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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냥냥이
그때 권민재가 불쑥 말을 꺼냈다.

“유빈 씨, 창현 그룹으로 올 생각 없어요? 제가 한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유빈의 단호한 거절이 날아들었다.

“생각 없습니다!”

그 가냘픈 뒷모습을 보며 권민재의 눈빛이 묘하게 번뜩였다.

약간의 감탄, 그리고 은근한 설렘까지 섞인 시선이었다.

...

메모장 속에서 계획 하나가 또 그렇게 끝났다.

호텔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강유빈은 박지호와의 별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게 웬일? 정원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성수지는 그녀의 옷을 입고 비싼 캐시미어 숄을 걸친 채 마치 안주인이라도 된 양 가정부들을 지시하면서 정성껏 가꿔온 꽃들을 뿌리째 뽑아내고 있었다.

강유빈이 차에서 내리자 그녀의 눈에 찰나의 득의양양함이 스쳤다.

아직 약 올릴 영상도 찍지 않았는데 제 발로 돌아오다니.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성수지는 눈웃음을 지으며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언니, 왜 돌아왔어? 오빠가 언니 며칠 호텔에 묵는다면서 여길 제집처럼 편하게 쓰라고 했는데...”

그녀는 말하면서 입을 가리고 가냘프게 기침을 해댔다.

“하여튼 이 몸이 문제라니까.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향기도 못 맡고 오빠는 밤늦게까지 날 돌보느라 또 엄청 고생했잖아. 언니 혹시 화난 건 아니지?”

강유빈은 다 시들어가는 꽃들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효성 그룹을 떠나온 뒤, 박지호는 그녀가 심심할까 봐 꽃 가꾸기를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진귀한 꽃들을 수소문해 아낌없이 선물했었다.

그중에는 꽤나 까다로운 녀석들도 있어 강유빈이 오랫동안 공들인 끝에 겨우 살려냈다.

마침내 꽃이 피던 날,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사진을 찍어 박지호에게 보냈다. 우리 결혼식 때 이 꽃으로 부케를 만들자고 약속했건만 지금은 그저 진흙더미나 되어버리다니.

“잘 뽑았네. 계속해.”

강유빈은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순간 성수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녀가 노발대발할 줄 알았는데 이토록 담담하다니.

한편 침실로 들어온 강유빈은 오랫동안 살았던 방을 훑어보며 텅 빈 공허함을 느꼈다.

박지호와 각방을 쓴 지 오래였지만 그녀 방 안의 모든 물건은 늘 짝을 이루고 있었다.

칫솔도, 수건도, 인형도, 잠옷도, 베개까지 전부 다...

강유빈은 검은색 대형 쓰레기봉투를 하나 꺼내 들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봉투에 쓸어 담았다.

짐을 다 버리기까지 다섯 번이나 마당을 오갔지만, 정원 쪽에 모여 있던 가정부들은 아무도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짐을 버리고 돌아오는 길, 마침 박지호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강유빈을 보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거실을 가로질러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침실 앞을 지날 때, 방 안에서 성수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나 그냥 나갈게. 꽃들도 그렇고... 콜록콜록...”

“바보야, 그까짓 꽃이 뭐라고. 걔 좋아하면 나중에 또 심으면 되지. 네 건강이 우선이야. 울지 마, 우리 수지 눈이 퉁퉁 부었네.”

남자의 다정한 위로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심장을 후벼 팠다.

강유빈은 제 방으로 돌아가 마지막 남은 짐까지 모조리 캐리어에 채워 넣었다.

캐리어를 잠그기 바쁘게 누군가 밖에서 또다시 열었다.

“빈아...”

텅 빈 진열장을 본 박지호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네 물건들 다 어디 갔어?”

강유빈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낡은 것들 다 새 걸로 바꿔야지. 안 그래?”

박지호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

찝찝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다음 주 월요일이면 혼인 신고를 할 테니 그땐 둘의 관계가 엄연히 달라질 테고 새로운 물건으로 바꾸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집에 돌아와 성수지를 돌봐달라는 부탁에도 응했으니 어젯밤 일로 화난 건 아닌 듯싶었다.

박지호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던 불안을 애써 짓누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익숙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기분 안 좋은 거 알아. 며칠 쇼핑도 하면서 기분 풀어. 지민이 시켜서 수지 머물 집 찾고 있으니까 다음 주 월요일이면 무조건 나갈 거야. 그땐 내 방의 물건들도 싹 다 네가 새로 산 것들로 채우자. 그럼 되지?”

강유빈은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고 더없이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오빠, 우리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수지 챙길 거야?”

그녀가 직접 결혼까지 언급하자 박지호의 눈빛이 안도감으로 물들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강유빈과 눈높이를 맞췄다. 남자의 깊고 검은 눈동자에는 은은한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질투 좀 그만해. 떼쓰지도 말고. 착하지 우리 빈이.”

“알았어.”

강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질투도, 투정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녀가 호텔에 돌아가기도 전에 시댁에서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다.

박지호의 아버지가 박지호에게 강유빈을 데리고 가족 모임에 참석하라고 지시했다.

효성 그룹이 창립된 이래로 박지호의 입지는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한때는 그를 아들로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던 박동건조차 이제는 인자한 아버지인 양 밖에서는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이라며 박지호를 칭찬하기 바빴으니 말이다.

하지만 강유빈에게 이 자리는 언제나 살얼음판이었다.

박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그저 ‘갈 곳 없는 고아’로만 알고 있으니까.

“오빠, 나 너무 긴장돼. 오빠 할아버님이랑 부모님께서 날 싫어하면 어떡하지?”

조수석의 성수지가 상기된 얼굴로 운전하는 박지호에게 애교를 부렸다.

본가에 돌아갈 때마다 박지호는 비서를 동행하지 않았다.

그는 성수지에게 대답하는 대신 백미러로 뒷좌석의 강유빈을 힐끗 보았다. 한사코 뒷좌석에 앉겠다고 고집하는 그녀를 쳐다보며 남자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또 삐졌네! 수지도 함께 돌아간다고 해서 조수석에 앉지 않겠다는 거잖아. 아무리 그래도 환자인 수지를 어떻게 홀로 집에 내버려 두냐고!’

차 안을 맴도는 공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다만 성수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뒤를 돌아 강유빈에게 말을 걸다가 대답이 없으면 다시 박지호에게 애교를 부리곤 했다.

도저히 봐줄 수가 없던 강유빈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사십 분을 달리는 동안 그녀는 정말로 잠이 들었다. 차에서 내릴 때도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오기 싫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어. 여기 우리 집이야. 여기서까지 행패 부리지 마라.”

낮게 깔린 박지호의 꾸중이 쏟아졌다. 그의 눈에는 혐오감이 서려 있었다.

강유빈이 은퇴한 이후로 박지호가 그녀를 공식 석상에 대동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박지호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다고 믿었다.

사교계의 껄끄러운 인연들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으려는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부 오산이었다. 박지호는 어쩌면 그녀의 배경, 그 비루한 출신까지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셨어요, 도련님. 이분은...”

집사가 성수지와 강유빈을 번갈아 보며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호 오빠 친구예요.”

성수지는 아주 자연스럽게 박지호의 팔짱을 끼며 친근함을 과시했다.

집사는 상황을 단번에 파악한 듯했다.

강유빈을 향해 연민 어린 눈길을 보낸 후 정중히 허리를 숙여 길을 안내했다.

“어르신과 회장님은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모님은 거실에 계세요.”

눈앞에 우뚝 솟은 화려한 저택을 보며 성수지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욕망이 치밀어 올랐다.

머지않아 이 모든 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언니, 우리 빨리 들어가자. 어르신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성수지는 박지호의 팔을 꽉 쥔 채 거침없이 저택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보여준 긴장한 모습은 연기였을까?

강유빈은 다정하게 얽힌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애써 밀려오는 비참함을 삼켰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다 때려치우고 여기서 나가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끝맺지 못한 일들이 많아서 박지호와 대립각을 세우기엔 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박재한만큼은 그녀에게 늘 따뜻하게 대해주셨기에 쉽게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최근 건강이 부쩍 안 좋아지신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이 집에서 굳이 얼굴 붉히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강유빈은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몇 분 뒤에야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하지만 현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박지호의 계모 은미란의 비꼬는 듯한 냉소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지호 너 진짜 대단하다. 부모 없는 애 하나 데리고 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듣도 보도 못한 것까지 집에 들이는 거니? 여기가 무슨 수용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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