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한은 핸드폰을 꺼내 보았고 화면에 떠 있는 이진영의 번호를 보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들과 연락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진영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이진영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공항에서 신하린과 심미연을 봤어.” 강지한은 갑자기 전에 박시훈과 했던 통화를 떠올리며 잠시 멈칫했다. “박유진도 그들과 함께 있었어.” 이진영은 신하린이 박유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수년간 신하린의 마음 속에는 늘 박유진이 있었고 심지어 그와 함께 있을 때도 떠올리는 사람은 항상 박유진이였다. “정말 공항에서 심미연을 봤다고?” 강지한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크게 뛰는 걸 느끼며 물었다. ‘그렇다면 심미연이 아직 살아있다는 거야?’ “그럼. 절대 틀림없어. 살아있는 심미연 씨야.” 이진영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심미연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신하린은 한 번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 그녀의 얼굴에서 본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이진영은 심미연이 정말 살아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심미연 씨 정말 대단해. 모두를 속였어.’‘강지한까지 속인 걸 보면 정말 대단해.’“그럼 그 사람이 진짜 심미연인지 신하린 씨에게 물어봤어?” 강지한이 물었다. 그는 이진영과 신하린 사이의 관계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동안 이들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연락 안 했어.” 이진영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심미연이 사라진 이후 신하린의 정신 상태는 항상 불안정했다. 그들이 함께 있을 때마다 자주 싸웠고 그의 가문과 한씨 가문에 일이 생기면서 그는 처리하느라 바빴고 신하린과의 연락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녀와 만난 횟수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신하린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결국 그녀와 이진영은 약혼한 사이였고 지금 경성의 모든 이들이 그들이 미혼 부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만약 약혼을 취소하면 그녀는 경성에서 다시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삼 년 동안 그녀는 이진영에게 매우 관대했다. 그가 다른 여자를 자기 앞에 데려오지 않는 한 그녀는 모든 것을 눈감아 주었다.방혜자의 방에 도착한 한유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를 보고 조용히 다가가서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뭐 보고 계세요?” 방혜자는 정신을 차리고 한유나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유나야, 언제 왔니? 진영이도 집에 있어. 먼저 진영이한테 가 볼래?” 그녀는 말을 하면서 손을 천천히 뒤로 빼며 마치 한유나와의 접촉을 피하려는 듯 보였다. 한유나는 그 모습에 마음이 조금 아팠지만 빠르게 감정을 누르고 웃으며 대답했다. “진영 씨와 함께 왔어요. 어머니가 점심도 안 드셨다고 하던데 입맛이 없으세요?” 그제야 방혜자는 눈을 들어 이진영을 바라보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왜 다 유나에게 말해주냐? 대체 누구 편인게냐.”그녀가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다정했다. 이 아들은 그녀의 유일한 아들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럼 제가 뭐 좀 만들어 올게요. 나중에 내려와서 드세요. 네?” 한유나는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아.” 방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유나는 일어나서 이진영에게 다가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랑 얘기 좀 해주세요. 저는 뭐 좀 만들어 올게요.” “알겠어요.”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유나는 그의 차가운 얼굴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만약 아버지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면 한씨 가문은 여전히 번창했을 것이고 그녀는 이씨 가문에서 이렇게 홀로 소외된 대우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며 그녀는 여전히 억누를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하인들은 한유나를 보고 공손하
한유나는 잠시 멈칫한 후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약혼을 취소하고 싶으면 그냥 직접 말해줘요. 굳이 이렇게 돌려 말할 필요 없어요.” 그녀는 화가 난 기색도 없이 평소처럼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하지만 이진영은 그녀의 모습에서 어디가 이상한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당신이 동의한다면 약혼 취소는 당신이 먼저 말하는 거예요. 이유는 당신 마음대로 정해도 괜찮아요.”이진영은 마음속으로 신하린을 떠올리며 절대 한유나와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유나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결혼 취소를 내가 제안하게끔 하면 내 체면을 지켜주긴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경성 사람들에게 나 한유나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네요.” 2년 전 아버지가 퇴직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진영은 예비 사위로서 장례식을 주관했다. 그때 그는 장례식을 엄청 성대하게 치렀고 모두가 그에게 의리와 정이 넘친다고 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경성의 모든 여인들은 그녀가 좋은 남자에 든든한 의지처를 만났다고 부러워했다. 그래서 비록 이진영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가기로 결심했다. 이진영같은 이런 사람을 놓치면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진영이 갑자기 결혼을 취소하자고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분명 그들 사이는 늘 아무 일 없이 잘 지내왔는데 말이다. “그럼 내가 먼저 말할게요. 그러면 당신은 피해자가 될 거니까 아무도 당신한테 뭐라고 하지 않을 거에요.” 이진영은 사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냥 한유나가 제안하면 좀 더 체면이 서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한유나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듣고 그는 한유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까지 모두 그가 주관했었다는 걸 떠올렸다. 만약 그가 먼저 결혼을 취소한다고 말하면 한유나는 역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이진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머물 필요도 없었다. 한유나는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곧장 주방을 나섰다. 거실을 지나치려던 순간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이진영의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이진영의 아버지는 그녀가 집에 있는 걸 예상하지 못한 듯 신문을 내리며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나 왔구나. 이리 와서 앉아라.” 한유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려고요.” 사실 그녀는 이진영의 아버지를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해 본 적이 없었다.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지만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잠깐이라도 앉아서 얘기나 하고 가라. 하인에게 진영이를 내려오라고 하겠다.” 그는 안경을 살짝 고쳐 쓰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요. 아버님, 안녕히 계세요.” 한유나는 부드럽게 인사를 건넨 뒤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이진영의 아버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문을 나서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2층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이진영은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자 어머니에게 한마디 전하고 곧장 서재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문을 닫고 아버지 곁에 다가가 앉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너 한유나한테 파혼하자고 했냐?” “네.”이진영은 무의식적으로 등을 곧게 폈다.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의아했다. 아버지는 아까 거실에 앉아 있었고 그가 주방에서 한유나와 나눈 대화를 들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아무 말 없이 그를 그냥 내버려 뒀으면서 왜 이제 와서 따로 부르는 걸까?’“안 된다!”
이진영의 입꼬리가 비웃음으로 살짝 올라갔다. “그러니까 아버지 말은 자신의 앞길을 위해서 자식도 얼마든지 팔아넘길 수 있다는 거네요?” 어릴 때만 해도 그는 아버지가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건 그저 어린 시절의 착각이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이상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그가 거대한 존재처럼 보였던 것뿐이었다. 이진영 아버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이진영, 네가 이제 좀 컸다고 해서 내가 널 통제 못 할 거라 착각하지 마라. 한유나와의 결혼은 무조건 그대로 진행돼야 해. 여기서 멈출 순 없어. 나가!” 이진영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이진영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짙은 피로를 느끼듯 미간을 손으로 눌렀다. 불쾌함과 초조함이 뒤섞인 감정이 그를 덮쳤다. 그는 그제야 이진영은 더 이상 자신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평생 정상에 서는 것을 목표로 살아왔다. 반평생을 바쳐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이제 정말 꼭대기가 보이는데 이 순간에 모든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진영은 차고로 가서 운전석에 앉자마자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꽤 오래 기다린 끝에야 강지한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데?” “어디야?” “병원. 딸이 열나서 입원했어.”“그럼 먼저 딸부터 잘 돌봐. 나중에 괜찮아지면 만나서 얘기하자.” 전화를 끊자마자 이진영은 갑자기 인생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졌다. 한편 강지한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딸에게 죽을 떠먹였다. 강상미는 또랑또랑한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아빠, 일 많이 바쁘지? 그냥 일하러 가도 돼요. 나 혼자서도 괜찮아요.” 딸의 사려 깊은 말에 강지한은 가슴 한구석이 짠해졌다. “아빠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어도 우리 상미를 돌보는 건 아빠밖에 못 해.” 다른 누구에게
강지한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는 네가 말하는 그 오빠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의 엄마는 그의 엄마일 뿐이야. 네 엄마가 될 수는 없단다, 알겠지?” 아직 어린 상미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원하는 사람이 엄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저릿하기도 했다. 강상미는 실망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구나...” 강지한은 딸의 그런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아렸다. “그럼 이렇게 하자. 다음에 그 오빠를 만나 그 오빠한테 직접 물어봐. 엄마를 너랑 나눠 쓸 수 있는지.” 강상미는 금세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바로 그때 강지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박시훈의 전화였다. 그는 조용히 병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그 명의가 드디어 요청을 받아들였어. 직접 병원에 와서 네 딸 상태부터 확인하겠다고 하더라.” “언제 오는데?” 강지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상미에게 드디여 희망이 생겼어!’ “약속한 시간은 오늘 오후 세 시. 병실로 직접 찾아간다고 했어.” “알겠어.” “내가 이렇게까지 힘 써서 의사를 찾아줬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냐?” 박시훈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불만이 묻어 있었다. 강지한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원하는 거 있으면 성 비서한테 말해.” 그리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는 핸드폰을 꽉 쥔 채 한동안 서 있었다. 딸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길수록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결국 그는 또 한번 흡연실로 향했다. 그는 담배를 한 개비 얻어 물고 벽에 기대어 연기를 내뿜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우리 상미가 살 수 있어.’‘정말 다행이야.’“형님, 지금 기분 좋은 거에요. 안 좋은 거야?”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눈앞에 있던 사람이 제자리에 굳었다. 이내 그 여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진찰하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가족들은 나가 주세요.”“방해되지 않도록 할게요. 의사 선생님, 제 딸 좀 치료해 주세요.”강지한은 낯선 사람에게 강상미를 맡기는 게 도무지 불안한 듯했다.“끝까지 그렇게 나오실 건가요? 그럼 제가 돌아가겠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 미간을 찌푸리던 강지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불안해서 그래요. 그쪽이 정말 명의가 맞긴 한지 저는 모르니까요.”‘이렇게 젊은데 명의라고? 사기 치는 거 아닌가?’“친구분한테 물어보면 되잖아요? 계속 여기 있으실 거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녀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바로 그때, 강지한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박시훈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마침 잘됐네.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지한아, 그 의사님은 만났어? 수염 가득한 노인 맞지?”박시훈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났다.강지한은 그 의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방금 들은 목소리를 떠올려 보아도 그 의사는 여자가 확실했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지한아, 왜 말이 없어?”박시훈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그럼 그 명의가 노인이 아니라는 건가? 하지만 그래도 여자일 리는 없을 것 같은데...’“너 그 의사분한테 어떻게 말했어?”강지한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말? 그냥 네 딸이 입원해 있는 환자실 번호를 보내줬지. 그거면 된 거 아니야? 그 외에 뭘 더 말해야 해?”“지한아, 무슨 의미야?”박시훈이 서둘러 말했다.“그래, 명의님이신데 분명 못생겼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네 딸을 살릴 수 있다는 거 아냐? 그럼 된 거지. 뭐가 불만인데?”강지한은 안색이 더 어두워지더니 바로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 그는 더 이상 박시훈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아빠, 잠깐만 나가 계시는 게 어때요? 이 예쁜 언니가 금방 검사해 주실 거예요!”그때, 병실에 누워있던 강상미가 입을 열었
심미연은 잠깐 눈앞의 어린아이를 바라보았다. 강상미의 눈동자는 심태하와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아이는 그 정도로 닮아있었다.순간,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기억은 마치 파도처럼 밀려왔다. 만나보지도 못한 채 작별 인사를 해야만 했던 아이에 대한 기억까지도 말이다. 이는 칼날처럼 그녀의 마음을 찔렀다.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딸을 떠올리며 그녀의 눈가가 서서히 촉촉해졌다.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심미연은 꾹 참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너무 약해 보일까 봐, 용감하게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아이가 혹시나 두려워할까 봐 걱정되었다.강상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워했다. 의문이 가득해 보이는 표정이었다.강상미는 재빨리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고사리같이 작은 손을 심미연의 팔에 살짝 손을 얹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그녀의 상처마저도 치유해 주려는 듯이 말이다.“언니, 제발 슬퍼하지 마요... 싫으시면 거절해도 좋아요. 괜찮으니까 울지 마세요...”어린아이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마치 자신이 무심코 한 말이 그녀를 더 속상하게 할까 봐 걱정되는 듯했다.방 안은 아주 조용했다. 두 사람의 가벼운 숨소리와 창밖에서 가끔씩 들려오는 새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공기 속에는 왠지 모를 묘한 긴장감과 따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심미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강상미의 얼굴을 감싸더니 아이와 오랫동안 마주 보았다. 그녀는 따뜻하고 단단한 눈빛으로 말했다.“너는 엄마가 없니? 네 엄마는?”강상미의 나이는 3살이었다. 심태하보다 정확히 한 달 더 빠르게 태어난 아이였다.즉 이혼하기 전인 4년 전부터 강지한은 이미 다른 여자를 두고 있었다는 것이었다.‘강지한이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면 온지유 아니었나? 온지유는 아이를 유산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 이 아이는 어떻게 된 거지?’순식간에 심미연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엄마는 저를 사
육현성이 입가를 만지며 말했다.“이진영, 네가 감히 나한테 주먹질을 날려? 내가 집에 가서 이다은 저년을 아주 제대로 혼쭐 내줄 거야. 이번엔 최소 몇 달은 못 일어날걸?”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했다.“보아하니 육씨 가문이 요즘 꽤 살 만한가 보네. 감히 나 이건명의 딸을 건드려?”이건명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육현성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감히 어디서 제멋대로 굴어!”그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딸을 육씨 가문에 시집보냈었다. 그래도 육씨 가문은 4대 가문 중 하나인데 비록 육현성이 이다은을 사랑하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할 줄 알았다.그래서 이다은이 이혼하겠다고 했을 땐 괜히 유난 떠는 줄 알았는데 방금 그 모든 생각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이다은이 육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이건명의 등장에 육현성은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 아무리 육씨 가문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집이라도 지금의 이건명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아버님, 화내지 마세요. 이건 오해예요. 저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육현성이 다급히 변명하려 들었다.“됐어. 변명은 필요 없어.”이건명이 이다은의 손을 꽉 잡았다.“다은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너 이혼하고 싶으면 해. 내가 최고로 실력 좋은 변호사를 붙여줄게.”이다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아빠가... 나를 이렇게 감싸준다고? 늘 냉정하기만 했던 사람이?’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정말 감동적인 부녀지간이네요. 좋은 아버지십니다, 정말.”이진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강혁승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나요? 부모 찾으러 왔죠.”이미 이진영이 그의 정체를 눈치챘기에 더 숨길 이유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한 강혁승은 오늘 결판을 보려 했다.“너...
“문자를 보낸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예요!”강혁승의 음울한 얼굴에 스며든 미소는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이건명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멈췄다. 얼굴에 난 깊은 흉터만 아니었다면 이건명 본인과도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었다.하지만 그의 아내가 낳은 자식은 이다은, 이진영 남매 둘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건명 씨는 여기 왜 왔어요? 어서 나가요!”문소영이 다급하게 외쳤고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이렇게 쫓아내려고 안달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죠.”강혁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고 그의 눈빛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왜 저 사람한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 저 사람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어!”문소영은 이건명을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와중에도 이건명을 감싸려 하다니, 그래도 한때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나 보네.’“관련이 없다고요? 저 사람이 내 아버지인데?”강혁승은 조소를 띤 채 반문했다.“내가 저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도와준 일들을 전부 알고 있는데 한 번 읊어볼까요?”문소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헛소리하지 마!”“입 다물지 못해!”이건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강혁승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저 자식이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이야?’심미연은 입술을 깨문 채 이건명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방원호가 넘겨준 자료가 전부 사실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이건명이 한 여자를 위해 불법까지 저질렀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까?“심미연, 이리 와!”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심미연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의식이 없었는데 분위기는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만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인가.“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정신을
문도현은 심미연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기 시작했다.‘안 되겠어. 일단 지금 이 상황부터 어떻게든 모면해야 해.’하지만 심미연은 그렇게 쉽게 속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 말이나 둘러대면 단번에 꿰뚫어 볼 게 뻔했다.‘어쩌지?’그때 마침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네, 가서 일 봐요. 난 여기 있을게요!”문도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심미연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문도현은 기지개를 한껏 켠 뒤 슬며시 일어나 그녀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그런데 그 사진 속에서 심미연의 옆에 박유진이 서 있는 걸 본 순간 문도현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박유진이랑 심미연이 왜 같이 있어? 말도 안 돼! 절대 이 둘이 이어지게 두면 안 돼!’문도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홱 돌아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마침 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그와 정면으로 부딪쳤다.“아야! 아이고, 아파라...”임현이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문도현은 그녀를 밀치고 나가버렸다.임현은 어이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누가 건드리기라도 했나?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지?”마침 그때 심미연이 다시 들어왔다.“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어요? 문 대표님은요?”“방금 나가면서 저랑 부딪혔어요. 엄청 화난 얼굴이던데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더라고요.”임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저 남자, 감정 기복 진짜 심하네.’“잘됐네요.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해요. 오늘은 임현 씨가 사무실 좀 맡아줘요.”심미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나가버렸다.방금 강지한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그가 어떻게 그녀가 교통사고를
문도현의 치명적인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고 깊고 그윽한 눈빛엔 묘하게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기운이 스쳤다. 그 눈으로 마음속 깊은 비밀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정말 여기서 얘기할 거예요?”그는 나직하면서도 묘하게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어쩌려고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마치 한 음절 한 음절이 심장을 울리는 현처럼 듣는 이의 감정을 툭툭 건드렸다.유흥가를 오래 드나든 남자답게 문도현의 말투나 몸짓 하나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방은 쉽게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뒤에 자리 잡은 견고한 집안 배경은 그의 존재에 신비로움과 권위를 덧씌웠다. 한 번만 눈빛을 주고받아도 수많은 여자가 그를 위해 기꺼이 심연으로 빠져들곤 했다.심미연은 가늘고 곧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그래요. 그럼 위에 올라가서 얘기하죠.”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차 문을 잠그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더라도 문도현은 사건을 의뢰하러 온 손님이었다. 심미연은 일과 사적 감정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문도현의 시선은 무심결에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라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곧 뇌리에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번뜩이듯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들지 않은 야수 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이제야 그는 자신이 여자에게 설레는 감정을 잃은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다만 평범한 여자들에게 더 이상 설레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흔한 여자들은 이제 그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지만 심미연은 예외였다.그 순간 심미연의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문 대표님께서 소송을 의뢰하신다네요. 임 변호사님께서 맡아주세요.”“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문 대표님.”임현이 공손하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안내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