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자정이 지나도록, 이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핸드폰 화면은 1분 단위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액정은 그의 초조함을 여과 없이 비춰냈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났다.
원하면 얻을 수 있었고, 다가가면 반응이 있었던 세상 속에서,그녀는 유일하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여자였다.그러니까, 더 끌렸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여자.’
그 말은 마치 독처럼 이현의 머릿속을 반복해서 스며들었다.
그녀의 얼굴, 그녀의 말투, 그녀의 눈빛…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떠올랐다.그리고 그 불안한 끌림이 그에게 처음으로 어떤 감정을 깨우고 있었다.
한편 유리는 그 시간, 자정이 넘은 자택에서 조용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 속엔 로스쿨 수험자료가 펼쳐져 있었고,그 옆엔 검찰시험 예상 스케줄이 띄워져 있었다.
그녀의 복수는 단발적이어선 안 된다.
처벌은 반드시, 법의 이름으로. 이현에게 언니를 죽였다는 말을 듣는 순간,그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릴 증거로 만들어야 했다.그것이 그녀가 법을 선택한 이유였다.
검사가 되는 것, 그건 단순한 꿈이 아니라 목적이었다.
지금은 잠시 ‘그의 이상형’인 여자의 탈을 쓰고 있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엔 ‘조유리 검사’라는 이름으로 그를 마주설 것이다.복수는 반드시 정의로 위장되어야 한다.
그때야말로, 그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질 것이다.다음 날 오후, 이현은 유리를 보기 위해 일부러 자주 가는 라운지를 찾았다.
이번엔 어떤 구실도 붙이지 않았다. 그저 보고 싶었다. 그것뿐.“자주 오시네요.”
유리는 이미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목소리는 담담했고, 감정은 걸러져 있었다.“솔직히 말하면… 그냥 기다렸어요.”
이현은 가볍게 웃으며 고백했다.
유리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건 입술 끝만 올린 형식적인 웃음이었다.“기다리면 보상이 있을 거라 생각하셨어요?”
“당신은 그런 여자잖아요. 예측하기 어렵고, 무슨 룰이 있는 것 같고.”
“그럼 이제 어떤 룰인지 알겠어요?”
“알고 싶어서 계속 오게 되네요.”
유리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의 눈빛은 선명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는 그 열기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는, 그가 흔들리는 그 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사람은, 자기 욕망에 솔직해질수록 위험해져요.”
“그래서 당신은 이렇게 안전한 척하는 거예요?”
이현의 말에 유리는 처음으로 눈을 마주했다. 눈빛은 서늘했다.
“전, 위험한 사람이에요.”
“좋네요. 나도 위험한 여자한테 끌리는 스타일이거든.”
그의 말에 유리는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차가운 독이 섞인 웃음.“좋아요. 그럼, 더 끌려보세요.”
그날 밤, 이현은 유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고마웠어요. 당신 말대로, 점점 위험해지는 기분이에요. 근데 싫지 않네요.]
유리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텅 빈 메시지창을 지그시 바라보다 조용히 혼잣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그녀는 침대맡에 놓인 수험서를 다시 펼쳤다.
빛도, 감정도, 휴식도 없는 시간 속에서,
그녀는 복수와 검사의 길을 동시에 걸어가고 있었다.그리고 언젠가, 그의 입에서 ‘내가 죽였어’라는 말이 나올 날을 기다리며…
이현은 자신의 시간표가 뒤틀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약속 시간은 자꾸 늦춰졌고, 집중은 오래가지 않았다.사소한 문자 알림 하나에도 고개를 돌리고, SNS 스토리를 확인하는 습관이 붙었다.이유는 명확했다. 그녀. 이름도 모르는 여자.
아니, 알고 싶지만 끝내 알려주지 않는 여자.
그가 전화를 걸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때마다,
그녀는 정확하게 그 타이밍을 지나쳐 메시지를 보냈다.‘지금은 안 돼요.’
‘다음에 봐요.’한 마디였지만, 그 속에는 거부도, 수락도 없는 절묘한 거리감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거리를 좁히고 싶어졌다. 점점 더….
유리는 이현이 집착을 시작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메시지 횟수, 반응 속도, 시선의 무게.그 모든 것들이 예상보다 빠르게 깊어지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페이스를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간격을 벌렸다.
그가 스스로 애가 타도록. 검사 준비는 여전히 병행되고 있었다.
도서관, 독서실, 스터디.그녀의 하루는 완벽하게 분리된 두 개의 삶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낮에는 법전을 읽고, 밤에는 그를 흔들었다. 복수는 계획이고, 법은 수단이었다.
결국 그녀는, 법정에서 그를 무릎 꿇게 만들 것이다.“이번엔 내가 초대할게요.”
이현의 문자는 짧았고, 예의는 없었다.
하지만 유리는 그런 그를 일부러 무시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만의 무례함을 허용해주는 척했다.‘어디로요?’
답장은 그가 기대하지 못한 속도로 도착했다.
‘우리 집. 오늘은 조용히 이야기나 하죠.’
유리는 몇 초간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짧게 ‘좋아요’라고 보냈다.
유리는 웃었다.처음으로,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울음을 참지 않았다.그날 밤, 유리는 이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이게 꿈이라도 좋아요.”“꿈 아니에요.”이우는 그녀의 머리칼을 쓸며 말했다.“지금 여기, 우린 같이 있어요.”다음 날. 유리의 상담센터 앞,기자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SNS에는 여전히 그녀를 겨누는 글들이 흘러다녔다.그러나 이번엔, 센터 입구에 검은색 SUV가 멈췄다.차 문이 열리자 이우가 내렸다.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이우는 잠시 멈춰 서서 기자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저는 서이우입니다.”짧고 단단한 목소리.“그리고 앞으로 이곳에, 자주 올 겁니다.”그 말 한 마디로, 기자들의 셔터가 멎었다.그 안에서, 유리는 창가에 서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그녀는 웃었다. 지금만큼은, 세상의 모든 플래시보다 그의 그림자가 더 밝게 빛나 보였다.“서이우 이사님 개인 계좌 동결 결정 났습니다.”비서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충격은 컸다.이우는 창가에 서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가문이, 자신을 더 이상 안에서 안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변호인단 쪽엔 이미 회의 요청 넣어두세요.”“예, 이사님.”전화를 끊은 뒤, 그는 손목시계를 잠시 들여다보다무심히 풀어내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유리는 상담센터에서 하루 종일 언론의 시선에 시달리고 있었다.전화, 인터뷰 요청, 항의 메일.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한 건 그것들이 아니었다.“계좌가 막혔다고요?”저녁, 이우에게 들은 말. 그것이 유리의 심장을 강하게 흔들었다.“왜… 왜 당신은 이래야 하는데요.”유리는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내가 뭘 했다고, 당신까지 이래야 하냐고요.”이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처음으로 진심을 꺼냈다.“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정해져 있었어요.”유리는 그 자리에 멈췄다.그 말이, 모든 방어를 무너뜨렸다.늦
“센터 앞에 기자들이 모여 있습니다.”비서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유리는 창가에 서서, 창문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카메라 플래시. 붐 마이크.주황색, 파란색, 붉은색 마이크 캡이 거리에 모여 있었다.그곳에서 터져 나오는 질문은 거의 다 똑같았다.“조유진 씨 동생 맞습니까?”“서 회장 측과 어떤 관계입니까?”“복수를 위해 접근했다는 소문이 도는데”유리는 창을 닫았다.방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이우는 그의 사무실에서 전화기를 내려놓고 있었다.그의 눈앞에는 비서진들이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언론 대응팀은 회장님 쪽에서 장악했고, 이쪽 기사들은 지금 물살이 빨라지고 있습니다.”“좋습니다.”이우는 담담히 말했다.“내 이름으로 기자회견을 준비하세요.”비서진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이사님… 정말 직접”“예. 가문을 위해선 아니지만, 내 사람을 위해서니까.”그 말은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가족’ 대신 ‘사랑’을 말한 선언이었다.밤이 되었다.유리는 상담센터 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커튼은 치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창밖의 빛이 벽을 물들였다.이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말없이 다가와, 유리 맞은편에 앉았다.“오늘 기자회견 준비한다고 들었어요.”“예.”“그럼 이제 당신 이름도 언론에 오르겠네요.”유리는 부드럽게 웃었다.피곤했지만, 눈빛은 꺾이지 않았다.“나, 이제 숨어있지 않기로 했어요.”그 말에 이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숨는 대신, 앞으로 나서겠다고요.”유리는 손끝으로 소파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언니가 지켜주려던 사람으로만 남는 게 아니라, 언니 대신 지키는 사람으로 살아보려구요.”그 말은 조용했지만, 이우의 가슴을 천천히 쥐어짰다.“지금까지 난, 누군가의 그림자였던 것 같아요.”그녀는 숨을 고르고 이우를 바라봤다.“근데 당신 옆에 서면, 내 그림자가 처음으로 사람 모양 같아져요.”그 말에 이우는 미소 지었다.그의 손이 조용히 유리의 손등을 덮었다.“이제부터 같이 나섭시다.”그가
그 시각, 서인국의 사무실.“정민철을 보호하고 있다.”“서이우가 직접 진술을 검찰에 냈다.”이야기들은 빠르게 회장 귀에 들어왔다.“이우를 막아야 합니다.”“가문 전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그러나 서인국은 아무 말 없이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들춰보았다.그 안에는 '조유진 사망 당시 병원 진료 기록''조유리 상담센터 운영 정보'그리고 '서이우 사적 동선 분석 자료'가 함께 있었다.“제일 무서운 건…”그가 낮게 말했다.“사랑 같은 착각이다.”그는 조용히 펜을 내려놓았다.“서이우를 치는 게 빠를지도 모르지.”그날 밤, 이우는 유리의 방 창문 앞에 서 있었다.유리는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다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당신이 나를 지켜주는 게 무서울 때가 있어요.”“왜요.”“내가 그만큼의 사람이 아닐까봐.”이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조용히 말했다.“난 당신이 누굴 지키고 있는지도 알아요.”“조유진. 그 이름 하나를 안고, 당신은 지금까지 견디고 있었죠.”“그래서…”“이젠 나도, 당신 이름 하나를 안고 살아보려고요.”유리는 눈을 감았다. 이번엔 눈물이 났다. 어떤 고백도 없이,그냥 그렇게 그녀의 이름이 누군가에게 닿고 있었다.이우에게 날아든 첫 번째 칼날은, 이사회 통보였다.이사직 박탈안. 비공식 의결, 비공식 회의.형식은 없지만 힘은 있는, 그 집안 특유의 방식이었다.이우는 이사실 앞에서 가만히 섰다.손에 쥔 것은 단 한 장의 문서.그 안에는 정민철의 진술 요약,그리고 서인국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이걸 들고 들어가면 가문은 그를 내칠 것이다.하지만,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해요.”유리는 창가에 서서 이우를 바라보며 말했다.“가문이 당신을 밀어내려고 한다는 거, 왜 나한테 숨겨요.”이우는 말없이 웃었다. 지쳐 있는 웃음이었지만, 어딘가 따뜻한 미소였다.“숨긴 게 아니에요. 그냥… 아직까지, 당신 걱정이 먼저였던 거죠.”유리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당신은 내 걱정을
문은 잠겨 있었지만, 그는 잠시 그 앞에서 머물렀다.문 너머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긴급하게 정리되는 회의 안건, 계열사 관련 언론 브리핑,어딘가에서 “회장님 성함이 언급됐습니다”라고 말하는 누구의 낮은 음성.그 한 마디에 이우는 문을 떠났다.“이름 하나로, 그 안이 술렁이고 있어요.”그는 유리에게 말했다.“우린 앞으로 이걸 더 정확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그게 회장의 방어를 무너뜨리는 유일한 방식이에요.”유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이었다.상담소는 조용했고, 어둠이 고요하게 깔려 있었다.“내 이름도 무너졌던 적 있어요.”유리가 말했다.“조유진의 동생. 쌍둥이. 피해자 가족. 그다음엔 가해자로 몰렸고…”이우는 말없이 그녀 옆에 앉았다.“그때 알았어요. 이름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하지만 이름을 말하는 사람이 바뀌면, 그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도요.”이우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밤의 공기보다, 그녀의 손이 더 차가웠다.“그럼 이젠, 당신 이름도 내가 지켜야 할 차례네요.”그 말에 유리는 눈을 감았다.눈꺼풀 밑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밀려왔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그 대신, 그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그것이면 충분했다. 지금은...그 시각, 인국의 회장실 안.태영의 이름이 빠진 통화기록이 정리되고 있었고,상우의 실종 사유는 ‘출장’으로 내부 회람이 돌았다.인국은 말이 없었다.다만, 손가락으로 책상 유리 위를 반복적으로 두드릴 뿐.‘유진’이라는 이름도,‘유리’라는 이름도,그는 그 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그 이름들이 자신의 이름을 향해 칼을 들기 시작한 것이다.“서이우.”그는 낮게 중얼거렸다.“그 자식이 움직였군.”밤. 유리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스탠드 불빛이 벽을 따라 번졌다.이우에게 도착한 메시지 하나.“혹시 오늘 밤, 그 자리에 있어 줄 수 있어요?”잠시 후 도착한 답장.“당신이 있다면, 난 언제든 거기 있어요.”
서울은 여전히 조용했다.비가 오고 나면 세상은 깨끗해지는 줄 알았지만,그날의 피 냄새는 아직 유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폐창고. 윤시훈. 그 남자의 숨결, 입김, 손끝.죽음보다 무서웠던 건,그가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감각이었다.하지만 이제 그는 없다.검거되었고, 구속되었고,그 이름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조일 수 없다.이제 남은 건 단 하나.그날 ‘죽어야 했던 언니’의 이름을 지운그 진짜 손을, 끌어내는 것."정민철은 여전히 말을 아낍니다."이우의 목소리는 낮았고 안정적이었다.유리는 맞은편에서 커피를 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지금은 침묵이 죄보다 덜 무서운 상태예요."“죄책감이 더 무거워지게 만들어야죠.”“말 안 하면 삼켜야 하니까요. 그게 무서워져야 입을 열죠.”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방식은요?”유리는 수첩을 꺼냈다.그 안에는 정민철이 직접 남긴 짧은 말들이 적혀 있었다.'나는 봤다.''그녀는 울고 있었다.''그날, 누군가는 분명히 회장실과 통화 중이었다.'“‘그날’이 언젠지를 명확하게 끄집어내야 해요. 회장이란 단어도, 이름 없이 반복되기만 했죠.”“이름이 필요하군요.”“네. 서인국이라는 이름을, 그의 입으로 말하게 해야 해요.”그날 오후, 유리는 정민철과 다시 마주 앉았다.이번엔 병원이 아닌, 상담센터였다.그는 마치 도망칠 수 없다는 듯 의자 끝에 앉아 있었다.“오늘은 어떤 기억을 떠올리셨나요.”유리는 조용히 물었다.“기억이라는 건 원래 물속에 가라앉아 있거든요. 언제 건져 올릴지는 본인 몫이에요.”민철은 손을 떨었다. 그 손이 닿은 종이컵이 살짝 흔들렸다.“그날…그녀가 죽은 병실 앞에서, 통화 중이던 사람이 분명 ‘서…’라는 이름을 말했습니다.”유리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민철은 눈을 감았다.“‘서 회장님이 직접 결정하셨다’고 누군가 그랬어요.누군가가 아니라, 김태영이었을 겁니다. 그땐 그냥…그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이름을 말해주실 수 있나요?”정적. 유리는
비가 오기 전의 공기였다. 습한 냄새가 코끝을 감싸고,늦은 오후의 도시 위로 낮은 구름이 깔려 있었다.이우는 차 안에서 한 장의 메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김태영이 남기고 간, 정민철이라는 이름. 병원장 비서였던 자.그날 폐쇄병동의 출입자 명단에 남아 있던,그러나 입을 다물었던 또 한 명의 증인.‘다음은 이 사람입니다.’유리의 말은 차갑지도, 강요적이지도 않았지만그 안엔 명확한 힘이 있었다.자기 손으로 언니의 복수를 쌓아올리겠다는 조용하지만 흔들림 없는 다짐.그 다짐을 듣는 그의 마음은 늘 복잡했다.“도착했어요.”유리가 조수석에서 말했다.오늘은 조금 화사한 셔츠,단정한 머리,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말투.이우는 대답 대신 시동을 껐다.“정민철은 여기 요양병원 행정실 쪽에 남아 있어요.”“접촉은 제가 먼저 할게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었다.비가 오기 직전, 바람이 유리의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그 순간 이우의 눈이 유리의 옆얼굴을 잠시, 깊이 응시했다.약 30분 후. 그녀는 돌아왔고, 손에는 짧은 대화와 짧은 메모가 담긴 수첩이 있었다.“입을 열 준비는 되어 있진 않아요.”“하지만... 언니가 죽던 날, 병실 안에서 무언가를 봤다고 했어요.”이우는 수첩을 받아들고 넘겼다.글씨는 흔들려 있었고, 말도 끊겨 있었다.‘그녀는 눈을 떴고, 울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죄는 침묵에서 시작된다.’그 글을 읽는 그의 손끝에 기묘한 미열이 올라왔다.‘죄는 침묵에서 시작된다.’그날 밤, 상담센터 옥상.비가 드디어 내리고 있었다.유리는 우산도 없이 서 있었고, 이우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다가갔다.“왜 여기 있어요.”“숨 좀 쉬고 싶어서요.”“비를 맞으면서 숨 쉬고 싶을 만큼, 오늘이 버거웠습니까?”“아니요.”그녀는 고개를 돌려 미소 지었다.“당신이 보고 싶어서요.”그 한 마디에, 이우는 말이 막혔다.유리는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예전처럼 서늘한 분석가의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