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석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다소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아직 저녁을 못 먹었거든.”정은은 그의 귀가 붉어진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괜히 웃었다가 재석이 더 난처해질까 봐.“국수 괜찮아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번거롭게 해서 미안.”“그럼 잠시 앉아 있어요. 금방 끓여 올게요.”정은은 국수를 삶고, 달걀 하나를 노릇하게 부쳤다. 거기에 채소를 조금 넣고, 소진헌이 직접 만든 소고기 장조림을 얇게 썰어 듬뿍 올렸다. 마지막으로 송송 썬 파와 고수를 솔솔 뿌리자, 푸짐한 국수 한 그릇이 완성됐다.국수를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정은이 말했다.“선비님, 다 됐어요. 어서 먹어요.”재석은 자리에 앉자마자 젓가락을 들고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배가 정말 고팠고, 이 국수도 정말 맛있었다.정은은 턱을 괴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한 남자가 국수를 먹는 모습이 이렇게 우아하고 멋질 줄이야.’재석은 빠르게 먹으면서도 결코 거칠지 않았고, 마치 아주 중요한 일이라도 하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면발을 집어 올렸다. 국물을 한 모금 마시는 순간조차도 신중했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진귀한 미식을 음미하는 줄 알겠어.’“왜 그렇게 쳐다봐?”무심코 고개를 든 재석은 정은의 시선을 마주쳤고, 국수를 삼키며 물었다.“선배님 표정만 봐도 내가 만든 국수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 수 있어서요. 맛있다면, 얼마나 맛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재석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다행히 티가 나지 않아 오직 그 자신만이 알 뿐이었다.“민망하네.”“민망하긴요. 이건 칭찬이에요.”‘셰프’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이렇게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을 보면 기쁠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맛있어.”정은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었다.“마음에 들면 됐어요. 요즘 많이 바빠요?”“아니, 전과 비슷해. 특별히 바쁜 건 아니야...”재석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솔직하게 털어놨다.“사실, 요리를 하고 싶지도 않고, 잘하지도 못해서 그래
재석은 눈을 드리우며 빈 맥주 캔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마치 그 위에 꽃이라도 피어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무심한 듯 입을 열었다.“오늘 이씨 가문 두 어르신들과 즐겁게 놀았어?”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말했다.“할머니가 점심에 맛있는 음식을 한 상 차려주셨고, 오후에는 디저트랑 간식도 잔뜩 해주셨어요.”“밥 먹고는 두 분이랑 낚시도 가고, 과수원에서 과일까지 땄고요. 원래는 저녁에 그림 전시회까지 보러 가려고 했는데...”재석은 덤덤하게 물었다.“심 대표님도 같이 있었어?”“네.” 정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어느새 테이블 밑에 있는 손을 꽉 쥐었다.한참 후, 그는 약간 쉬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그래서... 넌 심 대표님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정은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예전에는 별로 좋은 인상을 못 받았는데, 지금은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요.”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두 노인을 챙기는 세심함과 배려가 딸인 이미숙보다도 더 나았던 것이다.그 말을 들은 재석은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묵직한 통증이 심장을 강타하며 숨이 턱 막혔다.그가 붉어진 눈으로 ‘이제 그 남자를 받아들이기로 한 거야?’라고 물으려던 찰나, 정은이 덧붙였다.“그리고 꽤 좋은 오빠기도 하고요.”“오, 오빠?”재석은 순간 얼어붙었다.정은이 자연스럽게 말했다.“네, 심 대표님은 내 사촌 오빠예요! 어? 내가 선배한테 말 안 했었나?”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아, 그러고 보니 요즘 대회 준비로 바빠서 이 좋은 소식을 아직 못 전했네요...”그녀는 이미숙이 이씨 가문의 잃어버린 딸이란 것을 간단히 설명했다.“그래서 결국 내 사촌 오빠가 됐어요.”재석은 필사적으로 이 사실을 소화하려 했지만, 여전히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그 사람이 네 사촌 오빠라고?”“맞아요.” 정은이 피식 웃었다.“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문제가 있는 건 정은이 아니라,
재석은 시계를 힐끗 바라보다가, 뒤늦게야 이 시간이 정말 적절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귀까지 새빨개졌지만,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밤은 안 되니까... 그럼 내일 밤은 어때?”“좋아요.” 정은이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실험실에 가야 하지 않아?”“맞아요.”“몇 시에 나가는데?”“8시쯤에요. 왜요, 선배님?”“같이 가자. 아침 사 줄게. 학교 앞에 호떡이랑 두유 파는 집 있잖아. 네가 맛있다고 했던 거.”“정말요? 고마워요, 선배님!” 정은은 거절하지 않았다.“그럼... 늦었으니까 난 이제 갈게.”“네.”정은은 재석을 문앞까지 배웅했다.재석은 정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잘 자.”“선배님도요.”문이 닫히자, 정은은 왠지 모르게 재석이 문을 닫는 동작마저도 들뜬 것 같다고 느꼈다.재석을 보낸 정은은 침대에 누웠고, 어느새 깊은 잠에 빠졌다.반면, 옆집의 재석은 정반대였다.집으로 돌아온 후 이상하게 들뜬 기분에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사촌 오빠? 정말 사촌 오빠라니?’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재석은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 억누를 수가 없었다.새벽 1시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눈이 말똥말똥했다. 결국 눕는 걸 포기하고 재석은 책상에 앉았다.그리고 컴퓨터를 켜고 논문을 계속 보았다.새벽 3시가 되어서야 간신히 잠들었지만, 6시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눈을 떴다.7시 30분, 재석은 아침을 사러 나갔다.8시 정각에 그는 정은의 집 문을 두드렸다.“선배님, 좋은 아침이에요.”“응. 뜨거울 때 먹어.” 재석은 손에 들고 있던 음식을 건넸다.“고마워요!” 정은은 반갑게 받았다. “선배님도 지금 나가는 길이에요?”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같이 갈까요?”“그래.”...9시, 진욱은 학교에 도착해 실험복으로 갈아입으며 어제 재석의 행동을 떠올렸다.‘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조언을 좀 해 줘야 하나?’실험실에 들어서자마자, 진욱은 예상대로 실험대 앞에 서서 연구에만 몰두하는 재석을 보았다.
민지는 멍해졌다.“이럴 수가?”서준도 몇 번이고 명단을 훑었지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조급해하지 말고 1, 2, 3등 수상자 명단을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알겠어.”10분 후.민지는 더욱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명단을 다섯 번이나 확인했는데, 우리의 이름이 없어.”즉, 최우수상은커녕 그들은 1, 2, 3등상 중 그 어떤 것도 받지 못했다.서준은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미간은 더욱 깊이 찌푸려졌다.그때, 민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말도 안 돼!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서준은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했다.“경쟁에서는 운이 중요하기도 해. 누구도 자신이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 하지만...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최우수상을 못 받더라도, 최소한 장려상을 하나쯤 받을 법한데. 어떻게 명단에 아예 이름조차 없을 수 있지?’“정은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요?”두 사람은 동시에 정은을 바라보았다.민지가 명단을 클릭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정은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확실히 이상해.”민지는 손바닥을 쳤다.“봐! 정은 언니까지 이렇게 말하잖아!”“그렇다고 해도... 이미 명단이 발표됐는데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주최 측을 찾아가서 ‘이 결과 인정 못 하겠어요'라고 따질 순 없잖아?”그녀는 그냥 툭 내뱉은 말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모든 팀이 자기들이 상을 못 탔다고 항의하기 시작하면, 대회가 아수라장이 될 게 뻔했다.정은이 말했다.“일단 학교 측을 찾아가서 확인해 볼게. 가능하면 우리가 제출했던 연구 보고서를 돌려받아서 체크를 해봐야겠어. 데이터 오류나 연구 방향 같은 원칙적인 문제가 있었는지부터 먼저 확인해야 해.”대회 규정에 따르면, 특정한 문제가 있을 경우 자동으로 0점 처리될 수도 있었다.만약 0점이라면, 당연히 수상할 리가 없었다....방학 기간이었지만, 학교 행정 사무실에는 당직자가 남아 있었다.정은의 말을 들은 담당자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맞아
교수님의 얼굴은 순간 굳어졌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컴퓨터 화면부터 확인했다.‘분명 최소화해서 숨겨 놨는데, 어떻게...’동료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섰다.“아니, 괜히 그 아이를 건드려서 뭐 하려고 그래? 논리력, 사고력, 말솜씨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그런데 저 여학생, 말투가 참 매섭네. 대체 정체가 뭐야? 너 아는 사람이야?”“생명과학대학에서 소정은 학생을 모르면 간첩이지. 혼자서 두 명의 동창을 데리고 스마트 실험실을 설립했고, 그것도 성공적으로 운영 중이잖아. Science 학술지에 논문도 냈고, 네이처 잡지에도 논문을 실었어. 우리 학과 내년 연구 실적의 절반은 다 그 학생한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런데도 몰라?”“아... 이름은 들어봤는데, 이렇게 생긴 줄은 몰랐어...”‘이거 참!’“그래도 뭐 별거 아니잖아? 그렇게 대단한 논문을 썼다면서 정작 대학생 대회 같은 소규모 대회에서조차 상 하나 못 탔다니? 본인이 직접 그러던데?”동료는 그녀를 흘긋 쳐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왜 우리 사무실을 찾았겠어?”“그야... 보고서를 돌려받으려는 거겠지?”“맞아. 그런데 왜 돌려받으려는지 생각해 봤어? 보고서가 조작됐을 거라고 의심하고 있는 거야.”“하, 웃기네. 누가 그럴 시간이나 있대? 자기들이 못 해서 떨어진 걸 괜히 트집 잡는 거지!”“그럴 수도 있지만, 더 큰 가능성이 하나 있어.”“뭔데?”“보고서가 제출 과정에서 변조됐을 가능성. 제출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조사를 하려는 거야.”“쳇, 누가 심심해서 그 보고서에 손을 대겠어? 정말 웃겨.”“그래, 누가 그랬겠어. 하지만 만약 제출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게 밝혀지면, 학교 사무실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거야. 보고서를 거친 사람들 모두 조사 대상이 되겠지. 내가 너라면 지금 웃음이 나오지 않을 거야.”보고서를 거친 사람들 중, 마침 이 사무실에 있는 그 교수님이 있었다.그러니 그녀는 계속 웃을 여유가 있을
“여전히 똑같아, 아무도 받지 않아.”“좋아! 책임을 미루는 학교 측, 죽은 척하는 주최 측. 이 안에 문제가 없다고? 절대 믿을 수 없어!”정은은 생각에 잠기다가 문득 떠올랐다.“이런 전국적인 대회에서는 심사위원이 보통 해당 분야의 대학교수들로 구성돼. 내가 알기로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심사위원 명단을 공개했을 텐데. 우리 학교 교수님이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자.”민지는 곧바로 노트북을 켜고 빠르게 검색한 뒤 외쳤다.“찾았다!”하지만 정은이 직접 확인한 결과, 심사위원 명단 어디에서도 서비대학교 교수님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서준이 설명했다.“서비대랑 연성대는 매년 강력한 경쟁 학교로 꼽혀, 수상자 절반이 이 두 학교에서 나오니까요. 그래서 공정성을 위해 주최 측은 원칙적으로 두 학교 교수님들을 심사위원으로 위탁하지 않았던 거예요.”즉, 문제를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민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다른 학교 교수님들은 아예 아는 분이 없잖아. 어떻게 연락하지?”설령 연락한다고 해도 그들이 응답해 줄지는 미지수였다.정은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우리는 몰라도, 교수님들끼리는 알고 지낼 수도 있어.”“그게 무슨 뜻이에요, 정은 언니?”“오 교수님께 여쭤보면, 명단에 있는 교수님 중 아는 분이 계실지도 몰라.”하지만 오미선은 지금 해외 학술 세미나 참석 중이었다. 시차 때문에 전화 통화가 어려웠기에, 정은은 메일을 보내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그날 밤, 오미선이 답장을 보냈다.그녀는 정은의 결정을 지지하며 반드시 연구 보고서를 되찾아야 한다고 했다.또한, 앞으로 24시간 동안 핸드폰을 켜두겠으니 필요할 때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가 바로,명단에 오미선이 아는 교수가 있었던 것이다.다만 안면이 있는 정도였고, 개인 연락처까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 교수는 재석과 친분이 있었다.그래서 그날 밤, 함께 러닝을 하던 중 정은이 재석에게 상황을 설명했다.“대략 이런 상황이에요. 지금 주최 측과 연
정은은 의혹을 느꼈다.“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될 거야.”10분 후, 커다란 그림자가 두 사람의 맞은편에 나타났다.“안녕, 재석아.”정은은 상대를 바라보았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예상보다 더 충격적이었다.이건... 믿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눈앞의 노은, 아니, 그의 옷차림만 보면 도저히 ‘노인'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GAP 맨투맨에 Levi’s 청바지, 그리고 Moncler 패딩까지 걸치고 있었다.거기에 챙이 푹 눌린 캡모자로 희끗희끗한 머리를 가린 데다가, 깊게 팬 주름을 가린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었다.‘이건... 나이를 어떻게 짐작하라는 거야?’그러니 재석이 장학경을 마음이 젊고, 젊은이들 못지 않게 트렌드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이건 그냥 트랜드를 넘어섰잖아!’“장 교수님, 또 뵙네요.”재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그와 악수를 나눈 뒤, 옆에 앉아 있는 정은을 바라보았다.정은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섰다.“소개할게요. 제 친구 소정은입니다. 그리고 이분이 바로 장학경 교수님이셔.”“안녕하세요, 장 교수님.”“안녕, 아가씨! 자, 어서 앉아.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난 엄숙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냥 친구처럼 편하게 커피 마시고 이야기하면 돼. 굳이 나를 선배 대하듯 깍듯이 모실 필요 없어. 난 그런 거 안 좋아하거든.”이야기를 나누던 중 정은은 장학경이 M시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키가 그렇게 큰 데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사실 교수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얼마 전, 두 명의 친구와 함께 팀을 꾸려 대학생 대회에 참가했었어요. 그런데 어제 발표 결과에서 저희 팀은 수상을 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제라도 저희의 과제 보고서를 받고 싶은데, 학교 측과 대회 주최 측 모두 별다른 답을 주지 않더라고요.”“교수님은 심사위원 경험이 많으시잖아요. 대회 참가자가 사후에 자신의 과제 보고서를 받
“이번 대회를 말하자면, 요즘 학생들이 예전과 달라진 건지, 아니면 전체적인 교육 환경이 변해버린 건지 모르겠어.”“제출된 과제 중 50%는 허황된 내용이고, 나머지 40%는 앞뒤가 안 맞아 말도 안 되더군. 겨우 10%도 안 되는 과제만이 그나마 볼 만했지.”장학경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씁쓸하게 말했다.“정말 세대가 갈수록 퇴보하는 걸까? 전의 세 번의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학생들은 하나같이 Science나 네이처 잡지에 논문을 발표한 유력한 인재들이었는데, 지금은... 하아.”더 이상의 말은 없었고, 그저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올해는 그래도 뜻밖에 괜찮은 과제가 하나 있긴 했어. 바로 너희 학교의 학생들이 낸 과제였는데, 제목이... , 조장 이름은 아마도... 서지예라고 한 것 같은데?”“그 과제는 최우수상을 받았지. 연구 주제 선정부터 실험 방식, 그리고 최종 완성도까지 기대 이상이었어. 심사위원들도 만장일치로 학술지 Science에 투고해도 무난히 통과할 수준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였으니까!”“심사 끝난 후, 몇몇 교수님들이 서지예 학생에 대해 알아보더군. 들리는 말로는 대학원 입학하자마자 이미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고 하던데, 너희 생명과학대학에서도 꽤 유명한 천재 소녀라더라. 저 나이에 대단하긴 하지...”정은은 장학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그가 지예와 이라는 것을 언급한 순간부터, 정은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왜냐하면 그 과제는 분명 그들 팀의 연구 과제였으니까.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지예의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일까?머릿속은 세게 얻어맞은 듯 멍해졌지만, 짧은 충격이 지나가자마자, 정은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진일은 금방 밖에서 돌아왔다. 피곤에 찌든 허리와 어깨는 뻐근했고, 이마 한가운데엔 지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과로와 지나친 집중으로 인한 피로감이었다.올해 겨울방학, 송지혜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