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무슨 셔츠요?”
이서가 물었다. 시현은 강당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어깨가 잠깐 닿았다. 가까이서 박하 냄새가 났지만 그것이 기억인지 지금 맡는 냄새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제 와인 쏟았잖아요.”
“그다음까지 보셨어요?”
“봤죠.”
시현은 더 말하려다 문 쪽을 보았다. 진행요원이 이서를 찾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이서는 시현의 팔을 잠깐 잡았다.
“이따 그 얘기부터 해요. 잊지 마시고요.”
“안 잊습니다.”
그 대답만큼은 믿을 수 있었다. 시현은 남의 말도 잘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어느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할지 늘 자기가 골랐다는 데 있었다.
강당 앞쪽의 대기 의자에 앉자 민우가 생수와 원고를 건넸다. 한 장이 모서리부터 접혀 있었다. 이서는 습관처럼 편 다음, 첫 문장을 읽었다. 어젯밤까지는 자연스럽게 외웠는데 지금은 남이 쓴 글 같았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말 다음에 누구의 얼굴을 떠올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펜을 들었다.
“지금 고치게?”
“첫 문장만.”
“너 맨날 첫 문장만 고친다더니 밤새잖아.”
“이번에는 진짜야.”
이서는 문장을 지우고 새로 적었다.
‘오늘 아침, 저는 제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생각했습니다.’
별로 대단한 문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기 이야기 같았다.
무대에 올라갔을 때 태헌이 앞줄에 보였다. 시현은 출입문 옆에 서 있었고, 도하는 학위 케이스가 쌓인 탁자 앞에 있었다. 누구에게 시선을 둘지 고르다가 이서는 가운데 통로를 보았다. 민우가 카메라를 들고 손을 흔들었다.
그 앞쪽 렌즈를 향해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발음 하나가 꼬였다. 잠깐 웃음이 났다. 객석에서도 가볍게 웃었다. 틀렸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서는 그다음 문장을 조금 천천히 읽었다. 마지막 인사를 마쳤을 때에는 손의 떨림이 거의 멎어 있었다.
도하에게서 학위 케이스를 받았다.
“수고했다.”
매번 지적부터 하던 사람이어서 짧은 칭찬이 더 선명했다. 이서는 고맙다고 답했다. 그가 밤에 무슨 말을 했든, 이 학위를 위해 자신이 공부한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후 4시. 연구실에 있겠다.”
도하가 덧붙였다. 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꺼낼 생각도 없었다.
***
단체사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누군가는 학사모를 놓쳤고, 누군가는 부모님과 찍겠다며 빠져나갔다. 태헌은 사진 한 장만 찍으면 된다고 하더니 이서 곁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시현은 남의 카메라를 받아주는 일을 하면서도 계속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민우가 카메라를 내렸다.
“선배님들, 저 얘 증명사진 찍는 거 아니거든요. 양옆에서 그렇게 막으면 얼굴만 나와요.”
“네가 뒤로 가면 되잖아.”
태헌이 말했다.
“뒤가 화단이라서요.”
이서가 결국 웃었다. 태헌이 그 웃음을 보다가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시현도 뒤로 섰다. 도하는 처음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민우가 셋 다 들어오라고 손짓하자 그제야 다가왔다.
셔터가 몇 번 울렸다. 태헌이 이서의 가운 어깨를 정리하려 했고, 시현이 태슬을 치워주려 했고, 도하는 이름표가 뒤집혔다고 말했다.
“셋 다 손 내려요.”
이서가 말하자 민우가 그대로 사진을 찍었다.
“좋다. 방금 거 되게 너 같아.”
확대된 화면 속 자신은 셋을 노려보고 있었다. 밤새 불안했던 사람이 아니라, 귀찮은 사람 셋을 데리고 졸업사진을 찍는 얼굴이었다. 이서는 그 사진을 자기 휴대전화로 보내달라고 했다.
민우가 파일을 옮기는 사이 태헌에게 전화가 왔다. 회사에서 찾는 모양이었다. 태헌은 서너 걸음 떨어져 전화를 받았다. 상대에게 그냥 기다리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현은 그쪽을 보다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도하 역시 같은 시각에 화면을 내려다봤다.
“다 같이 바쁘네요.”
이서의 말에 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월요일에 들어오면 더 바빠질 거예요.”
“저까지 바쁘게 만들겠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제가 도와드릴 수 있죠.”
그 말이 조금 전까지는 다정하게 들렸을 것이다. 오늘은 얼마만큼 도와주고 무엇을 요구할지가 먼저 궁금했다.
민우가 손에 든 카메라를 두드렸다.
“어제 사진도 밤에 보낼게. 시간 표시가 9분 늦으니까 헷갈리지 말고. 배터리 갈고 다시 맞추는 걸 깜빡했어.”
“9분?”
“응. 휴대전화랑 같이 찍은 사진 하나 있어서 그걸로 맞추면 돼.”
민우는 카메라로 제 휴대전화를 찍어 화면을 보여주었다. 휴대전화에는 11시 26분, 사진 정보에는 11시 17분이 떠 있었다.
“지금 고치면 어제랑 섞여서 더 헷갈려. 어제 사진 다 보내고 고칠게.”
“원본으로 줘. 예쁘게 잘라서 주지 말고.”
“졸업사진을 이렇게 비장하게 받는 사람 처음 본다.”
민우가 대답하고는 이서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거뒀다. 이서는 괜찮다고 말했다. 사진을 예쁘게 남기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가장자리에서 잘려 나갈 사람과 시간이 먼저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이서는 그 말을 기억해두었다. 이상하게 모든 숫자가 오늘은 단서처럼 들렸다. 그것이 좋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태헌이 전화를 끊고 돌아왔다.
“점심 먹고 가.”
“어디요?”
“가보면 알아.”
“저 오늘은 가보면 아는 거 싫어요.”
태헌이 이서를 보았다. 시현이 카메라를 민우에게 돌려주었고, 도하는 학위 수여 가운을 접었다. 모두 그 말 뒤의 뜻을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이는 얼굴이었다.
이서는 점심은 민우와 먹겠다고 했다. 태헌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도하가 오후에 보자고 짧게 말하고 돌아섰다. 시현은 별말 없이 이서의 손에 생수를 쥐여주었다.
세 사람이 흩어진 뒤 민우가 물었다.
“무슨 일 있냐.”
이서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어제 내가 누구랑 먼저 나갔어?”
민우가 가볍게 기억을 더듬다가 표정을 바꿨다.
“먼저 나간 건 너 혼자였는데.”
태헌은 자신이 데리고 올라갔다고 했었다.
2027년 8월 29일 일요일, 졸업식으로부터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서는 자기 집 식탁을 창가로 옮겼다.넷이 앉으면 한쪽 통로가 조금 좁았다. 그렇다고 새 식탁을 살 정도는 아니었다. 의자 두 개는 미리 빌려왔다. 테이블 위에는 인터넷에서 배운 대로 접으려다 실패한 냅킨이 네 장 놓였다.***점심 무렵 민우에게 사진이 왔다. 작년 졸업식 때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이서는 자기 얼굴부터 확대했다가 원래 크기로 돌려놓았다. 학사모가 옆으로 기울어 있었고, 누군가는 꽃다발 뒤로 반쯤 가려 있었다. 그날에 호텔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너 그때 답사 잘했는데 왜 사진마다 눈을 감았냐.]이서는 자기보다 더 눈을 감고 있는 민우의 사진을 찾아 답장했다. 그는 자기는 찍히는 역할이 아니었다고 우겼다. 잠시 뒤 작은 카메라 시계가 제대로 맞는지 확인한 사진도 왔다.[이젠 9분 안 느려. 오늘 건 그냥 봐도 돼.]이서는 웃으며 고맙다고 보냈다. 작년에는 그 숫자 하나 때문에 사진을 몇 번이나 다시 펼쳤다. 오늘은 식탁의 구도를 잡으면서 민우에게 의자 두 개를 빌려줘서 고맙다고 덧붙였다. 의자는 다음 날 저녁에 돌려주기로 했다. 드라이버처럼 몇 달씩 가지고 있지 말라는 답이 곧 왔다.민우의 말에 이서는 웃었다. 답사를 다시 할 일은 없겠지만, 사진은 한 장 더 남길 수 있었다.새 회사에서는 지난주 처음으로 작은 분석 업무 하나를 처음부터 마감까지 맡았다. 고객은 두 군데를 더 고쳐달라고 했고, 팀장은 정리 방식이 좋아졌다고 했다. 둘 다 맞는 말이었다. 이서는 수정 요청 메일에 월요일 오전에 확인하겠다고 답한 뒤 업무용 노트북을 닫았다.가족처럼 가까워졌다는 말로 네 사람이 모든 생활을 합친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자기 집과 자기 월급, 자기 이름으로 보내는 보고서가 있었다. 함께 머무는 집에는 이서의 방과 생활비 몫이 남아
가평에 가자는 말을 먼저 꺼낸 쪽은 도하였다.8월 셋째 주말에 가기로 한 곳은 그가 예전에 원고를 정리하러 몇 번 묵었던 강가의 작은 숙소였다. 공용 마당이 있고 방은 세 개뿐이었다. 이번에는 하루만 예약했다.“차 막히기 전에 출발하면 좋겠다.”“그럼 아침에 깨워줘요. 대신 못 일어나도 교수님 목소리로 출석 부르지 말고.”도하가 잠깐 웃었다. 이서는 금요일 밤까지 일을 마치느라 잠이 부족했다. 태헌이 차 키를 흔들며 자기가 운전해줄까 물었지만, 이서가 둘이 다녀오겠다고 하자 투덜거리면서도 키를 주머니에 넣었다.“지난번에 산 빵, 이번에는 다른 집 걸로 사 와.”“맛없다면서 다 먹었잖아요.”“다 먹어봐야 맛없는 걸 알지.”시현은 날씨를 확인한 뒤 우산을 가져가라고 했다. 휴대전화 위치를 켜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서는 가방 옆 주머니에 접는 우산을 넣었다.숙소에 도착한 것은 토요일 점심 무렵이었다. 주인은 방을 보여주고 마당 불을 끄는 시간을 알려주었다. 도하가 가져온 책은 한 권뿐이었다. 이서는 그 두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쉬러 온 거 맞죠?”“읽다가 잠들 생각이었다.”“그 두께면 기절하겠는데.”둘은 강가를 걸었다. 물 가까이 내려가는 길은 비 때문에 막혀 있었다. 도하는 다른 길이 있을 거라고 앞서가려다 멈췄다. 이서가 젖은 운동화 끈을 보며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예전이라면 더 좋은 풍경을 보여주겠다고 끝까지 길을 찾았을 것이다. 오늘은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처마 아래 앉았다. 도하는 포장지에서 떨어진 초콜릿 조각을 바지에 묻혔다. 이서가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가리키자
도하가 외부 교육기관에서 맡을 새 강의의 첫 수업은 8월 첫째 주에 열렸다.정규 지도학생을 맡거나 성적을 단독으로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외부 교육기관의 실무자 대상 단기 강좌였다. 담당자는 차성그룹 자문 경력을 강사 소개 맨 위에 올리고 싶다고 했다. 도하는 그 계약이 끝난 시점과 현재 맡는 일을 구분해 보내달라고 요청했다.자료를 고친 뒤에도 신청 인원은 많지 않았다. 첫 강의에 온 사람은 열일곱 명이었다.이서는 그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반차를 낼 이유도, 그가 잘하는지 지켜볼 의무도 없었다. 대신 퇴근 후 근처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도하는 강의를 마치고 전화하겠다고 했다.퇴근이 늦어진 것은 이번에는 이서 쪽이었다. 고객이 확인하지 않은 숫자 하나가 보고서에 남아 있어 팀원들과 다시 표를 펼쳐야 했다. 그녀가 늦겠다고 연락했을 때 도하는 아직 강의실에 있었다.“질문이 길어졌어. 나도 조금 늦는다.”“그럼 천천히 해요. 저도 아직 표 앞이에요.”한 시간 뒤 도하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이서는 식당 입구 의자에서 꾸벅 졸고 있었다. 그가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미안하다. 깨웠구나.”“안 깨우면 여기서 잘 뻔했어요.”도하의 어깨에 걸린 가방이 평소보다 무거워 보였다. 이서가 이유를 묻자 남은 교재를 가져왔다고 했다. 그는 식당에 앉아서도 가방을 바닥에 바로 놓지 못했다.“수업은 어땠어요?”“예상했던 질문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좋은 뜻이에요, 나쁜 뜻이에요?”“둘 다.”도하는 국에 숟가락을 넣었다가 멈췄다.“내가 준비한
메일 제목을 본 이서는 파일을 열기 전에 도하에게 전화를 걸었다.“이거 누구한테 받으셨어요?”도하가 보내온 것은 이서가 맡은 신규 업무와 관련된 연구 자료 목록이었다. 공개 논문만 모아놓은 파일이었지만, 그 아래에는 도하가 아는 연구자의 연락처와 ‘상황은 간단히 설명해 두었다’는 문장이 붙어 있었다.수화기 너머에서 도하가 잠시 말을 멈췄다.“전문가 의견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필요하다고 했지, 소개해달라고는 안 했어요.”이서는 사무실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상담할 상대를 찾는 일이 어려웠다. 그래서 전날 저녁 그 이야기를 했고, 말하고 나니 조금 후련했다. 하룻밤 사이에 상대가 정해지고 자기 업무가 다른 사람에게 설명돼 있을 줄은 몰랐다.“회사 이름까지 말씀하셨어요?”“회사와 분야만 말했다. 자료는 보내지 않았고.”“그래도 먼저 물어봐 주셨어야죠.”도하는 자신이 보낸 메일을 확인하는 듯했다. 잠깐 키보드 소리가 났다.“철회하겠다.”“상대한테 없던 일로 해달라고만 하지 말고요. 제가 요청한 게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말해주세요.”그녀는 통화를 끝냈다.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는데도 손끝이 뜨거웠다. 주변에서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인맥이었다. 그걸 거절하는 자신이 일을 어렵게 만드는 건 아닌지,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다.자리로 돌아왔을 때 팀장이 전문가 섭외 진행 상황을 물었다. 이서는 후보를 더 확인하고 있다고 답했다. 도하의 목록을 자기 성과처럼 내밀지는 않았다. 오후에는 공개된 학회 명단을 보고 직접 문의했다. 두 곳은 거절했고, 한 곳은 다음 주에 답을 주겠다고
도하가 주말에 가져온 원고에는 첫 장부터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7월의 토요일이었다. 이서는 거실 창가에 앉아 선풍기 방향을 돌렸다. 도하의 새 책 원고는 그가 전에 맡았던 기업 자문 사례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대학원에서 가르치던 의사결정 수업을 정리한 글이었다. 출판사 편집자는 서문의 절반을 덜어내고 실제 사례부터 시작하라고 주문해 놓았다.“틀린 말은 없는데, 읽는 사람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 안 보인대요.”이서가 편집자의 의견을 읽었다. 도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그래서요?”“여전히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겠어.”모른다는 말을 하는 도하가 조금 낯설었다. 예전이었다면 편집자의 문해력부터 의심했을지도 몰랐다. 이서는 첫 단락의 ‘합리적 판단 주체’를 볼펜 끝으로 가리켰다.“이 사람이 월세 내야 하는 사람인지, 잘못 결재하면 잘리는 사람인지 모르겠는데요. 그냥 합리적이라고만 해놓으니까.”도하는 원고를 자기 쪽으로 가져왔다. 이서가 그걸 붙잡았다.“바로 고치지 말고요. 제 말부터 끝까지 들어봐요.”“듣고 있다.”“손은 이미 고치려고 했잖아요.”그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서는 웃지 않았다. 아직 그 앞에서 말할 때 결론을 빨리 증명해야 할 것 같은 버릇이 남아 있었다. 도하 역시 듣다가 곧장 정답을 제시하려는 버릇이 남아 있었다. 둘 다 안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누가 틀렸다고만 하지 말고, 왜 그 사람이 그걸 골랐는지 먼저 써봐요. 나중에 잘못됐다고 말하더라도요.”도하가 한참 뒤 빈 여백에 짧게
시현은 이서에게 공책을 한 권 건넸다. 오래전 문구점에서 샀던 것과 같은 제품이었다. 표지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이서는 공책을 열었다. 첫 장도 비어 있었다.“무슨 기록이에요?”“아직 없어요.”그가 대답했다. 예전에는 그녀의 생활을 알아내기 위해 기록을 만들었다. 요즘 쓰는 공책에는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말과 읽은 책의 문장, 발표 뒤 수정할 내용이 섞여 있었다. 이서에게 보여주고 싶은 쪽만 따로 표시했다.“제 공책도 한번 보여주고 싶었는데, 전부 넘기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이건 같이 쓸까요?”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로의 모든 사생활을 공유하자는 제안은 아니었다. 함께 가고 싶은 곳과 같이 본 영화 정도를 적어두자는 말이었다.이서는 첫 장에 제주에서 갔던 카페 이름을 적었다. 길을 잘못 들어 돌아온 곳이라고 덧붙였다. 시현은 그 아래에 빵이 맛있었다고 썼다.“분석이 너무 짧은데요.”그녀가 놀렸다.“같이 있었으니까 설명을 길게 안 해도 되잖아요.”시현의 대답에 이서가 웃었다. 둘은 몇 장을 더 채우려다가 멈췄다. 아직 하지 않은 일까지 목록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그날 오후, 시현은 연구소에서 받은 수정 의견을 읽었다. 예전보다 관리 권한은 적었지만 개발자로서 실제로 손댈 부분은 많았다. 동료가 그의 코드를 고친 흔적을 보며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가, 바뀐 이유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서는 자기 회사의 메일을 정리했다. 둘이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의 화면을 볼 필요는 없었다. 중간에 차를 마시고, 각자 다시 일했다.이서가 화면을 닫기 전 저장한 파일의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시현은 물을 가지러 나갔다가 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