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대통령 집무궁 국가위기대응회의실.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누구도 피곤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대형 스크린에는 테러 현장 정리 상황, 해킹 분석 자료, 엘리아나 관련 영상 캡처, 전국 경계 태세 현황이 동시에 떠 있었다.
회의실 안 공기는 무거웠다.
커피 향과 긴장감이 뒤섞여 있었다.
누군가는 세 번째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누군가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놓은 채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강시온은 회의실 중앙 자리에 앉아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원룸 바닥에서 컵라면을 먹던 백수였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 전체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사실이 아직도 현실감이 없었다.
“각하,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한채린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하지만 눈 밑의 피로는 숨길 수 없었다.
그녀 역시 거의 하루 넘게 쉬지 못한 상태였다.
첫 보고는 치안 상황이었다.
임태건이 앞으로 나섰다.
“전국 주요 시설 경계 강화 완료.”
“공항, 항만, 발전소, 통신망 보호 인력 증원.”
“축제장 인근 시민 대피 완료.”
“현재까지 폭발 관련 중상자는 없습니다.”
짧고 정확한 보고였다.
시온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운이 좋았습니다.”
임태건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다음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시온의 얼굴도 조금 굳었다.
“좋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제가 더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회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몇몇 참모진이 서로 눈치를 봤다.
오민석이 작게 속삭였다.
“솔직한 지도자…”
한채린은 익숙하다는 듯 대답했다.
“결정하시면 됩니다.”
“무엇을요?”
“우선순위를 정하시면 됩니다.”
시온은 순간 더 어려워졌다.
백수 시절엔 선택지가 단순했다.
오늘 컵라면 먹을지 편의점 도시락 먹을지 정도.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어떤 선택 하나가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두 번째 보고는 전산 분석팀이었다.
젊은 연구원이 긴장한 얼굴로 설명했다.
“가면 인물의 영상은 다중 우회망을 사용했습니다. 일반 추적은 불가능합니다.”
“음성 역시 실시간 변조 기술입니다.”
“다만 배경 잡음에서 특정 주파수 반복 패턴이 확인됐습니다.”
화면에 복잡한 파형이 떴다.
시온은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다 말했다.
“심전도 같네요.”
회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연구원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항만 레이더 주파수입니다.”
“…아.”
오민석이 빠르게 메모했다.
“각하의 솔직함, 오늘도 유지 중입니다.”
“그건 이제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네요.”
한채린이 핵심만 정리했다.
“영상 촬영 장소는 항만 또는 대형 물류 창고 구역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 다시 항만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전국 항만은 수백 곳입니다.”
“아…”
“그리고 상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쉽지 않았다.
시온은 다시 스크린을 바라봤다.
타이머.
14시간대.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그때 외교 라인 보고가 들어왔다.
“프랑시아 측 추가 메시지 도착.”
회의실 공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화면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떠 있었다.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마라.]
시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프랑시아도 점점 압박 수위를 올리고 있었다.
당연했다.
딸이 납치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 딸은 세계 강대국의 후계자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교 문제는 눈덩이처럼 커진다.
한채린이 새로운 안건을 꺼냈다.
“국민 대상 긴급 담화가 필요합니다.”
“지금입니까?”
“네. 테러 직후 정부가 침묵하면 불안이 커집니다.”
오민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검색어 1위가 ‘또 터지나’입니다.”
“2위는요?”
“‘대통령 괜찮나’입니다.”
시온이 잠깐 멈칫했다.
“…그건 좀 감동인데요?”
“3위는 ‘루카 어디 감’입니다.”
“…역시 톱스타군요.”
“4위는 ‘비서실장 정체’입니다.”
시온은 피식 웃었다.
“한 실장님 팬클럽도 생기겠는데요?”
한채린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싫습니다.”
“왜요?”
“귀찮습니다.”
오민석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미 생겼을 것 같은데…”
“들립니다.”
“죄송합니다.”
시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국민을 안심시키는 말.
거짓 없이.
하지만 흔들리지 않게.쉽지 않았다.
“원고 준비됐습니까?” 한채린이 물었다.
“없습니다.”
“제가 작성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모두의 시선이 시온에게 향했다.
“이번에는 제가 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한채린의 말이 끝난 뒤 강시온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수없이 미뤘던 말인데, 막상 허락을 받고 나니 준비했던 문장들은 필요 없었다.“좋아합니다.”한채린의 눈빛이 멈췄다.“한채린이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처음에는 저도 잘 몰랐습니다.”강시온이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늘 옆에 계셔서 의지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일이 없어도 보고 싶었고, 안 보이면 찾게 됐습니다.”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대통령이라서 제 곁에 있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비서실장이라서 옆에 계셨으면 하는 것도 아니고요.”강시온은 결국 가장 쉬운 말로 돌아갔다.“그냥 제가 한채린이라는 사람 옆에 있고 싶습니다.”한채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시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제가 너무 늦었습니까?”“많이 늦으셨습니다.”강시온의 표정이 굳자 한채린이 아주 작게 웃었다.“그래도 기다렸습니다.”이번에는 강시온이 말을 잃었다.한채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도 처음에는 이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각하를 걱정하는 것도, 찾는 것도 업무라고 생각하면 편했으니까요.”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걸 업무라고 부르는 게 더 이상해
한채린이 그를 바라봤다.“그렇게 멀리 앉으실 필요는 없습니다.”강시온이 고개를 돌렸다.“가까이 앉아도 됩니까?”“아까는 제 어깨에도 기대셨잖습니까.”강시온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그건 꽤 강력한 근거네요.”그는 한채린의 옆자리에 앉았다.어깨 사이에 손 하나 들어갈 만큼의 거리만 남았다.멀리서는 아직 박수와 음악이 이어지고 있었다.한채린이 조용히 말했다.“오늘은 이상하게 그 소리가 멀게 들립니다.”“저도요.”강시온은 정면을 바라봤다.“지금은 저쪽보다 여기가 더 신경 쓰여서요.”한채린의 손이 무릎 위에서 잠깐 멈췄다.강시온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대신 자신의 손을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한채린도 손을 치우지 않았다.둘 사이의 거리는 그대로였지만, 먼저 물러나는 사람도 없었다.서로 기대지도, 붙잡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굳이 멀리 있을 이유가 없는 사이 같았다.강시온이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한채린이 그 움직임을 보고 물었다.“왜 그러십니까?”“괜히 손이 움직일 것 같아서요.”“무슨 뜻입니까?”강시온이 그녀의 손을 한번 내려다봤다.“오늘은 안 잡으려고요.”한채린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왜요?”이번에는 질문이 그녀에게서 먼저 나왔다.강시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후 6시 19분.World Harmony Fest 행사장 뒤편 정원.강시온은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한채린의 태블릿이 무대 뒤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정원 끝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한채린은 난간 앞에 서서 멀리 행사장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늘 다음 일을 준비하던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한채린이 먼저 그를 알아차렸다.“각하.”강시온이 가까이 다가갔다.“여기 계셨습니까?”“잠시 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태블릿까지 두고요?”한채린이 짧게 웃었다.“그 정도로 급하게 나온 건 아닙니다.”“저한테는 꽤 큰일처럼 보였습니다.”“왜요?”“한 실장님이 태블릿을 두고 자리를 비우는 건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한채린은 다시 행사장 쪽을 바라봤다.멀리서 폐막을 알리는 음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강시온은 그녀 옆에 섰다.이번에는 이유를 재촉하지 않았다.잠시 뒤 한채린이 먼저 말했다.“연설을 듣고 있으니까 조금 이상해졌습니다.”“뭐가요?”“처음 각하를 만났던 날이 생각났습니다.”강시온의 표정이 멈췄다.대통령이 된 이유조차 몰랐고, 일정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날.“좋은 기억은 아닐 것 같은데요.”“그때는 아니었습니다.&rdq
조금 전까지 빠르던 심장이 천천히 제 속도를 찾았다.“일 분 됐습니다.”강시온은 아쉬운 듯 몸을 일으켰다.“정확하시네요.”“제가 시간 관리를 잘하니까요.”“다음에는 조금 느슨하게 부탁드립니다.”“상황봐서요.”그때 행사 담당자가 다가왔다.“각하, 준비됐습니다.”강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한채린이 그의 눈을 한번 보고는 짧게 말했다.“잘하고 오십시오.”“예.”강시온은 무대로 걸어 나갔다.조명이 켜지고 박수가 쏟아졌다.폭발로 멈췄던 행사장.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강시온이 연단 앞에 섰다.“우리가 오늘 다시 모인 이유는 누군가가 이겼기 때문이 아닙니다.”객석이 조용해졌다.“끝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강시온은 원고에서 시선을 들었다.“저는 대통령이 된 뒤 세계평화라는 말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객석에서 작은 웃음이 흘렀다.“솔직히 처음에는 저도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습니다.”무대 아래 한채린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강시온이 객석을 바라봤다.“평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무슨 일이 일어나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선택이었습니다.”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것.혼자 해결하려 하지 않는 것.사람을 숫자로 계산하지 않는 것.그것이 그가 이곳까지 오며 배운 평화였다.“그래서 오늘 새로운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대형 화면에 문장이 나타났다.「NEW WORLD PEACE P
다음 날 오전 10시 20분.대통령 관저 집무실.강시온은 소파에 앉아 폐막 연설문을 읽고 있었다.“너무 거창하지 않습니까?”맞은편에 있던 한채린이 물었다.“어느 부분이요?”강시온이 태블릿을 돌렸다.“‘대한민국은 새로운 국제 질서를 이끄는 중심 국가가 될 것입니다.’”“외교팀에서 작성한 문장입니다.”“그래서 저랑 안 맞나 봅니다.”“어떻게 바꾸고 싶으십니까?”강시온은 잠시 생각했다.“중심이라는 말을 빼고 싶습니다.”“이유는요?”“이번에 알았잖습니까.”강시온이 그녀를 바라봤다.“혼자 앞에 서는 것보다 옆에 누가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거.”한채린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대한민국이 세계 위에 서겠다는 말처럼 들리는 건 싫습니다.”“그럼 어떤 나라가 되고 싶으십니까?”“사람들이 필요할 때 모일 수 있는 곳.”강시온이 말했다.“누가 위에 있는지가 아니라 같이 움직일 수 있는 곳이요.”한채린이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그게 훨씬 각하답습니다.”강시온이 고개를 돌렸다.생각보다 가까웠다.한채린은 아무렇지 않게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그럼 이 문장도 수정하는 게 좋겠습니다.”강시온은 화면보다 그녀를 보
한채린은 다음 동선을 확인했다.“윤 대표님은 각하라는 사람보다 판단을 의심했습니다.”강시온이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한 실장님은 처음에 저라는 사람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까?”“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하십니까?”“윤 대표님한테 인정받고 나니까 욕심이 생겼습니다.”“무슨 욕심입니까?”“한 실장님한테는 언제부터 괜찮은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어서요.”한채린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지금은 업무 중입니다.”“업무 끝나면 물어봐도 됩니까?”“그때까지 기억하고 계시면요.”“그건 절대 안 잊습니다.”한채린이 한 박자 뒤에 덧붙였다.“대신 각하께서 먼저 하셔야 할 말씀도 잊지 마십시오.”강시온의 걸음이 잠깐 멈췄다.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피하지도 않았다.오후 5시 20분.World Harmony Fest 폐막 행사장.아침까지 비어 있던 객석은 각국 대표단과 초청 인사들로 가득 찼다.무대 위 조명이 하나씩 켜졌다.폐막식은 이제 마지막 순서를 향하고 있었다.강시온은 무대 옆에서 객석을 바라봤다.“다시 다 모였네요.”“예. 참가국 전원 참석했습니다.”객석 한쪽에는 윤도현도 약속대로 앉아 있었다.강시온과 눈이 마주치자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곧 행사장의 조명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