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타이트하게 조여오던 넥타이를 풀어 내리고, 자켓을 침대 위로 던지듯 벗어던졌다.
도윤은 마스터 룸 안쪽, 어둠이 짙게 깔린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 조명 하나만이 비좁은 빛의 영토를 만들고 있었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나도 안 변했네.’
가만히 떠올려 보면 아직도 중학생 꼬맹이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자신을 보고 엄마 뒤로 숨던 6살 아이의 눈빛 그대로였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렸다. 그 투명한 눈동자에 담긴 고단함을 읽어버린 순간, 도윤은 제 심장이 뜯겨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가볼 걸.’
중학교 졸업식 때 갈게.
고등학교 입학하면 보러 갈게.
고등학교 졸업하면 보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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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늘어난 지키지 못한 약속이 반복될 때쯤, 해인에게 오던 이메일도 끊어졌다.
용기를 내볼까 했을 땐 남자친구가 생겼단다.
복잡한 가정사에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가 알고 있던 모든 연락처를 바꾸어었다. 그게 해인을 위한 길이라 믿었던 자신의 오만함이, 결국 해인을 그 시궁창 속에 홀로 버려두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다시 해주면 돼. 대학도 보내고…….”
텅 빈 서재에 그의 다짐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부럽지 않게 결혼도…… 시켜줘야지.”
그래, 그거면 됐다. 해인이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해주고, 가장 좋은 것만 입히고 먹여서 가장 좋은 놈에게 보내주는 것. 그것이 오빠로서, 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망가뜨린 공범의 아들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내린 결론은 명쾌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정체 모를 답답함이 응어리져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노트북 앞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해인이 편안히 기댈 수 있는 완벽한 울타리를 더 견고하게 다지는 것뿐이었다.
노트북 화면 너머로 내일의 스케줄을 확인하던 도윤의 귀에 둔탁한 소리가 꽂혔다.
텅!
플라스틱 통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였다. 서둘러 서재를 나가보니 주방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그 한가운데 해인이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다쳤어?”
“아, 아니…… 그게, 배고파서 라면이나 좀 있을까 하고 뒤지다가…… 하하, 없네.”
해인이 멋쩍은 듯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집에 라면 없어. 지금 먹을 만 한 게…….”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넘었다.
“치킨 시켜줄까?”
“치킨? 좋지! ”
“아직도 양념만 먹어?”
“응. 반반 시켜. 요즘은 반반 메뉴 많잖아.”
잠시 후, 현관 벨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치킨 박스가 도착했다. 도윤이 식탁에 세팅을 하려 하자, 해인이 박스를 뺏어 들며 거실로 향했다.
“오빠, 저기 거실 탁자에서 먹자. TV 보면서. 우리 옛날에 아저씨랑 엄마 없을 때 맨날 그랬잖아.”
“그럴까?”
바닥에 주저앉아 TV를 틀고 치킨 박스를 여는 해인의 모습은 10년 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도윤은 그녀의 옆에 앉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잠옷이 왜 이래.’
제 손으로 직접 산 잠옷이었다. 분명 긴팔 실크 파자마 세트였는데, 해인이 입으니 어딘가 이상했다. 윗도리는 사이즈가 너무 커서 그녀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하얀 가슴골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 반면 하의는 짧아도 너무 짧았다. 안 그래도 짧은 반바지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자 허벅지 끝까지 말려 올라가,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얀 속살이 도윤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는 달콤한 샴푸 향이 풍겼고, 치킨을 오물거리는 해인의 입술은 기름기 때문에 번들거리며 야한 광택을 냈다.
‘분명히 긴팔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팔은 기네. 그런데 팔이 길면 바지도 길어야지, 하의는 대체 왜 이 모양이야.’
도윤은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에 맥주를 들이켰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치킨무만 씹어댔다.
“오빠, 왜 그래? 맛이 없어? 왜 인상을 쓰고 있어.”
해인이 닭다리를 입에 문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과 촉촉한 눈망울. 도윤은 제 안의 짐승이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그가 엉겁결에 내뱉은 말은 제 진심과는 정반대의 독설이었다.
“……너, 살 좀 빼야겠다.”
“어?”
치킨을 씹던 해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뭐? 나 지금 1kg이라도 더 빠지면 기절할 판이거든? 오빠 눈엔 내가 돼지로 보여?”
“……무슨. 백화점에서 네가 제일 튼튼해 보이던데.”
도윤은 시선을 회피하며 맥주 캔을 찌그러뜨렸다.
“치사해서 안 먹어!”
억울함에 입술을 삐죽 내민 해인이 씩씩거리며 일어섰다.
“처음부터 사주지 말던가, 왜 사람 무안하게 만들고 그래?”
시선을 위로 들자, 짧은 바지 아래로 하얀 엉덩이 밑살이 아슬아슬하게 시야에 걸렸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해인의 손목을 낚아채 다시 바닥으로 주저앉혔다.
“또, 뭐!”
도윤은 홧홧해진 손바닥을 숨기려는 듯 손목을 놓아주며, 일부러 더 무심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다 먹고 가.”
“안 먹어. 살 빼라며. 입맛 다 떨어졌단 말이야.”
“넌 닭이 불쌍하지도 않냐? 먹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야 닭도 덜 억울하지.”
도윤은 맥주 캔을 거칠게 구겨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일할 게 남아서 먼저 들어간다.”
“벌써?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
“누구랑 달라서 난 내일 아침부터 회의거든.”
도윤은 뒤돌아보지 않고 서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문을 열기 직전, 그는 멈춰 서서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다 먹은 건 네가 치워라. 이제 그 정도는 할 줄 알지?”
“……치사해 진짜. 알았어, 내가 치우면 되잖아!”
홀로 남겨진 거실에서 해인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자기가 사줘 놓고 먹으라 마라, 치워라 마라…….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아나 보지.”
해인은 신경질적으로 TV 채널을 돌렸다. 화면 속에서는 화려한 연예인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해인의 신경은 자꾸만 도윤이 들어간 방 문에 머물렀다.
“뭐야, 진짜. 싫다는 사람 데리고 와서는 일이나 하고.”
남은 닭다리를 거칠게 씹었다. 그 옛날 제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뒷바라지해주던 다정한 오빠가 까칠하고 재수 없는 놈으로 변한 것 같아 왠지 모를 섭섭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내, 해인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차라리 그편이 훨씬 편했다. 도윤의 눈에 자신을 향한 연민이나 눅눅한 동정심이 섞여 있었다면, 해인은 이 집에 하루 이상 머물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비참한 바닥을 들킨 상대가 저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고문은 없으니까.
저렇게 막 대해주니, 도리어 마음이 놓였다. 저 까칠한 태도가 해인에게는 도윤이 자신을 여전히 예전처럼 대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처럼 느껴졌다.
“어제 일 말인데.”“어제 무슨 일.”“서우가 한 말…… 그거 진짜 아니야. 나 서우 그냥 동생으로 생각해. 맹세코 그 이상으로 본 적 없어.”변명하듯 쏟아내는 해인의 말에, 핸들을 쥐고 있던 도윤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하지만 해인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어제처럼 짓궂게 굴 때도 있지만, 걔 원래 그런 장난 잘 치잖아. 오빠 긁으려고 일부러 더 과장해서 말한 걸 거야.”“…….”“그러니까……, 혹시라도 어제 일 때문에 신경 쓰고 있다면 걱정하지 마.”마침내 신호등이 붉은색으로 바뀌며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동시에 운전대에 얹혀 있던 도윤의 손이 툭 떨어졌다.“내가 뭘 걱정하는데.”느릿하게 고개를 돌린 도윤의 시선이 해인에게로 와서 꽂혔다.무심한 듯하지만, 그 안에는 형용할 수 없는 짙은 열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어? 아니, 어제…… 오빠가 화 많이 난 것 같아서. 혹시나 서우랑 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날까 봐…….”“걱정 안 해.”말문이 막힌 해인을 향해 도윤이 나른하게 상체를 기울여왔다.좁은 차 안, 두 사람의 거리가 아찔할 만큼 가까워졌다. 도윤의 짙은 체향이 코로 들어오며 해인의 숨통을 조였다.도윤은 크게 요동치는 해인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을, 기가 막힐 정도로 평온한 얼굴로 내뱉었다.“네가 서우를 만나든, 딴 놈을 만나든. 나부랭이 같은 새끼들이랑 무슨 일이 날까 봐 걱정하는 일, 앞으로도 없어.”“오빠…….”“너, 나 좋아하잖아.”순간, 해인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져 내렸다.쿵, 쿵, 쿵.고막을 찢을 듯한 이명과 함께 귓가에 미친 듯한 박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뭐?”“아니야?”도윤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비스듬히 말려 올라갔다. 그것은 오빠로서의 여유가 아니라, 승기를 쥔 포식자의 오만한 확신이었다.“네 시선이 어딜 향해 있는지, 누구한테 반응하는지.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았어
어젯밤, 해인의 입에서 ‘남’이라는 단어가 떨어졌을 때 권도윤은 앓던 이가 빠진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그래, 남. 빌어먹을 오빠 동생이 아니라 완벽한 타인.그런데 문제가 생겼다.생판 남인 여자, 그것도 제가 미치도록 탐내고 있는 여자에게 대체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건지 서른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다는 것."숨 막히는 이사회 심문 앞에서도 넥타이 한 번 고쳐 매지 않던 그가, 아침부터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글자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온 신경은 창밖 너머, 굳게 닫힌 별채의 현관문에 쏠려 있었다.‘언제쯤 나오려나. 마주치면 뭐라고 해야 하지? 잘 잤냐고? 아니, 너무 오빠 같잖아. 그럼 오늘 예쁘네? 미친놈처럼 보이려나.’머릿속으로 수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그때였다.덜컥-.멀리서 별채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밤새 잠을 설쳤는지 조금 퀭한 얼굴로 걸어 나오는 해인의 어깨에는 무거운 포트폴리오 가방이 매달려 있었다.그녀가 본채 앞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도윤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신문을 소파에 던져두고 현관을 나섰다.평소라면 마당을 가로지르는 해인에게 냉큼 다가가 가방부터 뺏어 들며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터였다. 하지만 도윤은 정원 한가운데서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 채 우뚝 걸음을 멈췄다.아침 햇살 아래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와, 얇은 셔츠 위로 도드라진 가녀린 어깨선이 오늘따라 숨이 막힐 정도로 기이하고 낯설게 느껴졌다.“……어?”갑자기 길을 막아선 도윤의 등장에 놀란 해인이 흠칫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얇은 셔츠 위로 무거운 가방끈이 비스듬히 파고들어 꼬여 있었다.“……가방끈.”도윤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저 꼬인 끈을 바로잡아주려던 것뿐인데, 손끝이 해인의 어깨에 닿는 순간 도윤은 숨을 헉 삼킬 뻔했다.‘……미치겠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안아주고 쓰다듬었던 어깨였다.대체 그때는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거지?‘
[도윤 오빠]평소라면 한 번 안 받으면 그만일 도윤이 연달아 열 통이 넘게 전화를 남겼다.‘무슨 일이 있나? 또 한참 안 받았다고 화를 내면 어쩌지?’해인은 초조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려 통화 버튼을 눌렀다.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연결되었다.“……오빠? 미안해. 서우 일하는 데 구경 왔는데, 촬영장 안이라 소리를 못 들었어.”[끝났어?]그녀의 예상과 달리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도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하고 매끄러웠다.화가 났다거나 다그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평온한 음성.해인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응, 방금 끝났어. 이제 정리하고 가려고.”[그럼 서우랑 같이 내려와. 스튜디오 앞이야. 저녁 사줄게.]그 차분한 통보에 해인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오빠가 이곳까지 왔다고?갑자기?아니, 그보다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고?열 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그런데도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목소리.그리고 묻지도 않은 제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집요함까지.그 이질적인 조합에 등줄기로 오싹한 전율이 훑고 지나갔다.해인이 미처 ‘여길 어떻게 알았냐’고 입을 떼기도 전에 전화는 일방적으로 툭 끊어졌다.“누구야?”어느새 다가온 서우가 끊긴 핸드폰을 쥐고 굳어 있는 해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아……, 오빠가 스튜디오 앞이래. 저녁 사준다고 같이 내려오라는데.”“형이 여길 왔다고?”해인의 말에 서우는 아주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비스듬히 말아 올렸다.“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고 온건지…….”서우의 눈이 반짝 커지더니, 이내 손뼉을 짝 쳤다.“아! 내가 촬영 시작 전에, 스튜디오 태그해서 SNS에 우리 사진 올렸거든. 그거 왔나보네.”서우가 여유롭게 제 겉옷을 챙겨 입으며 해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가자. 기왕 형이 여기까지 납셨는데 안 가면 섭섭하지. 오늘 메뉴는 우리가 골라도 된대? 엄청 비싼 거 사달라고 해야겠다.”잠시 후,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을 맞이
손끝이 화면 위를 내리누르자, 조명이 은은하게 비치는 프라이빗 스파 풀장의 사진이 액정을 가득 채웠다.수증기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나른하게 미소 짓고 있는 반나체의 강서우.그리고 그 옆에서, 얇은 홀터넥 수영복만 입은 채 당황한 듯 렌즈를 피하고 있는 윤해인의 젖은 어깨와 붉어진 뺨.게시물 아래에는 보란 듯이 태그가 달려 있었다.@Seowoo_K: 협찬 바우처 덕분에 주말 오전부터 완벽한 힐링. 이제 열일하러 촬영장 갑니다.#프라이빗스파 #VIP코스 #휴식 #일일어시스턴트랑_함께누가 봐도 협찬받은 스파를 홍보하는 평범한 모델의 일상 사진.대중들은 그저 서우의 화려한 외모와 스파의 고급스러움에 환호할 테지만, 도윤의 눈에는 달랐다.사진 속 서우의 시선은 렌즈가 아니라, 제 옆에 바짝 붙어 앉은 해인의 젖은 쇄골을 향해 아주 교묘하고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리넨 냅킨이 도윤의 손아귀 안에서 처참하게 구겨졌다.바스라지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짓이겨진 천 뭉치는,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숨통을 틀어쥐고 싶은 그의 뒤틀린 심사 그 자체였다.‘대체 무슨 생각이지.’선박에서의 그 밤, 채영의 농간에 휘둘려 해인에게 약이 든 술을 건넸던 서우를 도윤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기꺼이 용서했다.실수였다는 그 비겁한 변명을 믿어준 것이 아니었다.결론은 서우가 해인을 건드리지 않았고, 해인의 주변을 더는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도윤의 인내였을 뿐이다.그런데 강서우는 보란 듯이 그 인내를 비웃으며 다시 해인을 건드리고 있었다.‘진심인 건가, 아니면 단순히 나를 이겨 먹기 위해 던지는 패인가.’어느 쪽이라 하더라도 끔찍했다.사진 속 저 맹목적인 눈빛이 해인을 흔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도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하지만 만약 이게 단순한 게임이라면, 저놈은 오늘 제 손에 죽어야 했다.감히 윤해인을 상대로 우월감을 확인하려 들고, 수만 명의 눈앞에 그녀를 전시하며 저를 조롱하는 그 가벼운 유희를 도
스파 건물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는 내내, 해인은 반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었다.풍성한 아로마 오일의 향도,전문가의 섬세한 마사지도 해인의 굳은 몸을 풀어주진 못했다.엎드려 있는 한 시간 내내 머릿속에는 오직 수면 아래에서 들려오던 강서우의 목소리만이 이명처럼 맴돌았으니까.‘나는 누나만의 얌전한 개가 될 수 있어.’해인은 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히려 연신 손바닥을 뺨에 갖다 대었다.반면 서우는 스파 덕분인지, 아니면 제 고백에 흔들리는 해인의 모습을 구경한 덕분인지 아주 개운하고 반짝거리는 얼굴이었다.조수석 문을 열어주던 서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차 하는 표정으로 해인을 내려다보았다.“아, 맞다. 깜빡하고 말 안 했는데, 나 오늘 오후에 화보 촬영 있거든.”“……어? 촬영?”“응. 그래도 뭐, 같이 가줄 거지? 나 일하는 거 구경도 좀 하고.”뻔뻔하고도 자연스러운 통보였다.해인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지만, 서우는 해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가볍게 그녀의 등을 밀어 조수석에 앉혔다.“촬영 금방 끝나니까, 같이 있다가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가자. 누나 좋아하는 거 사줄게.”스파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강서우의 능수능란한 페이스에 완전히 휘말려, 해인은 ‘안 돼’라고 거절할 타이밍조차 놓쳐버렸다.“벨트 매.”서우가 운전석에 올라타며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해인은 어쩐지 저 여우 같은 놈이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바우처를 내밀었다는 강한 합리적 의심이 들었지만, 이미 스포츠카는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서우의 스포츠카가 해인을 태우고 능수능란하게 스파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을 무렵.같은 시각, 본가에서 멀지 않은 프라이빗 호텔 라운지.도윤은 식은 홍차 잔을 매만지며 맞은편에 앉은 차민영을 건조한 시선으로 응시했다.태성과 에이펙의 합작 건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주말 낮부터 그녀를 불러냈지만, 사실 비즈니스 점검은 얄팍한 핑계에 불과했다.진짜 속내는 따로 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프라이빗 VIP룸.문이 닫히고 단둘만 남겨지자, 앞장서 걷던 해인의 걸음이 뚝 멎었다.은은한 아로마 향과 따뜻한 수증기가 감도는 실내 중앙.당연히 나란히 누워 받는 마사지 베드가 있을 줄 알았던 공간에는, 은은한 조명을 받는 커다란 온수 풀(Spa tub)이 자리 잡고 있었다.“여기…… 마사지 샵 아니었어?”해인이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서우 역시 작게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깨를 으쓱했다.“어라. 바우처에 스파 코스라고 적혀 있긴 했는데, 진짜 물에 들어가는 스파일 줄은 나도 몰랐네. 그냥 전신 마사지인 줄 알았어.”한 치의 당황함도 묻어나지 않는, 뻔뻔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변명이었다.제공된 홀터넥 스타일의 얇은 스파용 수영복을 입은 해인이 난감한 얼굴로 맨살을 가리려 팔짱을 끼자, 서우가 피식 웃으며 제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가운을 훌렁 벗어 던졌다.조명 아래로 모델다운 매끈하고 탄탄한 상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군더더기 없이 갈라진 근육 위로 수증기가 맺히는 것을 보며 해인이 흠칫 시선을 피했지만, 서우는 아무렇지 않게 계단을 밟고 따뜻한 물속으로 스르륵 몸을 담갔다.“뭘 그렇게 얼어 있어, 누나.”“아니, 남녀가 같이 탕에 들어가는 건 좀…….”“우리 둘 다 수영복 챙겨 입었잖아. 해변가 가면 이것보다 헐벗고도 잘만 돌아다니면서 왜 새삼스럽게 유교 걸처럼 굴어?”서우가 찰바닥, 가볍게 물장구를 치며 나른하게 턱을 괴었다.“다리 끊어질 것 같다며. 따뜻한 물에 담그고 있으면 금방 풀릴 거야. 정 불편하면 밖에서 기다리든가. 나 혼자 이 넓은 거 다 쓰지 뭐.”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운 태도였다.여기서 뒷걸음질 치면 혼자 이상한 상상을 한 것 같아 우스워질 판이었다.결국 해인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못 이기는 척 물속으로 조심스레 발을 담갔다.따뜻한 온기가 굳어있던 몸을 녹이자 저도 모르게 나른한 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일렁이는 파도 소리와 함께 서우가 해인의 바로 옆으로 스르륵
도윤의 집무실 문이 예고도 없이 열렸다.“점심이나 먹죠, 파트너.”서류를 검토하던 도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칼같이 재단된 크림 화이트 컬러의 슈트를 입은 차민영이 들어서고 있었다. 헐렁한 재킷 소매 아래로 언뜻 보이는 볼드한 골드 뱅글이 바깥세상의 빛을 반사했다.“하아…, 비서실을 갈아치워야 하나.”“또 뭘 그렇게까지. 난 프리패스거든요. 물론 권한은 권 회장님께서 주셨고.”도윤의 시선이 민영을 지나쳐, 그녀의 등 뒤에서 그림자처럼 태건에게로 꽂혔다.무표정한 가드의 얼굴 너머로, 어젯밤 그가 꿰뚫어 보았던
“……!”[602호. 안 와도 상관 없어. 사람들은 늘 이런식으로 날 대하니까.]뚝.전화가 끊겼다. 해인은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신음조차 내뱉지 못했다. 귓가에는 서우의 낮고 절박한, 그래서 더 잔인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쟁쟁하게 맴돌았다.[먹고 버리기에 제격인 거지?]그 말이 낙인이 되어 해인의 전신을 지져댔다. 자신의 기억 속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서우의 일그러진 얼굴. 모든 정황이 하나의 결론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해인은 미친 듯이 방을 뛰쳐나갔다. 복도에는 이른 아침의 정적만이 감돌았다.타닥, 타닥.도윤의 커다
“조용히 있을 게, 피우지 마.”담배를 뺏는 과정에서 해인의 손가락 끝이 도윤의 아랫입술에 살짝 스쳤다. 찰나의 접촉이었지만, 도윤은 마치 불에 덴 듯 멈춰 섰다.“……윤해인.”낮게 가라앉은 도윤의 목소리가 경고처럼 울렸다. 해인은 뺏은 담배를 등 뒤로 감추며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몸에도 안 좋은 거, 그냥 끊어.”해인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다가, 도윤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웃음이 멎었다. 도윤은 나가지도, 다시 앉지도 않은 채 해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도윤이 한 걸음 다가오자 해인은 책상 모서리에 가로막혀 뒤로 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해인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서우는 그녀가 뺨이라도 때릴 줄 알았지만, 해인의 손은 너무도 부드럽게 서우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해인이 서우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짐승의 털을 골라주듯 조심스럽고도 단호한 손길이었다. 서우는 숨 쉬는 법조차 잊은 채 굳어버렸다.“불쌍하게 안 봐. 내 주제에 누굴 불쌍하게 보겠어.”해인의 나직한 목소리가 서우의 귓가에 닿았다.“그런데 어떻게 안 아파. 백 번을 맞아도, 천 번을 맞아도 아픈 건 그냥 아픈 거야. 익숙해진다고 해서 상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