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손을 뻗어 주머니에서 펜 하나를 꺼냈다. 방법이 이거뿐이었다. 그녀는 펜을 환자의 흉막강에 찔러 넣으려던 참이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심미연, 지금 뭐하는 거야!” 그 소리에 심미연은 짧게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나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그곳에 서 있는 심서연과 눈이 마주쳤다. “환자 살리는 게 급해. 너랑 얘기할 시간 없어.” 심미연은 심서연을 아예 무시한 채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다.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심서연과 논쟁할 여유는 없었다.“너가 사람을 살린다고? 너 의사야? 의사 면허는 있어? 없잖아.” 심서연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너는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거야.” “심서연, 이제 그만 떠들어.” 심미연은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응급처치가 늦어져서 이 사람 생명이 위험해지면 너 그 책임 질 자신 있어?” 심미연이 환자에게 응급처치를 하려던 찰나 한 여자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남편한테 손대지 마세요.”이때 주변 사람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저 여자 의사도 아니고 의사 면허도 없으면서 어떻게 환자한테 응급처치 하겠다고 나서?” “세상에. 만약 저 여자가 제때 오지 않았으면 저 남자 아마 죽었을 거야. 저 여자가 죽일 뻔했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죽일 생각을 하다니 대단한 용기네. 저 남자랑 무슨 관계였던 거 아니야?” 심서연은 이 대화들을 들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심미연은 그런 말들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물론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단지 어느 병원에도 취직하지 않았을 뿐이다. 심서연의 그 우쭐한 표정은 정말 한심해 보였다. “이분이 정말 당신 남편이라면 제발 저를 믿고 맡겨주세요. 반드시 살려내겠습니다.” 심미연은 남자 곁애 무릎 꿇은 여자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환자의 상태는 더 이상 지체
이 사람들의 말을 들은 심미연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다. 사람을 살리고 있었다.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예요? 빨리 저 여자 잡아서 경찰서에 넘기세요.” 심서연은 군중을 부추기며 사람들에게 다가가라고 재촉했다.그녀가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이들은 그녀와 심미연을 비교했다. 심미연은 예쁘고 말도 달콤하게 잘하며 똑똑하기까지 했다. 모든 아름다운 칭찬이 심미연에게 쏟아졌고 그녀는 그 옆에서 빛을 잃은 채 서 있었다. 그녀는 화가 나고 억울했다.원래는 심미연을 팔아넘길 생각이었지만 결국 자신이 팔려버린 것이다. 그녀는 심씨 가문의 딸로서 특권을 누리며 살아야 했지만 결국 산골로 팔려가 고통의 세월을 겪었다. 겨우 도망쳐 나왔지만 심미연은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였고 그녀는 산골에서 돌아온 촌스러운 소녀일 뿐이었다. 집안의 하인들조차 그녀를 몰래 비웃으며 촌스럽다고 했다. 그녀는 매일같이 심미연을 죽이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기회가 왔다.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그 여자가 갑자기 심미연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당신이 내 남편을 죽였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심미연은 이마를 찡그리며 그녀를 붙잡았다. “당신 남편은 죽지 않았어요.” “움직이지도 않잖아요. 분명 죽었어요.” 여자는 말하며 눈물을 쏟았다. ‘그때 내가 그 사람과 다투지 않고 혼자 앞서 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미 그 사람은 죽었고 이제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맞아요. 당신 남편은 죽었어요. 이 여자 당장 경찰서로 끌고 가요. 살인자는 대가를 치러야죠.” 심서연은 심미연의 차갑고 무심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세상이 무너져도 전혀 두려워 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심미연은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째려보며 말했다. “입 닥쳐.” ‘도대체 심서연은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
그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놀라며 서로 얼굴을 마주쳤다. ‘뭐라고? 이 여자가 정말 사람을 구했다고?’ ‘하지만 그 펜이 몸속에 박힌 채로 있는데 사람이 안 죽는 게 말이 되나?’ 의사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몇 명의 남자들에게 고함쳤다. “왜 멍하니 서 있는 거예요? 얼른 손을 풀어주세요.” ‘이런 무지한 사람들, 어떻게 생명을 구하는 의사를 이렇게 대하는 거지?’ 심미연은 여유 있게 돌아서며 그들을 쳐다봤다. “무식하면 책이나 더 많이 읽고 배워요. 하루 종일 쓸데없는 동영상이나 보며 시간 낭비하지 말고요.”상황은 순식간에 반전되었고 군중들은 자신들이 방금 그 여자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모두가 심서연을 찾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이미 조용히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미연은 어떻게 의술을 익혔고 게다가 왜 그 기술이 상당히 뛰어난 것처럼 보였는지. 이번에 심미연을 죽이지 못했으니 다음 기회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환자분은 이제 괜찮은 것 같으니 저도 이만 가겠습니다. 다들 이쪽에서 떠나 주세요. 여기 계속 있으면 교통에 방해가 될 겁니다.” 심미연은 말을 마친 후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 여자는 정신을 차리더니 ‘쿵’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방금 정말 오해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 남편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연락처 좀 남겨 주세요. 남편이 다 나으면 꼭 찾아뵙고 고맙다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심미연은 뒤를 돌아보며 그 여자를 한 번 쳐다봤다. “괜찮습니다.” 방금 그 남자는 그 자리에 누워 있었고 주변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여자는 남편이 다쳤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녀는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다.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그 남자도 참 불쌍한 사람일지도.’ 심미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차로 돌아갔다. 차에서 마스크와 장갑을 벗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옷을 정리한 뒤 안전벨트를 채웠다. 그
남자의 흉악한 기세에 불륜녀는 겁에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남자를 향한 공포만이 가득했다. 아마 남자가 모든 죄를 자신에게 뒤집어씌울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나한테 시집왔으면 얌전히 굴어. 안 그랬다간 내가 어떻게 너를 처리하는지 똑똑히 보게 될 거야.” 남자는 가장 잔인한 본성을 드러냈다. 어차피 이제 가면을 쓸 필요도 없었다.영상을 다 본 심미연은 미간을 주무르며 말했다. “나머지 증거들은 이미 다 정리했어요. 내일 내가 직접 법정에 나가서 이 사건을 맡을 겁니다.” 그 남자는 원래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지만 재산을 독차지하려고 끝까지 이혼하지 않았고 결국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불륜녀는 나이도 어리고 얼마든지 자기 또래와 결혼해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도 뻔뻔하게 다른 사람의 가정에 끼어들어 그 남자와 손잡고 원래 아내를 죽이는 데 가담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감히 세상에 살아갈 자격이 있을까?’ ‘두 사람은 반드시 내 손으로 감옥에 보내버릴 거야.’ ‘평생 다시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만들 거야.’임현은 심미연이 매우 피곤해 보이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몸이 안 좋으신가요?” “머리가 좀 아파요.” 심미연을 아이를 낳고 나서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자주 몸살이나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잠깐 쉬시는 게 어때요?” “괜찮아요. 계속 진행합시다. 어제 말했던 친모가 아들을 죽인 사건 자료 보여주세요.”임현은 빠르게 자료를 가져와 심미연 앞에 놓으며 말했다. “이 어머니는 오늘로 70세가 되셨어요. 하지만 아들은 술을 마시고 오랫동안 어르신을 폭행했죠. 그날 밤 아들은 술에 취해 의자까지 어르신에게 던졌어요.” “어르신은 계속 피했지만 나이가 많아 반응이 빠르지 않았고 손발도 예전 같지 않아서 결국 의자에 맞고 허벅지를 다쳤습니다. 화가 난 어르신은 옆에 있던 술병을 집어 들어 아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먼저 사무실로 가서 얘기합시다.” 그녀의 말투에서 강한 기세가 느껴졌고 마치 여왕님처럼 당당했다. “심 대표님, 이쪽입니다.” 도진혁은 정중하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초대하는 제스처를 했다.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도진혁은 그녀 뒤에서 걸으며 의도적으로 걸음을 천천히 하여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그는 손을 뻗어 버튼을 눌렀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는 왜 신하린이 이 비서를 추천했는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사무실에 도착한 심미연은 도진혁이 이미 서류를 깔끔하게 분류해 놓은 것을 발견했다. 어떤 서류는 급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라며 따로 분류되어 있었고 심지어 중요한 내용은 메모지에 적어 놓고 바로 보일 수 있도록 서류 속에 끼워 놓았다. 심미연은 두 개의 급한 서류에 서명을 마친 뒤 펜을 천천히 내려놓고 도진혁을 바라보았다. “혹시 원하는 게 있나요? 예를 들면 연봉 인상이나 주택 문제 같은 거. 당신이 요구하는 건 뭐든지 내가 해결해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인재는 반드시 회사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연봉, 집, 차 모두 문제될 게 없었다. 도진혁 한 명이 여러 명의 효율을 낼 수 있으니 그녀는 완전히 큰 이득을 본 셈이었다. “감사합니다. 심 대표님. 지금은 특별히 도와주실 일이 없습니다.” 도진혁은 매우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는 이 두 해 동안 회사에서 번 돈으로 이미 차와 집을 모두 구입했으며 연봉도 경성에서 꽤 높은 수준이라 추가로 월급을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알았어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세요.” 심미연은 속으로 연말이 되면 그에게 연말 보너스를 좀 더 줄 생각을 하며 평소에도 간간히 보너스를 챙겨줄 계획을 세웠다.돈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을 충성스럽게 오래도록 회사에 묶어둘 수 있다. 매번 새로운
[강지한, 내 아들을 유치원에서 데려간 건 무슨 뜻이야?] 심미연은 참지 못하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강지한의 이런 행동은 단번에 그녀의 화를 폭발시키기 충분했다. [내 아들이기도 해. 내가 그 아이를 데려가는 게 왜 안 되는 거지?] 강지한은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여유롭고 담담하게 되물었다.유치원에서 병원으로 가는 길 그는 이미 확신을 했다. 이 아이가 바로 그의 아들이라는 걸. 너무 똑똑하고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그와 너무 닮았다. 강지한을 결정을 내렸다. 우선 아들을 자신 곁에 데려다 키운다면 심미연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은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내가 말했잖아. 태하는 네 아들이 아니라고.]심미연은 마음이 점점 더 가라앉았다. 강지한의 아들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친자 검사를 하면 금방 알 수 있다. ‘만약 강지한이 지금 애를 데리고 친자 검사를 한다면...’그 생각에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태하가 나한테 한마디라도 할 수 있게 해줘. 그래야 내가 마음이 놓일 거야.] 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심미연이 강지한이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을 때 아들의 부드럽고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어디 있어요? 빨리 나 데리러 와요. 금방 병원에 도착했어요.] 병원이라는 두 글자를 듣는 순간 심미연의 온몸은 얼어붙은 듯 굳어졌고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정말 아무리 대비하고 대비해도 강지한이 아들을 빼앗아간 이 한 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엄마, 빨리 데리러 와요. 무서워요.]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절대 따라가지 마. 꼭 기억해.] 그녀는 아들의 머리가 충분히 똑똑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 말라는 걸 하면 그는 반드시 그것을 피하려고 할 것이다. [엄마, 알겠어요. 빨리 데리러 오세요.] 심태하는 말을 마친 후 바로 전화를 끊었다. 심미연은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서둘러
강지한과 심태하는 혈연 관계가 있긴 했지만 사실상 그들의 첫 번째 공식적인 만남이었다. 강지한은 여전히 심태하에게 낯선 존재였고 심태하는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동생 만나러 데려가줄게. 이제 우리랑 같이 살자. 우리 집은 네 집이기도 해.” 강지한은 그를 안아 올리며 그가 반응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심태하, 아빠랑 엄마 그리고 동생이랑 같이 사는 거 싫어?” 심태하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제가 만약 싫다고 말하면 저를 집에 돌려보내줄 거예요?” 강지한은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안 돼.” “그럼 당신은 독재자잖아요.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데 왜 물어보는 거예요?” 심태하의 작은 얼굴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 강지한은 눈을 좁히며 그를 쳐다봤다. ‘이 녀석, 반응도 빠르고 말도 잘하네.’ ‘정말 신기하게도 심미연과 똑같아.’심태하는 강지한의 침묵이 길어지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첫 만남인데 혹시라도 그가 자신에게 손을 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강하게 반박하면 결국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겁이 났다. 심태하는 무서운 마음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강지한은 심태하를 안고 계단을 올라 강상미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강상미는 작은 토끼 인형을 품에 안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강지한이 병실에 들어갔지만 강상미는 전혀 깨지 않았다. 심태하는 병상 옆으로 다가가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녀를 보았고 그제야 그날 만났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굴에 있던 불쾌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져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제가 동생을 아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묻어 있었다. 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봤다. “너희가 아는 사이였어?” 심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알아요.”“그럼 이제 너와 상미는 남매가 된 거야. 상미랑 같이 살면 재미있지 않겠어?”
“동생아, 일어났어?” 강상미의 목소리를 들은 심태하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강지한을 밀어내며 말했다. “빨리 내려줘요.” 심태하는 강지한이 과거에 심미연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강지한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더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강지한은 허리를 굽혀 심태하를 병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둘이 잠깐 놀아.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그 말을 끝내고 그는 돌아서서 방 밖으로 나갔다. 강지한은 일부러 두 아이를 남겨두고 혼자 나갔다. 그가 생각하기에 두 아이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될 것이고 그때부터는 서로 끊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질 거라고 믿었다. 강지한은 두 아이가 친남매처럼 서로 의지하며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관계라면 두 아이가 싸우거나 갈등을 일으킬 걱정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밖으로 나온 강지한은 곧바로 의사 사무실로 향했다.병실 안에서 두 아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 거야? 왜 병원에 있어?” 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궁금한 마음을 그대로 물었다. ‘전에 두 번 만났을 때는 괜찮아 보였는데 왜 갑자기 병원에 있는 거지?’“난 아주 심한 병에 걸렸어. 엄마가 말했어. 아마 죽을 수도 있다고...” 강상미는 심태하의 손을 꽉 잡고 슬픔이 묻어나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죽고 싶지 않아...” 심태하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바로 자세를 고쳐 세우며 말했다. “너 아프면 우리 엄마가 치료해줄 거야. 내가 엄마한테 말해서 널 꼭 치료하게 할 거야.” 그의 목소리엔 자랑이 묻어 있었다. “앞으로 우리 엄마의 사랑을 반으로 나눠줄게. 괜찮지?” 강상미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좋아.”“혹시 핸드폰 있어?” 심태하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있어. 왜?” 강상미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엄마한테 전화하려고. 잠깐만 빌려줘.”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