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세레니아에 머무는 동안 베르덴의 크리스마스를 놓쳤지만 아직 방학이었고 연말에는 가족들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돌아온 김에 짐을 조금 정리하고 곧장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가족들 선물을 챙겨 넣은 뒤 앨런을 불러 함께 집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강지연은 준비해 온 선물 세 개를 꺼내 조수석 위에 올려두었다.“새해 복 많이 받아요. 이건 한 사람당 하나씩이에요. 대신 전해 주세요.”“아, 이건...”앨런이 잠시 난처해했다.“별거 아니에요. 늘 고생 많잖아요.”강지연이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아가씨.”“천만에요.”앨런은 그녀를 강희라의 집 앞에 내려주고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홍순자가 다가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연달아 말했다.“말랐다, 말랐어.”도대체 어른들 눈에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안 말랐다고 하는 걸까.강지연은 난감한 얼굴로 할머니를 안고 애교를 부렸다.“이번에 가서 고기만 먹고 왔어요. 오히려 오 킬로는 쪘다니까요. 더 찌면 춤 못 춰요.”홍순자는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흘겨보았다.“안 쪘어.”그때 강희라가 계단을 내려오며 웃었다.“명절에 네가 없으니까 집이 허전하더라. 예전엔 시우랑 나 둘만 있어도 잘 지냈는데 말이야. 역시 한 번 익숙해지면 돌아가기 힘들어.”강시우도 뒤따라 내려오며 거들었다.“맞아. 네가 크리스마스에 집에 안 오니까 엄마가 하루 종일 나만 보면 트집이야.”강지연이 낄낄 웃었다.“고모, 혹시 오빠한테 결혼하라고 하셨어요?”“그건 아니고.”강희라가 담담하게 말했다.“난 결혼 재촉 안 해. 다만 밖에 애는 없는지만 물어봤지. 혼자 사는 건 상관없는데 혹시 누군가한테 상처 주고 있는 건 아닌지.”“엄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강시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틀린 말 했니? 서른이 넘도록 소문 하나 없는 것도 이상하잖아. 엄마가 구식이라서가 아니라 혹시 건강에 문제가 있나 걱정돼서 그래.”강시우는 말문이 막혔다. 이 집 안엔 여자들뿐인 데다 여동
“그럼 난 이만 갈게. 두 사람도 즐거운 시간 보내.”온하준은 끝까지 웃는 얼굴이었다. 민다혜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단장님, 저 사람 웃는 거 너무 여유 있지 않아요?”강지연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 축제 시장의 불빛 속에서 온하준도 마침 뒤를 돌아 그녀를 향해 가볍게 미소 지었다.요즘 들어 온하준은 참 자주 웃었다. 그리고 그는 웃을 때 꽤 예쁘기도 했다.고등학생 때 그를 좋아했던 이유도 사실 그것 때문이었다. 늘 싸늘할 정도로 차가운 기운을 두르고 있었지만 가끔 웃을 때면 겨울 햇살처럼 눈 부셨다.여전히 서늘한데 묘하게 사람을 흔들어 놓는 그런 미소였다. 그런데 결혼한 오 년 동안 그는 거의 웃지 않았다.‘아마도 나는 너를 웃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겠지. 그래도 이제는 괜찮았다. 어차피 남남이 되었고 저렇게 환하게 웃게 해주는 사람을 만났다면 그것도... 아, 젠장. 저런 인간이 운까지 좋은 게 세상 이치가 맞나. 역시 못된 놈들은 인생이 술술 풀린다더니, 하늘이 참 불공평하네.’온하준은 김밥을 발견하고 신이 난 얼굴로 안나에게 말했다.“이거 먹어볼래? 너 김밥 먹어본 적 없다고 했잖아. 맛이 같은지 확인해 보자.”안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그런데 요즘 너 되게 행복해 보여.”“그래 보여?”“응. 이해가 안 돼.”안나는 살짝 빈정거리듯 말했다.“전처한테 관심도 못 받는데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데?”온하준은 고개를 돌려 강지연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그녀가 행복해 보이잖아. 그걸로 충분해.”강지연은 다음 날 정오 비행기였고 공항에서 온하준을 다시 마주치지는 못했다.이번 세레니아 일정에는 앨런을 데려오지 않았던 터라 가족들은 꽤 걱정했는데 돌아오자마자 앨런이 정확히 공항에 나와 있었다.그는 민다혜까지 함께 태워 먼저 기숙사에 내려주고 다시 강지연을 학교 근처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집 앞에 도착하자 문 앞에 커다란 상자가 놓여있었다.“이게 뭐죠?”강지연이 놀라자 앨런은 즉시 그녀를
강지연은 이 집에서 춤을 마치고 민다혜, 아이들과 함께 다음 집으로 향했다. 뒤에서는 온하준이 또다시 휴대전화를 꺼내 영상을 찍고 있었다.민다혜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단장님, 왜 저는 빵집 사장님이 단장님이랑 더 친해 보일까요?”강지연은 웃으며 솔직하게 말했다.“내 전남편이야.”“네?”민다혜는 놀란 표정으로 굳었다가 곧바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그것도 모르고 저는 저 사람이랑 그렇게 떠들고 웃은 거예요? 제 입장은 뭐죠? 단장님, 저는 저 사람을 미워해야 해요, 아니면 원망해야 해요?”강지연은 그 반응이 우스워 피식 웃었다.“상관없어. 다 지난 일이고 이제 나랑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아니죠, 전 안 돼요.”민다혜는 괜히 결연해졌다.“이렇게 좋은 단장님이랑도 이혼한 사람이면 분명 좋은 사람은 아닐 거예요.”강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자, 이제 우리 차례야. 춤추자.”아이들의 음악과 노랫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경쾌한 리듬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었고 그런 옛 인연을 떠올릴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 모든 것은 이미 바람에 흩어져 사라진 지 오래였다.오후에는 민다혜와 함께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갔다. 한번 발을 들이니 좀처럼 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따뜻한 와인, 구운 사과, 수제 베이커리, 현지 소스와 간식들, 심지어 김밥까지 정말 없는 게 없었다.시장의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의 손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특히 눈을 떼기 힘든 건 공예품들이었다.디자인 감각이 살아 있는 니트 모자, 수제핸들, 장신구, 목제 장난감, 양모 제품들까지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강지연은 전부 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한 항아리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원래도 그릇이나 병 같은 물건을 좋아했는데 이 항아리는 유독 마음에 들어왔다.하지만 이미 손에는 몇 개의 쇼핑백이 들려 있었고 이건 들고 가기도, 보내기도 애매했다. 강지연은 항아리를 안은 채 한참을 놓지 못했다.“단장님, 안고 계세요. 제가 사
강지연은 지도교수를 따라 한 달간 조사를 이어갔다. 마지막 주에는 더블린에서 이틀을 남겨두었다. 지도교수는 전통 축제가 있다며 다른 분위기도 한번 느껴보자고 했다.이번에도 숙소는 민박이었다. 민박 주인은 지도교수의 오랜 친구로 그가 이곳에 올 때마다 늘 이 집에 머물렀다고 했다.이번 조사 첫날 세레니아에 도착했을 때도 바로 이곳이 숙소였다.민박 주인은 축제 날이 되면 아이들이 분장하고 집집이 다니며 춤을 춘다고 설명해 주었다. 강지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지도교수가 웃으며 말했다.“그럼 두 사람도 같이 참가해 보지 그래요?”“저희가 무슨 아이도 아니고요.”강지연이 쑥스러워하자 민박 주인과 지도교수는 동시에 웃었다.“우리 눈엔 다 애들 같아서 그래요.”강지연과 민다혜는 그 말에 크게 웃었다.“춤추면서 모은 돈은 전부 기부할 거예요.”지도교수가 덧붙였다. 그렇다면 해볼 만했다.축제 당일, 강지연과 민다혜는 아이들처럼 분장하고 현지 아이들에게서 춤 동작을 배웠다. 즉석에서 익힌 동작을 그대로 써먹으며 집집이 찾아가 공연을 했다.그날은 큰 눈이 내렸다. 도시 전체가 새하얗게 덮였지만 축제의 열기를 막지는 못했다. 곳곳에서 음악과 노랫소리가 흘러나왔고 마치 겨울 동화 속에 들어온 듯했다.강지연과 민다혜는 아이들과 함께 동네를 돌며 한 집, 또 한 집 춤을 췄다. 몸이 후끈후끈해질 즈음 또 한 집의 문을 두드렸다.문이 열리며 환한 얼굴이 나타났다가 잠시 굳더니 곧 더 큰 미소로 바뀌었다.민다혜가 강지연보다 더 들떠서 웃었다.“와, 진짜 이렇게 또 만날 수도 있네요!”문을 연 사람은 온하준이었다. 그는 민다혜를 보며 웃었다.“그러게요. 눈보라가 너무 심해서 더는 이동 안 하려고요. 그냥 돌아가서 내년 봄에 다시 올 생각이에요.”그는 민다혜를 향해 웃고 있었지만 시선은 잠깐 강지연을 스쳤다. 마치 설명이라도 하듯이.강지연의 눈에는 집 안에 있는 안나가 먼저 들어왔다. 안나가 웃으며 손을 흔들자 강지연도 가볍게 손
“안나, 요즘은 내가 꿈속에 있는 건지 현실에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온하준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강지연이 전에 물었잖아. 왜 갑자기 차유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 하느냐고.”“그런데 그 이유를 나한테도 말 안 해줬잖아.”안나는 그가 이제는 말해 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온하준은 말하지 않았다.그저 웃으며 시선을 아주 먼 곳에 두었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도로 위로 정말로 한 대의 차가 전속력으로 달려오기라도 할 것처럼.강지연은 그 마을에서 여섯 날을 머물렀다. 매일의 일과는 단순했다.마을의 노인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전해 내려온 춤의 역사와 규범을 배우고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 춤을 익히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춤을 다시 그들 앞에서 보여주는 것.차유준이 남긴 문장처럼 이곳은 바깥세상을 잊게 만드는 곳이었다.그러나 언제까지나 머물 수는 없었다. 결국은 다음 장소로 떠나야 했다.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세션에 참여해 여러 최정상급 무용수와 교류를 마친 뒤 다시 길을 나설 시간이 왔다.마을에서의 마지막 밤, 강지연은 친구들과 늦도록 춤을 췄고 민박으로 돌아와 지도교수와 민다혜 그리고 온하준과 안나와 다시 한자리에 앉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는 자리였다.“다들 앞으로의 여정도 순조롭기를 바랄게요.”온하준은 일부러 어색할 만큼 담담한 얼굴로 지도교수와 동료들에게 잔을 들었다. 물론 강지연의 잔에도 가볍게 부딪쳤다.“이제 우리는 길이 갈라지네요.”온하준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강지연 일행은 전통 춤이 남아 있는 마을들을 찾아갈 예정이었고 온하준과 안나는 차유준이 지나간 또 다른 방향으로 떠날 계획이었다.“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술이 들어가자 민다혜의 감정은 한층 솔직해졌다. 이 일주일 동안 매일 같이 함께 식사했고 어떤 밤에는 같은 술집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게다가 민다혜는 원래도 쿠키 하우스의 디저트를 좋아했기에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난 인연이 괜히 반가웠다.“만날 겁니다.”온하준
온하준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강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너도 모르는 거네.”“아니야, 알아.”온하준이 서둘러 말했다. 강지연은 말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그에게 여자 친구가 없었다는 건 알아.”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가 다시 고개를 든 온하준은 어딘가 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하지만 일기에 적혀 있는 춤추는 여자가 누구인지는 몰라.”강지연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꿈속에서 해안선을 따라 질주해 오던 그 사람.지금은 꿈에서 깨어났지만 여전히 생명력이 폭발하듯 살아 있는 느낌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왜 그래?”온하준은 강지연의 표정이 달라진 걸 느끼고 물었다.강지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가끔 사람 마음이 참 모순적이잖아. 그렇게 좋은 사람이 평생 혼자였다고 생각하면 너무 아깝고 그런데 또 반대로 만약 누군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그 사람은 그를 잃고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오래 걸려야 회복했을까 싶어서. 그래서 여자 친구가 있었던 게 나은 건지, 없었던 게 나은 건지 모르겠어.”온하준이 웃으며 되물었다.“그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는 건 어떻게 알아? 우린 같은 반도 아니었고 난 그냥 같이 농구만 했을 뿐이야. 너는 차유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잖아.”강지연이 눈을 흘겼다.“그래도 너보다는 좋은 사람이었겠지.”그 말에 온하준의 웃음이 잠시 멈췄다. 마침 안나가 시야에 없다는 걸 확인한 강지연은 참지 못하고 덧붙였다.“그런데 왜 이렇게 나쁜 남자한테 좋은 여자들이 몰릴까? 신은 진짜 눈이 없는 것 같아.”온하준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가 이내 억지로 풀렸다.“강지연...”그때 마침 지도교수와 민다혜 일행이 다가왔다. 강지연은 더 말하지 않고 짐을 챙겨 그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민다혜는 뒤돌아보며 안나와 온하준에게 손을 흔들었다.“오늘 밤에 약속한 대로 또 한잔해요.”강지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민다혜를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