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아침이었다. 그러나 빛은 희미했다.잔뜩 흐린 하늘 아래, 유리는 천천히 커튼을 걷었다.창가에 선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커튼 틈 사이로 스며든 회색빛이 그녀의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인터뷰 요청서. 기자들의 명함. 받지 않은 전화들.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유리는 손끝으로 그것들을 천천히 쓰다듬었다.마치, 가벼운 먼지를 털어내듯. 그 시간, 이우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검은 셔츠, 단정한 넥타이.넥타이를 조여 매는 그의 손끝에는 희미한 떨림이 있었다.서인국, 그 이름이 오늘 그의 앞에 다시 놓인다.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그 얼굴을 떠올렸다.그러나 떠오른 것은 서인국의 얼굴이 아니라, 유리가 건넨 마지막 미소였다.늦은 오후, 유리는 인터뷰 장소로 향했다.차창 너머로 흐르는 거리는 어딘가 무겁고 어딘가 멍했다.유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끝내고 나면…”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그 물음은 마치 공기 중으로 녹아 사라졌다.저녁, 이우는 서인국의 집무실 앞에 섰다.문 앞에서, 그는 한 번 숨을 고르고 주먹을 살짝 쥐었다 폈다.문틈 너머로 낮은 대화 소리, 컵 놓는 소리,의자가 삐걱이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 나왔다.‘마지막이다.’그 말이 속에서 울렸다.그 시각, 유리는 카메라 앞에 앉아 있었다.마이크가 켜졌다. 기자가 낮게 물었다.“언니 이름을 왜 이제야 꺼내기로 결심하셨나요?”유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그 질문은 수백 번쯤 준비한 말이었지만, 막상 목 끝에서 걸렸다.그녀는 한 번 숨을 고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조유진.”단 두 음절. 그러나 그 이름은 방 안 공기를 갈라내며 조용히 내려앉았다.“그 이름은, 지워진 적이 없습니다.”밤. 서인국과 이우, 아버지와 아들, 지배자와 반역자.그들은 마침내 한 방 안에 마주 앉았다.“재밌게 크더니,”서인국이 낮게 웃었다.“결국 내 앞에서 칼을 드는구나.”이우는 웃지 않았다.그저, 이제 더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밤이었다. 하지만, 완전한 밤은 아니었다.서울 끝자락, 늦은 불빛이 창에 비치고,어딘가에서 피아노 연습 소리가 미약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유리는 그 소리를 따라가듯 창가에 등을 기댔다.법정에서 돌아온 지 세 시간이 지났지만, 마음속은 아직 정리에 다다르지 못했다.‘끝났다.’‘이제 끝이다.’몇 번이나 그 말을 되뇌었지만,끝이란 건 생각처럼 쉽게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커피잔 위로 증기의 띠가 천천히 피어올랐다.유리는 잔을 감싼 손가락에 조금씩 힘을 주었다.‘언니.’속으로 부른 그 이름은 어쩐지 오늘따라 이상하게 멀리 있는 것 같았다.문이 열렸다. 낮은 발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이우였다.그는 말없이 유리의 맞은편에 앉아 짧게 숨을 고르고 테이블 위 커피잔을 들었다.“괜찮아요?”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낮고, 그러나 조심스러움은 없었다.“괜찮아요.”이우는 짧게 대답했다.그 말은 ‘별일 없다’는 의미보다,‘지금은 괜찮다’는 의미에 가까웠다.“법정에서 언니 이름 말할 때… 이상했어요.”유리는 잔잔히 말했다.“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말하고 나니까 더 아프더라고요.”이우는 시선을 들어 유리를 바라봤다.그 눈동자 안에는 이해가 있었고, 질문은 없었다.“아마,”그가 낮게 말했다.“그건…그 이름이 여전히 살아있어서일 거예요.”방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창밖, 버스가 한 대 지나갔다.정류장에서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렸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유리는 고개를 들어 이우에게 물었다.“우리, 이제 어디로 가야 해요?”그 질문은 법정 싸움이나 재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이우는 천천히 잔을 내려놓고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었다.“난,”그가 말했다.“이제 어디든 괜찮아요. 당신이랑이면.”그 말은 부드럽게, 그러나 천천히 유리의 귓가로 스며들었다.유리는 작게 숨을 삼켰다.늦은 밤, 그들은 함께 거리로 나왔다.가로등 불빛 아래, 둘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걸어가는 동안, 유리는 몇
말없이 다가온 그가 유리의 이마에 이마를 맞댔다.처음이었다. 서로의 숨결이 닿은 밤.그날 밤, 모든 불안이 고요히 서로의 손등에 내려앉았다.동이 틀 듯 흐릿한 새벽, 서인국의 집무실 안.그는 신문을 내려놓았다.[조유리, 오늘 증언 출석]손끝이 유리잔을 두드렸다.“이우.”그는 낮게 중얼거렸다.“어디까지 갈 건지, 보여줘 봐라.”그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얼음장처럼 날카로웠다.아침이었다. 햇살은 맑았지만, 공기는 싸늘했다.유리는 거울 앞에 섰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거울 속 자신과 눈을 맞췄다.오늘, 언니의 이름을 말하는 날.손끝이 떨리지는 않았다.그 대신, 가슴 아래쪽에서 얇은 긴장감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법정 앞,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셔터 소리, 마이크 끝의 질문들.“조유리 씨, 증언 맞습니까?”“회장님과 어떤 관계입니까?”유리는 눈을 감았다 뜨며 한 걸음씩 걸었다.그 순간, 누군가의 그림자가 곁에 맞춰 걸었다.이우였다.그는 아무 말 없이 유리의 속도를 따라 걸었다.그림자가 나란히 늘어섰다.법정 안, 공기가 무거웠다.재판장이 들어오고, 증인 호출이 울렸다.“조유리 증인.”유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손끝이 서늘했고, 입안이 마르기 시작했다.걸어 들어가는 동안, 유리는 속으로 한 사람의 이름을 되뇌었다.언니, 조유진.증언대에 섰을 때, 유리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방청석에 이우가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것만으로, 호흡이 고르게 돌아왔다.“증언을 시작하세요.”유리는 입을 열었다.처음 몇 초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이내, 낮고 분명한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조유진. 제 언니의 이름입니다.”순간, 법정 안의 공기가 아주 짧게 떨렸다.“그날, 그 이름은 기록에서 지워졌습니다. 오늘 저는, 그 이름을 기록으로 돌려놓기 위해 왔습니다.”유리는 손끝을 가볍게 쥐었다.마지막 한 문장은, 조용히 삼켜지듯 흘러나왔다.“제 이름은, 조유리입니다.”법정
그 짧은 두 글자에, 유리는 처음으로 긴 복수의 길 위에서 스스로를 사람답게 느꼈다.다음 날. 이우는 검은 정장을 입고, 서인국의 집무실 문 앞에 섰다.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문을 두드릴 때 느껴지는 손끝의 떨림,그리고 문득 떠오른 유리의 미소.그는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이제 끝이다.’그 말은 누구보다 그 자신에게 하는 주문이었다.인국의 집무실은 언제나 정적이 깊었다.유리한테 들었던 말처럼, 그 방은 사람을 집어삼키는 공기 냄새로 가득했다.문이 열리자, 인국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왔냐.”짧은 인사. 그러나 그 안에 권력, 냉소, 피로, 경계, 모든 게 뒤섞여 있었다.이우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그리고 아주 천천히, 방 한가운데까지 걸어 들어갔다.“아버지.”그 말이 입에서 나오는데, 목 안이 살짝 말랐다.“이젠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저한테 다가오지 마세요.”인국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래, 이제 그런 말도 하게 됐구나.”이우는 미소를 보이지 않았다.“회장님. 이제 제가 가진 것 중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건 없습니다.”그 말에 서인국의 손끝이 멈췄다.“제가 원하는 건 하나예요.”“뭔데.”“더는 그 여자를 건드리지 마세요.”정적이 길었다.인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다. 대신 네가 내 사람이 아니란 건 오늘로 끝내자.”“네.”“가라.”그 한마디에 모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한편, 유리는 상담센터에서 책상 위 메모들을 정리하고 있었다.법정 증언 계획, 언론 대책, 그리고 센터 문을 지켜줄 경호 인력까지.언젠가 이 모든 게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손끝을 저리게 했다.하지만 그 감각 한가운데서 따뜻하게 스며든 건 하룻밤 전 이우가 했던 말이었다.‘끝나면, 같이 있어줘요.’유리는 웃었다.그 말은,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을 지탱해주는 가장 확실한 언약이었다.해질 무렵, 이우는 유리의 상담센터 옥상으로 걸어왔다.유리는 이미 거기 서 있었다.달빛 아래, 그녀의 머
유리는 웃었다.처음으로,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울음을 참지 않았다.그날 밤, 유리는 이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이게 꿈이라도 좋아요.”“꿈 아니에요.”이우는 그녀의 머리칼을 쓸며 말했다.“지금 여기, 우린 같이 있어요.”다음 날. 유리의 상담센터 앞,기자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SNS에는 여전히 그녀를 겨누는 글들이 흘러다녔다.그러나 이번엔, 센터 입구에 검은색 SUV가 멈췄다.차 문이 열리자 이우가 내렸다.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이우는 잠시 멈춰 서서 기자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저는 서이우입니다.”짧고 단단한 목소리.“그리고 앞으로 이곳에, 자주 올 겁니다.”그 말 한 마디로, 기자들의 셔터가 멎었다.그 안에서, 유리는 창가에 서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그녀는 웃었다. 지금만큼은, 세상의 모든 플래시보다 그의 그림자가 더 밝게 빛나 보였다.“서이우 이사님 개인 계좌 동결 결정 났습니다.”비서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충격은 컸다.이우는 창가에 서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가문이, 자신을 더 이상 안에서 안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변호인단 쪽엔 이미 회의 요청 넣어두세요.”“예, 이사님.”전화를 끊은 뒤, 그는 손목시계를 잠시 들여다보다무심히 풀어내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유리는 상담센터에서 하루 종일 언론의 시선에 시달리고 있었다.전화, 인터뷰 요청, 항의 메일.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한 건 그것들이 아니었다.“계좌가 막혔다고요?”저녁, 이우에게 들은 말. 그것이 유리의 심장을 강하게 흔들었다.“왜… 왜 당신은 이래야 하는데요.”유리는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내가 뭘 했다고, 당신까지 이래야 하냐고요.”이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처음으로 진심을 꺼냈다.“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정해져 있었어요.”유리는 그 자리에 멈췄다.그 말이, 모든 방어를 무너뜨렸다.늦
“센터 앞에 기자들이 모여 있습니다.”비서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유리는 창가에 서서, 창문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카메라 플래시. 붐 마이크.주황색, 파란색, 붉은색 마이크 캡이 거리에 모여 있었다.그곳에서 터져 나오는 질문은 거의 다 똑같았다.“조유진 씨 동생 맞습니까?”“서 회장 측과 어떤 관계입니까?”“복수를 위해 접근했다는 소문이 도는데”유리는 창을 닫았다.방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이우는 그의 사무실에서 전화기를 내려놓고 있었다.그의 눈앞에는 비서진들이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언론 대응팀은 회장님 쪽에서 장악했고, 이쪽 기사들은 지금 물살이 빨라지고 있습니다.”“좋습니다.”이우는 담담히 말했다.“내 이름으로 기자회견을 준비하세요.”비서진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이사님… 정말 직접”“예. 가문을 위해선 아니지만, 내 사람을 위해서니까.”그 말은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가족’ 대신 ‘사랑’을 말한 선언이었다.밤이 되었다.유리는 상담센터 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커튼은 치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창밖의 빛이 벽을 물들였다.이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말없이 다가와, 유리 맞은편에 앉았다.“오늘 기자회견 준비한다고 들었어요.”“예.”“그럼 이제 당신 이름도 언론에 오르겠네요.”유리는 부드럽게 웃었다.피곤했지만, 눈빛은 꺾이지 않았다.“나, 이제 숨어있지 않기로 했어요.”그 말에 이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숨는 대신, 앞으로 나서겠다고요.”유리는 손끝으로 소파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언니가 지켜주려던 사람으로만 남는 게 아니라, 언니 대신 지키는 사람으로 살아보려구요.”그 말은 조용했지만, 이우의 가슴을 천천히 쥐어짰다.“지금까지 난, 누군가의 그림자였던 것 같아요.”그녀는 숨을 고르고 이우를 바라봤다.“근데 당신 옆에 서면, 내 그림자가 처음으로 사람 모양 같아져요.”그 말에 이우는 미소 지었다.그의 손이 조용히 유리의 손등을 덮었다.“이제부터 같이 나섭시다.”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