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린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게슴츠레 눈을 뜨니 당황한 듯한 에르딘이 보였다.
“에르딘! 너!”
“이서린. 이곳은 어디지? 날 어디로 데리고 온 것이냐?”
심각한 표정으로 서린의 어깨를 붙잡고 묻는 에르딘은 꽤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잠깐! 멈춰 봐. 여긴 내 집이야. 어제 네가 너무 취해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다구.”
그제야 짤랑짤랑 서린을 흔들던 에르딘이 멈췄다.
“집이라고? 이 작은 곳은 업무를 보는 곳이냐?”
얘가 뭔 소리를 하는 거니.
설마 저택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저러는 거?
“아니, 여기서 먹고 씻고 자고 다 하는데? 한국은 물가가 비싸.”
“설마 너는 여기서도 신분이 하찮은 거냐?”
저런, 같은 말을 해도 더 얄미운 놈 같으니.
“보통 대학생은 다 이런 데서 산단다. 나도 좀 묻자. 너 왜 안 죽고 내 옆에 돌아다녀?”
“……말을 해 줘야 하나?”
“나는 묻는 거 다 말해 줬는데?”
“…….”
에르딘은 침묵했다.
그래. 네 속을 다 말해 주면 네가 에르딘 카이덴이 아니지. 다른 사람이지.
저 머릿속에 또 생각이 얼마나 팽팽 돌아가고 있을까.
서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에르딘을 지나쳐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흠칫 놀란 에르딘이 경계하는 낯으로 서린을 쳐다봤다.
“아니, 나 물 좀 마시려고…… 너…… 너도 줘?”
“됐다. 뭘 탔을 줄 알고.”
듣다 보니까 화나네?
나는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지 술 먹은 거 개고생해서 여기까지 끌고 와 재워 주기까지 했는데.
고맙다는 말은 기대도 안 했지만, 아주 태도가 뻔뻔하기 그지없네.
서린은 생수 하나를 따서 벌컥벌컥 마신 뒤, 마시던 물병을 그대로 내밀었다.
“자. 독 없지? 마셔. 어제 술 많이 먹어서 갈증 날 텐데?”
“감히 네가 입에 댔던 것을 누구에게 주는 거지?”
에르딘의 끊임없는 으르렁거림에 결국 서린의 뚜껑이 열렸다.
‘남의 집에 와서 지금 공작 행세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서린은 성큼성큼 다가가 순간적인 완력과 기술로 에르딘의 머리채를 잡아 내리고 입에 물병을 꽂았다.
놀란 에르딘이 서린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그러나 서린의 행동이 워낙 순식간이었던 탓에 결국 꿀떡꿀떡 물을 삼켜 버렸다.
물만 먹였는데도 서린의 표정은 어쩐지 밝아지며 개운해졌다.
속이 아주 뻥 뚫렸다.
에르딘 저건 저렇게 살다가 누가 안 죽여도 언젠가는 스스로 죽지 않을까 싶다.
서린은 잡고 있던 머리채를 놓았다.
아씨.
잡혔던 손목에 멍이 들었다.
“감히 내가 마시던 걸 마셨으니, 이제 대답 좀 해 보시지? 왜 원래 세계로 안 돌아가는 거야?”
“돌아갈 이유가 있나? 죽기도 싫고, 이 세계도 궁금하고 말이지.”
에르딘이 특유의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눈만 웃는 걸 보니 뭔가 계략이 있군.
있는 그대로 믿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죽기는? 나도 싫지.’
‘하지만 나는 죽어서라도 돌아오고 싶을 것 같은데.’
하물며 에르딘에게는 세레나가 있지 않나?
더더욱 돌아가야 할 이유가 될 텐데.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있나?
“그럼 나 안 죽일 거지?”
공작이 ‘하’ 하고 기가 찬 웃음을 흘렸다.
“그대야말로 그런 짓 하지 않길 부탁하지.”
그렇게 둘은 서로 안 죽이기 휴전 협정을 맺었다.
에르딘은 앞으로 한국에서는 시후라고 부르기로 했다.
에르딘도 그녀를 서린이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서린은 대충 머리를 질끈 묶어 올리고 주방에서 냄비를 꺼냈다.
“라면 먹을 거지?”
“라면?”
‘이건 뭐, 아는 게 없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 할 판이네.’
따로 대답하지 않고 라면 두 개를 보글보글 끓였다.
계란이 없네.
그냥 플레인으로 먹어야지 뭐.
작은 식탁을 펴고 끓인 라면을 올렸다.
에르딘은 생전 처음 보는 음식 앞에서 잠시 굳어 있었다.
밥그릇은 하나라 에르딘에게 양보하고, 서린은 냄비 뚜껑을 썼다.
젓가락질하는 법을 보여준 뒤 서린이 라면을 흡입했다.
에르딘도 나름 젓가락으로 열심히 라면을 우아하게 먹고 있었다.
공작쯤 되면 행동이 그냥 다 품위 있어지는가 보다.
서린은 이쯤 되니까 얼굴이 매너를 만드는 건지, 매너가 얼굴을 더 나아 보이게 만드는 건지 헷갈렸다.
식사가 끝나자 서린은 식탁을 정리했다.
설거지를 하고 상을 접는 동안, 에르딘은 그 모습을 품위 있게 보고만 있었다.
“왜!!! 왜 집에 안 가!!!!!”
“집이 어딘지 모른다.”
“민증 없어?? 민증에 나와 있을 거 아냐.”
에르딘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민증이 뭔지 모른다.”
서린이 에르딘의 옷 주머니란 주머니는 전부 더듬었다.
흠칫!
바지춤까지 더듬으려는 서린의 손을 에르딘이 재빨리 잡았다.
“지금 지갑 찾고 있거든??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거든?”
“닥쳐라. 내가 찾겠다.”
“주머니 다 뒤져 봐. 거기에 아마 있을 거야.”
자기 몸을 직접 수색하던 에르딘은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지갑이 없다고 했다.
“아니, 저번에 넘어왔을 땐 그럼 학교는 어떻게 온 거야?”
“그냥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그럼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냥 상황에 따라 행동한 거라고?”
“그래.”
“그럼 칼은 왜 맞은 거야?”
“시비를 걸기에 받아주었다.”
아, 그냥 길 가다 시비가 걸렸는데 조폭이어서 죽었구나.
아, 그랬구나?
그럼 아무것도 모르고 집도, 돈도, 가족도 없는 상태구나.
그래서 아는 척했구나?
‘나도 델리아가 됐을 때랑 똑같았는데.’
“그럼 앞으로 어디서 지낼 건데?”
“나도 모르지. 노숙하다 또 그냥 칼 맞아 죽어 버릴지도.”
에르딘은 예의 그 눈만 웃는 표정을 지었다.
약아 빠져가지고.
이 사이코가 내 줄을 잡고 흔들어 댔다.
뿌드득.
이가 갈렸다.
협박당하고 있는데, 슬프게도 할 수 있는 대답은 저놈이 원하는 것밖에 없었다.
“어…… 그럼…… 일단 우리 집에…… 있을래?”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놈이 원하는 대로 서린의 집이 임시 보호소가 되었다.
서린은 왜 에르딘이 자신에게 붙어 있었는지 어느 정도 의문이 풀리고 나니, 그가 마냥 의뭉스럽지만은 않았다.
다 가진 놈이 아무것도 없는 이곳이 뭐가 좋다고 남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린은 한국이 좋았다.
한국에 오래 남으려면 윤시후가 뭐 하는 사람인지 꼭 찾아주마.
돌아갈 생각 못 하게!
그런데 윤시후가 어디에 살고,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대체 어디서부터 알아보냐고!
게다가 지금 당장 제일 시급한 것은 칫솔, 여분의 옷, 속옷, 양말 등등이었다.
“젠장!”
‘신혼부부냐!’
델리아의 장례식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스란에 의해 공작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세레나가 공작의 빈자리를 메꿨다. 세레나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아스란에게 먼저 묻지는 않았다. 그저 항상 그랬듯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세레나의 치유술은 이제 그 어떤 치유술사보다 더 대단해져 있었다. 그녀는 시간이 나면 항상 빈민가로 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치유술을 베풀었다.“세레나님, 감사합니다. 세레나님은 여신이십니다.”그 말을 들은 세레나가 자신을 찬양하던 델리아를 떠올렸다.“아니요. 이제 다치지 말고 조심하세요.”치유술을 마치고 나온 세레나를 아스란이 에스코트했다.“어머, 아스란님. 굳이 같이 안 오셔도 된다니까요.”아스란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옆에 서 있었다.머리를 짚은 세레나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홀로 치료를 하러 나왔다가 불량배를 만난 뒤로는 무조건 뒤따라다니는 아스란이었다. 결국 그 불량배들도 치료술로 치료해 보내긴 했지만, 아스란이 그 이야기를 알게 되고 폭주를 할 뻔했었다.오늘 세레나는 어느 젊은 남성의 집으로 찾아갔다.“세레나님, 발목을…….”젊은 남성이 발목을 보였다. 농기구에 긁혀 살이 썩어 가고 있었다. 세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름을 짜낸 뒤 치유술을 사용했다. 생각보다 깊은 상처에 조금 무리를 해서 능력을 사용했다.휘청거리는 세레나를 젊은 남성이 받아 들려 하자, 아스란이 손으로 남성을 쳐내고 세레나를 받아 들었다.“내가 하지.”아스란이 도마뱀의 눈을 만들어 남자에게 살기를 날렸다. 가볍게 세레나를 안아 든 아스란은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울며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남자를 뒤로한 채, 세레나는 안긴 채 마차에 태워졌다.“너무 무리하면서는 하지 마라.”땀을 흘려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정리해 주며 아스란이 세레나를 걱정했다.“예? 제…… 제가 할게요. 아스란님, 제발…….”얼굴이 새빨개진 세레나는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허겁지겁 정리했다. 그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에 아
시후의 집 2층에서 서린이 열심히 옷을 골랐다. 같이 살기로 하면서 바다 여행은 올해가 처음이었다.‘에르딘이 사라졌을 때 제일 후회했지.’서린은 에르딘이 돌아온 뒤로 한을 풀 듯 그동안 못 했던 걸 다 몰아서 했다.영화 보기, 커플링 맞추기, 남산타워 올라가기 등등 시간이 나는 대로 에르딘과 붙어 다니기 바빴다.그러나 어쩌다 보니 바다만은 다녀오지 못했는데, 내일 드디어 같이 바다를 가기로 한 것이다.서린은 속옷을 고르며 민망해져서 주먹으로 침대를 몇 대 팼다. 이불 사이로 서린의 손이 푹푹 박혔다.‘설마, 붙어 잔 적은 많았지만…… 꺄악.’서린 혼자 얼굴이 빨갛게 익어서는 팔다리를 마구 휘두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에르딘은 아래층에서 방문 사이로 내적 비명을 지르는 서린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다음 날 에르딘은 선글라스를 끼고 차 한 대를 가지고 나왔다. 그새 면허까지 따 버린 에르딘이 서린은 어쩐지 뿌듯해져 괜스레 제 가슴을 당당하게 폈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조수석에 올라탄 서린은 잔뜩 들떠서는 내비게이션에 바다 이름을 쳤다.“가서 멍게, 말미잘, 해삼, 낙지! 꼭 먹여 볼 거야!”눈을 빛내는 서린을 보고 에르딘은 순간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좋은 것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드라이브에 시동을 건 에르딘이 출발했다. 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서린은 비어 있는 에르딘의 오른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시후, 너는 바다를 본 적 있어?”서린이 에르딘을 보며 물었다.“없다.”“엄청 예뻐!”에르딘이 피식 웃으며 서린을 쳐다보았다. 이미 그의 눈에 예쁜 것을 담고 있었다.바다로 가는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차는 정체되어 있었다. 서린이 몸을 베베 꼬며 말했다.“으…… 다음 휴게소에서 쉬었다 가자.”에르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서린이 정체된 길이 지루한지 또다시 말을 꺼냈다.“시후, 너는 여기 오게 된 거 후회 안 해?”“안 한다.”선글라스 안에 감춰진 눈동자에서 살기가…… 살기?“잠
서린의 눈앞에서 벨라트리스가 손을 뻗었다. 서린은 가슴에 뜨거운 열감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언제나처럼 엿을 날려 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모든 것이 느려지며 멀리서 에르딘이 멈춰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래도 에르딘한테서는 떼어 냈어.’이제 다시 현대로 돌아가 계획을 짜면 그만이리라.서린은 방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에르딘이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건물이…… 없어.”에르딘이 살았던 자리에는 빈 공터만이 남아 있었다. 매서운 바람만이 서린의 뺨을 스쳤다.불길한 예감에 서린은 재빨리 재현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서린아, 학교도 안 나오고 웬일이야?”“선배, 취직 안 했어요?”서린이 설마 하며 물었다.“무슨 소리 하는 거야? 빨리 학교 나와.”서린은 믿을 수가 없어 중얼거렸다.“거짓말…….”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자취방으로 돌아온 서린은 시후의 물건을 사 놓았던 박스들을 꺼냈다.“봐, 꿈 아니잖아. 진짜잖아!”서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와 찍은 네컷사진이 없었다. 집 안을 다 뒤지기 시작했다.‘뭐야, 에르딘. 너 지금 나 혼자 현대로 보낸 거야?’서린은 박스 안의 물건들을 끌어안았다. 입을 틀어막아도 울음이 새어 나왔다.에르딘이 쓰려고 샀던 물건만 남아 있었다. 사진도, 번호도, 그 무엇도 남기지 않은 채 윤시후는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잔뜩 울어 버린 서린은 휴대폰으로 『검은 장미의 가시』를 검색했다.그런 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에르딘의 상처는 어떻게 됐지.’‘마왕은…… 라리엘은…… 세레나는…….’그곳에 인사하지 못하고 놓고 온 것이 너무나 많았다.결국 가슴을 쥐어뜯기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서린은 손으로 옷을 강하게 말아쥐었다.왜 마지막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어.에르딘 말 듣고 조심 좀 할걸. 왜 항상 저지르고 후회하는 걸까.왜 조심하지 않았어, 이서린!꺽꺽 소리를 내며 목 놓아 울다 지쳐 버린 서린은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다음 날 서린은 비척비척 학교를 향했다. 퉁퉁
“우리가 판단할 일은 아니지.”그가 손에 마력을 더욱 쏟아부었다.쿠드드득.얼음꽃이 한 번 더 피어났다.몸속의 가시들이 일제히 자라났다.벨라트리스의 몸이 크게 떨렸다.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날개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허공에는 거대한 얼음꽃 한 송이가 피어난 듯했다.그 중심에 벨라트리스가 매달려 있었다.축 늘어진 몸.감긴 눈.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아스란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허공에 떠 있던 얼음꽃이 산산이 부서졌다.벨라트리스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쿵.아스란도 비틀거렸다.그제야 오른팔을 움켜쥐었다.검은 저주가 혈관을 타고 어깨까지 번져 있었다.그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조금 늦었구나.”비틀거리며 일행에게 걸어갔다.에르딘은 서린을 끌어안은 채 넋을 잃고 있었다.세레나는 울먹이며 아스란을 향해 뛰어왔다.“아스란 님!”아스란은 그녀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괜찮다.”한 걸음 더 내디뎠다.시야가 흔들렸다.검게 물든 저주가 몸을 잠식했다.세레나의 얼굴이 흐릿해졌다.아스란은 끝내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툭.무릎이 먼저 꺾였다.이내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세레나가 다급히 그를 받아 안았다.공작저에서 아스란은 다행히 대신관에게 금세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세레나는 눈물을 흘리며 반은 용인 아스란에게 무리하게 치유술을 쓰다가 결국 쓰러졌다.오히려 세레나를 간호하게 된 아스란에게 에르딘이 조용히 다가왔다.“난 왜 안 돌아가진 거지?”아스란이 대답했다.“내 마력이 끝난 거다. 인과가 끝난 거야.”에르딘이 아스란의 멱살을 잡았다. 에르딘의 주먹이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갈 수 있지?”“그녀가 거기 있다고 누가 그러던가?”에르딘은 더욱 거세게 멱살을 움켜쥐었다.“거기 있어야 할 거다. 그녀는 죽지 않았어.”아스란은 무표정으로 에르딘의 얼굴을 바라봤다.원래대로 돌아간 것인데 무엇이 문제인지.저토록 이성적인 남자가 왜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인지.아스란은 그를
“스승님이 그러셨잖아요.”“인간을 이해하라고.”“그래서 이해하려고 했죠.”손을 천천히 펼쳤다.“웃어도 보고.”“울어도 보고.”“사랑도 해 보고.”“배신도 당해 보고.”“죽여도 보고.”“죽어도 보고.”검은 마력이 손끝에 모였다.“그러다가.”“인간의 욕망을 만났어요.”“그게 너무 아름답더라고.”순간 손가락이 아스란을 향했다.쾅!검은 광선이 공간을 찢으며 날아왔다.아스란은 손을 들어 올렸다.거대한 얼음벽이 솟아났다.쿠드드드득.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울렸다.하지만 끝내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아스란이 담담히 말했다.“내 탓이라는 것이냐.”“욕망의 탓이라는 것이냐.”“……아니다.”“네 탓이다.”벨라트리스의 미소가 사라졌다.“뭐라는 거야.”“할아버지가!”손가락을 장난치듯 여러 번 튕겼다.수십 개의 검은 탄환이 허공을 뒤덮었다.콰쾅!콰앙!얼음벽이 하나둘 깨져 나갔다.하지만.깨질수록 더 커졌다.아스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한 걸음.또 한 걸음.얼음벽을 밀며 천천히 다가왔다.“……나는.”아스란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네가 좋은 수호신이 될 줄 알았다.”“…….”“욕심이 많고.”“모든 것을 직접 겪어야 직성이 풀리던 아이.”“그래서.”“인간을 가장 잘 이해할 거라 믿었다.”벨라트리스가 이를 악물었다.“맞아요!”“욕심도 많았고!”“다 해 봤어요!”“그래서 알게 됐잖아요!”날개를 활짝 펼쳤다.검은 마력이 폭발했다.“인간은! 지켜야 하는 존재가 아니야!”“서로 죽이고!”“빼앗고!”“배신하고!”“욕망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버리는 존재라고!”광기 어린 외침이 하늘을 울렸다.아스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그 눈에 분노는 없었다.안타까움뿐이었다.“……아이야.”“인간을 너무 닮아서.”“괴로웠구나.”그가 손을 펼쳤다.차가운 마력이 응축됐다.손바닥 위에 얼음창 하나가 피어났다.휘익.소리도 없이 날아갔다.벨라트리스의 어깨를 꿰뚫었다.곧이어 두 개.열 개.수십
휘익!손을 한 번 휘두르자 서린의 몸이 미로 너머로 튕겨 나갔다.라리엘은 허공으로 떠오르며 웃었다.“꼭꼭 숨어라.”쿠웅!!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에서 떨어졌다.용의 날개를 펼친 사내가 그대로 라리엘을 들이받았다.둘은 미로를 부수며 데굴데굴 굴러갔다.엉망이 된 라리엘이 피식 웃었다.“아스란.”“드디어 왔네.”아스란은 옷을 툭툭 털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푸른 눈이 라리엘을 똑바로 응시했다.“그래.”“벨라트리스.”“잘 지냈느냐.”“스승님…….”검갈색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듯 보였다.뒤늦게 도착한 세레나가 에르딘에게 치유술을 걸고 있었다. 희미한 빛이 에르딘의 상처를 감쌌다.라리엘의 시선이 천천히 세레나에게 향했다.“거슬려.”순간 그녀의 몸이 사라졌다.“세레나!”아스란이 몸을 날렸다.라리엘은 에르딘에게 달려가던 길목에서 세레나를 손등으로 쳐냈다. 세레나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멀리 날아갔다.아스란은 방향을 틀어 세레나를 받아냈다.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은 뒤 다시 라리엘에게 쇄도했다.하지만 라리엘은 손바닥을 펼쳤다.콰앙!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 아스란의 몸을 그대로 멈춰 세웠다.“제 힘을 거두고 이야기하시죠.”라리엘이 싱긋 웃었다.그 손이 천천히 에르딘의 왼쪽 어깨를 움켜쥐었다.“커흑!”에르딘의 몸이 크게 떨렸다.손끝이 어깨 깊숙이 파고들었다.핏물이 쏟아졌다.핏줄을 따라 붉은 피가 거꾸로 라리엘의 팔을 타고 흘러들어 갔다.에르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무릎이 꺾였다.숨이 점점 짧아졌다.“에르딘!”서린이 악을 쓰며 뛰어올랐다.“디질래?!”하늘에서 그대로 떨어진 그녀가 라리엘의 목을 팔로 감아 버렸다.네이키드 초크.팔에 핏줄이 솟았다.온몸의 힘을 전부 목에 실었다.“서린…… 가라.”“손 떼!”라리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서린은 이를 악물었다.그리고 그대로 귀를 물어뜯었다.“아아악!”피가 튀었다.라리엘이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손이 잠깐 풀렸다.에르딘의 몸이 바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