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타이트하게 조여오던 넥타이를 풀어 내리고, 자켓을 침대 위로 던지듯 벗어던졌다.
도윤은 마스터 룸 안쪽, 어둠이 짙게 깔린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 조명 하나만이 비좁은 빛의 영토를 만들고 있었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나도 안 변했네.’
가만히 떠올려 보면 아직도 중학생 꼬맹이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자신을 보고 엄마 뒤로 숨던 6살 아이의 눈빛 그대로였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렸다. 그 투명한 눈동자에 담긴 고단함을 읽어버린 순간, 도윤은 제 심장이 뜯겨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가볼 걸.’
중학교 졸업식 때 갈게.
고등학교 입학하면 보러 갈게.
고등학교 졸업하면 보러 갈게.
.
.
자꾸 늘어난 지키지 못한 약속이 반복될 때쯤, 해인에게 오던 이메일도 끊어졌다.
용기를 내볼까 했을 땐 남자친구가 생겼단다.
복잡한 가정사에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가 알고 있던 모든 연락처를 바꾸어었다. 그게 해인을 위한 길이라 믿었던 자신의 오만함이, 결국 해인을 그 시궁창 속에 홀로 버려두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다시 해주면 돼. 대학도 보내고…….”
텅 빈 서재에 그의 다짐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부럽지 않게 결혼도…… 시켜줘야지.”
그래, 그거면 됐다. 해인이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해주고, 가장 좋은 것만 입히고 먹여서 가장 좋은 놈에게 보내주는 것. 그것이 오빠로서, 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망가뜨린 공범의 아들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내린 결론은 명쾌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정체 모를 답답함이 응어리져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노트북 앞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해인이 편안히 기댈 수 있는 완벽한 울타리를 더 견고하게 다지는 것뿐이었다.
노트북 화면 너머로 내일의 스케줄을 확인하던 도윤의 귀에 둔탁한 소리가 꽂혔다.
텅!
플라스틱 통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였다. 서둘러 서재를 나가보니 주방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그 한가운데 해인이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다쳤어?”
“아, 아니…… 그게, 배고파서 라면이나 좀 있을까 하고 뒤지다가…… 하하, 없네.”
해인이 멋쩍은 듯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집에 라면 없어. 지금 먹을 만 한 게…….”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넘었다.
“치킨 시켜줄까?”
“치킨? 좋지! ”
“아직도 양념만 먹어?”
“응. 반반 시켜. 요즘은 반반 메뉴 많잖아.”
잠시 후, 현관 벨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치킨 박스가 도착했다. 도윤이 식탁에 세팅을 하려 하자, 해인이 박스를 뺏어 들며 거실로 향했다.
“오빠, 저기 거실 탁자에서 먹자. TV 보면서. 우리 옛날에 아저씨랑 엄마 없을 때 맨날 그랬잖아.”
“그럴까?”
바닥에 주저앉아 TV를 틀고 치킨 박스를 여는 해인의 모습은 10년 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도윤은 그녀의 옆에 앉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잠옷이 왜 이래.’
제 손으로 직접 산 잠옷이었다. 분명 긴팔 실크 파자마 세트였는데, 해인이 입으니 어딘가 이상했다. 윗도리는 사이즈가 너무 커서 그녀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하얀 가슴골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 반면 하의는 짧아도 너무 짧았다. 안 그래도 짧은 반바지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자 허벅지 끝까지 말려 올라가,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얀 속살이 도윤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는 달콤한 샴푸 향이 풍겼고, 치킨을 오물거리는 해인의 입술은 기름기 때문에 번들거리며 야한 광택을 냈다.
‘분명히 긴팔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팔은 기네. 그런데 팔이 길면 바지도 길어야지, 하의는 대체 왜 이 모양이야.’
도윤은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에 맥주를 들이켰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치킨무만 씹어댔다.
“오빠, 왜 그래? 맛이 없어? 왜 인상을 쓰고 있어.”
해인이 닭다리를 입에 문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과 촉촉한 눈망울. 도윤은 제 안의 짐승이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그가 엉겁결에 내뱉은 말은 제 진심과는 정반대의 독설이었다.
“……너, 살 좀 빼야겠다.”
“어?”
치킨을 씹던 해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뭐? 나 지금 1kg이라도 더 빠지면 기절할 판이거든? 오빠 눈엔 내가 돼지로 보여?”
“……무슨. 백화점에서 네가 제일 튼튼해 보이던데.”
도윤은 시선을 회피하며 맥주 캔을 찌그러뜨렸다.
“치사해서 안 먹어!”
억울함에 입술을 삐죽 내민 해인이 씩씩거리며 일어섰다.
“처음부터 사주지 말던가, 왜 사람 무안하게 만들고 그래?”
시선을 위로 들자, 짧은 바지 아래로 하얀 엉덩이 밑살이 아슬아슬하게 시야에 걸렸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해인의 손목을 낚아채 다시 바닥으로 주저앉혔다.
“또, 뭐!”
도윤은 홧홧해진 손바닥을 숨기려는 듯 손목을 놓아주며, 일부러 더 무심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다 먹고 가.”
“안 먹어. 살 빼라며. 입맛 다 떨어졌단 말이야.”
“넌 닭이 불쌍하지도 않냐? 먹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야 닭도 덜 억울하지.”
도윤은 맥주 캔을 거칠게 구겨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일할 게 남아서 먼저 들어간다.”
“벌써?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
“누구랑 달라서 난 내일 아침부터 회의거든.”
도윤은 뒤돌아보지 않고 서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문을 열기 직전, 그는 멈춰 서서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다 먹은 건 네가 치워라. 이제 그 정도는 할 줄 알지?”
“……치사해 진짜. 알았어, 내가 치우면 되잖아!”
홀로 남겨진 거실에서 해인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자기가 사줘 놓고 먹으라 마라, 치워라 마라…….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아나 보지.”
해인은 신경질적으로 TV 채널을 돌렸다. 화면 속에서는 화려한 연예인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해인의 신경은 자꾸만 도윤이 들어간 방 문에 머물렀다.
“뭐야, 진짜. 싫다는 사람 데리고 와서는 일이나 하고.”
남은 닭다리를 거칠게 씹었다. 그 옛날 제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뒷바라지해주던 다정한 오빠가 까칠하고 재수 없는 놈으로 변한 것 같아 왠지 모를 섭섭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내, 해인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차라리 그편이 훨씬 편했다. 도윤의 눈에 자신을 향한 연민이나 눅눅한 동정심이 섞여 있었다면, 해인은 이 집에 하루 이상 머물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비참한 바닥을 들킨 상대가 저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고문은 없으니까.
저렇게 막 대해주니, 도리어 마음이 놓였다. 저 까칠한 태도가 해인에게는 도윤이 자신을 여전히 예전처럼 대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처럼 느껴졌다.
타이트하게 조여오던 넥타이를 풀어 내리고, 자켓을 침대 위로 던지듯 벗어던졌다.도윤은 마스터 룸 안쪽, 어둠이 짙게 깔린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 조명 하나만이 비좁은 빛의 영토를 만들고 있었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하나도 안 변했네.’가만히 떠올려 보면 아직도 중학생 꼬맹이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자신을 보고 엄마 뒤로 숨던 6살 아이의 눈빛 그대로였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렸다. 그 투명한 눈동자에 담긴 고단함을 읽어버린 순간, 도윤은 제 심장이 뜯겨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그때 가볼 걸.’중학교 졸업식 때 갈게.고등학교 입학하면 보러 갈게.고등학교 졸업하면 보러 갈게...자꾸 늘어난 지키지 못한 약속이 반복될 때쯤, 해인에게 오던 이메일도 끊어졌다.용기를 내볼까 했을 땐 남자친구가 생겼단다.복잡한 가정사에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가 알고 있던 모든 연락처를 바꾸어었다. 그게 해인을 위한 길이라 믿었던 자신의 오만함이, 결국 해인을 그 시궁창 속에 홀로 버려두게 만들었다.“지금부터 다시 해주면 돼. 대학도 보내고…….”텅 빈 서재에 그의 다짐이 무겁게 가라앉았다.“남부럽지 않게 결혼도…… 시켜줘야지.”그래, 그거면 됐다. 해인이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해주고, 가장 좋은 것만 입히고 먹여서 가장 좋은 놈에게 보내주는 것. 그것이 오빠로서, 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망가뜨린 공범의 아들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했다.스스로 내린 결론은 명쾌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정체 모를 답답함이 응어리져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노트북 앞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해인이 편안히 기댈 수 있는 완벽한 울타리를 더 견고하게 다지는 것뿐이었다.노트북 화면 너머로 내일의 스케줄을 확인하던 도윤의 귀에 둔탁한 소리가 꽂혔다.텅!플라스틱 통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였다. 서둘러 서재를 나가보니 주방 불이 환하게 켜져
“그냥…, 바빴어. 군대 다녀오고 학교 졸업하고, 일하고 살다 보니. 넌 왜 안 했는데?”“나도 바빴지 뭐. 순식간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하고 일 시작하니까 시간이 더 빠르게 가더라.”그녀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백화점 일?”“아니. 처음엔 미용실에서 일하다가, 백화점으로 들어왔어. 내가 손재주가 없나봐 하핫, 지금도 포장 잘 못한다고 혼나거든.”가벼운 웃음소리가 차 안을 울렸지만, 도윤의 표정은 굳어졌다.“자격증 같은 건? 고등학교에서 전문 자격증 따서 졸업하는 친구들도 있잖아.”“자격증은 뭐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나. 그것도 돈이랑 시간이 있어야 학원도 다니고 공부도 하지. 학교 끝나고 고깃집 아르바이트 다녔는데.”도윤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너희가 진짜 남매도 아니고 네 아버지랑 이혼한 마당에, 가깝게 지내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해인이 남자친구 생겼어. 돈 좀 보내봐, 아비도 없는데 비싸게라도 보여야지 대접을 받지.]어째서 그 여자가 보내온 말과 사진을 믿었을까.거짓말이 가득한 메시지를 볼 때마다, 해인이 적어도 자신의 부재를 느끼지 못할 만큼 화려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 믿으며 비겁하게 안도했었다.“……아버지가 살던 집도 줬었고 해서 그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안 어려웠어. 내 주변 친구들 다 비슷하게 살아. 그래도 아저씨 덕분에 남들 보기에 좋은 집에서 살았어. 감사하게 생각해.”감사하다니. 그 말은 도윤에게 독설보다 더 아프게 박혔다.“남자친구는……, 있어? 20대 초반인데 한창 연애할 나이잖아.”도윤이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약 올려? 누구 인생 망치려고. 아마 내가 누구만난다고 하면 우리 엄마, 그 남자 찾아가서 돈 뜯어낼 생각부터 할걸?”“…….”“오빠 여자친구, 아니 그 약혼녀 이야기나 해줘. 강채영…이라고 했지? 예쁘더라. 성격은 좀 까칠한 것 같지만.”“미안해.”갑작스러
마감 시간을 알리는 부드러운 음악이 매장에 깔리기 시작했다. 지친 다리를 두드리며 매대를 정리하던 해인의 귀에, 결코 들려서는 안 될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꽂혔다.“어, 그래! 나 지금 에비뉴 백화점에 옷 사러 왔다니까? 내가 말했잖아, 우리 딸이 여기서 일한다고.”불안한 예감은 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을까.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저 멀리서 화려하다 못해 천박한 원색 원피스를 입은 명희가 전화를 귀에 댄 채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어머, 해인아! 아직 마감 아니지?”명희는 사색이 된 딸의 안색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급하게 안으로 들어와 마구잡이로 행거에 걸린 고가의 코트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한 벌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신상들이 명희의 거친 손길에 힘없이 흔들렸다.“엄마…… 여기 왜 왔어. 지금 영업 끝나가. 일단 나가서 얘기해.”“왜 이래? 나 오늘은 여기 고객으로 온 거야. 어머, 이거 색깔 예쁘다. 이것도 꺼내봐.”명희는 보란 듯이 고가의 실크 블라우스를 집어 들었다. 해인은 떨리는 손으로 명희의 팔을 붙잡았다.“제발…… 왜 이래, 돈 없잖아. 이거 엄마가 살 수 있는 옷 아니야.”“왜 못 사? 여기 직원 할인되잖아. 딸 덕 좀 보자는데 뭐가 문제야? 그래야 내 배 찢고 너 낳은 게 안 억울하지 않겠니?”명희의 목소리가 커지자 주변 동료들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다. 명희는 보란 듯이 코트와 원피스 서너 벌을 계산대 위에 툭 던져 올렸다.“자, 이거 네 사원 카드로 긁어. 직원가로 하면 얼마 안 하겠네.”“절대 안 돼. 이거 내 몇 달치 월급으로도 못 갚아. 당장 내려놔.”해인이 강하게 거부하며 옷을 다시 가져가려 하자, 명희의 눈독이 잔인하게 번뜩였다. 명희는 집어 들었던 화이트 실크 블라우스를 제 화장기 가득한 얼굴에 대고 막무가내로 문질러버렸다.“어머, 어쩌니? 파운데이션이 다 묻어버렸네?”새하얀 실크 위에 진득하게 묻어난 살색 파운데이션과 붉은 립스틱 자국. 해인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거칠게 차에 올랐다. 핸들을 잡은 그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해인이 학원비 좀, 대학은 붙었는데 학비가 없네. 해인이가 해외연수도 가고 싶대.괜찮은 남자 만나려면 해인이도 명품 좀 들고 다녀야 하지 않겠어?그렇게 그 여자에게 보낸 돈이 억 대에 달했다.적어도 한 때는 제 여동생이었던 그녀가 번듯한 대학 졸업장을 따고, 고생 따위는 모르는 귀한 집 아가씨처럼 살고 있을 거라 믿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씨발, 그런데 왜……!”참지 못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도윤은 핸들을 세게 내리쳤다.“왜 저 꼴로 살고 있냐고, 대체!”갈라진 손끝과 푸석한 얼굴과 머리카락.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건지, 앙상한 손목과 발목이 망막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거칠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는 그의 눈동자가 액정 불빛에 번들거렸다.뚜르르르. 뚜르르르.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익숙하고도 위압적인 목소리가 차안을 채웠다.[이 시간에 웬일이냐.][해인이 어머니, 지금 뭐 하고 사는지 아버지는 아시죠.]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수화기 저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와 냉소적인 대답이 돌아왔다.[그건 알아서 뭐하게. 네가 그 여자 계좌로 돈 보내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지? 그런데 이제 직접 찾아가기까지 하려고?][오늘 해인이 만났습니다. 그 애가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것도 아세요?][이혼 한 지가 언제 인데 내가 그것까지 알아냐 하니.][저한테 분명히 그랬어요. 대학교도 가고, 어학연수도 가고 싶어한다고 해서…….][내가 뭐라고 했어! 그 여자한테 돈 보내봐야 해인이 밑으로 한 푼도 안 들어간다고 했지!]아버지의 무심한 포표에 도윤의 눈시울이 뜨겁게 타올랐다. 핸들을 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아버지도 해인이는 귀여워하셨잖아요. 무려 10년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며 따랐어요.][그렇다고 그 애가 진짜 내 딸이 되는 건 아니지 않니.]
“지퍼 좀 올려줄래요?”피팅룸의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나왔다.“네, 손님.”해인은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빠르게 다가갔다. 그녀가 걸친 원피스는 해인의 석 달 치 월급을 합쳐도 살 수 없는 고가의 신상이었다. 여자가 해인을 등지고 거울 앞에 섰다.순간, 해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거울 속 여자의 실루엣이, 그리고 살짝 돌아본 옆얼굴이 어쩐지 자신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는 화려한 조명 아래서 빛나는 보석 같았고, 해인은 그 보석을 닦는 초라한 수건 같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예쁘다…….’그 찰나의 멍함이 독이 되었다.“아얏!”돌연 여자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해인의 팔을 거칠게 밀쳤다.“미쳤어요? 지금 뭐 하는 거야!”“죄, 죄송합니다!”당황한 해인은 급히 지퍼를 살폈다. 가늘고 긴 머리카락 몇 올이 지퍼 이빨 사이에 단단히 씹혀 있었다.“머리카락이 지퍼에 걸려서…….”“아, 진짜 짜증 나. 이거 오늘 관리받고 온 머리인데! 당신 눈 어디다 두고 일해?”“정말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제가 금방 해결해 드릴게요.”다급히 카운터에서 쪽가위를 가져왔다. 조심스럽게 엉킨 머리카락을 끊어내려던 찰나, 여자의 눈이 가자미처럼 찢어졌다.“지금 내 머리카락을 자르겠다고? 이 상황에서 가위질이야? 당신 미쳤어?”“하지만 고객님, 지퍼가 완전히 끼어서 이 방법밖에는…….”“관리자 불러, 당장! 내가, 네 머리카락도 모조리 잘라줄게.”매장 안이 채영의 고함으로 소란스러워진 그때, 묵직한 구두 소리와 함께 매장 입구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무슨 일이야.”낮고 위압적인 음성. 여자는 반색하며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여기 점원이 내 머리카락을 뜯어놓고는 이제 자르겠대. 말도 안 되지?”남자의 시선이 채영을 지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해인에게 멎었다. 얼음처럼 차갑던 남자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균열을 일으키며 흔들렸다.“……윤해인?”익숙하면서도 낯선 무게감에 해인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맞닿는 순간, 해인의 손에 든 가
“왜 하필 강서우야.”낮게 깔린 도윤의 목소리가 방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분노를 억누르느라 불거진 그의 턱 근육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해인은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무심해 보이기까지 했다.“서우가 뭐 어때서. 겉으로 보기에만 철없는 거지, 속도 깊고 여린 애야.” “네가 걔에 대해서 뭘 알아!”쾅. 도윤이 화장대를 내리쳤다. 정적을 깨는 굉음에도 해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 옛날 그의 으름장 한마디에 겁을 먹던 꼬맹이는 이제 없었다.“그래 몰라. 그런데 사람 속을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나한테 잘해주면 되는 거잖아.” “윤해인.” “적어도 서우는 내가 아니면 안 된대. 걔 시선은 한결같이 나야.”도윤은 성큼 다가와 해인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너, 자신 있어? 내 눈앞에서 다른 놈이랑 살 자신 있냐고.”"못할 건 뭐 있어. 어차피 오빠 선택지에 나는 없잖아.”순간, 도윤의 숨이 멎었다.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찔린 자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해인은 그 비극적인 표정을 감상하듯 서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사실 나는 누구랑 결혼하든 똑같아. 그게 강서우든, 길거리의 누구든 상관없다고.” “……말 함부로 하지 마.”도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얇은 니트 위로 해인의 가녀린 뼈마디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해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보다 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도윤의 심장에 박혔다.“대체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네. 남부럽지 않은 결혼 시켜주겠다며. 자기 하기는 싫지만, 남 주려니 아까운 마음인가?”도윤의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해인을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이며 제 몸으로 그녀를 가둬버렸다.“계획 바꿨어."도윤의 뜨거운 숨결이 해인의 입술 바로 위에서 흩어졌다. "못 가. 강서우한테도, 그 어떤 새끼한테도.”“그럼 어떻게 하라고. 그냥 죽어버릴까.”해인은 있는 힘껏 입꼬리를 끌어당겨 봤지만, 기어이 눈앞이 흐려졌다. 그 처절한 얼굴을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