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각하, 상황이 심각합니다.”
하지만 평소와 달랐다.
차분하려고 했지만 목소리 끝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시온은 곧바로 답했다.
“여긴 엘리아나 확보했습니다.”
짧은 정적.
무전 너머에서 한채린 숨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렸다.
“…다행입니다.”
정말 짧은 한마디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시온 귀에는 또렷하게 남았다.
오민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한 실장님! 여긴 문은 열었는데 이제 폭발 직전 같습니다!”
양쪽 모두 시간이 없었다.
시온은 모니터를 바라봤다.
복잡한 장비를 전부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건 하나.
누군가 현장을 원격으로 조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연결만 끊으면 된다.
시온은 바지선 제어 패널을 열었다.
짧게 화면을 확인하던 그의 눈빛이 순간 달라졌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키보드 위를 움직였다.
오민석 눈이 커졌다.
“각하… 할 줄 아십니까?”
“대학교 전공이 정보보안학과였어요.”
“왜 이제 말씀하십니까?!”
“저도 잊고 살았습니다!”
엘리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떠올리신 것도 대단하네요.”
시온은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외부 연결 차단.
현장 제어 복구. 비상 안정화 실행.그 움직임은 생각보다 훨씬 익숙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이 손끝에서 되살아났다.
시온은 짧게 중얼거렸다.
“…아직 기억나네.”
엘리아나는 그런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사람 구하려고 물 위 바지선까지 뛰어내려온 사람.
그런데 지금은 누구보다 침착하게 시스템을 복구하고 있었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꽤 멋있었다.
모니터 수치가 99%에서 멈췄다.
정적.
그리고—
78%
52% 31% 25% ...위험 수치가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메인 무대 현장에서도 외침이 터졌다.
“제어권 복구됐습니다!”
“원격 명령 끊겼습니다!”
“전력 안정화 성공!”
한채린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굳어 있던 손끝에 힘이 조금 풀렸다.
“…해냈군요.”
서유진이 옆에서 슬쩍 웃었다.
“채린아.”
“왜.”
“너 방금 엄청 안심했다.”
“아니야.”
“아닌 얼굴은 아닌데?”
“유진아, 조용히 해.”
"당연히 안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잖아."
하지만 한채린의 귀 끝이 아주 미세하게 붉어져 있었다.
강 위 바지선.
엘리아나는 시온을 바라봤다.
“정치만 모르시는 게 아니었네요.”
“저도 방금 기억났어요.”
“대통령님, 더 멋있어졌는데요?”
시온이 황당한 얼굴로 돌아봤다.
“지금 또 플러팅입니까?”
“네.”
“너무 솔직하신데요.”
엘리아나는 웃으며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원래 마음에 드는 사람은 빨리 표시하는 편이라서.”
순간 시온 숨이 턱 막혔다.
가까웠다.
생각보다 훨씬.
푸른빛 눈동자와 샴페인 향이 아주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오민석은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저 여기 있습니다… 진짜로요…”
시온은 괜히 헛기침했다.
“…지금 위험 상황입니다.”
“알아요.”
엘리아나는 웃으며 말했다.
“근데 원래 사람은 위험할 때 제일 솔직해지잖아요.”
그 순간.
스피커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
느긋한 목소리였다.
“생각보다 훨씬 재밌군, 대통령.”
시온 표정이 굳었다.
“어디 있지?!”
“곧 만나게 될 거다.”
지지직—
통신이 끊겼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졌다.
구조팀과 경호팀이 바지선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바깥 공기를 길게 들이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드디어 나왔네요.”
시온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봤다.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하지만 마음 한쪽은 더 무거워졌다.
정체불명의 적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끝난 게 아니었다.
엘리아나는 시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통령님.”
“네?”
“다음에도 저 구하러 직접 와주실 거죠?”
시온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그럴 일이 없어야 되지만.. 가능하면요.”
엘리아나도 따라 웃었다.
“약속처럼 들리는데.”
강 위 아침 햇살 속에서,
다음 싸움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문장이 천천히 이어졌다.「세계평화프로젝트가 찾는 사람은 한 사람을 포기해서 다수를 구하는 지도자가 아니라—」「끝까지 아무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다.」강시온은 마지막 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오랫동안 찾아 헤맨 답이었다.그런데 막상 눈앞에 나타나자 안도보다 먼저 묘한 두려움이 밀려왔다.“이게 정말 기준이었다면.”강시온이 낮게 말했다.“저는 좋은 선택만 한 사람이 아닙니다.”“망설인 적도 많고, 제 고집 때문에 위험을 키운 적도 있습니다.”한채린은 곧바로 부정하지 않았다.대신 문서 아래쪽에 붙은 평가표를 펼쳤다.「판단 속도 낮음.」「위험 부담 높음.」「개인 희생 가능성 과도함.」강시온이 씁쓸하게 웃었다.“정확하네요.”“예.”“한 실장님은 조금도 감싸 주지 않으십니까?”“사실을 감추는 건 감싸는 일이 아닙니다.”한채린은 다음 줄을 가리켰다.「단, 후보 42번의 선택 이후 주변 참여 인원이 지속적으로 증가함.」강시온의 시선이 멈췄다.“주변 참여 인원.”“각하께서 혼자 해결한 사건은 거의 없습니다.”한채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이번에는 문서를 읽는 사람의 말투가 아니었다.“경호팀은 명령 범위를 넘어 움직였고, 비서실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계획을 다시 검토했습니다.”“각국 대표들도 처음에는 각자의 이해관계를 앞세웠지만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왔
몇 걸음 뒤, 한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책을 읽습니다.”강시온이 고개를 돌렸다.“어떤 책입니까?”“그 질문까지는 다음에 답하겠습니다.”강시온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다음이 또 생겼네요.”한채린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걸음을 빨리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어깨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로 나란히 걸었다.강시온은 그 거리를 억지로 좁히지 않았다.한채린이 먼저 알려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그 사람을 알아가는 방법이었다.봉투를 열지 않은 채 보낸 시간이었지만 강시온의 마음은 오히려 정돈되고 있었다.누군가 만든 기준보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가 더 선명했다.다음 날.오전 8시 14분.대통령 관저 서재.강시온과 한채린은 마주 앉아 있었다.한채린이 봉투를 책상 중앙으로 밀었다.“이제 확인하시겠습니까?”강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겠습니다.”“도망친 적은 없습니다.”“미룬 것도 비슷하지 않습니까?”“생각할 시간을 가진 겁니다.”강시온은 그녀를 보며 웃었다.“한 실장님이 그렇게 말해 주면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그는 봉인을 뜯었다.첫 장에는 마흔두 명 후보의 능력 평가가 적혀 있었다.외교 협상.위기 대응.조직 통솔.국제 정치 경험.강시온의 이
오후 4시 26분.대통령 관저 뒤편 산책로.오전 일정을 마친 강시온은 봉인된 서류를 손에 든 채 정원 입구에 서 있었다.「후보 42번 최종 선정 기준」“오늘은 보지 않으실 생각입니까?”강시온은 봉투를 내려다보다 작게 웃었다.“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닙니다.”“그럼요?”“열어 버리면 또 누군가가 정한 제 이야기에 끌려갈 것 같아서요.”그는 손끝으로 봉투 가장자리를 쓸었다.“어제는 적어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것 같았습니다.”“그런데 이걸 읽으면 다시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까 봐 조금 겁납니다.”한채린은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산책로 안쪽을 바라봤다.“잠시 걸으시겠습니까?”두 사람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지나며 잔잔한 소리를 냈다.이 길에는 일정한 거리를 둔 경호 인력만 보였다.강시온은 봉투를 든 손을 뒤로 감췄다.“한 실장님은 제가 저 문서 때문에 달라질 것 같습니까?”“어떻게 달라진다는 말씀이십니까?”“선택된 이유를 알게 되면 그 이유에 맞춰 살아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그러면 각하답지 않게 행동하실 겁니까?”강시온이 그녀를 돌아봤다.한채린은 앞을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문서가 각하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각하가 살아온 방식을 누군가 뒤늦게 정리한 겁니다.”“순서가 바뀌면 안 됩
“지금 제 앞에 있는 사람이 한 실장님이니까요.”한채린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강시온은 아무렇지 않게 생선구이 접시를 두 사람 사이로 조금 더 가까이 밀었다.“이 반찬은 혼자 먹기엔 많습니다.”“각하께서 드시면 됩니다.”“그러면 또 한 실장님은 국만 드실 것 같습니다.”“저는 원래 많이 먹지 않습니다.”“방금도 직원에게는 다친 손부터 보라고 했습니다.”“예.”“저도 지금 같은 마음입니다.”강시온은 젓가락으로 생선살을 조심스럽게 발라 가운데에 올려놓았다.“이 정도면 공동 식사 아닙니까?”한채린은 작게 웃음을 삼켰다.“그런 기준은 처음 듣습니다.”“제가 방금 만들었습니다.”“대통령 권한으로요?”“아닙니다.”강시온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같이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아서요.”잠시 침묵이 흘렀다.한채린은 결국 가운데 놓인 생선살을 하나 집었다.강시온도 아무 말 없이 식사를 이어 갔다.두 사람은 같은 반찬을 나누며 조용히 식사를 이어 갔다.화려한 대화는 없었다.하지만 한채린은 평범한 일상을 함께하는 시간이 이상하게 편안했다.그 평범함이 누구보다 특별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관저 내부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창밖으로 햇살이 길게 복도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대통령 관저 식당.오전 11시 46분.강시온과 한채린은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았다.따뜻한 국과 생선구이, 몇 가지 나물 반찬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강시온은 숟가락을 들었다가 맞은편의 한채린을 바라봤다.“한 실장님.”“말씀하십시오.”“제 과거를 전부 보고 나니까 제가 조금 달라 보입니까?”한채린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도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아니요.”“조금도요?”“오히려 지금과 같았습니다.”강시온의 손이 숟가락 위에서 멈췄다.한채린은 국그릇으로 시선을 내리며 덧붙였다.“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눈앞의 사람을 먼저 보셨고, 지금도 마찬가지니까요.”“저는 대통령이 되고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습니다.”“어떤 부분이 말입니까?”“처음에는 보고서 한 장도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외교 용어를 들으면 오 비서관님에게 몰래 뜻부터 물어봤고요.”강시온이 멋쩍게 웃었다.“지금은 적어도 대통령처럼 보이지 않습니까?”“때에 따라 다릅니다.”“생각보다 냉정한 평가네요.”“각하께서 원하신 게 솔직한 답변 아닙니까?”강시온은 대꾸하지 못하고 밥을 한 숟갈 떴다.대통령이 된 뒤 수많은 일을 겪었다.각국 정상들과 협상했고.폭발 현장에 뛰어들었으며.자신을 끌어내리려는 사람
강시온도 뒤늦게 자신의 말을 의식했다.“이상하게 들렸습니까?”“조금 갑작스럽기는 했습니다.”“못 들은 척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이미 들은 말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습니다.”강시온이 작게 웃었다.“그래서 더 곤란합니다.”그때 엘리베이터가 가볍게 흔들리며 멈췄다.조명이 한 차례 깜빡였다.한채린이 즉시 비상 호출 버튼을 눌렀다.―보안 시스템 점검으로 잠시 운행이 중단됐습니다.―곧 재가동하겠습니다.강시온이 벽에 등을 기댔다.“조금 더 대화할 시간이 생겼네요.”“무슨 이야기를 더 하시려고요?”“한 실장님은 기록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면접에 늦은 저와 아이들에게 마지막 돈을 준 저를 봤을 때요.”한채린은 잠시 답을 고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답답했습니다.”“제가요?”“누군가를 도운 것 때문이 아닙니다.”“그 뒤의 일을 전부 혼자 감당했기 때문입니다.”“면접에 늦은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고, 돈이 부족해진 뒤에도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제가 선택한 일이니까요.”“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강시온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예전보다는 덜합니다.”“무엇이 달라졌습니까?&rdq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