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귀 뒤로 넘긴 후 그녀는 겨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아직 눈앞에 있는 사람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몸이 툭 밀려 들어와 문 뒤로 기대어졌다. 남자는 막 샤워를 끝낸 듯 몸에서 은은한 바디워시 향이 퍼져 나왔다. 그 향은 정말로 기분 좋게 느껴졌다. 심미연의 심장은 저절로 조금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미연아, 준비됐어?”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낮고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등을 곧게 펴며 말했다. “나... 심리 상담 예약했어. 내일 오후에 가보려고.” 그녀도 빨리 자신을 치료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박유진은 마치 머리에 차가운 물 한 통을 끼얹은 것처럼 느껴졌다. 몸 속의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미연이 아직 괜찮지 않다면 그는 물론 그녀의 감정을 무시하고 강제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오빠, 미안해.” 심미연은 발끝을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나 치료 잘 받을게. 믿어줘. 금방 나을 거야.” 박유진은 그녀를 꼭 안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기다릴게.” 그런데 두 사람의 입술이 막 맞닿을 순간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엄마, 빨리 문 열어줘요. 저예요.” 심태하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박유진은 어쩔 수 없이 손을 풀며 살짝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문 열자. 애가 무슨 일인지 한번 보자.” 밖에 아이가 있으니 자신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오빠, 미안해.” 심미연은 그를 안아주고 나서 팔을 풀었다. 그녀는 정말 박유진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느꼈다. “아니야. 더 이상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또 미안하다고 하면 화낼 거야.” 박유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문 열어 봐.”심미연은 급히 문을 열었다. 작은 몸뚱이가 곧바로 달려들어왔다. “엄마, 너무 무서워요.” 목소리엔 울음이 섞여 있었고 떨리
“태하야, 아빠 말 좀 들어봐.” 박유진은 심태하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파 목소리가 자연스레 떨렸다. “동생은 다른 세계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너무 힘들어하지 마. 알겠지?” 말을 하며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하게 흘러나왔다.심미연은 그의 품에서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괜찮아. 이제 울지 마. 오늘 밤은 엄마랑 같이 자자.” 심태하는 두 살부터 혼자 자던 아이였지만 그래도 겨우 세 살밖에 되지 않았다. 방금 그런 꿈을 꾸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네.” 심태하는 눈물을 닦으며 엄마 품에 얼굴을 비볐다. 엄마가 있으니까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심미연은 박유진을 바라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그럼 먼저 방에 가 있어. 난 태하 데리고 잘게.” 박유진은 그녀를 안고 한 번 더 꽉 안아주었다. “알았어. 잘 자.” 그렇게 말하며 심미연과 심태하의 얼굴에 각각 입맞춤을 했다. 비록 마음은 살짝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잠간의 즐거움을 위해 아이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은 절대 할 수 없었다.박유진이 방을 나간 후 심미연은 심태하를 안고 침대에 누웠다.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침실의 불을 모두 끄자 순간적으로 어두운 세상이 펼쳐졌다. “엄마, 무서워요.” 심태하는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엄마 있잖아. 걱정하지 말고 자자.” 심태하는 눈을 감았지만 그 순간 바로 전에 꿈이 눈에 나타났다. 여동생은 온몸에 피를 흘리며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눈은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바로 여동생은 사라져 버렸다. 심태하의 감정이 갑자기 격해졌다.“안 돼. 가지 마.” 어둠 속에서 심태하의 낮은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렸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그를 더 꽉 안았다. “걱정하지 마. 엄마 여기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우리 딸이 아직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이때 병실에서. 강지한이 딸을 재우자마자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 번호가 성무진의 것임을 확인한 후 그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아가씨와의 친자 확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두 분 사이에는 혈연 관계가 없습니다.] 성무진은 왜 강지한이 갑자기 친자 확인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원래도 주운 아이였기 때문에 이 결과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친자 확인 할 때 쭉 지켜봤어?] 강지한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상미와 심태하의 얼굴이 똑같은데 어떻게 혈연 관계가 없을 수 있지?’ [인하 병원에서 했습니다.] ‘이노하이브 산하 병원이라 그런 실수는 없을 거 같은데.’성무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알겠다.] 강지한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한 번 친자 확인을 하려는 계획을 마음속에 세웠다.[대표님.] 성무진은 강지한의 표정을 볼 수 없어서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져서 조심스럽게 한 마디 했다. [말해.] [바렐 그룹과의 합작 계약이 전부 취소되었는데 이제 어떻게 할까요?]이렇게 많은 합작이 한 번에 취소되었으니 각 부서 모두 불안하지 않을 리 없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처리할게.] 원래 성무진은 회사 직원들의 불안한 정서에 대해 말하려 했지만 강지한이 이렇게 말하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음 기회에 말해야겠다.’성무진과의 전화를 끊고 강지한은 이진영의 번호를 눌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급한 일 있어?] 이진영의 목소리에서 피로가 묻어났다. [한 잔 하러 가자.] [좋아. 어디서 마셔?] 두 사람은 장소를 정하고 강지한은 전화를 끊었다.병실로 돌아온 그는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든 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디서 봐도 자기와 똑같이 닮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상미가 내 딸이 아닐 수 있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모두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한 발 물러서며 심서연과 거리를 뒀다.심서연은 눈알을 굴려 주변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속으로 비웃었다. 바로 병실 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순간 경호원 한 명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꽉 붙잡았다.“못 들어갑니다.”이런 인품을 가진 사람은 더더욱 아이 곁에 둘 수 없었다.“사람 살려. 성추행이에요.” 심서연은 목청껏 소리를 질렀지만 경호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재빠르게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에 덮었다. 이어서 거침없이 그녀의 몸을 어깨에 둘러메고는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여기가 12층이 아니었다면 창문 밖으로 내던져버렸을지도 몰랐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심서연을 바닥에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 “내가 여자한테 손대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었으면 당신 손발부터 분질렀어요. 그러니까 지금 좋게 말할 때 당장 돌아가세요.” 남자의 기세에 압도당한 심서연은 겁에 질려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병원 안으로 사라졌다.그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심서연은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남자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속으로 강지한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저 냉혈한 자식.’ ‘진짜로 딸을 보지도 못하게 막다니.’ ‘아무리 그래도 당시 내가 직접 아이를 안겨준 사람이었는데.’땅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심서연은 이내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꺼내어 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나 병실에 못 들어갔어. 애를 데리고 나올 방법이 없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냉정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멍청한 것.] 심서연은 속이 상해 울먹거렸다. [내가 어떻게 알아? 강지한이 이렇게 매몰찰 줄...] [너 박유진 약혼녀 아니었어? 박유진 찾아가.] [뭐? 왜 박유진이야?] 그녀는 이미 박유진에게 마음이 떠났고 이제 와서 다시 함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찾으라고 하면 그냥 찾으러 가.]
“문소영 씨...” 심서연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소영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밖으로 끌고 나갔다. “어디 가는 거예요?”심서연은 문소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느끼며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를 저승에 보내줄 거야. 안 돼?” 문소영은 비웃듯이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 “심서연, 내가 너를 위해 모든 길을 다 만들어줬는데 결과는 이게 뭐야!”그 당시 심미연의 딸을 훔친 건 심서연을 강지한의 곁에 두기 위함이었다. 원래는 심서연을 이용해 강지한에게서 유용한 정보를 끌어내려고 했으나 3년이 넘도록 이 멍청한 여자는 강지한의 침대조차 올라가지 못했다. ‘쓸모없는 것.’“이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요.” 심서연은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그 3년 동안 그녀는 심미연을 따라 하며 살아왔다.그리고 강상미도 열심히 키웠다.하지만 강지한은 냉정하게도 그녀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다. 문소영은 더 이상 말을 아끼지 않고 그녀를 거칠게 끌고 내려갔다. 곧 사람들이 다가왔다. “대표님.” 심서연은 그 남자를 보며 점점 더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이 여자 데려가서 교훈을 좀 줘.” 문소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문소영 씨, 당신은 나한테 이러면 안 돼요.” 심서연은 비명을 지르며 후회가 밀려왔다. 처음엔 문소영의 약점을 쥐고 있으면 그녀가 자신에게 손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깨달았다. 문소영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시끄러워. 입 다물어.” 문소영은 냉정하게 그녀를 호통쳤다. 심서연은 원래 입을 다물 생각이 없었지만 순간 누군가 그녀의 입에 더러운 양말을 밀어넣었다. 심서연은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하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후 그녀는 사람들에게 힘껏 끌려가 차에 강제로 밀어넣어졌다.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창 밖으로 보이는 문소영을 응시했다. 문소영에게서 느껴지는 그 무시무시한 살기가 가슴 속 깊이까지 전해져 왔다.
문소영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말없이 있었다.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TV 뉴스에서 그의 모습을 보며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미칠 듯했다. 문소영은 자신이 더 이상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 믿어왔다. 남자는 그녀의 침묵을 감지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문소영은 깊은 생각을 떨쳐내고 몸을 곧게 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필요해서 왔어. 우리 아들에 관한 일이야.” 남자는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우리가 아들이 있다고? 그럴 리가...” “쌍둥이였어. 작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납치됐고 큰 아이는 강지성. 몇 년 전에 사고로 죽었어.” 문소영은 눈물을 훔치며 말을 급히 이어갔다.이건 그녀가 삼십 년 넘게 숨겨온 비밀이었다. 그녀는 이 생에서 절대 말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순간 이렇게 쉽게 입 밖으로 내뱉게 되었다. 문소영의 말은 마치 폭탄처럼 남자의 가슴 속에 떨어졌고 남자는 동공이 급격히 축소되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절대 상상할 수 없었다. 문소영과 자신이 쌍둥이 아들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사실 처음 내가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바로 당신에게 말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집에서 강제로 나를 강우석과 결혼시키려 했고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았어. 그러자 부모님은 나를 감금하고 내 핸드폰도 압수했어. 외부와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었어.” 문소영은 말하면서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그녀는 부모님의 강요로 강씨 가문에 보내졌었다. 강우석과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우석은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강우석은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 상대가 바로 강지한의 어머니였다. 7개월 후 그녀는 쌍둥이를 낳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 그 중 한 명이 사라졌다. 그녀는 30년 동안 그 아이를 훔쳐간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끝내 그 사람이 누구
문소영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만약 나를 살려주지 않으면 우리가 두 명의 아들을 뒀다는 사실을 세상에 공개할 거야. 그럼 당신도 명예를 잃고 끝장날 거라고.” 그녀는 지금 이 남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우리가 두 아들을 뒀다고? 증거 없이는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남자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하며 눈빛은 강렬하게 빛났다. “당시 내 임신 검진서도 여전히 남아 있고 병원에 가면 내 출산 기록도 확인할 수 있어. 그 아이들의 혈액형은 당신이랑 똑같아.” 문소영은 그동안 이 모든 것을 철저히 보관해 왔다.“문소영, 나를 망치려고 하는 거야?” 남자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나는 당신이 더 높이 올라가기를 바래.” 문소영은 감정을 정리한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더 높이 올라갈수록 나에게 유리해.” “내가 원칙을 깨고 너를 돕기를 바란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남자는 술잔을 비운 후 탁자 위에 쿵 하고 내려놓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소영은 그가 떠나는 모습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며 부르지 않았다. 오늘은 그에게 경고만 준 것뿐이다. 그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한 대로였다.잠시 후 문소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모님, 지시하신 대로 사람을 공해에 던졌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해외로 잠시 숨어 있어. 여기 상황이 정리 될 때까지 기다려. 그때 다시 돌아오면 된다.] 문소영의 얼굴엔 차가운 표정이 가득했다. 그들이 돌아올 때쯤 심서연의 죽음은 이미 잠잠해지고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문소영은 전화를 끊고 술을 따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이진영은 술을 많이 마셨고 잠간 밖으로 나왔다. 그때 한 남자의 뒷모습이 아버지를 닮은 듯해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잠시 멈칫하며 발걸음
“너희 아버지가 최근에 한석훈과 많이 가까워졌다고 들었어. 내가 알기로 한석훈과의 관계가 간단하지 않다더라.” 강지한은 박시훈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이진영에게 전했다. 이진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알고 있어.” 사실 지난 4년 동안 그는 한석훈의 배후 세력을 조사해왔고 조사할수록 그 배후는 점점 더 복잡하고 충격적인 사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 너와 한유나 씨 사이의 일은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야?” 이진영은 조용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혼약을 해제할 생각이야.” 그는 이미 한유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한유나는 최근 들어 그를 피하는 듯했다. 그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구아정은 어떻게 할 거야?” 강지한이 다시 물었다. “네 첫사랑이라고 했지?”“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했던 사람이야. 그런데 갑자기 사라졌고 그 뒤로 그냥 끝났어.” 이진영은 무의식적으로 신하린의 얼굴을 떠올렸다.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실 지금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신하린이었다.이제 그녀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확실히 느꼈다. 그녀의 다리가 이렇게 된 지금 그녀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고 그로 인해 그녀를 돌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지내고 있었다.“구아정, 그 여자에 대해 조사해본 적 있어?” 강지한이 상기시키듯 말했다.“조사 중이야.” 이진영은 숨기지 않고 답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겠어.”구아정은 분명 그를 찾으러 온 거였다.‘왜일까?’“신하린 씨의 일은 잘 해결됐나?” 강지한은 그녀에게서 도움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 물었다.“하린이 오른쪽 다리가 절단됐어.” 이진영은 말하면서도 짜증이 치밀었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흡입했다. 연기가 흩어질 때 그는 다시 한 번 신하린의 분노 어린 눈빛을 떠올렸다. 그녀는 분명 자신을 증오하고 있을 것이다.“언제 그런 일이 있었지?” 강지한은 잠시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