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이현은 느긋한 걸음을 자주 걸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리듬을 그 혼자만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늘 여유롭고 방심한 표정으로 거리를 걷는 사람. 하지만 그날, 그는 멈췄다.
빨간 코트, 검은 하이힐. 그리고 정면에서 다가온 여자.
그는 그녀를 모른다고 확신하면서도, 쉽게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요?”
여자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상대를 흔들기보다, 묘하게 안착하는 음색이었다.
이현은 미소를 지었다. 무의식적으로. 어쩌면 방어적으로.
“왠지…그대가 기억나진 않지만, 낯설진 않아서요.”
그 말이 끝나고도 몇 초간, 두 사람은 마주 선 채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일부러 웃지 않았다. 친근함이나 호의가 아닌, 묘한 거리감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계산된 눈빛으로 이현을 바라보았고, 그 안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기가 흘렀다.
"미친놈..."
유리는 그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음성으로 속사였고,
먼저 시선을 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스스로를 들켜버릴 것 같아서. 이현은 그대로 서 있었다.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게 간질거렸다.
이름도, 나이도, 아무 정보도 없는 여자. 그런데 왜. 왜 그 눈빛이 낯익다고 느껴졌을까.
며칠 후, 또 우연히 마주쳤다. 이번엔 호텔 로비였다.
이현이 친구들과 저녁 약속을 마치고 나오는 길, 그녀는 혼자 서 있었다.
핸드백을 여는 동작도 느리고, 시선을 내리는 각도조차 절도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연이 반복되면, 인연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이현이 말을 걸었다.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미소는 여전히 없었다.
“그런 말, 자주 쓰세요?”
“가끔요. 하지만 지금은... 써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유리는 그 말만 남기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이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여자에게 두 번 연속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를 따라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유리는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몸을 꽉 쥐고 있었고, 이제야 풀린 듯 어깨가 무너졌다.
침대 위에 던져진 핸드폰 화면엔 이현의 검색 결과들이 켜져 있었다.
그녀는 서이현이라는 남자의 정보, 움직임, 주변 인맥까지 샅샅이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앞에서 웃지 않는 건, 미소가 새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감정이 아니라, 목표만 남겨야 했다.
그의 눈빛은 선했지만, 유리는 그 선함조차 의심했다.
그의 말투는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은 허점을 만들기 위한 가면일지도 몰랐다.이현이 어떤 사람인지,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유리에게 중요한 건 언니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였다.그 사람의 짓이야.
유리는 확신했다. 감정은 배제하고, 이 싸움에 필요한 건 냉정함이었다..
그의 말투는 다정했지만, 허용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남자보다 훨씬 ‘사람’ 같았고,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
그가 정말 언니를 죽였을까? 아직은 아니다.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언니가 남긴 이름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유리는 자신에게 되물었다. 망설이면 안 돼. 이건 감정이 아니라 복수야.
며칠 후, 세 번째 마주침은 이현의 쪽에서 먼저 찾아왔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유리는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차 한잔 하시겠어요?”
그녀는 끝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눈빛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맑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현이 절대 모를 심연이 숨어 있었다.
그가 다가올수록, 난 더 멀어져야 했다.
그녀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감정은 철저히 봉인되어야 했다.이 계획은 유혹이 아닌 통제였고, 연애가 아닌 복수였다.그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하는 건 그녀다.
하지만 그 감정을 품어선 안 되는 것도, 그녀 자신이다..사랑이 생기면, 복수가 흔들리니까.하지만 이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선,
그를 사랑하게 만든 다음 무너뜨려야 했다.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햇살이 지면 너머에서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하늘은 흐릿했고, 구름의 무게가 낮게 깔린 오후의 공기는숨을 깊게 들이마실수록 가슴 안쪽까지 눅눅하게 젖어들었다.별장을 둘러싼 산자락에는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조차가늠할 수 없는 고요가 깃들어 있었고,그 고요는 마치 오래전 잊힌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는 말을 삼키고 있었다.이우는 발끝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무너진 담벼락과 나무 덤불 사이,유리가 발견한 손수건 근처를 중심으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유리는 손수건을 곁에 두고, 손끝으로 가만히 흙을 헤집었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은 채,마치 무언가가 손끝에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매우 천천히, 고요히 움직이고 있었다.그녀의 손끝에 딱딱한 감촉이
유리는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그 손길은 어쩌면, 세상에서 유일하게 따뜻하고 믿을 수 있는 연결이었다.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이젠… 절대 혼자가 아니니까요.”그날 밤, 유리는 잠들지 않았다.책상 위에 펼쳐진 유진의 사진, 노트에 적힌 단서들,그리고 박소정이 남긴 증언을 정리하며 하나씩 조각을 맞춰나갔다.이우는 그녀 곁을 지켰다. 말없이, 끝까지.바깥은 조용했다. 그러나 유리는 알았다.이 고요함은 폭풍 전의 정적이라는 것을.그날, 언니가 흘렸던 눈물처럼 자신도 점점 더 감정의 벼랑 끝에 서고 있다는 걸.그러나 이번엔 그 끝에서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이 있었다.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켜야 할 진실이라는 이름으로.바람이 먼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오던 새벽,짙은 안개는 들판을 기어오르듯 스며들어 도시의 가장자리마저 무겁게 감쌌다.조유리와 서이우가 탄 차는 침묵 속에 목적지를 향해 느리게 나아가고 있었다.라디오도 꺼진 조용한 차 안, 창밖을 스치는 바람 소리만이 이따금씩 두 사람의 침묵을 대신해주었다.유리는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무릎 위에 놓인 노트북,그 안에는 유진의 마지막 이동 경로가 기록되어 있었다.박소정이 말했던 ‘그날 밤’의 좌표. 그리고 ‘사라졌다’는 말 대신‘지워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그 마지막 장소.“많이 흐려졌네요.”이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유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짙게 내려앉은 안개는 언뜻 보면 풍경을 덮는 베일처럼 보이기도 했지만,그 안엔 숨기려는 무엇이 분명히 있었다.“혹시…”그녀가 입을 뗐다.“그곳에… 정말 뭐가 남아 있을까요?”이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그의 손은 여전히 안정적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지만, 그 표정은 흔들리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남아 있어요.”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떤 흔적은 절대 사라지지 않거든요.”유리는 입술을 다물었다. 심장이 서서히 조여오는 느낌. 지금 이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과거의 가장 어두운
노트북을 내밀며 그녀가 음성 파일을 재생하자, 여성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귀를 기울였다.그리고 음성이 멈췄을 때,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이건… 박소정이에요.”“박소정…이요?”이우가 되물었다.“그 사람, 유진과 같이 일했죠. 언니처럼 따라다녔고… 늘 유진 곁에 있었어요.”“지금은… 어디에 있나요?”유리의 질문에 여성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사고가 있었어요. 유진이 사라지기 몇 주 전, 소정도 갑자기 그만뒀어요. 연락이 끊겼죠.”유리는 손끝을 움켜쥐었다.
낡은 책상, 오래된 커튼, 그리고 구석에 놓인 작은 녹음기 하나.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그러나 그 안에는 언젠가 있었던 무언가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남아 있었다.유리는 방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그리고 다시 음성 파일을 재생했다.“이건 내가 선택한 거야. 아무도 대신할 수 없어. 그러니까, 만약 내가 없어지게 된다면.”그 순간, 구석의 녹음기에서 전혀 다른 톤의 이어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넌 네 방식대로 살아.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남을게.”낯선 여성의 목소리.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익숙한 어투.유리는 숨을 삼켰다.“이 목소리….”이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누구죠?”“……몰라요. 하지만,”유리는 말을 멈췄다.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조용히, 그러나 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그 이름을 부를 수는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그 음성이 그녀의 과거 어디쯤에 언제나 있었던 사람의 것이란 걸.그날 밤, 두 사람은 숙소로 돌아와서도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불 꺼진 방 안. 창밖엔 달빛조차 흐리지 못할 정도로 짙은 구름이 드리워 있었다.“모든 퍼즐이… 한 조각씩 보이기 시작했어요.”유리가 말했다.“하지만 그 조각들이… 내가 알던 그림이 아니라면요?”그 말에, 이우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감쌌다.“진실은… 언제나 낯설죠.”“그래도… 알고 싶어요.”“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진실 위에 서게 될 거예요. 울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방 안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 너머로 두 사람의 감정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한때는 복수로 엮인 사이.하지만 지금은, 서로의 생의 가장 안쪽에서 숨을 나누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었다.고요한 새벽, 도시의 끝자락에 부드럽게 깔린 안개는마치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시간의 잔해처럼 창가를 스쳐 흘렀다.방 안은 불이 꺼져 있었고, 희미한 노트북 화면의 푸른빛이 조유리의 옆얼굴을 서늘하게 비추고 있었다.그녀는 다시,
그날 밤은 유난히 긴 그림자를 끌었다.도시의 불빛은 낮게 깔린 안개 사이에서 제 빛을 다하지 못했고,고요함은 오히려 누군가의 숨결처럼 무겁게 방 안을 감쌌다.조유리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노트북 화면은 오래도록 켜진 채 조용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고,그녀는 키보드 위에 손을 얹은 채,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마음은 이미 수없이 많은 문장을 그려냈다.하지만 그 모든 문장은 현실의 언어로 옮겨질 수 없을 만큼 무겁고 깊었다.USB에 담긴 새로운 자료들.그 안에는 유진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담긴 영상이 있었다.감시용 카메라가 포착한 흐릿한 장면.그녀가 혼잣말을 하듯 무언가를 중얼이며 서성이는 뒷모습.
해가 완전히 기운 이른 저녁,붉은 노을은 유리창 너머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고 도시는 점점 어둠 속으로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창밖의 불빛들은 저마다 다른 진실을 품은 듯 반짝였고,그 불빛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었다.지쳤거나, 포기했거나, 혹은 아직 기다리고 있는 눈빛.조유리는 조용히 커튼을 닫았다.사무실 안은 순식간에 외부와 단절된 조용한 밀실이 되었고,그 정적 속에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고르듯 앉았다.책상 위에는 며칠째 그녀가 들여다보는 보고서와 자료들이 조용히 겹겹이 쌓여 있었다.그 중 하나, 장상우가 넘긴 문건들 가운데 한 장의 문서가 유리의 시선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