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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독립할래.”
저녁 식탁 위로 이하랑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가족들의 젓가락이 동시에 멈췄다. 가장 먼저 고개를 든 사람은 아빠 이무혁이었다. “뭐?” “독립.” “무슨 독립?” “집에서 나가서 살 거야.” 무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집 있는데 왜 나가서 살아?”“나 스물네 살이야.” “알아.” “그러니까 독립할 나이잖아.” “스물네 살 되면 집이 없어져?” 하랑이 입술을 삐죽였다.“아빠는 꼭 말을 그렇게 해.” 상석의 백금희는 조용히 국을 떴고, 맞은편 큰아빠 이무진은 말없이 밥을 먹었다. 하랑이 슬쩍 무진을 바라봤다. “큰아빠.” “안 돼.”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독립 안 돼.” 역시나였다. 이번에는 사촌오빠들을 바라봤다. 강진도 단호했다. “나도 반대.”“오빠까지?” “혼자 살 이유가 없잖아.” 마지막 희망은 강욱이었다. “해보고 싶으면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아?” 하랑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그치?” 무혁이 강욱을 노려봤다.“너 누구 편이야?” “하랑이 편.” “나도 하랑이 편이야.” “근데 왜 하랑이 말을 안 들어.” 무혁이 잠시 말문이 막혔다. “……쟤가 수의사라 다행이지.” 강진이 고개를 들었다. “왜요?” “변호사가 둘이었으면 내가 이 집에서 못 살아.” 장진화가 우아하게 물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일단 하랑이 말부터 들어봐요. 갑자기 독립하고 싶은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역시 큰엄마밖에 없어.” 하랑이 반색하자 무혁이 서운한 얼굴로 딸을 봤다. “아빠는?” “아빠는 방금 반대했잖아.” “반대는 했어도 이유는 들을 수 있지.” “그럼 찬성할 거야?” “그건 듣고 생각하고.” “결국 반대한다는 거잖아.” “아직 모른다니까.” “아빠 표정에 쓰여 있어.” 무혁이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을 만졌다. 금희가 혀를 찼다.“둘 다 밥이나 먹어.” “네.” 아빠와 딸이 동시에 대답했다. 하랑은 밥을 한 숟갈 뜨는 척하다 내려놨다. 사실 오늘 할 말은 독립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 취직할 거야.” 이번에는 무혁의 젓가락만 멈췄다. “취직?” “응.” “어디?” “세화주얼리.” 무진이 처음으로 하랑을 똑바로 바라봤다. 무혁도 눈을 깜빡였다. “우리 회사?” “응.” “아빠한테 취직시켜 달라는 거야?” “아니. 내가 지원할 거야.” “어디를?” “디자인팀.” “경영 쪽 아니고?” “응. 나 세공과 나왔잖아.” 하랑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얼굴이었다. 무혁은 잠시 딸을 바라봤다. 하랑이 주얼리를 좋아하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릴 때부터 반짝이는 것만 보면 눈부터 빛났고, 대학도 자신의 뜻으로 세공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세화주얼리는 달랐다. 할아버지 이훈이 세웠고, 지금은 큰아빠가 회장이고 아빠가 상무로 있는 회사였다. “하랑아.” 무혁의 목소리가 조금 진지해졌다. “네가 들어가면 사람들이 누구 딸인지 몰라?” “알겠지.”“누구 조카인지도 알 거고.” “그것도 알겠지.” “그런데?” 하랑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그냥 들어가기 싫은 거야.” 웃음기 많던 얼굴이 드물게 진지해졌다. “아빠 딸이라서 자리 하나 받는 것도 싫고, 큰아빠 조카라서 잘한다는 소리 듣는 것도 싫어. 처음부터 배울 거야. 신입사원으로.” 무진의 시선이 조용히 하랑에게 머물렀다. “힘들어.” “알아.” 강진이 덧붙였다.“울 수도 있어.” “나 그렇게 맨날 울진 않아.” 식탁에 앉은 모두가 하랑을 바라봤다. “……왜 다 그렇게 봐?” 강욱은 웃음을 참으며 물을 마셨고, 진화도 입가를 가렸다. 무혁만 진지했다. “진짜 하고 싶어?” “응.” “왜?” 하랑은 잠시 생각하다 아빠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냥 이하랑으로 해보고 싶어.” 식탁이 조용해졌다. 회장 이무진의 조카도 아니고, 상무 이무혁의 딸도 아닌. 그냥 이하랑. 그때 금희가 국그릇을 내려놓았다. “시키자.” “어머니.” “애가 평생 우리 품에서만 살 것도 아니고.” “그래도 혼자 사는 건…….” “너도 나가 살았어.” “저는 남자였잖아요.” 금희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래서?” 무혁의 입이 닫혔다. 하랑이 몰래 웃었다. 이 집에서 이무혁 상무의 입을 한마디로 닫을 수 있는 사람은 백금희뿐이었다. “대신.” 금희가 하랑을 바라봤다. “하다가 힘들다고 집안 이름부터 찾으면 안 된다.” “응.” “회사에서도 똑같아.” “응.” “할 수 있겠어?”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할 수 있어.” 그날 밤, 하랑은 침대에 엎드려 오피스텔 매물을 들여다봤다. 독립. 취직. 처음으로 자기 힘으로 벌어 쓰는 월급.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시 후 휴대전화에 메일 알림 하나가 떴다. [세화주얼리㈜ 신입사원 채용] 하랑은 벌떡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지원서를 열고 이름을 입력했다. 이하랑. 세 글자를 한참 바라보다 입꼬리를 올렸다. 누구의 딸도 아니고, 누구의 조카도 아닌. 그냥 이하랑으로 시작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선택 끝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는, 아직 몰랐다.금요일 오후.공동 프로젝트 수정안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사무실 분위기도 한결 느슨해졌다.하랑은 샘플 사진과 도면을 번갈아 보며 마지막 수정사항을 확인하고 있었다.입술은 어김없이 앞으로 나와 있었다.기태가 지나가다 그 모습을 봤다.“이하랑 씨.”“네?”하랑이 바로 입술부터 집어넣었다.“저 또 입 나왔죠?”“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근데 왜 부르셨어요?”기태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이거 확인하세요.”“아.”하랑이 받아들더니 작게 중얼거렸다.“이제 팀장님이 부르면 입부터 넣게 되네.”“집중하면 나온다면서요.”“네.”“그럼 그냥 두세요.”하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안 이상해요?”“일하는 데 지장 없잖습니까.”“팀장님이 맨날 놀리셨잖아요.”“놀린 적 없습니다.”“‘입.’ 이것도 놀리는 거 아니에요?”“알려준 겁니다.”“그게 그건데.”“다릅니다.”“어떻게요?”기태가 잠시 하랑을 바라봤다.“일하세요.”“또 설명 안 해주시네.”“이하랑 씨.”“네. 일하겠습니다.”하랑이 웃으며 돌아갔다.기태는 고개를 한번 저었다.질문 하나에 대답하면 꼭 다음 질문이 붙었다.이제는 제법 익숙했다.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하랑은 평소보다 자주 휴대전화를 확인했다.메시지가
오전 열 시.기태가 수정 요청서를 하랑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하랑이 서류와 기태를 번갈아 봤다.“이거 제가 해요?”“네.”“혼자요?”“네.”“팀장님 안 도와주시고요?”“막히면 물어보세요.”하랑이 눈을 가늘게 떴다.“제가 질문 많은 거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세요?”“……그러네요.”“벌써 후회하세요?”“조금.”“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그러니까 시작하세요.”“네.”이번 공동 프로젝트에 들어갈 팔찌의 세부 수정안이었다.입사 후 처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랑에게 맡겨진 일이었다.하랑이 괜히 어깨를 한번 폈다.“잘해볼게요.”“잘해야죠.”“팀장님은 응원을 참 무뚝뚝하게 하시네요.”“응원 아니었습니다.”“그럼요?”“업무 지시였습니다.”“그래도 저는 응원으로 들을게요.”기태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말을 해도 늘 자기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그런데 이상했다.삼십 분.한 시간.조용했다.너무 조용했다.평소라면 벌써 몇 번은 들렸어야 했다.‘팀장님.’‘이것 좀 봐주세요.’‘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기태가 결국 고개를 돌렸다.하랑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수치를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하고,입술은 잔뜩 앞으로 나와 있었다.
다음 날 오전.하랑이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 기태의 자리 앞에 섰다.“팀장님.”“왜요.”“어제 외근 정리한 거요.”기태가 서류를 받아 펼쳤다.세공업체에서 들은 설명부터 샘플 제작 과정, 수정 가능한 범위까지 제법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어제 하랑이 질문했던 부분에는 별도의 표시까지 되어 있었다.“이거 언제 했습니까?”“어제 집에서요.”기태가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집에서까지 했습니까?”“까먹을까 봐요.”“회사에서 해도 됩니다.”“근데 집에 갔더니 궁금한 게 또 생겼어요.”역시나.기태가 다시 서류를 내려다봤다.“그래서 찾아봤어요?”“네. 팀장님한테 전화할 순 없잖아요.”“잘 생각했습니다.”하랑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전화하면 안 돼요?”기태가 고개를 들었다.“업무시간에 물어보세요.”“그럼 업무시간에는 많이 물어봐도 돼요?”“…….”“팀장님?”“이미 많이 물어보고 있잖습니까.”“그건 허락받은 건 아니었으니까요.”기태는 잠시 하랑을 바라봤다.어제 돌아오는 차
다음 날 오전.기태가 외근 서류를 챙기다 하랑을 불렀다.“이하랑 씨.”“네!”“내일 외근 준비하세요.”하랑이 제 가슴을 가리켰다.“저도요?”“이하랑 씨한테 말하고 있잖습니까.”“팀장님 혼자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원래는요.”하랑이 의자를 살짝 밀고 가까이 왔다.“근데 왜 저도 가요?”“배워야 하니까요.”“저 가르쳐주시려고요?”기태가 서류에서 시선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신입사원 교육도 제 일입니다.”“헤헤.”그제야 기태가 고개를 들었다.“왜 웃습니까?”“그냥요.”“웃지 말고 준비물 확인하세요.”“네!”대답만큼은 늘 빨랐다.다음 날.두 사람이 향한 곳은 이번 프로젝트의 샘플 제작을 맡은 협력 세공업체였다.학교에서 배운 것과 실제 제작은 달랐다.하랑은 작업자의 손끝을 뚫어져라 바라봤다.입술이 점점 앞으로 나왔다.기태는 이제 그 표정만 봐도 알았다.제대로 집중하고 있었다.설명이 끝나자 하랑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죄송한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네, 말씀하세요.”“이 부분을 얇게 만드는 대신 안쪽을 이렇게 잡으면 안 돼요? 그러면 강도는 유지하면서 착용감은 더 좋아질 것 같은데.”담당자가 샘플을 다시 살폈다.“음…… 이쪽을 조금 보강하면 가능하겠네요.”하랑의 눈이 반짝였다.“진짜요?”기태도 샘플을 들여다봤다.단순히 예쁜 모양만 보는 게 아니었다.하랑은 생각보다 빠르게 배우고 있었다.“이하랑 씨.”“네?”“메모하세요.”“아!”하랑이 허둥지둥 수첩을 펼쳤다.기태가 한마디 덧붙였다.“좋은 질문이었습니다.”펜을 움직이던 손이 딱 멈췄다.“저 지금 칭찬받았어요?”“메모부터 하세요.”“맞네. 칭찬받았네.”“이하랑 씨.”“네. 집중하겠습니다.”그러면서 입꼬리는 잔뜩 올라가 있었다.업무를 마치고 나온 건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뒤였다.근처 식당 앞에서 기태가 메뉴판을 봤다.“매운 건 안 되고.”하랑이 옆에서 눈을 깜빡였다.“생선도 안 먹죠?”“……팀장님.”“왜요
월요일 오후.디자인1팀과 2팀의 공동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1차 디자인 시안과 샘플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하랑은 평소보다 조용했다.로로가 설명하는 동안 빠르게 메모했고, 샘플이 돌기 시작하자 하나씩 직접 착용해봤다.어느 순간 입술이 조금씩 앞으로 나왔다.기태는 그 모습을 보고 바로 알았다.집중하고 있었다.하랑이 손목에 채운 샘플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기태를 불렀다.“팀장님.”“왜요.”“여기 조금만 더 완만하게 하면 안 돼요?”“이유는요?”“지금도 예쁜데 착용하면 여기가 눌릴 것 같아요. 안쪽 마감도 조금만 부드럽게 하면 오래 차고 있어도 덜 불편할 것 같고요.”옆에서 듣던 로로가 손을 내밀었다.“나도 한번 줘봐.”샘플을 받아 직접 착용해본 로로가 손목을 이리저리 돌렸다.“그러네. 확실히 여기가 좀 눌리겠다.”하랑의 눈이 반짝였다.“보이세요?”“응. 너 이거 바로 보였어?”“네. 이상한가요?”“아니.”로로가 샘플을 돌려주며 웃었다.“잘 보이는데?”“감사합니다.”하랑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기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하랑이 착용감이나 작은 구조 변화를 꽤 잘 잡아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그때 로로가 기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한 팀장.”“왜.”“신입 잘 키웠네?”기태가 하랑이 들고 있는 샘플을 한번 봤다.“아직 한참 남았습니다.”바로 옆에서 듣고 있던 하랑이 고개를 들었다.“저 여기 있는데요.”“들으라고 한 말인데?”로로가 태연하게 받아치자 하랑도 지지 않았다.“그럼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로로가 피식 웃으며 기태를 봤다.“쟤 은근히 안 지네.”“압니다.”대답이 너무 빨랐다.하랑이 이번에는 기태를 돌아봤다.“제가 언제요?”기태는 아무렇지 않게 다음 서류를 펼쳤다.“회의부터 합시다.”“대답 피하시는 것 같은데요.”“이하랑 씨.”“네. 회의하겠습니다.”로로가 둘을 번갈아 보다가 작게 웃었다.오후에는 수정 샘플 확인이 이어졌다.“아까
월요일 아침.하랑은 평소보다 십 분 일찍 출근했다.금요일 회식 이후, 주말 내내 찝찝했다.고기를 먹은 것도 기억났다.팀원들과 술잔을 부딪친 것도 기억났다.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어떻게 식당에서 나왔는지,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택시는 어떻게 타고 왔는지.회식 후반부가 깨끗하게 날아가 있었다.토요일 아침부터 몇 번이나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없었다.그렇다고 주말에 회사 사람한테 연락해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결국 월요일까지 기다렸다.자리에 앉은 하랑은 컴퓨터를 켜자마자 정훈 쪽을 슬쩍 봤다.“주임님.”“네?”“저 금요일에…….”“금요일에요?”정훈이 돌아보자 하랑은 입을 다물었다.괜히 물어봤다가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다.“아니에요.”“뭔데요?”“아무것도 아니에요.”하랑이 슬그머니 모니터 쪽으로 돌아섰다.그때 기태가 출근했다.“좋은 아침입니다.”“좋은 아침입니다.”하랑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잠시 망설이던 하랑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팀장님.”“왜요.”“저 금요일에 뭐 했어요?”가방을 내려놓던 기태가 하랑을 봤다.“기억 안 납니까?”“……네.”“하나도?”하랑이 손으로 애매한 지점을 그었다.“중간까지는 나는데 그 뒤가 없어요.”기태가 짧게 대답했다.“웃었습니다.”“네?”“계속 웃었습니다.”하랑이 눈을 깜빡였다.“웃은 게 왜 문제예요?”“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처음에는요?”옆에서 듣고 있던 정훈의 입꼬리가 씰룩였다.불길했다.“……얼마나 웃었는데요?”“회식 끝날 때까지요.”결국 정훈이 터졌다.“헤헤~”하랑이 홱 돌아봤다.“뭐예요?”정훈은 두 손으로 볼까지 감싸며 하랑을 따라 했다.“기분 좋아서요. 헤헤~”하랑의 눈이 커졌다.“제가 그랬어요?”“네.”“설마.”기태가 서류를 꺼내며 말했다.“했습니다.”정훈이 이번에는 기태를 보며 재연했다.“헤헤~ 팀장님이다.”하랑이 그대로 굳었다.“……제가 진짜 그랬어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