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민우는 바로 대답을 고쳤다.
“정확히는, 연회장 밖으로 먼저 나간 게 너였어. 엘리베이터까지는 못 봤고.”
“혼자 나간 건 맞아?”
“응. 남색 봉투 들고 있었어. 전화하면서.”
이서는 식판 위의 국을 내려다봤다. 졸업식 날에도 학생식당은 문을 열었다. 아침부터 꽃다발을 품에 안고 기념사진을 찍던 사람이 가장 싼 정식을 먹고 있었다. 이서는 포장지가 국그릇에 닿지 않도록 의자를 조금 당겨놓았다. 그게 오히려 익숙했다.
남색 봉투는 기억났다. 제출한 공모전 제안서를 인쇄해둔 봉투였다. 태헌이 회사에서 쓰는 자료를 보여주었는데, 그 안의 표 하나가 자신의 것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런데 작성자 이름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봉투를 가져갔었다.
지금 가방에는 없었다.
“민우야, 그 봉투 내가 너한테 맡기진 않았지?”
“아니. 왜, 없어졌어?”
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식판을 옆으로 밀어놓고 다시 물었다.
“중요한 거야?”
“월요일에 보여주려고 했던 거. 제안서 원본이랑 회사 자료가 어디서 달라졌는지 표시해뒀어.”
“원본 파일 있잖아.”
“파일에는 내가 연회장에서 들은 말을 못 적었으니까.”
이서는 숟가락 끝으로 식판 모서리를 두드렸다. 기억나는 대목이 있었다. 회사에서 쓰는 표를 보고 이름이 왜 바뀌었느냐고 묻자, 누군가 학생이 만든 것은 실무에서 그대로 쓸 수 없다고 했다. 내용은 쓸 수 있는데 이름은 쓸 수 없다는 게 이상해서 봉투에 그 말을 적었었다.
입사 제안은 이미 일주일 전에 받은 상태였다. 그 자리를 얻으려고 밤을 보낸 사람으로 이야기가 바뀌는 것만큼은 싫었다. 이서는 메일에서 계약 안내를 열어 날짜를 다시 보았다. 읽을수록 안심이 되는 숫자였다.
민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어제 찍은 사진을 훑었다. 연회장과 복도에서 촬영한 것들이었다. 이서가 웃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적어도 초저녁에는 웃을 수 있었다.
“여기 있다. 이때 들고 있잖아.”
사진 속 이서는 남색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태헌이 그 앞에서 몸을 기울여 무언가 설명했다. 시현은 한쪽 뒤에서 케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도하는 사진 끝에 어깨만 들어와 있었다.
한 프레임 안에 셋이 모두 있었다.
그렇다고 셋이 무엇을 의논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이서는 사진을 받아두었다. 오늘은 자신이 아는 범위를 넘어서 생각하는 일이 자꾸 생겼다.
민우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너 괜찮은 거 맞아?”
“어제 기억이 중간중간 안 나. 그래서 좀 확인하려고.”
민우는 장난하지 않았다. 누구와 뭘 했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이서가 말할 때까지 물컵만 한 번 밀어주었다.
“필요하면 같이 가줄게.”
그 말에 이서는 목이 조금 메었다.
“일단 사진부터. 네가 직접 본 것만 말해줘.”
“알았어. 짐작은 안 할게.”
밥을 다 먹은 뒤 이서는 예약한 진료를 받으러 갔다. 민우는 건물 아래 카페에서 기다렸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캐묻는 대신, 들고 있던 꽃다발을 다시 건네주었다. 이서는 오늘 저녁에는 집에 가서 쉬겠다고 약속했다. 오후에 만나야 할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태헌에게서 세 번이나 메시지가 왔다.
[어디야.]
[데리러 갈게.] [읽었으면 대답을 해.]이서는 카페 위치를 보냈다.
[차에서 말고 여기서 만나요. 30분이면 돼요.]
태헌은 정확히 20분 뒤에 왔다. 평소라면 도로변에 세워두었을 차를 주차장에 넣고 돌아왔다. 카페에서 이야기하자는 말을 듣기는 한 모양이었다.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헌이 그를 보았다.
“얘랑 있었어?”
“저를 기다려줬어요.”
이서가 대답했다. 민우는 둘 사이의 빈 의자를 보다가, 근처에 있겠다며 나갔다. 태헌이 자리에 앉자 의자가 작아 보였다. 그는 탁자 위 꽃다발을 옆으로 밀었다. 그가 주문한 커피 두 잔 중 하나에는 시럽이 들어 있었다. 이서가 바꿔 놓자 태헌이 눈썹을 들었다.
“단거 안 마셔?”
“오늘은요.”
“너 시험 때마다 달게 마셨잖아.”
“지금 시험기간 아니니까.”
태헌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는 자기 기억이 틀렸다는 것보다 이서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더 의외로 여기는 것 같았다.
“다른 데 가면 안 돼? 사람 많잖아.”
“사람이 있어서 여기 골랐어요.”
태헌이 입을 다물었다. 이서는 파우치에서 커프스링크를 꺼냈다. 종이 냅킨을 깔고 그 위에 올려두었다.
“제 방에서 나왔어요.”
“알아. 찾고 있었어.”
“이거 언제 떨어뜨렸어요?”
“네 셔츠에 와인 묻었을 때쯤.”
태헌은 물건을 집으려다 이서의 얼굴을 보았다. 손을 멈추었다. 이서는 고맙다는 말 대신 질문을 이었다.
“어제 저랑 있었죠?”
“응.”
“몇 시부터요?”
“한 시 반쯤. 방에 올라간 건.”
“나갈 때까지?”
“두 시 십오 분쯤 나왔어. 영수증 있을걸.”
숫자가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나왔다. 이서는 휴대전화에 적었다. 태헌이 그 화면을 보더니 등을 의자에서 뗐다.
“뭐 하는 거야, 윤이서.”
“물어보는 거예요.”
“나를 의심해?”
이서는 잠깐 망설였다.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대화가 쉬워질 것이다. 태헌은 기분을 풀고, 자신은 또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할 것이다.
“네. 제가 기억을 못 하니까요.”
태헌이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으로 커피 뚜껑을 두드렸다. 손등에 작은 긁힌 자국이 있었다. 이서는 그 자국의 이유까지 지금 묻지는 않았다.
“원하는 게 뭔데.”
그 말은 태헌에게 쉬운 질문이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면 주면 되니까. 하지만 오늘은 이서도 그의 방식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돈도, 입사 자리도 아니고요.”
이서가 커프스링크를 손끝으로 밀었다.
“그날 밤 선배가 저랑 무슨 일을 했는지요.”
태헌의 손가락이 멎었다.
가게 안의 커피 머신이 크게 울렸다.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이서는 기다렸다. 이번에는 질문을 바꾸지 않았다.
태헌이 입술을 한번 훑고 말했다.
“차에서 얘기하자. 문 열어두고. 여기선 내가 못 하겠어.”
처음으로 명령이 아니라 자기 사정을 말했다. 이서는 민우에게 주차장으로 옮긴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30분이라는 약속은 그대로였다.
태헌이 커프스링크를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이거 보면, 네가 생각하는 거랑 다를 수도 있어.”
“그럼 다르게 설명해요.”
이서는 파우치의 지퍼를 열었다. 그 작은 물건을 돌려주는 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아니다.”도하의 대답은 작았지만 분명했다.이서는 기다렸다. 그가 다른 말을 붙일 것 같았다. 어젯밤의 자신이 착각한 것인지, 누군가와 다른 일을 한 것인지. 하지만 도하는 잠깐 숨을 고른 뒤 물컵만 자기 쪽으로 당겼다.“세 분 다 아니라고 하네요.”이서가 말했다.도하의 눈이 다시 올라왔다.“모두에게 물었니?”“누구한테는 묻고 누구한테는 안 물어야 해요?”그는 입을 다물었다. 이서는 막막해졌다. 세 남자를 차례로 만나면 적어도 하나의 대답은 얻을 것 같았다. 대답을 셋이나 얻었는데 아침보다 빈칸이 더 넓어졌다.“교수님이 오셨을 때 저는 어디 있었어요?”“침실 쪽에 있었다.”“교수님은 어디에 계셨어요?”“처음에는 거실에. 네가 자료를 보여주겠다고 해서 탁자 앞에 앉았다.”“그 뒤에는요?”도하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잠들게 두고 나왔다.”이서는 질문을 고쳤다.“제 옆에 계속 계셨다는 뜻이에요?”“방 안에는 있었어.”같은 의미인 것 같다가도 조금씩 달라졌다. 교수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처럼 자꾸 재질문하게 됐다. 이서는 그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제가 어려운 질문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이서의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울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잘못 알아들어서 이런 아침이 생긴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싫었다.“네가 뭘 기억하는지 모르니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어렵다.”“제가 기억하는 데 맞춰서 대답하시면 안 되잖아요.”도하의 얼굴이 굳었다. 이서는 자신의 말이 너무 날카로웠는지 생각했다가 그대로 두었다. 답을 맞춰달라는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다.반쯤 열린 문밖으로 학생 둘이 지나갔다. 도하를 보더니 인사하려다가 이서가 있는 것을 보고 소리를 낮췄다. 도하는 문을 닫지 않았다. 이서는 그 때문에 조금 더 차분해질 수 있었다. 지금 이 방에는 질문하는 자신과 답해야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도하가 천천히 말했다.“2시 55분쯤 들어갔다. 네가 자리를 옮긴 뒤에도 방에 있었고, 3시
도하는 열어둔 문을 닫을지 물었다.이서는 잠깐 생각하고 반쯤만 닫아달라고 했다. 도하는 그대로 두었다. 복도에서 시현이 돌아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서는 그 소리를 듣다가 조금 전 시현이 한 말을 떠올렸다. 익숙한 발소리로 사람을 맞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연구실에는 수정할 논문과 반납할 책이 나란히 쌓여 있었다. 창가의 화분은 한쪽만 말라 있었다. 언제나 완벽하게 정돈돼 보이던 방인데 자세히 보니 손이 가지 않은 곳도 많았다.문 앞에서 학생이 조심스럽게 교수님을 불렀다. 방금 나간 줄 알았다며 학위 케이스가 바뀐 것 같다고 했다. 도하는 학생의 이름을 묻고 케이스를 열었다. 누군가 동명이인의 것을 가져간 모양이었다.“학과 사무실에 지금 연락해두겠다. 네가 누구 것인지 찾아다닐 필요 없어.”학생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도하가 괜찮다며 가방을 챙겨주었다. 그 학생이 돌아가고 나자 이서는 탁자 위 다른 케이스를 보았다. 도하는 잘못된 것을 정확히 돌려놓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잘못 준 사람부터 혼내실 줄 알았어요.”이서가 말했다.“지금 필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그가 답했다. 이서는 잠깐 웃었다. 원고가 틀렸을 때는 그렇게 엄격하면서, 사람을 돌려보낼 때는 뜻밖에 다정한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그를 한 가지 얼굴로 미워하기가 더 어려웠다.도하가 물을 내밀었다.“아침에 어디 아팠니?”“왜요?”“목소리가 좋지 않았다.”이서는 물컵을 받았다. 오전에는 메모부터 물었던 사람이 이제야 몸을 물었다. 늦게 온 질문이 반갑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진료받고 왔어요. 제가 알아서 확인할 일은 하고 있어요.”도하가 무언가 더 물으려다 그만뒀다. 이서는 그에게 검진 결과를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 묻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파우치에서 냅킨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교수님이 쓰신 거죠?”“그래.”“언제요?”“나오기 전에.”“몇 시였어요?”도하가 안경을 책 위에 내려놓았다. 검은 테가 양장본 표지에 부딪혀 작은
이서는 시현에게 들어온 문과 나간 문을 그려달라고 했다.시현은 조교실에서 종이를 가져와 작은 네모를 그렸다. 현관, 거실, 침실, 안쪽 문. 지도라기보다는 약도가 가까웠다. 이서는 자신이 아침에 나왔던 현관을 짚었다.“여기로 들어왔어요?”“네. 이서 씨가 열어줬어요.”“나갈 때도요?”“반대쪽 문으로요.”이서는 아침에 찍힌 사진을 보여주었다. 천장 아래로 어두운 나무 모서리가 비쳐 있었다. 시현이 화면을 가까이 보았다.“서재 책장 같은데요.”“들어가봤어요?”“나가면서 지나갔어요. 책상이 있고, 소파도 있었고요.”이서는 침실의 하얀 협탁과 그 어두운 나무를 비교했다. 사진 속 방이 자기 객실의 일부라면, 자신은 두 시 오십칠 분에 침실 밖에 있었던 셈이었다. 태헌이 돌아와 빈 침대를 보았다는 말과 꼭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다.그녀는 사진을 닫았다. 시현의 말만으로 서재라고 적지는 않았다. 호텔에서 도면을 받아보면 직접 비교할 수 있었다. 빨리 답을 찾고 싶은 마음 때문에, 또 다른 남자의 설명에 기대고 있었다.객실 안에 출입문이 두 개였다는 사실을 이서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현관과 침실만 생각했는데 안쪽에 다른 문이 있었다. 아침에 찍힌 사진의 나무 모서리가 문득 떠올랐다.“어디로 이어져요?”“서비스 복도요. 안쪽 작은 서재와 연결돼 있어요.”“그걸 어떻게 알았어요?”시현이 펜을 내려놓았다.“행사 준비 자료에 도면이 있었습니다.”그가 새로 보여준 파일은 단순한 객실 번호 목록보다 자세했다. 방의 내부 구조와 자료 반출 동선이 표시돼 있었다. 이서는 화면에서 ‘자료 회수’라는 글자를 읽었다. 자신의 숙박과 아무 상관없는 말이었다.“저를 만나러 왔는데, 나갈 길도 미리 보고 왔네요.”“그렇게 말하면…….”“다른 설명 있어요?”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서는 종이 위의 문을 보았다. 그가 다른 남자를 마주치지 않으려 나갔을 수도 있었다. 자료를 들킨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지금은 어느 쪽도 단정하지 않았다.“왜 얼굴도
시현은 민우를 보았다.이서가 먼저 말했다.“민우 앞에서 못 할 얘기면 이유를 말해주세요.”“회사 자료가 섞여 있어서요.”“그럼 자료 내용 빼고, 누가 무슨 부탁을 했는지만요.”민우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휴대전화를 챙겼다. 이서에게 자신은 옆 건물에 있겠다고 했다. 혼자 남기기 불편해서 계속 앉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자리를 떴다.시현은 곧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그렇게 기다리지 말아요. 말할 겁니다.”“네. 기다릴게요.”그는 허탈하게 웃었다.“이서 씨가 가져간 자료를 확인해달라고 했어요. 회사 원본이 섞였는지.”“제 봉투를요?”“네.”이서는 가방 손잡이를 놓았다. 이제야 시현이 원본 파일을 가지고 한 시간 가까이 늦게 올라온 이유가 다른 쪽으로 보였다. 제 자료를 돌려주러 온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료를 찾아오라는 부탁까지 받은 사람이었다.“왜 저한테 말 안 했어요?”“말하면 안 받으실 것 같았어요.”“제가 제 봉투를 검사받아야 하는 이유부터 몰랐겠죠.”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화가 덜 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서는 손에 든 USB를 탁자 위에 놓았다.“그래서 그 안에 뭐가 있었는데요.”“이서 씨의 제안서와 비교표요. 회사 양식으로 된 출력물도 몇 장 있었고.”“마음대로 보셨어요?”“보여달라고 했고, 이서 씨가 펼쳐줬어요.”그의 설명을 따라가려 하자 어렴풋한 장면이 떠올랐다. 남색 봉투, 탁자에 펼친 종이, 이름이 없어졌다고 자기가 따지던 목소리. 이서는 그 장면이 지금 들은 말 때문에 생긴 것인지, 원래 남아 있던 기억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종이 가져갔어요?”“두 장을 복사했어요. 원본은 가져가지 않았고요.”“복사한 건 누구한테 줬어요?”시현은 그제야 얼굴을 돌렸다.이서는 휴대전화의 시계를 봤다. 오후 3시 36분이었다. 도하와의 약속까지 24분. 시간 때문에 질문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시현이 말했다.“제 장치에 있어요. 임성준 씨에게는
시현은 방에서 나온 시각을 2시 55분쯤이라고 했다.이서는 그 말을 적었다. 숫자가 세 개가 되자 종이에 순서가 생겼다. 태헌이 나간 뒤 시현이 들어왔고, 시현이 나갈 무렵 도하가 왔다는 설명이었다.“그럼 태헌 선배가 다시 올라온 건 몰랐어요?”시현의 시선이 들렸다.“다시요?”이번 놀람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이서는 휴대전화를 뒤집어놓았다. 다른 남자의 설명을 미리 보여준 다음 대답을 받으면 말이 섞일 것 같았다.“그건 나중에 같이 맞춰봐요. 조교님이 직접 본 것부터요.”“조금 전에는 수석님이더니.”“지금 학교 얘기하잖아요.”시현은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이서는 틀린 호칭을 고르는 게임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짧은 실랑이 덕분에 그가 질문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 잘 보였다.민우가 계단에서 올라왔다. 전송된 파일을 확인해달라는 전화였다고 했다. 그는 시현의 노트북으로 다가가지 않고 제 화면을 돌렸다. 연회장의 단체사진이 크게 떠 있었다.“어제 안내판 누가 만든 거예요? 방 번호 적힌 거요.”시현이 물었다.“행사 쪽에서 줬죠. 저는 사진만 찍었어요.”“원본 사진에 그것도 나왔어요?”민우는 몇 장을 넘겼다. 복도에서 이서를 찍기 직전의 사진에 안내 데스크가 걸려 있었다. 작게 세운 종이 표지에 2001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얼굴을 내민 임성준이 누군가에게 봉투를 주고 있었다.민우가 사진을 한 장 앞으로 돌렸다. 같은 안내 데스크였는데 그 사진에는 2001이라는 종이가 없었다. 검은 명찰과 줄 맞춘 펜, 명함을 넣는 작은 상자만 보였다.“두 장 사이 얼마나 돼?”“실제 시각으로 열한 시 십 분쯤부터 열한 시 이십사 분. 나 시계 9분 더한 거 맞게 계산했나 봐줘.”이서는 화면의 숫자를 직접 더했다. 두 장 사이에 안내판이 생겼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누가 만들었는지까지 보이는 사진은 아니었다.그 짧은 사이에 자신의 방이 다른 이름을 얻었다. 이서는 어제 저 시간에 태헌과 언쟁하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자신이
시현이 행사 안내 파일을 열었다.맨 위에는 차성그룹 비서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참석자 명단과 행사장 배치, 발표 장치 반납 장소.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자료 대기실 2001호가 있었다. 이서는 자기 예약 확인서와 그 문장을 나란히 놓았다.“저 방을 제가 쓴다는 것도 알았어요?”“나중에는요. 이서 씨가 번호를 보냈으니까.”“그전에는 몰랐고요?”“정확히는, 누구 방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어요.”처음에 들은 대답과 조금 달라졌다. 이서는 곧바로 따지지 않았다. 시현은 자신이 틀리지 않을 문장을 고르고 있었다. 그 문장들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지 살펴야 했다.복도 건너편에서 민우의 노트북이 울렸다. 파일 전송이 끝난 모양이었다. 민우는 담당자와 통화하며 계단 쪽으로 내려갔다. 둘만 남자 시현이 의자를 조금 앞으로 당겼다.“아까 질문, 계속해도 돼요?”이서가 물었다.“무슨 질문인데요.”“그날 저랑 잤어요?”시현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그는 이서의 눈을 오래 보았다. 질문이 어디까지를 묻는지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이서는 피하지 않았다.“아니요.”“키스 다음에는요?”“아무 일 없었어요.”이서는 물컵을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시현에게 그런 질문을 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조교실에 둘이 남았을 때 서로 말이 없어지던 순간은 있었다. 그런 날이면 시현은 먼저 컴퓨터 화면을 돌렸고, 이서는 자료를 보는 척했다.한 번은 도서관이 닫힌 뒤 같이 버스를 기다렸다. 비가 왔는데 우산은 하나였다. 시현이 우산을 넘겨주고 뛰어가려 하자 이서가 소매를 잡았다. 같이 쓰면 되는데 왜 그러느냐고 했다. 그는 그녀를 보다가, 그러면 자기가 너무 좋아할 것 같다고 답했었다.그때는 농담으로 넘겼다. 집에 와서는 버스 창문에 비친 두 사람의 어깨를 한참 떠올렸다. 시현을 아무 감정 없는 조교로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날의 설렘이 어젯밤의 빈칸을 대신 채워주는 것은 아니었다.“저도 조교님을 싫어해서 묻는 건 아니에요.”뜻밖에 먼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