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정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슬픔도 서운함도 아니었다.
놀람, 그리고 그 뒤를 바짝 따라오는 불쾌함이었다.
예관이 조심스레 말을 얹었다.
"영안공께서는 아직 혼백이 돌아오지 않으신 상태로, 앞날을 장담하기 어려운 처지십니다. 다시 한번 숙고하심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청하는 것입니다."
전생에 수없이 듣고 흘려보냈던 대신들의 화법이, 이제는 서리의 무기가 되어 혀끝에 올랐다.
"나라를 위해 피 흘린 이를 병들었다 하여 외면한다면, 누가 다시 고려를 위해 칼을 들겠습니까. 제가 서가의 이름을 걸고 그분을 지키겠습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전부도 아니었다.
태자의 외가와 가까운 대신 몇이 굳은 얼굴로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한 관료는 무릎 위에 포갠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왕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렸다. 시선이 서리와 이겸의 명패를 지나 이헌에게 머물렀다가, 옆으로— 왕후에게로 옮겨갔다.
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서리를 향한 눈빛에서, 조금 전까지 있던 온기가 조용히 사라져 있었다.
"영안공이 끝내 눈을 뜨지 못해도, 그 뜻을 거두지 않겠느냐."
"거두지 않겠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서가의 후계자가 가문의 이름을 걸었다. 그 선택을 받아들이겠다. 연택을 허한다."
첫 번째 인연을 끊는 데는, 십 년과 한 장의 폐출 문서가 필요했다.
이번에는, 한 이름을 고르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다.
—
서리가 정전을 나선 뒤에도,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열린 문 너머로 매화 문양이 수놓인 옷자락이 회랑 끝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왕후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영안궁도 결국 왕실의 궁이다."
—
서가 저택으로 돌아오자, 마당에 나와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얼떨떨했다.
감씨는 마차에서 내리는 서리를 부축하면서도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늙은 집사와 몇 안 되는 하인들도 서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연택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소문이 저택까지 앞질러 도착해 있는 모양이었다.
"아기씨."
감씨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 영안공을 고르신 거예요? 그, 아직 눈도 못 뜨신다는……"
"응."
서리는 짧게 답하며 겉옷을 벗었다. 감씨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어째서요. 태자 전하도 계셨는데."
"나라를 위해 싸운 분을 병들었다는 이유로 외면할 순 없잖아."
서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감씨가 알아야 할 이유의 전부도 아니었다.
감씨는 더 캐묻지 않았다. 다만 서리의 손을 오래 붙잡았다가 놓았다.
그 손길에서 걱정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안도 같은 것이 함께 느껴졌다.
서리는 그날 밤 홀로 방에 앉아, 태자를 고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확실함을 동시에 곱씹었다. 둘 다 진짜였다.
—
혼인 문서는 사흘 뒤 도착했다.
왕실에서 보낸 관원이 두꺼운 문서 뭉치를 내려놓고 형식적인 설명을 늘어놓는 동안, 서리는 조용히 앉아 첫 장부터 넘겨보았다.
전생의 서리였다면 이런 문서는 훑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헌을 믿었으니까. 혼인 조건이 무엇이든, 결국 사랑이 전부를 지켜줄 거라 믿었던 스무 살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이 조항."
서리가 문서의 한 대목을 손끝으로 짚었다.
"서가의 토지 관리권이 혼인 후에도 제 명의로 유지된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 집행은 누가 합니까?"
관원이 잠시 당황한 얼굴을 하다가 답했다.
"혼인하신 뒤에는 아기씨께서 지정하시는 자가 집행하게 됩니다."
"그럼 여기, 가신들의 인사권도 마찬가지겠군요."
"그러합니다."
서리는 그 조항 옆에 작게 표시를 해두었다.
나중에 다시 확인할 것들이었다.
문서와 사람의 말이 항상 같지는 않다는 걸, 서리는 이미 십 년 치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관원이 돌아간 뒤, 늙은 집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기씨, 예전에는 이런 걸 이렇게까지 살피지 않으셨는데……"
"이제는 살펴."
서리가 문서를 덮으며 말했다.
"그게 다야."
집사는 더 묻지 않았지만, 서리를 보는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임가의 시신이 나왔다는 말은 사흘도 안 되어 도성 안까지 돌았다.영안공 쪽에서 그것을 거두어 조사한다는 말도 함께 돌았다.영안궁 대문 앞에 아이 하나가 나타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문지기가 처음 쫓아냈다. 이튿날 또 왔고, 또 쫓겨났다. 사흘째 되던 날에는 담 모퉁이에 앉아 있다가 발견되었다."임가 일을 묻는다 합니다."백우가 고했다."그 집 시신을 여기서 거뒀느냐고요. 며칠째 근처를 맴돌고 있었습니다.""몇 살쯤 되나.""열 살 안팎으로 보입니다."백우가 잠시 멈췄다."행색이…… 오래 밖에서 지낸 아이입니다."—아이는 마르고 더러웠다. 발에 신은 것은 짝이 맞지 않았고, 손등이 트다 못해 갈라져 있었다.들어와 앉으라 해도 문턱 안쪽에서 더 들어오지 않았다. 무릎에 손을 얹고, 등을 곧게 편 자세였다. 그 자세만은 거리에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이름이 무엇이냐."서리가 물었다.아이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답했다."임준연입니다."—준연을 데리고 간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거적을 걷기 전에 이겸이 아이 앞에 섰다."보지 않아도 된다."준연은 고개를 저었다."봐야 합니다."거적이 걷혔다.아이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만 무릎이 먼저 꺾였다.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손을 뻗지도 못하고 그 앞을 보고만 있었다.한참 뒤에야 목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는 소리라기보다는, 숨이 걸려 나오는 소리에 가까웠다.서리는 다가가지 않았다. 이겸도 그랬다. 아이가 다 울 때까지 아무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해가 제법 올라온 뒤에야 준연이 소매로 얼굴을 닦고 일어섰다."어머니 것부터 물으실 겁니까."아이가 먼저 말했다."제가 임가 사람이 맞는지.""그래야 한다."서리가 답했다."네게 미안한 일이다.""괜찮습니다."—아이는 묻는 것마다 답했다.집 안마당에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는 것. 아버지가 서책을 넣어두던 궤가 안방 뒤편에 있었고, 밑판이 하나 떨어져 그 아래 서찰을 감춰두곤 했다는
객주를 맡았던 자를 데려온 지 사흘째였다.삯을 내주던 자리는 생각보다 허술했다. 정해진 말을 대면 얼마를 내주고, 나무패를 가져오면 얼마를 더 내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 돈이 어디서 들어오는지는 그자도 몰랐다. 달마다 사람이 바뀌었고, 얼굴을 기억하는 자도 없었다.그래도 실은 실이었다. 서리는 그 돈이 들어온 날짜를 하나씩 짚어가며 종이에 옮기고 있었다.백우가 들어선 것은 그 무렵이었다."주군. 다른 건으로 아뢸 것이 있습니다."이겸이 고개를 들었다."도성 밖 야산에서 시신이 여럿 나왔다 합니다."—발견한 것은 관아도 순검도 아니었다.봄부터 비가 시원치 않았다. 논에 물을 대지 못한 곳이 늘었고, 먹을 것이 떨어진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가 뿌리를 캐기 시작한 지 벌써 여러 날이었다.그날도 몇이 괭이를 들고 산등성이를 파고 있었다. 흙이 유난히 무른 자리였다. 괭이 끝에 걸린 것을 뿌리인 줄 알고 잡아당긴 사람이 그대로 주저앉았다.뿌리가 아니었다."한 자리에 여럿이 묻혀 있었다 합니다."백우가 고했다."깊지 않았고요. 흙을 덮은 뒤로 반년쯤 지난 것으로 보인다더군요.""신원은.""알아보기 어렵습니다."백우가 잠시 말을 골랐다."얼굴로는 어렵고, 옷이며 머리카락이 조금씩 남은 정도입니다."서리는 붓을 내려놓았다."인원은요.""어른 넷에 아이 하나입니다."백우가 서리 쪽을 보았다."저희가 찾던 실종자들 가운데 한쪽일 가능성이 있습니다."방 안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가족째 사라진 집이 둘이었다. 하나는 영안궁의 문적을 맡았던 자의 식솔이었고, 다른 하나는 손수건에 수를 놓은 딸이 있던 집이었다."가보아야겠군요."서리가 말했다.—야산에는 이미 관아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거적이 몇 장 깔렸고, 그 위에 흙을 털어낸 것들이 놓여 있었다. 서리는 소매로 코를 가리지 않았다. 전장에서 돌아온 짐수레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맡았던 냄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이겸이 먼저 다가가 하나씩 살폈다. 백우가 곁에서 숫자를 세었
서리가 물었다."그런 밤이 여러 번 있었나.""두 번쯤 됩니다. 그다음부터는 아예 자리만 두고 곧장 나왔고요.""값은 어떻게 받았나.""다음 날 성안 객주에서 받았습니다. 정해둔 말을 대면 셈해줬고요.""객주는 네가 무엇을 팔았는지 알고 있었나.""아닙니다. 그 말만 맞으면 돈을 내줬습니다.""웃돈은.""다음번에 갔을 때 자리에 나무패가 놓여 있으면, 그걸 객주에 가져갔습니다."사내가 손가락을 비볐다."그게 꽤 후해서요. 그 맛에 다녔습니다.""너 말고도 다니는 자가 있었나.""있었겠지요."사내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그런데 서로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날이랑 시각을 다 따로 잡아줬거든요. 저는 제 날에만 갔습니다."—"무엇을 팔았나."서리가 물었다.사내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늘어놓기 시작했다."뭐 대단한 건 아닙니다. 저는 그냥 저잣거리에서 주워듣는 거니까요. 어느 집에 새 사람이 들어왔다더라, 어디는 사람이 바뀌었다더라, 그런 겁니다.""어느 집.""……영안궁 이야기를 꽤 물었습니다."방 안이 조용해졌다."자세히 말해봐라."이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영안공께서 자리보전하신 뒤로 궁에 사람이 얼마나 드나드는지, 새로 들어온 자가 있는지, 밤에 누가 지키는지— 그런 걸 물었습니다."사내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저야 뭐 담 너머로 들은 소리를 옮긴 거지요. 문지기들이 술자리에서 흘리는 말이나, 물건 대는 상인들한테 들은 것들이요.""그것뿐인가.""서가 이야기도 몇 번 팔았습니다."사내가 서리 쪽을 흘긋 보았다."장군댁이 그렇게 되고 나서 남은 재산이 어디로 갔다더라, 옛날 사람들이 아직 붙어 있다더라, 그런 뒷말이요.""언제부터.""글쎄요, 꽤 됐습니다."사내가 셈하듯 눈을 굴렸다."지난겨울 전부터니까…… 반년은 훨씬 넘었지요."서리는 무릎 위에 놓은 손을 조용히 겹쳤다.연택례에서 이름을 부른 것이 봄이었다. 그런데 이 사내가 영안궁과 서가에 관한 말을 팔기
창고를 비워둔 채 지켜보기로 한 것은 이겸의 뜻이었다.문을 도로 잠그고, 장도 원래 자리에 밀어놓았다. 안에서 무엇을 찾아냈는지 아무도 모르게 두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장이 서는 날마다 사람을 몇씩 흩어 앉혀두었다.첫 장이 섰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두 번째 장이 선 밤, 백우가 처음으로 이름 없는 보고를 올렸다. 창고 앞을 두 번 지나간 사내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물건을 사지도, 누구와 말을 섞지도 않았다.세 번째 장에서, 그 사내가 다시 왔다."옷이 달랐습니다."백우가 고했다."지난번엔 짐꾼 차림이었는데, 이번엔 약재 사러 온 행색이었습니다. 들어온 길도 반대쪽이었고요.""확실한가.""걸음이 같습니다. 왼발을 조금 끕니다."백우가 잠시 뜸을 들였다."그리고 창고를 오래 보지 않습니다. 대신 창고가 보이는 자리를 몇 번씩 지나갑니다. 좌판을 들여다보는 척하면서요."이겸은 곧바로 잡으라 하지 않았다."다음 장까지 두어라. 세 번이면 우연이 아니지."—네 번째 장이 선 밤, 사내는 또 왔다.이번에도 옷차림이 달랐고, 들어온 길도 달랐다. 다만 도는 자리는 같았다. 창고 뒤편으로 돌아 담이 무너진 틈을 한 번 들여다보고, 앞쪽으로 나와 좌판 두어 곳을 지나며 다시 그쪽을 살폈다. 그러기를 네 번쯤 되풀이한 뒤에야 자리를 뜨려 했다.백우의 사람이 그 앞을 막아섰을 때, 사내는 곧바로 몸을 틀어 달아났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 뒷골목에서 붙잡혔고, 칼을 뽑거나 끝까지 반항하지는 않았다.—사내는 영안궁 별채가 아니라 도성 안의 조용한 자리로 옮겨졌다.나이는 마흔쯤, 몸집이 작고 눈이 빨랐다. 결박된 채 앉혀놓자 이겸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곧 시선을 내렸다. 상대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인지 가늠하는 눈치였고, 그 가늠이 끝나자 어깨가 축 처졌다."살려주십쇼. 저는 사람 해치는 일은 안 합니다.""무슨 일을 하나.""……소식 나르는 일 좀 합니다."사내가 우물거렸다."누가 어디 갔다더라, 누구네 집에 누가 드나든다더라, 그
궁으로 돌아온 이헌이 왕후의 처소에 든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왕후는 수틀을 무릎에 둔 채였고, 곁에는 오래 부려온 상궁 하나가 서 있었다."아직도 그 아이를 찾고 있다지.""찾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왕후는 바늘을 한 땀 놓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태자의 이름으로 사람을 반년이나 움직였다. 그만하면 되지 않았느냐.""아직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밝혀질 것이 없으니 반년이 지나도 그 모양인 게지."왕후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고요했다."사적인 일에 사람을 계속 붙들어두면 말이 난다. 손을 떼어라. 정 마음에 걸리거든 내 쪽에서 사람을 붙이겠다."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이헌은 그것을 알았고, 그래서 어릴 적부터 이런 말에 늘 눌려왔다. 어머니는 그를 막은 적이 없었다. 다만 어디까지 가도 되는지를 언제나 먼저 정해두었다."오늘 알아낸 것이 있습니다."이헌이 화제를 돌렸다."그 애가 마지막으로 다녀간 곳을 찾았습니다."왕후의 바늘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무엇을 알아냈느냐.""손수건이 두 장이었다 합니다. 짝이 되게 지은 것이라, 하나는 제가 받았고 나머지는 그 애가 지녔다고요."이헌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그날 바깥에 사람이 와 있었답니다. 늘 걸어 다니던 아이가, 그날은 탈것에 올랐고요.""그것뿐이냐.""평소 다니던 길과 반대로 갔다 합니다."그때였다."성 밖으로 나가는 길이라면, 그런 것들이야 흔하지요."상궁이 낮게 덧붙였다. 묻지도 않은 말이었다.이헌은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럴듯한 소리였고, 지금 그의 머릿속은 다른 것으로 차 있었다."저쪽 길로 나간 것들을 마저 뒤지게 하겠습니다.""손을 떼라 하지 않았느냐.""떼지 않겠습니다."예전 같으면 그 자리에서 알겠다고 답했을 것이다. 이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이 옳다는 것과, 그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물러나는 걸음이 문턱을 넘을 때까지, 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문이 닫히고 나서도 왕후는 한동안
반년 동안 사람을 풀어 그 집안의 흔적을 쫓게 했다.친척을 찾아가게 하고, 연고가 있다는 고을에 사람을 보내고, 얼굴을 본 자가 있는지 묻게 했다. 그렇게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보고를 몇 달째 받던 어느 날, 엉뚱한 것이 하나 올라왔다.기름을 대던 상인이 값을 받으러 갔다가 집이 빈 것을 알고, 관아에 문의를 넣었다는 것이었다. 액수가 크지 않고 오래 거래한 집이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는데, 해가 바뀌도록 기별이 없어 그제야 찾아가 보았다고 했다.그 종이를 받아 든 이헌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반년 동안 그 집안을 아는 사람만 뒤지게 했다. 정작 그 집안과 값을 주고받던 자들은 한 번도 세어본 적이 없었다.사람은 숨길 수 있어도 셈은 남는다."그 집과 거래하던 자들을 전부 찾아라."이헌이 일렀다."받을 것이 남았든, 맡아둔 것이 있든 상관없다. 값이 오간 자리는 하나도 빼놓지 마라."그렇게 해서 며칠 뒤에 올라온 것이 종이 몇 장이었다.값을 못 받은 포목상, 손질을 맡겼다가 주인이 끊긴 신발 가게, 심부름을 다니던 아이가 기억하는 마지막 걸음. 그 종이들이 가리키는 곳 가운데 하나가 도성 안쪽의 오래된 바느질방이었다.사람을 보내 캐물었으나 처음에는 소득이 없었다. 접수를 받던 자는 지난달에 그만두었고, 남은 이들은 손님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했다.다만 그중에 손수건 하나를 기억한다는 나이 든 여인이 있다는 보고가 뒤늦게 올라왔다.이헌은 그 여인을 부르게 했다.—자리는 도성 안쪽에 잠시 빌린 사랑채에 마련되었다.옷차림은 낮췄으나 굳이 감추지는 않았다. 마당과 문간에 사람이 서 있었고, 안내를 받아 들어온 여인은 방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몸을 낮추고 있었다."앉아라."여인이 조심스레 앉았다. 눈을 들지는 않았다.이헌은 품에서 그것을 꺼내 상 위에 놓았다.손수건이었다. 오래 접혀 있어 자국이 남았고, 가장자리가 조금 해졌다."이것을 아는가."여인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빛이 드는 쪽으로 기울여 보고, 뒤집어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