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차 한잔 하자는 말이, 그렇게 고민할 일이야?”
이현은 언제나 상대의 흐름을 엉망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눈웃음을 머금은 말투, 농담과 진심 사이를 기어 다니는 얄미운 어조.하지만 정작 그의 표정엔, 말의 무게를 지탱하려는 책임 같은 건 없었다.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고르는 게 아니라, 고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그 침묵에 이현은 웃음을 흘렸다.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뭐, 그 정도 관심도 못 끄는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좀 과신했나.”
유리는 그를 바라봤다.
얼굴은 매끈했고, 눈매는 유려했지만, 그 속엔 그 어떤 온기도 없었다.그의 태도는 방탕했고, 그의 말은 가볍고, 그의 눈빛은 방심 그 자체였다.“그럼 됐고. 언젠가 마시고 싶을 때 연락이나 하시든가. 이름은 모르겠지만, 얼굴은 기억하니까.”
이현은 말끝을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웃는 얼굴이 익숙하다는 듯, 아니 그보다, 자기 표정을 잘 아는 사람처럼 능숙했다.유리는 입꼬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가볍게 흔드는 사람은 가볍게 무너진다.그녀는 이미 그를 무너뜨릴 설계를 거의 완성한 상태였다.“내 이름, 알고 싶어요?”
그 순간 이현의 움직임이 멈췄다.
돌아선 고개가 천천히 그녀를 향했다.유리는 똑바로 그를 바라봤다. 미소도, 호의도 없었다.“와, 목소리는 매력 있네. 그거 하나는 인정.”
칭찬 같지 않은 말을 대놓고 하는 태도.
유리는 애초에 그에게 기대한 게 없었기에 놀라지 않았다.오히려 잘 작동되는 장난감처럼, 그의 반응은 예측 가능한 수준이었다.“궁금하면, 스스로 알아내요.”
그녀는 단호한 말투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떴다.
이현은 무심하게 뒷모습을 훑더니, 입가에 조용히 혼잣말을 남겼다.“성격도 독특하네. 근데 좀 끌리긴 한다.”
그날 저녁, 유리는 호텔 방에서 이현의 SNS를 다시 열었다.
불필요하게 많이 찍힌 셀카, 파티, 클럽, 외제차, 와인, 무의미한 인맥과 무의미한 웃음.그는 가식 없는 허세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꾸미지 않았고, 그래서 더 위험했다.무너뜨릴 틈이 많은 사람은, 더 쉽게 믿는다.그는 이미 유리에게 미묘하게 시선을 내주었고,그것이 반복된다면 감정으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그의 웃음은 가볍고, 선택은 본능적이며, 책임감은 없다.
사랑이 생겨도 감정보다 소유가 앞설 것이고,그는 자신이 무너지는지도 모른 채 무너질 것이다.유리는 화면을 끄고 침대에 등을 기댔다.
천장을 보며 숨을 고르며 속삭였다.“계획은 잘 흘러가고 있어.”
며칠 후, 두 번째 만남은 호텔 로비였다.
유리는 그 장소를 알고 있었고,그가 언제쯤 그 건물에서 나올지도 예상하고 있었다.
이현은 그녀를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다.“진짜 우연이네? 이정도면 그쪽이 날 따라다니는 것 같은데...”
유리는 짧게 웃었다. 이번엔 미소를 살짝, 의도적으로 흘렸다.
“그런 말, 자주 하시나 봐요.”
“나 같은 사람은 핑계가 필요하거든요. 이렇게 말이라도 해야 다가가니까.”
“굳이 다가가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이현은 그녀의 정면에 멈춰 서서 말했다.
“뭔가... 잊히질 않아서요. 내가 낯선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끌리는 스타일은 아닌데.”
그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적어도 유리는 그렇게 해석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진심이 아니면 더 쉽게 속인다.“차 한 잔, 이번엔 받아줄래요?”
유리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다음 수를 위해서.
“한 번 정도는.”
그의 눈이 반짝였다. 유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유혹이 아니라 조종이야. 착각하게 만들어.
아니 믿게 만들어. 그다음엔 잔혹하게 무너뜨려 주겠어.
카페 유리문에 붙은 ‘심리상담 예약 가능’ 안내문이 오늘따라 자꾸 눈에 밟혔다.예약은 한 건도 없었고, 전화도 울리지 않았다.센터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고, 그 침묵은 유리의 생각을 더 소란스럽게 만들었다.책상 위 종이컵은 비어 있었고, 그 옆에는 시훈이 두고 간 명함이 아직 그대로였다.하얀 바탕에 정갈한 활자. 윤시훈.그 이름만으로 이 며칠 사이, 유리는 너무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유리 씨, 오늘도 센터에 혼자 계세요?”이우의 음성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응. 아직 사람도 없고… 그냥 혼자 정리 중이에요.”“혼자 있기엔, 지금 상황이 조금…”“괜찮아요. 나, 혼자 있는 데 익숙하잖아요.”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유리에게는 그 말, 너 자신도 믿지 않잖아라는 속삭임처럼 들렸다.잠시 후, 이우는 예고 없이 센터 문을 열고 들어왔다.유리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또 왔네요.”“오늘은 이유가 있어요.”이우는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윤시훈. 그 사람이 최근에 접근한 기관들 리스트예요.”유리는 봉투를 받아들고, 천천히 서류를 넘겼다.그리고 어느 순간 손이 멈췄다.‘한국심리복지재단. 2023년 하반기 인턴 심사 조작 건.’“…이거 진짜예요?”“공식으론 무혐의 처리됐지만, 내부적으로 여러 증거들이 있었어요.”유리는 말없이 서류를 내려다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왜 나한테 이런 짓을… 왜 굳이 나를…”이우는 조용히 말했다.“유리씨가 그 사람의 목표라는 증거는 없어요.하지만, 그 사람은 예전부터 유리씨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이우 씨.”그가 고개를 들었다.“사람이 무너지는 건 바깥에서 누가 밀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누가 흔들기 시작할 때예요.”“…그래서요?”“그래서 무서워요. 나, 지금 흔들리고 있다는 걸 너무 잘 아니까.”이우는 그녀의 말에 한 걸음 다가섰다.“흔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게 당신 잘못은 아니고.”그 말에 유리는 눈을
센터 입구 유리문에 익숙한 로고 스티커가 어긋나 있었다.그 사소한 틈이 유리는 이상하리만큼 신경 쓰였다.문을 열자, 실장 은서가 조심스레 다가왔다.“상담 예약 3건, 오늘 다 취소됐어요.”“이유는?”“하나는 아이가 갑자기 아프다고…두 개는 그냥 사정 변경이라며…”유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묘하게 굳어 있었다.“혹시 다 같은 날, 예약된 사람들?”“…네. 일주일 전에 동시에 들어왔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유리의 뒷목이 싸늘해졌다.그날 저녁, 이우가 센터를 찾았다.그는 말없이 앉아있었고, 유리는 조용히 차를 건넸다.“이우 씨.”“응.”“혹시 우리 센터 운영…누군가 방해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이우는 곧바로 되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말했다.“생각하고 있었어요. 처음 예약이 들어왔을 때부터.”“…왜 말 안 했어요?”“당신이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유리는 잠시 침묵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였다.“이미 흔들렸어요.”그녀는 이우 옆에 조용히 앉았다.“당신이 옆에 있으면 내가 강해질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왜요.”“당신이 옆에 있으면 약해져요. 기대고 싶어져요. 참고 싶지 않아져요.”이우는 눈을 감았다.그 말은 그의 모든 인내를 조용히 긁어내는 문장이었다.유리는 이우의 어깨에 조심스레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이런 날은요… 당신이 입술 한 번만 기울이면 나는 무너질 것 같아요.”이우는 숨을 참았다. 그 말이 너무 가까웠다.감정의 문턱을 너무 무방비하게 열었다.“그래도, 무너지지 마요.”“…왜요.”“지금 당신이 무너지면, 나도 같이 무너져요.나는 당신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하지 않아요.”그날 밤, 시훈은 자신의 사무실 안에서익명의 계정으로 센터 홈페이지를 열었다.예약 취소 버튼이 붉게 깜빡였다.“처음은 항상 사소해야 해요. 무너짐은 작은 실금에서 시작하니까.”그는 단추를 꺼내, 작은 금속 상자에 올려놓았다.그 단추 위에 유리의 이름을 적은 메모지
새벽 세 시, 유리는 커튼을 열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거실엔 조명이 없었고, 손에 들린 머그잔엔 식은 커피가 그대로였다.핸드폰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녀는 천천히 사진첩을 열었다.이우와 함께 찍은 사진은 단 한 장. 그것도 어느 날 우연히 거울에 비친 뒷모습이었다.그는 유리의 뒤에 있었고, 유리는 웃고 있었다.하지만 그 웃음은 지금의 그녀가 낼 수 없는 표정이었다.“당신은 왜 그렇게 멀어요.”소리 내어 말했지만, 들리는 사람은 없었다.다음 날 오후, 이우는 센터를 찾았다.도움이 필요하다는 말도, 급한 일이라는 연락도 없었지만 그는 어김없이 찾아왔다.그냥 오는 사람이었다.“또 혼자 있었어요?”그가 묻자, 유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혼자 있어도 괜찮은 날이었어요. 근데, 혼자 있지 않게 됐네요.”그 말에 이우는 말없이 유리의 손에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다.그 손이 잠시 닿았다. 유리는 그 짧은 온기에 숨을 삼켰다.“이우 씨.”그가 고개를 들었다.“왜 나한테 말 안 해요?”“…무슨 말요.”“나, 많이 흔들리죠. 어떤 날은 당신한테 기대고 싶고,어떤 날은 기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나 자신이 밉기도 하고…”이우는 가만히 앉아 있었고, 유리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근데 당신은, 늘 똑같이 앉아 있잖아요. 움직이지도 않고, 밀지도 않고.”“…그게 나예요.”유리는 속삭였다.“그럼 내가 움직일게요.”그녀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오늘은, 이 정도까지 할게요. 내가 이 이상 가면… 당신이 또 나를 밀까 봐 무서우니까.”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손등이 천천히 유리의 손등에 닿았다.잠시. 그러다 아주 천천히, 떼어냈다.그리고 그날 밤.시훈은 조용히 컴퓨터 앞에서 한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조유진의 부검 당시 누락된 단추 사진. 그는 그 단추를 손에 들고 눈을 감았다.“조유리. 너를 여기까지 오게 하려고, 내가 없앤 건 단추 하나가 아니었어.”
이우는 조용히 실내로 들어왔다.서로 마주 앉기까지 몇 초간의 침묵. 그 몇 초가 유리에게는 숨이 턱 막히는 시간이기도 했다.“그 남자 윤시훈, 그 사람 뭔가 이상해요.”이우는 눈썹을 찌푸렸다.“뭐가 이상했어요?”“너무… 정리돼 있어요. 말하는 속도, 눈빛, 단어 선택까지.누굴 설득하는 게 아니라, 누굴 유인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이우는 묵묵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유리는 그 반응만으로도 안도했다.자신의 감정이 과하지 않았다는 증거 같았다.“그래서, 그 사람이 말하는 프로젝트 같은 거… 안 하기로 했어요.”“잘했어요.”이우는 그렇게 말했다. 짧고 단정한 문장이었지만, 그 속엔 유리를 믿는 감정이 들어 있었다.유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을 덧붙였다.“근데…그 사람, 또 올 것 같아요.”“와도 돼요. 그 대신, 그 앞에 나부터 서 있을 거예요.”말을 마친 이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잠깐… 이우 씨.”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흔들리고 있었다.그가 돌아서자, 유리는 망설이다가 말했다.“…혹시 내가 그 사람한테 위험해지면 어떡해요?”“그런 일 없게 할 거예요.”“그래도…혹시 그런 날이 온다면…”이우는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그런 날엔 제가 유리씨 옆에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문을 나서는 이우를 향해 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다가섰다.“이우 씨”그는 돌아섰고, 그 순간 유리는 그의 셔츠 소매를 잡았다.눈동자가 흔들렸고, 숨결이 가까워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도 마찬가지였다.오직 조용한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은 그날만큼은 아무것도 더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 시훈은 서류철을 정리하며 웃고 있었다.“그래, 그렇게 천천히 무너지면 돼요.신뢰 같은 거… 깨지는 데 오래 걸릴수록, 더 예쁘게 부서지거든요.”그의 손끝에서 유리의 인터뷰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그리고 화면에 떠 있는 자막 위로 시훈은 손가락을 얹었다.‘조유리. 정의를 묻던 자에서, 사람을 안아주는 사람으로
재판이 끝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유리는 처음으로 알람 없이 눈을 떴다.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은 낯설 만큼 따뜻했고,창 밖의 소음은 더 이상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았다.오랜만에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시작되는 듯했지만,그 고요함이 그녀에겐 불편한 정적처럼 느껴졌다.‘끝났다는 게… 이토록 텅 비어 있을 줄은 몰랐어.’오전엔 강남구청 민원실을 찾았다.상담센터 개소 관련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유리는 낡은 검정 서류가방을 들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사복을 입고 앉아 있는 지금,더는 검사의 얼굴이 아닌 ‘상담사 유리’로 서 있는 자리였다.그러나 몸 어딘가에 아직 그때의 서늘한 공기가 남아 있었다.그때, 낯선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조유리 검사님… 아, 아니. 상담사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고개를 들자 단정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눈매는 날카롭지 않았지만 깊었고,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무언가를 미리 계산한 듯했다.“윤시훈입니다. 법무법인 신율 소속 변호사이고요. 조유진 씨 재판 관련 언론 보도에서 이름을 여러 번 뵈었습니다.”유리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거죠?”“센터 개소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재단이 심리상담 프로젝트를 준비 중인데, 조유리 님이 함께해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아서요.”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그의 말을 조용히 흘려들었다.재단의 이름도, 그가 소속된 법무법인도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이렇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일정까지 파악한 상대는 처음이었다.“죄송하지만, 저를 찾으신 이유가 단순한 협업 때문은 아니겠죠?”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시훈은 억지 미소 없이, 담백한 표정으로 말했다.“맞습니다. 이건 단순한 제안이 아닙니다.검사직을 내려놓고 지금처럼 상담사로 방향을 트신 이유 그게 궁금했습니다.”유리는 말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법 안에 있었을 땐, 진실보다 증거가 먼저였어요.사람이 아니라, 수치로 판단됐죠
그날, 유리는 법정에서 울지 않았다.목소리가 떨리지도 않았고,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은 알았다.그녀가 무너졌다는 걸. 다만, 무너진 상태로도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이우는 방청석 가장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하지만 시선은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흐르지 않았다.그가 유리를 바라보는 건 동정도, 사랑도 아닌 존재에 대한 경의에 가까웠다.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대신해 자기 목소리를 써서 세상에 말을 거는 순간.그건 가장 인간적인 방식의 복수이자 가장 아름다운 방식의 사죄였다.그날 유리는 법정을 나서며 자신이 무언가를 끝냈다는 확신을 하지 않았다.그런 건 없었다. 그저 지나온 시간을 더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묘한 평온함만이 남아 있었다.그리고 그게, 지금의 그녀에겐 전부였다.법정을 나왔을 때, 바람이 불고 있었다.이상하리만큼 따뜻한 바람이었다.사람들이 말하는 ‘후련함’은 없었다.눈에 보이는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없었다.그런데도유리는 그 바람을 맞으며, 처음으로 숨을 들이쉴 수 있었다.그전까지는 모든 호흡이 언니를 향한 죄책감, 말하지 못한 진실, 감당하지 못한 분노로 뒤엉켜 있었으니까.이제야 가슴 한 켠이 텅 비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텅 빈 자리가 비로소 '살아남은 자리'라는 것도.“끝났네요.”목소리는 이우였다.그는 그녀를 따라 법정을 나서면서 단 한 발자국도 옆으로 다가서지 않았다.그는 언제나 그랬다.유리를 지켜보되, 닿지는 않았다.“아니요,”유리는 조용히 대답했다.“끝난 게 아니라…그냥, 놓은 거예요.”둘은 근처 조용한 카페에 들어갔다.창가 쪽 자리에 마주 앉았지만 시선은 맞닿지 않았다.테이블 위엔 따뜻한 물만 놓여 있었다.커피도, 차도 아니었다. 그 날의 감정은 향기조차 낼 수 없는 투명한 무언가였다.“왜 안 물어봤어요?”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입술이 약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