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차 한잔 하자는 말이, 그렇게 고민할 일이야?”
이현은 언제나 상대의 흐름을 엉망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눈웃음을 머금은 말투, 농담과 진심 사이를 기어 다니는 얄미운 어조.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시선을 그녀의 눈에서 입술로 내렸다가, 한 박자 멈추고 다시 천천히 눈으로 되돌렸다.
그 눈길은 살피는 것 같기도, 떠보는 것 같기도 했다.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고르는 게 아니라, 고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침묵에 이현이 낮게 웃었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팔을 테이블 끝에 걸쳤고, 거리는 순식간에 그녀에게서 풍기는 옅은 향기가 맡아질 만큼 좁혀졌다.
“뭐, 그 정도 관심도 못 끄는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좀 과신했나.”
유리는 그를 바라봤다.
얼굴은 매끈했고, 눈매는 유려했지만, 그 속엔 그 어떤 온기도 없었다. 그녀는 턱을 살짝 들고 숨을 느리게 쉬었다. 옷깃 아래로 가슴의 오르내림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의 태도는 방탕했고, 그의 말은 가볍고, 그의 눈빛은 그녀의 목선을 타고 아래로, 옅게 드리운 쇄골의 그림자 위를 훑고 나서야 무심하게 돌아왔다.
“그럼 됐고. 언젠가 마시고 싶을 때 연락이나 하시든가. 이름은 모르겠지만, 얼굴은 기억하니까.”
이현은 말끝을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웃는 얼굴이 익숙하다는 듯, 아니 그보다, 자기 표정을 잘 아는 사람처럼 능숙했다.
유리는 입꼬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가볍게 흔드는 사람은 가볍게 무너진다.
그녀는 이미 그를 무너뜨릴 설계를 거의 완성한 상태였다.
“내 이름, 알고 싶어요?”
그 순간 이현의 움직임이 멈췄다.
돌아선 고개가 천천히 그녀를 향했다.
유리는 똑바로 그를 바라봤다. 미소도, 호의도 없었다.
“와, 목소리는 매력 있네. 그거 하나는 인정.”
칭찬 같지 않은 말을 대놓고 하는 태도.
유리는 애초에 그에게 기대한 게 없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잘 작동되는 장난감처럼, 그의 반응은 예측 가능한 수준이었다.
“궁금하면, 스스로 알아내요.”
그녀는 단호한 말투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떴다.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머리카락 끝이 그의 팔을 스쳤다.
이현은 무심하게 뒷모습을 훑더니, 입가에 조용히 혼잣말을 남겼다.
“성격도 독특하네. 근데 좀 끌리긴 한다.”
그날 저녁, 유리는 호텔 방에서 이현의 SNS를 다시 열었다.
불필요하게 많이 찍힌 셀카, 파티, 클럽, 외제차, 와인, 무의미한 인맥과 무의미한 웃음.
그는 가식 없는 허세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꾸미지 않았고, 그래서 더 위험했다.
무너뜨릴 틈이 많은 사람은, 더 쉽게 믿는다.
그는 이미 유리에게 미묘하게 시선을 내주었고,
그것이 반복된다면 감정으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의 웃음은 가볍고, 선택은 본능적이며, 책임감은 없다.
사랑이 생겨도 감정보다 소유가 앞설 것이고,
그는 자신이 무너지는지도 모른 채 무너질 것이다.
유리는 화면을 끄고 침대에 등을 기댔다.
천장을 보며 숨을 고르며 속삭였다.
“……계획은 잘 흘러가고 있어.”
그녀는 그가 다음에 어디에 나타날지 알고 있었다.
SNS에 올라온 사진들, 태그된 장소들, 그리고 그가 자주 간다는 라운지. 그녀는 이미 그 동선을 손금처럼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곳에 갔다.
호텔 로비, 그가 저녁 약속을 마치고 나오는 시간. 유리는 로비 한쪽에 서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사람처럼.
이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와 로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녀를 발견했다.
그의 발걸음이 반 박자 느려졌다. 그는 그녀를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하이힐에서 시작해 종아리, 무릎 안쪽, 치맛단 아래로 이어지다, 마침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진짜 우연이네? 이정도면 그쪽이 날 따라다니는 것 같은데...”
유리는 짧게 웃었다. 이번엔 미소를 살짝, 의도적으로 흘렸다. 그녀가 살짝 몸을 틀자, 치맛자락이 허리선에 붙으며 곡선을 드러냈다.
“그런 말, 자주 하시나 봐요.”
“나 같은 사람은 핑계가 필요하거든요. 이렇게 말이라도 해야 다가가니까.”
“굳이 다가가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이현은 그녀의 정면에 멈춰 섰다. 눈썹 아래 짙은 그림자가 보일 만큼 가까이,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가슴께의 작은 오르내림이 전부 그의 눈에 들어올 만큼 가까이.
그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뭔가... 잊히질 않아서요. 내가 낯선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끌리는 스타일은 아닌데.”
그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적어도 유리는 그렇게 해석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진심이 아니면 더 쉽게 속인다.
“차 한 잔, 이번엔 받아줄래요?”
유리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다음 수를 위해서.
“한 번 정도는.”
그의 눈이 반짝였다. 유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유혹이 아니라 조종이야. 착각하게 만들어.
아니 믿게 만들어. 그다음엔 잔혹하게 무너뜨려 주겠어.
창밖으로 느리게 아침이 흘러왔다.그리 밝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도시는 조용히 일상을 준비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아침은 유리에게 어떤 평범함으로도 다가오지 않았다.긴 계절을 견뎌온 마음처럼, 그녀의 가슴속엔 여전히 한 사람이조용히 살고 있었고, 그 이름은 결코 잊히지 않는 방식으로, 그녀의 심장을 천천히 눌러오고 있었다.유진. 그 이름은 언제부터였을까,하루를 여는 입술보다 먼저 떠오르는 문장이 되었고,눈을 감는 밤마다 바닥에 스며든 물처럼 유리의 꿈을 적시곤 했다.이우는 유리의 옆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내렸다.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오늘은, 말이 필요 없는 날이라는 것을.말보다 먼저
아침이라고 부르기엔 빛이 너무 흐렸고, 밤이라고 말하기엔 공기 속에 묘한 기척이 스며 있었다.창밖에서는 희뿌연 운무가 도시의 윤곽을 덮고 있었고, 그 위로는 말갛게 식은 하늘이 부서지듯 펼쳐져 있었다.그 시간, 유리는 아무 말 없이 영상 속 그 장면을 반복해서 되감고 있었다.프레임이 전환될 때마다 유진의 뒷모습이 다시 태어났고,그 안에서 유리는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숨을 멈추곤 했다.그녀는 더 이상 영상 속 언니를 따라가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녀는 이제, 유진의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려 하고 있었다.그날의 공기, 그날의 마음, 그리고 그날의 고요한 침묵.그녀는 알 수 있었다. 유진이 결심했던 마지막 말들.끝내 남기지 못한 문장들.그 말들 안에 담긴 두려움과 애착과 절망.
짙은 어둠의 끝에서 새벽이 고개를 들 무렵,방 안의 공기는 유리하게 식어 있었다. 창밖으로는 아직 해가 뜨지 않았고,도시는 잠시, 무엇도 움직이지 않는 정적 속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그 조용한 새벽의 맥박을 따라, 유리는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책상 위 조명을 낮게 틀어놓은 채,그녀는 이우가 건넨 복구된 파일을 응시하고 있었다.파일 이름은 숫자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1127_final’.유진이 사라지기 하루 전날.그 마지막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지 모를,결정적인 진실의 조각이었다.손끝이 마우스를 눌렀다. 영상이 재생되었다.흑백의 흐릿한 영상. 심리상담소의 내부.
조용한 저녁이었다.하늘은 흐렸고,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공기에는 축축한 기운이 감돌았다.햇살이 지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기 전의 그 어정쩡한 회색빛.세상의 색채들이 점점 흐릿해지고, 경계가 무너지는 시간.그 사이에 유리는 앉아 있었다.고요한 방 안, 창문은 닫혀 있었고 커튼은 젖혀져 있었다.그녀의 눈은 오래된 녹음 파일의 자막을 따라가고 있었지만,마음은 이미 그날, 그 순간의 숨결 속으로 깊이 잠겨 있었다.“조유진 씨, 그만두세요. 이 이상은”그 목소리는 분명 도훈이었다.하지만 말의 끝은 흐려졌고, 마치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급하게 숨을 눌러 삼킨 것처럼 어딘가 매듭이 지어지지 않은 문장이었다.유리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늦겨울의 아침은 여느 계절보다 조용하고,그 고요함은 무언가를 숨기기엔 오히려 더 적막했다.해는 아직 창문을 넘지 않았고,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세상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유리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밤새 덮어두었던 사건 파일을 다시 펼쳐놓고, 한 장 한 장 종이 위를 천천히 훑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눈동자는 어딘가 멀리 닿아 있었다.그 눈빛은 잊힌 이름들을, 버려진 시간들을 다시 불러내고 있었다.유진의 마지막 통화 기록. 그 페이지를 다시 들여다보며,유리는 숫자 하나, 초 하나까지 마치 생명의 리듬처럼 새겨 넣듯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무심히 넘겼던 다음 장. 한쪽 귀퉁이에 작게 메모된 통화 연결 지연 시간.
새벽이었다. 밤과 아침의 경계에서 잠시 머무는 그 짧은 틈.세상은 여전히 조용했고, 창문 너머의 어둠은 채 가시지 않은 채 조용히 유리의 방 안을 감싸고 있었다.불은 켜지지 않았다. 유리는 침대 머리맡에 앉은 채,두 무릎 위에 손을 모은 채로 긴 시간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어젯밤의 메일. 그리고 ‘강도훈’이라는 이름.그 이름 하나가 유리의 가슴 안에 다시 오래전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마지막 전화.”그 단어가 입안에서 맴돌았다.조유진이 사라지기 직전,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하지만, 그 통화를 ‘강도훈’이 끝냈다는 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