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머리를 양손으로 헝클이며 내적으로 비명을 지르는 서린을 보며 에르딘이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제 씻지도 못하고 잠든 상태라 꿉꿉해서 어디 나갈 수도 없었다.
씻자니 에르딘이 방에 있는 게 신경 쓰였다.
‘에르딘은 왜 뽀송뽀송한 거지. 나는 절어 있는데?’
세상이 급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잘생긴 놈한테만 더욱더 잘생김을 주는 세상.
“에르…… 아니, 시후야. 나 씻고 올 테니까 기다려.”
침대에 앉아 있던 에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린은 최대한 재빠르게 촤아아, 촤아아 씻었다.
들고 들어간 옷이 습기에 들러붙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긴 머리는 말리지도 못하고 수건으로 돌돌 말아 나왔다.
‘옷을 입고 나와야 해서 불편하네.’
“시후, 너도 대충 씻어. 어제 못 씻었잖아.”
“거절하지.”
에르딘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서린은 당황스러웠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안 꿉꿉한가?’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이제 생필품도 사야 하고 학교도 가야 했다.
“잠깐.”
서린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내 돈으로 다 하는 거야??”
지금 두 명의 생활비를 혼자서?
망했다.
알바도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에르딘도 내가 나타났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부자니까 별로 상관없었으려나?
서린은 벌써부터 등골이 휘는 것 같았다.
“일단 생필품 좀 사러 나가자. 너 물건이 하나도 없으니까! 일단 내가 돈을 꿔줄게.”
에르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저택에서는 공짜로 뭘 안 썼나 보군?”
은근한 살기에 서린이 움찔했다.
“알았어. 사 줄게.”
좀팽이 자식.
어떻게 알았지?
너한테 죽느라 얼마 못 쓰긴 했지만 네 거 쓰긴 했다.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내가 상도덕이 있어서 갚는 줄 알아라.’
서린은 입을 삐죽이며 신발을 신고 나가려 했다.
침대에서 쑥 일어난 에르딘도 교양 있는 몸짓으로 운동화를 신었다.
“이걸 교양 없애는 법부터 가르쳐야 하나……. 원룸에서 저러니까 인지부조화 오네.”
서린은 에르딘을 데리고 모든 걸 다 판다는 그곳으로 향해 쇼핑을 시작했다.
장바구니 하나를 쥐고 1층부터 3층까지 필요한 물건을 훑었다.
에르딘은 싸고 약해 보이는 물건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힘줘서 만지지 마! 부러진다구!”
다 박살 낼 기세에 서린이 다급히 소리쳤다.
에르딘은 조심스럽게 물건을 장바구니에 도로 넣었다.
집에 오는 길에는 옷과 속옷도 대충 몇 가지 골라 샀다.
젠장.
생활비를 다 썼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르딘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물건을 대충 침대 위에 던져 놓고 둘은 급하게 학교로 향했다.
학관에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어제 둘이 같이 갔대.’
‘재현 선배도 있었다던데?’
‘삼각관계라던데.’
이럴 줄 알았지.
다들 둘이 무슨 사이인지 궁금한 눈치였다.
무슨 사이라고 해야 할까?
서로 죽이는 사이?
동거하는 사이?
공작과 메이드?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사이.
그게 그들의 사이였다.
“서린아, 안녕? 어제 잘 들어갔어?”
거대 멍뭉이, 재현 선배였다.
‘으아아아악.’
사람들이 더 쳐다봤다.
“네. 잘 들어갔어요. 선배도 잘 들어가셨죠? 죄송하지만 전 이만.”
다급하게 벗어나려는 티가 났는지 재현 선배가 멋쩍은 듯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서린은 꾸벅, 피하듯 인사하고 재빨리 에르딘을 데리고 강의실로 이동했다.
강의실에 앉고 나서야 조금 긴장이 풀렸다.
멍하니 앞을 보고 있는 에르딘의 팔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이따가 수업 끝나고 학과 사무실에 가 보자. 거기에 너 정보 있을 거야.”
에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차라리 여기 잘 적응시켜서 아예 영영 돌아갈 생각을 못 하게 만드는 거다.
천재 이서린.
착한 이서린.
할 수 있어, 이서린.
“오늘은 수업 끝나고 경호학과 전체 과모임이 있다. 교수님들도 오시니까 다들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주도록!”
이런…….
서린은 시후와 단둘이 과모임에서 빠졌을 때의 파장을 떠올렸다.
오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겠지.
서린은 고개를 돌려 에르딘에게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건 꼭 가야 되니까. 야, 이번엔 술 작작 처먹어라.”
두 번은 절대 못 들고 올 것 같으니까.
네가 술을 안 먹는 게 더 좋겠구나.
줄줄이 나가는 경호학과 학생들 뒤를 따라 서린과 에르딘도 죄수처럼 질질 끌려갔다.
시끌벅적한 호프집에 도착하자 교수 하나가 서린을 호출했다.
“어이! 이서린! 이리 와 봐, 임마!”
아.
오늘 술 빼기는 글렀다.
지금 서린을 호출하는 저 체육학과 교수는 개꼰대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거절을 거절하시는 그런 분이지.
서린은 술잔을 들고 호다닥 달려갔다.
“경호학과 26학번 이.서.린!입니다!”
알지, 알지.
내가 사랑하는 이서린이.
사랑하는 만큼 술을 따라주고 이 지랄 하고 있었다.
서린은 꼴닥꼴닥 술을 삼켰다.
‘내 근손실…….’
요즘 체육관도 못 가는데 이러다가 물렁뼈 되겠다.
안주 하나 먹고 호다닥 에르딘 옆으로 달려갔다.
무슨 소문이라도 났는지 서린이 에르딘의 옆으로 가면 다들 자리를 비켜줬다.
기분 나쁜데 편해.
‘뭐지?’
에르딘도 두 번 취하기는 싫은지 눈으로 살기를 날리는 바람에, 무슨 사고라도 칠까 봐 술을 주려는 것들을 무찔러가며 서린은 전천후로 뛰어다녔다.
“이서린. 귀찮은 일 만들지 말고 적당히 마셔라.”
걱저~엉?
에르딘이 걱저~엉?
서린은 흥 하고 좀 웃었다.
‘어라?’
‘나 좀 취했나?’
이제 그만 마셔야 되는데 좀처럼 사람들이 서린을 놔주지를 않았다.
서린이 술을 먹다가도 회귀 본능처럼 에르딘 옆으로 와서 감시했다.
세상이 조금 어지러워졌다.
‘어?’
‘책상이 왜 이렇게 가까워지지.’
은글슬쩍 서린의고개가 테이블 위로 떨어져 갔다.
울렁, 울렁.
세상이 울렁거렸다.
‘나 누구 등에 업혀 있는 것 같은데.’
누구지?
“재현 선배?”
“윤시후다.”
“아~ 윤시후 우리 같이 살지, 참. 윤시후 보자.
키 크고, 눈 예쁘고, 코 오똑하고, 입술 섹시한 귀티나는 윤시후 맞네, 맞아.”
깔깔.
하고 싶은 말 대놓고 하니까 너무 재밌다.
어깨는 왜 잔뜩 굳으셨대요?
꺄하핫.
“왜 예쁘게 생기고 난린데.”
“왜 나 죽이려는 건데.”
근데 내일 나 이거 기억나면 어떻게 하지?
지금 기분 너무 좋아서 알바가 아닌데.
아 맞다.
알바 구해야 되는데…….
울렁, 울렁.
집 앞인 듯하다.
에르딘이 서린의 집 비밀번호를 물어보는데.
“너 문 딸 줄은 아냐? 깔깔깔깔깔!”
‘누군지 모르겠지만 개빡쳐 보인다.’
‘곧 나 죽일 기세인데?’
두 번 죽어봐서 그런가?
그냥 죽여보던가, 그럼.
서린이 눈을 감았다.
목말라…….
물…….
물을 찾아 더듬더듬.
냉장고가 어디에 있는지, 왜 이렇게 어지럽지.
그때 누군가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꺼냈다.
서린이 물을 잡으려고 헛손질을 하자 머리카락을 쥐고는 서린의 고개를 꺾었다.
서린의 입으로 물이 들어갔다.
‘살 것 같다.’
‘근데 개새끼, 저거 웃고 있는 거야?’
여자 머리를 잡고는 너무하네.
델리아의 장례식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스란에 의해 공작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세레나가 공작의 빈자리를 메꿨다. 세레나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아스란에게 먼저 묻지는 않았다. 그저 항상 그랬듯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세레나의 치유술은 이제 그 어떤 치유술사보다 더 대단해져 있었다. 그녀는 시간이 나면 항상 빈민가로 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치유술을 베풀었다.“세레나님, 감사합니다. 세레나님은 여신이십니다.”그 말을 들은 세레나가 자신을 찬양하던 델리아를 떠올렸다.“아니요. 이제 다치지 말고 조심하세요.”치유술을 마치고 나온 세레나를 아스란이 에스코트했다.“어머, 아스란님. 굳이 같이 안 오셔도 된다니까요.”아스란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옆에 서 있었다.머리를 짚은 세레나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홀로 치료를 하러 나왔다가 불량배를 만난 뒤로는 무조건 뒤따라다니는 아스란이었다. 결국 그 불량배들도 치료술로 치료해 보내긴 했지만, 아스란이 그 이야기를 알게 되고 폭주를 할 뻔했었다.오늘 세레나는 어느 젊은 남성의 집으로 찾아갔다.“세레나님, 발목을…….”젊은 남성이 발목을 보였다. 농기구에 긁혀 살이 썩어 가고 있었다. 세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름을 짜낸 뒤 치유술을 사용했다. 생각보다 깊은 상처에 조금 무리를 해서 능력을 사용했다.휘청거리는 세레나를 젊은 남성이 받아 들려 하자, 아스란이 손으로 남성을 쳐내고 세레나를 받아 들었다.“내가 하지.”아스란이 도마뱀의 눈을 만들어 남자에게 살기를 날렸다. 가볍게 세레나를 안아 든 아스란은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울며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남자를 뒤로한 채, 세레나는 안긴 채 마차에 태워졌다.“너무 무리하면서는 하지 마라.”땀을 흘려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정리해 주며 아스란이 세레나를 걱정했다.“예? 제…… 제가 할게요. 아스란님, 제발…….”얼굴이 새빨개진 세레나는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허겁지겁 정리했다. 그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에 아
시후의 집 2층에서 서린이 열심히 옷을 골랐다. 같이 살기로 하면서 바다 여행은 올해가 처음이었다.‘에르딘이 사라졌을 때 제일 후회했지.’서린은 에르딘이 돌아온 뒤로 한을 풀 듯 그동안 못 했던 걸 다 몰아서 했다.영화 보기, 커플링 맞추기, 남산타워 올라가기 등등 시간이 나는 대로 에르딘과 붙어 다니기 바빴다.그러나 어쩌다 보니 바다만은 다녀오지 못했는데, 내일 드디어 같이 바다를 가기로 한 것이다.서린은 속옷을 고르며 민망해져서 주먹으로 침대를 몇 대 팼다. 이불 사이로 서린의 손이 푹푹 박혔다.‘설마, 붙어 잔 적은 많았지만…… 꺄악.’서린 혼자 얼굴이 빨갛게 익어서는 팔다리를 마구 휘두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에르딘은 아래층에서 방문 사이로 내적 비명을 지르는 서린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다음 날 에르딘은 선글라스를 끼고 차 한 대를 가지고 나왔다. 그새 면허까지 따 버린 에르딘이 서린은 어쩐지 뿌듯해져 괜스레 제 가슴을 당당하게 폈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조수석에 올라탄 서린은 잔뜩 들떠서는 내비게이션에 바다 이름을 쳤다.“가서 멍게, 말미잘, 해삼, 낙지! 꼭 먹여 볼 거야!”눈을 빛내는 서린을 보고 에르딘은 순간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좋은 것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드라이브에 시동을 건 에르딘이 출발했다. 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서린은 비어 있는 에르딘의 오른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시후, 너는 바다를 본 적 있어?”서린이 에르딘을 보며 물었다.“없다.”“엄청 예뻐!”에르딘이 피식 웃으며 서린을 쳐다보았다. 이미 그의 눈에 예쁜 것을 담고 있었다.바다로 가는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차는 정체되어 있었다. 서린이 몸을 베베 꼬며 말했다.“으…… 다음 휴게소에서 쉬었다 가자.”에르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서린이 정체된 길이 지루한지 또다시 말을 꺼냈다.“시후, 너는 여기 오게 된 거 후회 안 해?”“안 한다.”선글라스 안에 감춰진 눈동자에서 살기가…… 살기?“잠
서린의 눈앞에서 벨라트리스가 손을 뻗었다. 서린은 가슴에 뜨거운 열감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언제나처럼 엿을 날려 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모든 것이 느려지며 멀리서 에르딘이 멈춰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래도 에르딘한테서는 떼어 냈어.’이제 다시 현대로 돌아가 계획을 짜면 그만이리라.서린은 방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에르딘이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건물이…… 없어.”에르딘이 살았던 자리에는 빈 공터만이 남아 있었다. 매서운 바람만이 서린의 뺨을 스쳤다.불길한 예감에 서린은 재빨리 재현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서린아, 학교도 안 나오고 웬일이야?”“선배, 취직 안 했어요?”서린이 설마 하며 물었다.“무슨 소리 하는 거야? 빨리 학교 나와.”서린은 믿을 수가 없어 중얼거렸다.“거짓말…….”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자취방으로 돌아온 서린은 시후의 물건을 사 놓았던 박스들을 꺼냈다.“봐, 꿈 아니잖아. 진짜잖아!”서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와 찍은 네컷사진이 없었다. 집 안을 다 뒤지기 시작했다.‘뭐야, 에르딘. 너 지금 나 혼자 현대로 보낸 거야?’서린은 박스 안의 물건들을 끌어안았다. 입을 틀어막아도 울음이 새어 나왔다.에르딘이 쓰려고 샀던 물건만 남아 있었다. 사진도, 번호도, 그 무엇도 남기지 않은 채 윤시후는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잔뜩 울어 버린 서린은 휴대폰으로 『검은 장미의 가시』를 검색했다.그런 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에르딘의 상처는 어떻게 됐지.’‘마왕은…… 라리엘은…… 세레나는…….’그곳에 인사하지 못하고 놓고 온 것이 너무나 많았다.결국 가슴을 쥐어뜯기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서린은 손으로 옷을 강하게 말아쥐었다.왜 마지막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어.에르딘 말 듣고 조심 좀 할걸. 왜 항상 저지르고 후회하는 걸까.왜 조심하지 않았어, 이서린!꺽꺽 소리를 내며 목 놓아 울다 지쳐 버린 서린은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다음 날 서린은 비척비척 학교를 향했다. 퉁퉁
“우리가 판단할 일은 아니지.”그가 손에 마력을 더욱 쏟아부었다.쿠드드득.얼음꽃이 한 번 더 피어났다.몸속의 가시들이 일제히 자라났다.벨라트리스의 몸이 크게 떨렸다.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날개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허공에는 거대한 얼음꽃 한 송이가 피어난 듯했다.그 중심에 벨라트리스가 매달려 있었다.축 늘어진 몸.감긴 눈.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아스란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허공에 떠 있던 얼음꽃이 산산이 부서졌다.벨라트리스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쿵.아스란도 비틀거렸다.그제야 오른팔을 움켜쥐었다.검은 저주가 혈관을 타고 어깨까지 번져 있었다.그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조금 늦었구나.”비틀거리며 일행에게 걸어갔다.에르딘은 서린을 끌어안은 채 넋을 잃고 있었다.세레나는 울먹이며 아스란을 향해 뛰어왔다.“아스란 님!”아스란은 그녀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괜찮다.”한 걸음 더 내디뎠다.시야가 흔들렸다.검게 물든 저주가 몸을 잠식했다.세레나의 얼굴이 흐릿해졌다.아스란은 끝내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툭.무릎이 먼저 꺾였다.이내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세레나가 다급히 그를 받아 안았다.공작저에서 아스란은 다행히 대신관에게 금세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세레나는 눈물을 흘리며 반은 용인 아스란에게 무리하게 치유술을 쓰다가 결국 쓰러졌다.오히려 세레나를 간호하게 된 아스란에게 에르딘이 조용히 다가왔다.“난 왜 안 돌아가진 거지?”아스란이 대답했다.“내 마력이 끝난 거다. 인과가 끝난 거야.”에르딘이 아스란의 멱살을 잡았다. 에르딘의 주먹이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갈 수 있지?”“그녀가 거기 있다고 누가 그러던가?”에르딘은 더욱 거세게 멱살을 움켜쥐었다.“거기 있어야 할 거다. 그녀는 죽지 않았어.”아스란은 무표정으로 에르딘의 얼굴을 바라봤다.원래대로 돌아간 것인데 무엇이 문제인지.저토록 이성적인 남자가 왜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인지.아스란은 그를
“스승님이 그러셨잖아요.”“인간을 이해하라고.”“그래서 이해하려고 했죠.”손을 천천히 펼쳤다.“웃어도 보고.”“울어도 보고.”“사랑도 해 보고.”“배신도 당해 보고.”“죽여도 보고.”“죽어도 보고.”검은 마력이 손끝에 모였다.“그러다가.”“인간의 욕망을 만났어요.”“그게 너무 아름답더라고.”순간 손가락이 아스란을 향했다.쾅!검은 광선이 공간을 찢으며 날아왔다.아스란은 손을 들어 올렸다.거대한 얼음벽이 솟아났다.쿠드드드득.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울렸다.하지만 끝내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아스란이 담담히 말했다.“내 탓이라는 것이냐.”“욕망의 탓이라는 것이냐.”“……아니다.”“네 탓이다.”벨라트리스의 미소가 사라졌다.“뭐라는 거야.”“할아버지가!”손가락을 장난치듯 여러 번 튕겼다.수십 개의 검은 탄환이 허공을 뒤덮었다.콰쾅!콰앙!얼음벽이 하나둘 깨져 나갔다.하지만.깨질수록 더 커졌다.아스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한 걸음.또 한 걸음.얼음벽을 밀며 천천히 다가왔다.“……나는.”아스란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네가 좋은 수호신이 될 줄 알았다.”“…….”“욕심이 많고.”“모든 것을 직접 겪어야 직성이 풀리던 아이.”“그래서.”“인간을 가장 잘 이해할 거라 믿었다.”벨라트리스가 이를 악물었다.“맞아요!”“욕심도 많았고!”“다 해 봤어요!”“그래서 알게 됐잖아요!”날개를 활짝 펼쳤다.검은 마력이 폭발했다.“인간은! 지켜야 하는 존재가 아니야!”“서로 죽이고!”“빼앗고!”“배신하고!”“욕망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버리는 존재라고!”광기 어린 외침이 하늘을 울렸다.아스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그 눈에 분노는 없었다.안타까움뿐이었다.“……아이야.”“인간을 너무 닮아서.”“괴로웠구나.”그가 손을 펼쳤다.차가운 마력이 응축됐다.손바닥 위에 얼음창 하나가 피어났다.휘익.소리도 없이 날아갔다.벨라트리스의 어깨를 꿰뚫었다.곧이어 두 개.열 개.수십
휘익!손을 한 번 휘두르자 서린의 몸이 미로 너머로 튕겨 나갔다.라리엘은 허공으로 떠오르며 웃었다.“꼭꼭 숨어라.”쿠웅!!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에서 떨어졌다.용의 날개를 펼친 사내가 그대로 라리엘을 들이받았다.둘은 미로를 부수며 데굴데굴 굴러갔다.엉망이 된 라리엘이 피식 웃었다.“아스란.”“드디어 왔네.”아스란은 옷을 툭툭 털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푸른 눈이 라리엘을 똑바로 응시했다.“그래.”“벨라트리스.”“잘 지냈느냐.”“스승님…….”검갈색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듯 보였다.뒤늦게 도착한 세레나가 에르딘에게 치유술을 걸고 있었다. 희미한 빛이 에르딘의 상처를 감쌌다.라리엘의 시선이 천천히 세레나에게 향했다.“거슬려.”순간 그녀의 몸이 사라졌다.“세레나!”아스란이 몸을 날렸다.라리엘은 에르딘에게 달려가던 길목에서 세레나를 손등으로 쳐냈다. 세레나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멀리 날아갔다.아스란은 방향을 틀어 세레나를 받아냈다.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은 뒤 다시 라리엘에게 쇄도했다.하지만 라리엘은 손바닥을 펼쳤다.콰앙!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 아스란의 몸을 그대로 멈춰 세웠다.“제 힘을 거두고 이야기하시죠.”라리엘이 싱긋 웃었다.그 손이 천천히 에르딘의 왼쪽 어깨를 움켜쥐었다.“커흑!”에르딘의 몸이 크게 떨렸다.손끝이 어깨 깊숙이 파고들었다.핏물이 쏟아졌다.핏줄을 따라 붉은 피가 거꾸로 라리엘의 팔을 타고 흘러들어 갔다.에르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무릎이 꺾였다.숨이 점점 짧아졌다.“에르딘!”서린이 악을 쓰며 뛰어올랐다.“디질래?!”하늘에서 그대로 떨어진 그녀가 라리엘의 목을 팔로 감아 버렸다.네이키드 초크.팔에 핏줄이 솟았다.온몸의 힘을 전부 목에 실었다.“서린…… 가라.”“손 떼!”라리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서린은 이를 악물었다.그리고 그대로 귀를 물어뜯었다.“아아악!”피가 튀었다.라리엘이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손이 잠깐 풀렸다.에르딘의 몸이 바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