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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천천히, 확실하게 무너뜨려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5 10:07:47

카페는 비어 있었다. 오후 네 시, 사람도 음악도 없고, 

창밖으론 겨울 햇살이 멍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유리는 창가 자리에 앉아 메뉴판도 보지 않은 채 손끝으로 테이블을 천천히 문질렀다. 

짧은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을 깨는 낯익은 목소리.

“여기 분위기, 우리 둘 말고는 죽었네.”

서이현.

느긋하게 웃으며 걸어온 그는 여전히 손 하나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자신감은 여유로 위장하고, 무례는 농담으로 바꾸는 사람이었다.

“근데, 그게 더 좋지 않아요?”

유리는 맞받아치지 않았다.

이현은 말하면서도 상대방이 무슨 감정으로 있는지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이었다.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말을 꺼내는 게 아니라, 

자기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말하는 남자.

“당신, 처음 봤을 땐 좀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눈빛이 좀 독해서.”

“그럼, 안 마주쳤으면 좋았겠네요.”

“근데 묘하게 좋더라고요. 그런 거.”

그는 무심한 척,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계속 말을 던졌다.

유리는 그의 언어가 무너지는 타이밍을 계산 중이었다.

단순히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유도하는 방식으로.

“이름은 아직 안 알려줄 거예요?”

“그쪽은요?”

“서이현.”

유리는 눈썹도 움직이지 않았다.

드디어. 드디어 그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전… 나중에요.”

“어려운 사람이네.”

그가 웃었다. 대책 없는 미소였다. 그리고 유리는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모른다.

아니, 흔들린다는 감정을 ‘흥미’라고 착각하는 중일 것이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현은 컵을 들며 말을 이었다.

“나는 원래 사람 얼굴 잘 기억 못 하거든요. 

근데, 당신 얼굴은 자꾸 떠올라요. 그게 좀 웃겨요.”

유리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웃긴가요?”

“아니, 신경 쓰여서 웃긴 거죠.”

그의 눈빛이 진지해지려는 찰나, 유리는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진지함을 허락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진심을 꺼내면 지게 될 남자였다.

“지금은 신경만 쓰세요.”

“그럼 나중엔?”

“그건 그쪽 하기 나름이죠.”

카페에서 나오는 길, 이현은 유리에게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걸을래요?”

“싫어요.”

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좋아요. 그럼, 혼자 걸을게요. 다음엔 좀 더 매력 있게 초대할게요.”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느렸다.

뒤돌아보지 않는 유리의 뒷모습을 향해 손가락을 튕기며 중얼거렸다.

“내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차갑고 까다로운.”

그의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유리는 정확히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음 장면의 예고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유리는 거울 앞에서 입꼬리를 당겨보았다.

억지 미소는 여전히 낯설었다.

그렇기에 치명적이었다.

“천천히, 확실하게.”

그녀는 중얼거렸다.

사랑은 유혹처럼 시작되지만, 복수는 침묵처럼 파고든다.

그는 아직 시작점에 있다.

그리고 유리는, 끝을 알고 있다.

그날 이후, 이현은 이상하게 예민해졌다.

메신저를 열어도 보낼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인스타 피드를 넘기다 

그녀가 있을 법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대체 왜 신경이 쓰일까. 자기 이름을 말하고도 그녀의 이름 하나 듣지 못했는데,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묘했다. 미지근하게 밀어내는 태도, 

모든 걸 계산한 듯한 표정, 그리고 한 치의 틈도 주지 않는 시선.

그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이현은 항상 누가 됐든, 처음 몇 마디면 흐름을 잡았고 몇 초면 관심의 무게를 뒤바꿨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다. 그날 그녀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지금은 신경만 쓰세요.”

‘지금’이라는 단어는 의외로 잔인했다. 가능성을 열어주는 동시에, 조건을 붙였다.

그는 지금, 그 조건 안에 묶인 채 움직이고 있었다.

며칠 후,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또 한 번 만들어졌다.

이현은 클럽 라운지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고, 

그녀는 그 건물 안의 레스토랑에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현이 먼저 그녀를 발견했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반사였다.

시선이 그녀에게 닿자,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야, 나 금방 다녀올게.”

친구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몸을 일으켜 그녀를 따라갔다.

“오늘은 도망 안 가시네요?”

그녀가 멈춰 섰다.

이현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서며 익숙한 말투로 이어갔다.

“솔직히 좀 궁금했거든요. 다음에도 볼 수 있을까, 그런 거.”

“그럼 오늘 본 걸로 만족하세요.”

“그럼 내일은요?”

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내일은, 당신이 노력한 만큼 보상이 있겠죠.”

“그럼 노력 좀 해볼까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유리는 웃지 않았다.

이현의 말은 가벼웠지만, 그 안엔 조금씩 집요함이 배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요함은 유리의 계획에 필요한 열쇠였다.

그날 밤, 이현은 처음으로 자신의 속도를 놓쳤다.

연락을 하지 않던 사람에게 자꾸 휴대폰을 들여다보게 되는 건, 그에게 낯선 습관이었다.

그는 ‘관심’이란 단어를 자주 말했지만, 실제로 마음이 움직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이유를 모른 채 끌리고, 이름도 모른 채 떠오르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 상대를 향해 더 주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가 느끼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닌 유도된 중독이라는 것을.

유리는 거울 앞에서 귀걸이를 고르고 있었다.

검은 정장 원피스, 낮게 묶은 머리, 목선에 떨어지는 실버 링.

오늘의 스타일은 차갑고 도도하게, 조금 더 세게 조여들 수 있는 방식으로.

그녀는 이현이 조여지는 걸 즐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복수는 감정으로 하지 않는다. 설계하고, 조율하고, 밀고 당긴다.

그의 눈동자에서 조금씩 애가 타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혼자 허우적대는 동안, 유리는 한 걸음 더 물러선다.

그를 사랑하게 만들 것. 그리고 사랑이 가장 깊을 때, 그를 찢어버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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