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강단태는 두고.”
은빛새가 마지막 문장을 읽은 채 굳어 있었다.
윤하늘은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천장 구석의 작은 카메라.
붉은 불빛은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누군가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강단태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답장하지 마세요.”
빛새가 물었다.
“왜요?”
“반응을 기다리는 겁니다.”
하늘은 카메라를 바라봤다.
“그럼 기다리게 두죠.”
단태가 그녀를 봤다.
“하늘 씨.”
“이번에도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계속 끌려다녀요.”
빛새도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 순간.
또 문자가 왔다.
**[시간 없어.]**
이어진 두 번째 문자.
**[은빛새.]**
빛새의 표정이 굳었다.
**[네가 왜 장례식에 갔는지 윤하늘한테 말해.]**
이번에는 하늘이 빛새를 바라봤다.
“무슨 뜻이에요?”
빛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빛새 씨.”
“…….”
“나한테 아직 말 안 한 거 있어요?”
단태가 천장을 한번 보고 말했다.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하늘은 동의했다.
“나가요.”
세 사람은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가게 밖으로 나온 뒤에도 하늘은 곧장 차에 타지 않았다.
“여기서 말해요.”
빛새가 주변을 둘러봤다.
“밖에서요?”
“적어도 카메라 앞은 아니잖아요.”
단태가 근처에 세워진 차량들을 확인했다.
“짧게 하죠.”
하늘은 빛새에게 다시 물었다.
“왜 장례식에 왔어요?”
빛새의 손이 천천히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재욱 씨가 오라고 했어요.”
하늘의 표정이 굳었다.
“뭐라고요?”
“정확히는.”
빛새가 휴대전화 하나를 꺼냈다.
“하늘 씨를 찾아가라고 했어요.”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
“사고 일주일 전.”
빛새가 녹음 파일 하나를 열었다.
재생.
잠시 잡음이 흐른 뒤.
도재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빛새야.”
하늘의 손끝이 굳었다.
분명 재욱이었다.
“내가 며칠 동안 연락이 안 될 수도 있어.”
빛새는 입술을 깨물었다.
녹음은 계속됐다.
“만약 일주일이 지나도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짧은 침묵.
“윤하늘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하늘의 표정이 굳었다.
“그 사람이 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냥 돌아가.”
빛새가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안다고 하면.”
재욱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 아내라고 하면.”
하늘의 숨이 멎는 듯했다.
“절대 혼자 두지 마.”
녹음이 끝났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하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장례식에서 왜 바로 말 안 했어요?”
빛새는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못 믿었으니까요.”
“누굴.”
“하늘 씨를.”
하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빛새가 바로 말을 이었다.
“나도 미쳤었어요.”
“…….”
“내가 2년 동안 남편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죽었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장례식장에 갔더니 다른 여자가 자기 남편이라고 하고.”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재욱 씨가 죽기 전에 그 여자를 찾아가라고 했어요.”
빛새가 하늘을 바라봤다.
“내가 뭘 믿어야 했겠어요.”
“그래서 떠본 거예요?”
“네.”
“내가 진짜 아내인지.”
“네.”
하늘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결혼사진 보여주고.”
“……네.”
“내가 불륜 상대일 수도 있다고 한 거고.”
빛새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하늘은 바로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화를 내지도 않았다.
조금은 이해됐다.
둘 다 같은 방식으로 속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 사람은 법적으로 아내였고.
한 사람은 아니었다.
단태가 물었다.
“재욱 씨가 그 녹음만 남겼습니까?”
빛새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니요.”
그녀가 가방 안에서 작은 흰 봉투 하나를 꺼냈다.
하늘이 바라봤다.
“그건 뭐예요?”
“재욱 씨가 녹음 보내기 이틀 전에 줬어요.”
“왜 지금까지 안 열었어요?”
“열지 말라고 했으니까.”
“언제까지?”
빛새가 봉투 앞면을 보여줬다.
재욱의 글씨.
**윤하늘을 직접 만난 뒤에 열 것.**
하늘의 눈빛이 굳었다.
“그럼 장례식에서 이미 만났잖아요.”
“맞아요.”
“근데 왜 안 열었어요?”
빛새는 잠시 망설였다.
“무서웠어요.”
“뭐가.”
“열면 진짜 다 끝날 것 같아서.”
그 말은 하늘도 이해했다.
모를 때는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열어버리면.
진실이 된다.
하늘이 말했다.
“지금 열어요.”
빛새가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작은 메모지 한 장뿐이었다.
하늘과 단태가 동시에 가까이 다가갔다.
첫 줄.
**윤하늘과 은빛새.**
두 번째.
**둘이 같이 있어야 다음 걸 찾을 수 있다.**
그 아래에는 숫자 두 개가 적혀 있었다.
**0721**
**1119**
빛새가 말했다.
“0721.”
하늘이 바로 알아봤다.
“결혼기념일.”
단태가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 씨랑 재욱 씨?”
“네.”
빛새는 두 번째 숫자를 바라봤다.
“1119는.”
잠시 멈췄다.
“저랑 재욱 씨가 처음 같이 살기 시작한 날이에요.”
하늘의 표정이 굳었다.
둘의 날짜.
한쪽은 자신.
한쪽은 빛새.
메모 맨 아래.
**한쪽만 알고 있으면 열 수 없다.**
단태가 물었다.
“뭘 연다는 거죠?”
빛새가 갑자기 말했다.
“지하실.”
하늘이 그녀를 봤다.
“뭐가요?”
“아까 전자금고 있었어요.”
“어디.”
“책상 뒤쪽.”
단태의 표정이 바뀌었다.
“왜 아까 말 안 했습니까?”
“잠겨 있었고.”
빛새가 빠르게 말했다.
“숫자키가 이상했어요.”
“어떻게.”
“열두 자리 입력 방식.”
하늘과 단태가 동시에 멈췄다.
721.
722.
여덟 자리.
네 자리가 부족했다.
하늘이 중얼거렸다.
“둘만 가지고는 안 되네.”
단태가 메모를 다시 봤다.
“한쪽만 알고 있으면 열 수 없다.”
하늘이 말했다.
“둘을 합치라는 뜻인 건 맞는 것 같은데.”
빛새가 물었다.
“07211119?”
단태가 고개를 저었다.
“열두 자리라면 네 자리가 더 필요합니다.”
하늘은 잠시 생각했다.
결혼기념일.
동거 시작일.
그렇다면.
둘 사이에 공통으로 연결되는 날짜가 하나 더 있었다.
하늘의 표정이 굳었다.
“사고 날.”
빛새가 하늘을 바라봤다.
“네?”
“재욱 씨가 죽은 날.”
9월 1일.
**0901.**
단태가 말했다.
“0721, 1119, 0901.”
빛새가 숨을 삼켰다.
“열두 자리.”
세 사람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지하실 카메라를 먼저 떼어냈다.
단태가 전송선을 뽑았다.
붉은 불빛이 꺼졌다.
“이제 적어도 실시간으로 보진 못합니다.”
빛새가 책상 뒤 벽을 밀었다.
작은 전자금고가 나타났다.
숫자 열두 자리.
하늘이 먼저 입력했다.
**072111190901**
삑.
빨간 불.
실패.
빛새가 말했다.
“순서가 다른가?”
이번에는.
**111907210901**
삑.
또 실패.
하늘은 화면을 바라봤다.
왜 안 되지.
그 순간.
아까 메모의 첫 줄이 떠올랐다.
윤하늘과 은빛새.
순서.
하늘이 먼저.
빛새가 뒤.
그런데 마지막 날짜.
사고일.
재욱의 죽음.
단태가 조용히 말했다.
“날짜 형식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형식?”
“월일이 아니라.”
하늘이 바로 이해했다.
사고는 2026년.
하지만 앞 두 날짜는 년도가 없었다.
그런데 금고는 열두 자리.
하늘이 다시 생각했다.
721.
722.
723.
분명 열두 자리.
“아니.”
하늘이 말했다.
“이게 맞아요.”
“그럼 왜.”
하늘의 시선이 금고 아래로 향했다.
숫자키 밑.
작은 홈이 하나 있었다.
카드 인식부.
“숫자만 넣는 게 아니에요.”
빛새가 가방을 뒤졌다.
“카드?”
그러다 멈췄다.
아까 봉투 안쪽에 붙어 있던 얇은 카드 한 장.
빛새가 꺼냈다.
하늘이 바라봤다.
앞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빛새가 카드를 인식부에 댔다.
삑.
초록불.
하늘이 다시 입력했다.
**072111190901**
철컥.
금고가 열렸다.
빛새가 숨을 삼켰다.
안에는 현금도.
USB도 없었다.
카드 두 장.
한 장에는.
**윤하늘.**
다른 한 장에는.
**은빛새.**
하늘이 자신의 카드를 집었다.
빛새도 자신의 것을 들었다.
뒤집었다.
둘 다 같은 주소.
서울 성동구.
그리고 한 줄.
**개인 보관실 B-17**
단태가 두 카드를 바라봤다.
“재욱 씨가 처음부터 두 분이 같이 움직이도록 만들어놨습니다.”
하늘이 차갑게 말했다.
“왜.”
단태가 대답했다.
“한 사람에게 전부 주면.”
잠시 멈췄다.
“그 사람이 잡히는 순간 끝나니까.”
빛새가 카드 가장자리를 쥐었다.
“그래서 반씩.”
“네.”
단태가 말했다.
“한 사람은 절반.”
하늘의 카드.
“다른 한 사람도 절반.”
빛새의 카드.
“두 사람이 만나야만 완성되도록.”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욱은 자신과 빛새가 만나게 될 것을 예상한 게 아니었다.
만나게 만들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더 화가 났다.
죽어서까지.
자신의 삶을 설계한 것 같아서.
빛새가 조용히 말했다.
“하늘 씨.”
“왜요.”
“나 이제 알 것 같아요.”
“뭘.”
빛새의 눈빛이 흔들렸다.
“재욱 씨가 나한테 하늘 씨를 찾아가라고 한 이유.”
잠시 침묵.
“내가 아내라서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하늘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빛새가 자신의 카드를 내려다봤다.
“하늘 씨한테 내가 필요해서.”
하늘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빛새도.
자신도.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필요해서 선택된 사람들.
그 생각이 스쳤다.
하늘은 자신의 카드 뒷면을 다시 바라봤다.
B-17.
그리고 처음으로 이런 의문이 들었다.
도재욱은 자신을 사랑한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자신이 필요했던 걸까.
목요일 오전 11시 25분. “사장님, 이거 환불하고 싶은데요.” 은빛새는 계산대 앞에 놓인 쇼핑백을 바라봤다. 어제 판매한 벽돌색 겉옷이었다. 손님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혹시 어떤 점이 불편하셨어요?” “집에서 다시 입어보니까 생각보다 색이 진하더라고요.” 빛새는 옷을 꺼내 상태를 확인했다. 택은 그대로 붙어 있었고, 착용 흔적도 없었다. “구매하신 지 2일 되셨네요. 환불 도와드릴게요.” 손님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냥 해주시는 거예요?” “네. 상품 상태도 괜찮고 환불 가능 기간 안이니까요.” 손님은 안도했다. “다른 가게에서는 환불할 때 이것저것 물어보던데요.” 빛새는 웃었다. “색이 마음에 안 드실 수도 있죠.” 정다은이 환불 처리를 도왔다. 손님이 돌아간 뒤, 다은이 물었다. “사장님, 저분은 교환 권유 안 하셨어요?” “응.” “왜요?” 빛새는 겉옷을 옷걸이에 걸며 대답했다. “마음에 안 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잖아. 억지로 다른 옷을 권할 필요는 없지.” 다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오후 1시 40분. 윤하늘은 완성한 상품 사진을 전달하기 위해 가게에 들렀다. “언니!” 빛새가 고개를 들었다. “왔어?” “응. 사진 가져왔어.” 하늘은 노트북을 열어 보정한 사진을 보여줬다. 베이지색 재킷. 올리브색 니트. 짙은 갈색 카디건. 빛새는 화면을 넘기며 감탄했다. “색감 좋다.” “실제 상품 색이랑 최대한 맞췄어.” 다은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니트는 사진이 더 예뻐 보여요.” 하늘이 웃었다. “그럼 안 되는데?” “왜요?” “실물이랑 너무 다르면 손님이 실망할 수 있잖아.” 빛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예쁘게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확해야지.” 그때 가게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다은이 인사했다. 들어온 사람은 오전에 환불했던 여성이었다. 빛새가 반갑게 맞았다. “다시 오셨네요.” 여성은 조금 멋쩍게
화요일 오후 1시 20분.“하늘아, 이 재킷은 여기 걸면 어떨까?”은빛새가 베이지색 재킷을 들어 보였다.윤하늘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언니, 거기 걸면 뒤에 있는 니트랑 색이 겹쳐.”“그럼 어디?”“창가 쪽. 자연광 들어오는 자리.”빛새는 재킷을 옮겼다.“이렇게?”“응. 좋아.”하늘은 카메라를 들었다.찰칵.이번 촬영은 빛새의 가을 신상품 8벌을 위한 작업이었다. 두 사람은 미리 촬영 범위와 비용을 정했고, 정다은은 상품 번호와 색상을 확인하며 옷을 준비하고 있었다.“다음은 올리브색 니트예요.”다은이 옷걸이를 건넸다.하늘은 화면을 확인했다.“이건 단추를 하나만 풀어볼까요?”“네!”다은이 단추를 풀자 목선이 자연스럽게 정리됐다.빛새는 옆에서 감탄했다.“역시 사진은 다르네. 그냥 걸어놓을 때랑 느낌이 달라.”하늘이 웃었다.“옷이 예뻐야 사진도 잘 나오지.”“그 말 마음에 든다.”오후 2시 45분.마지막 상품을 촬영하던 중 가게 문이 열렸다.“어서 오세요!”다은이 인사했다.들어온 사람은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여성은 매장을 천천히 둘러보다 벽에 붙은 공연 포스터 앞에서 멈췄다.“어머, 이 연극.”빛새가 다가갔다.“혹시 보셨어요?”“네. 지난 토요일에요.”하늘은 카메라를 정리하다 고개를 들었다.여성은 포스터를 바라보며 말했다.“여기 배우들이 입었던 옷을 파는 곳인가요?”“맞아요. 저희 가게에서 의상을 협조했어요.”여성은 반가운 듯 웃었다.“그렇군요. 공연 보고 옷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거든요.”빛새는 진열대로 안내했다.“어떤 옷이 마음에 드셨어요?”“중년 여성 배우가 입었던 벽돌색 겉옷이요.”“아, 그 제품은 이쪽에 있어요.”빛새가 옷을 꺼내자 여성은 손끝으로 원단을 만져봤다.“생각보다 부드럽네요.”“입어보셔도 됩니다.”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오후 3시 10분.여성이 피팅룸에서 나왔다.벽돌색 겉옷은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다은이 거울을 가리켰다.“소매를 살
일요일 오전 10시 15분.윤하늘은 식탁에서 아침을 먹다가 휴대전화 알림을 확인했다.김소연에게서 사진 3장이 도착해 있었다.첫 번째는 전날 공연을 마친 배우들의 단체 사진이었다.두 번째는 관객들이 작성한 카드로 가득 찬 상자였다.그리고 세 번째 사진에는 작은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김소연: 윤 작가님, 어제 관객 한 분이 사진 촬영하신 분께 전해달라며 편지를 맡기셨어요.하늘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편지?”맞은편에 앉은 강단태가 고개를 들었다.“누가 보냈습니까?”“모르겠어요. 공연 관객이라는데요.”하늘은 메시지를 이어 읽었다.김소연: 봉투는 뜯지 않았어요. 다음에 오실 때 전달해드릴까요?하늘은 잠시 생각하다 답장을 보냈다.윤하늘: 네, 연출님. 감사합니다. 다음에 방문할 때 받을게요.단태가 물었다.“무슨 내용일 것 같습니까?”“글쎄요. 사진이 마음에 드셨다는 이야기일까요?”“그럴 수도 있겠네요.”하늘은 웃으며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조금 궁금하긴 하네요.”월요일 오후 2시.하늘은 촬영 장비를 점검하던 중 은빛새에게 전화를 받았다.“하늘아, 너 오늘 시간 있어?”“오후에는 괜찮아. 왜?”“가게 진열 좀 바꾸려고 하는데 사진 몇 장 찍어줄 수 있어?”하늘은 일정표를 확인했다.“상품 촬영?”“응. 이번에 들어온 가을 재킷이랑 니트.”“그럼 몇 벌인데?”“8벌.”하늘은 웃었다.“언니, 8벌이면 몇 장이 아니잖아.”빛새도 웃음을 터뜨렸다.“들켰네.”“촬영 범위 정해서 보내줘. 일정이랑 비용 확인하고 갈게.”“알았어. 이제 너한테 함부로 부탁도 못 하겠다.”“원래 함부로 부탁하면 안 되거든?”두 사람은 웃으며 통화를 마쳤다.오후 4시 30분.하늘은 소극장 마루에 들렀다.소연은 매표대에서 공연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윤 작가님, 오셨어요?”“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요.”소연은 서랍에서 흰색 봉투를 꺼냈다.“이거예요.”봉투 앞면에는 단정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사진을 찍으신 윤하늘 님께
토요일 오후 5시 40분.소극장 마루 앞에는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윤하늘은 강단태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생각보다 사람이 많네요.”“첫 공연이라 그런가 봅니다.”하늘은 입구에 붙은 포스터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우리 동네 마지막 버스》포스터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사진 촬영 | 윤하늘하늘은 그 앞에서 잠시 웃었다.“단태, 이거 봐요.”“하늘 씨 이름이네요.”“실제로 붙어 있는 걸 보니까 기분이 이상해요.”단태가 휴대전화를 꺼냈다.“여기 서보시겠습니까?”“사진 찍어주려고요?”“네.”하늘은 포스터 옆에 섰다.찰칵.단태는 사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잘 나왔습니다.”하늘이 화면을 보더니 웃었다.“포스터보다 제가 더 크게 나왔는데요?”“오늘의 주인공이니까요.”“오늘 주인공은 배우들이거든요.”오후 6시.로비에 들어선 하늘은 자신이 구성한 사진 전시를 발견했다.단체 사진과 배우 6명의 개인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그 아래에는 하늘이 작성한 소개문이 붙어 있었다.그런데 사진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이 배우가 여행 가방 들고 나오는 사람이래.”“사진 표정 좋다.”“실제로도 이렇게 연기할까?”하늘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단태가 작게 물었다.“기분이 어떠십니까?”“좋아요.”하늘은 미소 지었다.“제가 찍은 사진을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요.”그때 김소연이 다가왔다.“윤 작가님!”“연출님, 안녕하세요.”“오셨네요. 전시도 확인하셨어요?”“네. 정말 잘 설치됐어요.”소연은 웃었다.“배우들도 엄청 좋아했어요. 자기 사진 앞에서 서로 놀리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하늘이 웃음을 터뜨렸다.오후 6시 30분.공연이 시작됐다.무대에는 익숙한 버스정류장이 놓여 있었다.하지만 리허설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객석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대학생 역할의 배우가 무대에 등장했다.“저기요! 막차 아직 안 왔죠?”중년 여
목요일 오전 9시 40분.윤하늘은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어젯밤 작성한 전시 소개문 때문이었다.《막차를 기다리는 여섯 사람》같은 정류장에 서 있어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곳을 바라봅니다.첫 문장은 마음에 들었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하늘은 두 번째 문장을 읽었다.서로 다른 사연을 가진 여섯 인물의 감정과 삶의 궤적을 사진으로 표현했습니다.“삶의 궤적?”하늘은 혼잣말을 했다.“내가 언제 이런 말을 썼지?”문장을 지웠다.다시 썼다.여섯 배우의 표정에는 각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이번에는 너무 평범했다.하늘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사진 찍는 것보다 글 쓰는 게 어렵네.”그때 강단태가 방문을 두드렸다.“들어가도 됩니까?”“응.”단태는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아침부터 무슨 고민이십니까?”“전시 소개문이요.”“잘 안 써집니까?”하늘은 노트북을 가리켰다.“읽어볼래요?”단태는 화면을 살폈다.잠시 후 말했다.“첫 문장은 좋네요.”“그다음은요?”“조금 설명문 같습니다.”하늘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단태가 물었다.“사진 찍을 때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이 뭡니까?”하늘은 잠시 생각했다.“배우들이 카메라를 안 보고 서로 이야기할 때요.”“그럼 그 이야기를 쓰시면 되겠네요.”하늘은 눈을 깜빡였다.“아.”그녀는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오전 11시.하늘은 소개문을 완성했다.《막차를 기다리는 여섯 사람》같은 정류장에 서 있어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곳을 바라봅니다.촬영하는 동안 배우들은 카메라보다 서로의 이야기에 더 집중했습니다.그 순간, 여섯 사람의 표정이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났습니다.이 사진들이 여러분에게도 잠시 같은 정류장에 머무는 기분을 전했으면 합니다.하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다.이번에는 마음에 들었다.그녀는 김소연에게 글을 보냈다.잠시 후 답장이 도착했다.김소연: 너무 좋아요! 공연 분위기와도 잘 어울려요.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하늘은
오전 10시 30분.윤하늘은 완성한 전시 시안을 김소연에게 보냈다.단체 사진 1장과 배우 6명의 개인 사진을 배치한 전시판이었다.잠시 후 답장이 도착했다.김소연: 윤 작가님, 구성이 정말 좋아요! 그런데 개인 사진 하나만 변경할 수 있을까요?하늘은 화면을 확인했다.여행 가방을 든 청년 역할의 배우 사진이었다.윤하늘: 어떤 부분을 변경하면 될까요?김소연: 배우가 다른 사진을 사용하고 싶다고 하네요. 직접 연락드려도 괜찮을까요?하늘은 잠시 생각하다 답장을 보냈다.윤하늘: 네. 사진 선택에 관한 이야기라면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오전 11시.하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안녕하세요. 저 여행 가방 들고 나오는 배우입니다.”“아, 안녕하세요.”상대는 조금 머뭇거렸다.“사진 때문에 연락드렸어요.”“네. 말씀하세요.”“작가님이 골라주신 사진도 좋은데요. 저는 다른 사진이 더 마음에 들어서요.”하늘은 노트북을 열었다.“어떤 사진인지 알려주시겠어요?”배우가 파일 번호를 말했다.하늘은 해당 사진을 찾았다.그가 여행 가방 손잡이를 잡고 정면을 바라보는 사진이었다.그런데 눈빛이 조금 어색했다.“이 사진이요?”“네.”“혹시 특별히 마음에 드는 이유가 있으세요?”배우는 잠시 침묵했다.“그 사진에서는 제 얼굴이 좀 더 반듯하게 보여요.”하늘은 화면을 바라봤다.지난 촬영 날, 배우가 얼굴의 비대칭 때문에 사진 찍는 것을 어려워했던 일이 떠올랐다.“그렇군요.”하늘은 사진 2장을 나란히 띄웠다.자신이 고른 사진에는 낯선 정류장에 도착한 청년의 불안함이 담겨 있었다.배우가 고른 사진은 정면을 바라보는 평범한 프로필에 가까웠다.“배우님.”“네?”“제가 선택한 사진은 배역의 성격이 잘 보여서 골랐어요. 그런데 배우님이 원하시는 사진도 충분히 이해돼요.”상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바꿀 수 있을까요?”“물론이죠. 다만 전시 목적에 맞는지도 연출님과 함께 확인해보면 좋겠어요.”배우의 목소리가 밝아졌다.“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