”직원이 묵직한 방음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앞장서 들어가던 도윤의 발걸음이 돌부리에 걸린 듯 우뚝 멈춰 섰다.뒤따라가던 해인이
이른 아침부터 쏟아지는 햇살이 별채의 창가를 두드렸다.해인은 눈을 뜨자마자 어제 서우가 열고 들어왔던 창문부터 확인했다.하루아침에 벌어진 그 많은 일들이 꿈이었나 싶었지만, 화장대 위에 놓인 낯선 향수병과 도윤의 반지가 그 모든 일이 현실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어제 분명 깨끗이 씻고 잠들었건만, 침구에서 몸을 일으킬 때마다 아주 미세하고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서우가 장난스럽게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진짜 무슨 향수가 이래.”그때, 정적을 깨고 휴대폰이 진동했다.[1시간 뒤에 준비하고 나와.]도윤이었다.다정한 데이트 신청이라기 보다는 거절할 수 없는 명령에 가까웠다.“먼저 제안을 한 건 난데……, 빚쟁이가 된 이 느낌은 뭐지.”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입가에 비집고 나오는 실없는 웃음을 애써 감추며, 해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벌써 미세하게 상기되어 있었다.평소라면 스킨로션에 선크림 정도로 대충 마무리했을 외출 준비였지만, 오늘따라 해인의 손길은 유독 분주했다.조금 더 매끄럽게 베이스를 두드리고, 옅은 음영으로 눈매를 길게 뺐다. 화장대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평소엔 잘 바르지 않던 채도 높은 붉은 립스틱까지 꺼내 들었다.‘가짜 애인 노릇 하러 가는 건데, 너무 꾸민 티가 나면 우스우려나.’속으로는 그렇게 핑계를 대면서도, 입술 선을 따라 색을 채워 넣는 손끝에는 기분 좋은 떨림이 묻어났다. 거울 속의 자신은 평소보다 조금 더 성숙하고, 조금 더 낯설어 보였다. 그 낯섦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단장을 마친 해인은 마지막으로 화장대 한쪽에 놓여 있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네 번째 손가락에 서늘한 금속이 안착하자, 비로소 오늘이 그와의 공식적인 첫 데이트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같은 시각, 별채 앞 진입로에 정차된 검은색 세단 안.운전석에 앉은 도윤은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스티어링 휠을 톡톡 두드리
별채로 돌아온 해인은 녹초가 된 몸을 침대에 뉘었다. 네 번째 손가락을 감싼 다이아몬드 반지의 무게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억지로 밀어내듯 반지를 빼 화장대 위에 내려놓자, 챙그랑- 하는 서늘한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그때, 거울 옆에 놓인 낯선 쇼핑백이 시야에 걸렸다.“어……? 뭐지?”사그락거리는 종이봉투 안에서 묵직한 유리병을 꺼냈다. 낮에 백화점에서 서우와 함께 구경했던 바로 그 니치 향수였다. 리본을 풀자 은은하고도 매혹적인 향기가 해인의 방 안으로 툭, 떨어졌다.만 원짜리 한 장을 서우의 손에 쥐여주고 도망치듯 돌아섰던 제 뒷모습이 떠올라 입술을 깨물었다. 해인은 잠시 향수병을 매만지다 휴대폰을 들었다.[서우야, 혹시 이거 네가 사다 놓은 거야?]메시지를 보낸 지 채 1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똑, 똑-.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해인이 고개를 돌리자, 닫힌 창문 너머로 삐죽 솟은 머리카락과 장난스러운 눈동자가 보였다.“악! 강서우, 너 미쳤어? 여기가 몇 층인데!”급히 창문을 열자, 난간을 타고 올라온 서우가 위험천만하게 매달린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악! 강서우, 너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올라와!”“아, 좀 비켜봐. 나 팔 빠질 것 같아.”서우는 익숙한 동작으로 창턱을 넘어 방 안으로 훌쩍 뛰어 들어왔다.긴 다리는 가볍게 바닥에 닿았다. 해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우를 타박했다.“미쳤지, 진짜. 계단 놔두고 왜 이래? 떨어지면 어쩌려고!”“그냥, 이게 내 로망이었거든.”서우가 헝클어진 머리를 털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좋아하는 여자애 방 창문 두드리는 거. 만화 같고 좋잖아.”“그, 그럼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가서 해야지, 왜 여기 와서 난리야. 간 떨어질 뻔 했네.”“그러니까 여기 왔지. 누나 좋아하니까.”순간 해인의 숨이 툭 멎었다.너무나 해맑게 웃고 있는 저 얼굴에 대고 진지하게 ‘선 넘지 마’ 같은 말을 내뱉는 게 오히려 과민반응처럼 느껴질 정도였다.‘……또 장난이겠지. 얘 원래
반투명한 미러 유리문이 스르르 열렸다.햇빛과는 또다른 찬란한 조명이 쏟아지며, 진열대 안의 보석들이 각자의 빛을 내뿜으며 반짝였다.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깔린 카페트 위로 발을 내딛자, 푹신한 촉감이 발을 덮었다.“기다리고 있었습니다.”미리 연락을 받은 듯 점장이 직접 나와 도윤과 해인을 룸으로 안내했다.소파에 마주 앉자, 검은 벨벳 트레이 위로, 정교하게 세공된 반지들이 각기 다른 광채를 뿜어내며 줄지어 나타났다. 메인 다이아몬드를 수십 개의 서브 스톤이 촘촘하게 감싸 안은 화려한 헤일로 디자인부터, 투명한 얼음 조각을 깎아 만든 듯 날카로운 에메랄드 컷의 대담한 솔리테어 링까지. 플래티넘 밴드를 따라 빈틈없이 박힌 보석들이 조명을 받을 때마다 날카로운 파편 같은 빛을 흩뿌리며 시야를 어지럽혔다.‘무슨……, 결혼반지도 아니고 커플링 그것도 6개월짜리를 이렇게나…….’“고를 수 있겠어, 아니면 내가 골라줄까.”도윤이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으며 물었다. 해인은 눈앞의 화려한 보석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생각을 다졌다.‘확인해 보고 싶어. 오빠에게 내가 어떤 의미인지.’해인은 떨리는 손끝을 감추려 주먹을 꽉 쥐었다가, 이내 트레이 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존재감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콕 집어 가리켰다.“이거.”점장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도윤의 미간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평소의 해인이라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과하다 싶을 정도의 화려함이었다.“……생각보다 취향이 많이 화려해졌네.”“어설픈 실반지 끼고 나갔다가 비웃음 사면 안 되니까.”해인은 생긋 미소 지으며 도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설마…… 아까워?”도발적인 해인의 물음에 도윤은 대답 대신 피식, 서늘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점장에게 눈짓을 보내 결제를 지시하더니, 돌연 옆자리에 앉은 해인의 손을 낚아채듯 끌어당겼다.“앗……!”해인이 당황할 새도 없이, 도윤은 그녀의 손을 제 무릎 위로 가져와 아주 자연스럽게 손가락 사이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얽
“기꺼이 그렇게 해 주지.”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도윤은 해인의 붉어진 뺨 언저리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그의 긴 손가락은 해인의 살갗에 닿기 직전, 허공에서 멈칫하더니 이내 방향을 틀어 책상 위 인터폰 버튼을 꾹 눌렀다.[네, 전무님.]“오후 스케줄 전부 뒤로 미뤄. 오늘 퇴근 전까지 보고 안 받습니다.”[네? 아, 알겠습니다.]해인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완벽주의자에 일 중독자라 평이 나 있는 오빠가 평일 오후 일정을 통째로 비우다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행이었다.“오빠, 지금 뭐 하는…….”“완벽하게 하자며.”도윤이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며 나른하게 받아쳤다.“차민영 성격에 조만간 그 가드 놈을 대동하고 더블데이트라도 하자고 들러붙을 텐데. 그 앞에서 6개월짜리 애인 노릇을 완벽하게 하려면, 미리 연습 정도는 해둬야 하지 않겠어?”해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연습? 대체 무슨 연습을?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단어의 조합, 그리고 맨살에 닿을 듯 밀착해 온 도윤의 뜨거운 체온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날아가 버렸다.해인은 저도 모르게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설마…… 오빠랑 그런 연습까지 해야 하는 거야?스킨십…… 키…스?상상만으로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커다란 눈동자를 굴려 도윤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당황해서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진 해인을 내려다보던 도윤의 입가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나왔다.“무슨 생각해?”도윤이 다시 몸을 숙여 다가오며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해인의 응큼한 상상을 다 꿰뚫어 본 듯한, 지독하게 능글맞고도 매혹적인 목소리였다.“밥 먹으러 나가자고. 에스코트, 에티켓…… 사람들 눈앞에서 연인끼리 당연한 매너들. 연습 안 하면 차민영이 눈치챌 테니까.”매너 연습이라는 도윤의 해명에 해인의 얼굴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자신의 착각과 응큼한 상상이 도윤에게 완벽하게 들켜버린 기분이었다.“……아, 알았어. 나가.”해인은 뜨거워진 뺨을
안으로 들어선 해인의 시선은 곧장 책상 앞의 도윤을 향해 있었다.갑작스러운 호출에 조금 상기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옆쪽 소파에서 여유롭고도 나른한 목소리가 먼저 끼어들었다.“안녕하세요. 태성그룹 차민영입니다.”해인의 고개가 흠칫 놀라며 옆으로 돌아갔다.슈트를 입은 화려한 여자. 그리고 그 뒤를 그림자처럼 지키고 선 남자.순간, 해인의 머릿속에 어제저녁 권 회장이 식사 자리에서 흘리듯 뱉었던 말이 날아와 박혔다.오빠의 맞선 상대.‘나한테 소개해 준다던 사람이 저 여자……, 아니 저 사람이었어?’해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왜인지 모를 수치심과 원망이 발끝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자신을 굳이 이 자리에 부른 이유가 고작, 앞으로 새언니가 될 저 화려하고 완벽한 여자를 보여주며 자신의 처지를 확인시키기 위함이었단 말인가.핏기가 가셨던 해인의 뺨이 이내 모멸감과 배신감으로 붉게 달아올랐다.그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요동치는 감정을 누르고서, 우아한 미소를 얼굴에 덧씌웠다.“아, 오빠랑 맞선 보신 분이시군요. 이야기 들었어요.”해인은 도윤을 향했던 원망 어린 시선을 거두고 민영을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동생 윤해인입니다. 진작 새언니 되실 분인 줄 알았으면 빈손으로 오지 않았을 텐데요. 결례를 범했네요.”철저하게 가족이자 동생으로 선을 긋는 완벽한 방어였다.도윤의 미간이 불쾌감으로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러나 소파에 기대어 있던 차민영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더니, 픽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그런 얼굴 할 필요 없어요.”민영은 제 뒤에 선 태건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덤덤하게 덧붙였다.“난 그쪽 남자한테 관심 없으니까.”그쪽 남자라는 노골적인 단어에 해인의 사고 회로가 일순간 정지했다.방금 전까지 완벽하게 둘러썼던 동생이라는 가면이, 자신의 진짜 마음을 꿰뚫어 본 민영의 돌직구 한 방에 와장창 깨져버린 기분이었다.그 아슬아슬한 정적을 깬 건 도윤이었다.자리에서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