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유치원에서 데리러 갔을 때 선생님이 뭐라고 하신 건 없어?” “응. 아무 말도 안 하셨어. 아이만 데리고 바로 나왔어.” “그럼 이따가 가정부에게 오늘 태하가 이상한 점이 없었는지 물어볼게.” “괜찮아. 내가 내일 아침에 직접 물어볼게.” 심미연은 가정부에게 따로 묻는 게 오히려 부담스러울 주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럼 내일 아침에 물어봐. 먼저 쉬고 있어. 나는 회사에 가봐야겠어.” 박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얼굴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응. 운전 조심해.” 심미연은 불안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박유진이 무사히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알았어. 잘 자.” 박유진은 그녀에게 작별을 고하며 아쉬운 듯 손을 풀었다. “일찍 돌아와.” 심미연은 여전히 걱정스러워했지만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박유진은 웃으며 몸을 돌려 성큼성큼 집을 떠났다. 문이 닫히자 심미연은 욕실로 향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와보니 핸드폰 화면이 깜빡이고 있었다. 심미연은 다가가서 전화를 확인했는데 낯선 번호였다.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이진영입니다.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 잠깐 만나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제 동생의 이혼 소송을 맡아주세요.]이진영은 직접적으로 말했다. 심미연은 잠시 멈칫했다. [동생이 이혼을 하려고 하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이제 쉬어야 해서 내일 동생을 제 사무실로 데려오세요. 자세한 사항은 그때 말씀드리죠.] 심미연은 그의 동생이 왜 이혼을 하려는지 묻지 않았다. 어차피 여자가 이혼을 결심하는 이유는 크게 몇 가지였다. 남편의 외도, 가정 폭력, 아니면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부부 관계가 나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저 이진영 동생의 이혼 소송을 맡게 되면 육현성이 천성과의 합작을 계속 제안해 올 때 거절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큰 손실이 될 테니 신중히 고려해야 했
심미연은 잠시 멈칫했다. “이노하이브의 네트워크가 바이러스에 공격당했어. 네가 한 거야?” 하지만 그녀가 처리할 때 그게 심태하의 솜씨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심태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저 아니예요. 그런데 그때 그 사람과 잠깐 게임을 했었어요. 그 사람 진짜 대단해요. 하마트면 그 사람한테 질 뻔했어요.”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어제 밤 그녀도 상대가 꽤 실력이 있다는 걸 느꼈었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학교 끝나면 그 사람에 대해 조사해 볼게요.” 심태하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 일은 엄마가 조사할 거야. 너는 얌전히 있어. 알겠지?” 심미연은 그를 안아주며 조용히 말했다. 어린 아이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알겠어요...” ‘나도 할 수 있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리 태하 기분 풀어. 가서 아빠 일어났는지 확인해 봐.” 심미연은 한 가지 걱정이 떠올랐다. ‘이 사람 혹시 이노하이브뿐만 아니라 바렐 그룹까지 노리고 있는 걸까?’ 앞으로는 은성까지도 공격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목적이 뭘까?’ ‘경성의 패권을 쥐고 싶은 걸까?’ 알 수 없었고 그 생각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심미연은 이불을 걷어내고 품에 안고 있던 작은 아이를 안고 일어섰다. “엄마, 오늘 병원으로 여동생을 보러 가도 돼?” 어린 아이는 어제 받은 공주 드레스를 병원에 가져가서 여동생에게 입혀 보고싶다고 했다. “학교 끝나고 가자. 알겠지?” 심미연은 사실 내키지 않았다. 그 아이는 강지한의 딸이다. 만약 심태하를 데리고 가면 강지한과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지한이 심태하를 빼앗으려 한다면 그녀는 그를 만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엄마, 나는 그 여동생이 정말 좋아. 그 애랑 있으면 마치 친남매처럼 느껴져.” 심태하는 자신이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몰랐지만 그게 진심이었다. 몇 번을 함께 지내면서 그와 여동생은 같은 생
“알았어요.”심태하는 힘차게 대답한 후 신나게 뛰어갔다. 심미연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복잡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만약 강지한이 강제로 심태하를 데려가려 한다면 그녀는 아마 심태하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 경성에서 강지한은 세력이 가장 강했다.박유진은 어린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깨어났다. 그의 시선이 문 밖으로 향했고 빛에 가려진 작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박유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커튼을 열자 작은 아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우리 태하 빨리 일어났네.” 박유진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빠, 좋은 아침!” 심태하는 신나게 그에게 달려갔다. 작은 다리를 힘껏 흔들며 큰 침대에 올라가 박유진의 품에 풍덩 뛰어들었다. “아빠는 큰 게으름뱅이야. 빨리 일어나요.” 박유진은 손을 뻗어 그를 간지럽혔다. “우리 태하야말로 작은 게으름뱅이야.” 심태하는 간지러워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가 제일 큰 게으름뱅이에요.” 심미연은 세수하고 나서 나가려다 박유진 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 사람이 떠들썩하게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코가 조금 시큰해졌다. 그때 박유진은 심미연을 보고 어린 아이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왔다. 쉿...” 어린 아이는 엄마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빠르게 침대에서 뛰어내려 방으로 달려갔다. “저는 먼저 방에 갈게요. 두 분은 얘기하세요.” 심미연과 스치며 지나가던 심태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엄마가 방으로 가서 세수하라고 했는데 아빠랑 놀다가 잊어버린 심태하는 급히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화낼 것 같았다. 그가 바람처럼 뛰어가던 모습을 보며 심미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녀석이 나를 왜 이렇게 무서워하지?’ 박유진은 침대에 기대어 앉아 상반신을 편안하게 드러낸 채 있었다. 아침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들
심미연이 전화를 받자 육현성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당장 계약서를 들고 육영 그룹으로 와서 계약을 체결하죠.] 그의 어조는 강압적이었고 거부할 여지조차 없었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어젯밤 이진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육 대표님. 저희 천성에서는 육영 그룹과의 합작을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어젯밤, 육현성이 일부러 현지원과 주아연을 데리고 온 것은 자신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심미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리우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다. 현지원과 주아연은 리우에서 오랜 시간 일했지만 평범한 성과만 내왔을 뿐. 결국 지금의 리우는 뛰어난 변호사를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런 리우가 과연 우리와 비교나 될까?’육영 그룹과의 합작을 포기하면 1년에 수백억 원의 수익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예전에는 심미연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지금은 모든 게 명확해졌다. 그래서 더 이상 미련도 없었다.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곧 육현성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심미연 씨, 당신은 천성 로펌의 하찮은 변호사일 뿐인데 감히 저를 거절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장 당신네 사장에게 전화해서 해고시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가서 무릎 꿇고 빌지나 마세요.] 심미연은 그의 말을 듣고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지금 당장 전화해 보시죠.] 심미연은 말을 끝내자마자 전화를 끊어버렸다. ‘천성의 사장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런 협박을 한다니. 참 우습기 짝이 없네.’육영 그룹 회장실. 육현성은 차가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던졌다. ‘이게 말이 돼?’ ‘심미연이 감히 나한테 맞서다니.’ ‘설마 내가 진짜 천성 사장에게 전화를 걸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비서가 서류를 품에 안고 문을 열고 들어오자 육현성의 굳은 표정을 보고 급
곧 같은 번호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육현성은 얼굴에 짙은 어두운 표정을 띠고 전화를 받았다. 화가 치밀어 오르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진영, 일하는 중인데 왜 자꾸 전화하는 거야!] [다은이가 지금 병원에서 유산 수술을 받아야 해. 남편 서명이 필요하니까 당장 와서 서명해.] 이진영의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육현성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응했다. [그 여자랑 한 번도 관계를 안 했는데 어떻게 임신했다는 거야? 서명이 필요하면 그 애 아빠한테 가서 서명을 받으라고 해.] 이다은은 그의 어머니가 강제로 끼워넣은 여자였고 그는 그녀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결혼 후 몇 년동안 그는 술에 취할 때마다 그녀를 심하게 괴롭혔고 손찌검도 서슴지 않았다. 이다은은 명문 가문의 딸이었지만 그녀는 너무나 나약했다. 맞고 나서도 한 번도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고 고통을 홀로 참았다. 그래서 그는 점점 더 그녀에게 심한 행동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울며 용서를 빌 때마다 그는 마치 분이 풀린 듯한 쾌감을 느꼈다. ‘이씨 가문의 딸이면 뭐 어때? 내 앞에서는 그저 굴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인데.’[육현성, 나는 다은이가 아니야. 말 가려서 해. 한 번 더 말할게. 지금 다은이가 병원에서 유산 수술을 받아야 하니까 당장 서명하러 와. 네가 육영 그룹 대표라고 내가 너를 못 건드릴 줄 알아? 선 넘지마. 나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줄게.]이진영은 말끝을 날카롭게 내뱉은 후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육현성은 눈을 좁히며 그 말에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이다은이 이번엔 감히 이진영에게까지 얘기했다고?’ ‘집에 돌아가면 어떻게 다뤄줄지 두고 보자.’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사무실 책상으로 돌아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밖으로 나갔다. 그때 병원에서 이다은은 병상에 누워 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혈색 하나 없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어젯밤, 육현성에게 배를 차인 뒤 그 고통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이진영은 분노에 찬 주먹을 꽉 쥐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진짜 죽어 마땅해.’ ‘오늘 오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오빠, 나 무서워...” 이다은은 눈물 가득한 눈으로 애처롭게 말했다. 이진영은 그런 여동생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 마. 오빠가 널 지켜줄게. 이제 누구도 널 함부로 건드리지 못해.”하지만 3년 동안 육현성에게 시달려온 이다은이 단 한마디로 안심할 리 없었다.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진영도 그녀의 상처를 완전히 치유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저 조용히 곁을 지켰다. 병실은 깊은 침묵에 잠겼고 시간만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육현성이 마침내 느긋하게 모습을 드러냈다.이다은이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육현성은 독설을 퍼부었다. “또 병원에 처박혀 있어? 네 돈 아니라고 막 쓰는 거냐?” 이다은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육현성은 더욱 거칠게 쏘아붙였다. “배 속에 누구 애인지도 모르는 걸 임신하고 나한테 서명하라고? 내가 창피하게 이 짓까지 해야 돼?” 그때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돌아온 이진영이 이 말을 듣자마자 눈이 뒤집혔다. 그는 문을 쾅 닫고 한걸음에 달려가 육현성의 등을 향해 강하게 발길질을 날렸다. “이 개자식이 감히 내 동생한테 그런 말을 해?” “내가 오늘 널 죽여버릴 거야.” 이진영의 발길질에 육현성은 방심한 채로 날아가 그대로 바닥에 쳐박혔다. “쿵.”둔탁한 소리와 함께 육현성의 몸이 바닥에 부딪쳤고 그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멍해졌다.이진영은 분이 풀리지 않아 다시 한 번 육현성의 배를 거세게 걷어찼다. 육현성은 복부에 강한 충격을 받고 고통에 몸을 웅크렸다. 이진영은 이다은이 놀랄까 봐 그녀를 향해 말했다. “무서우면 이불로 머리 덮어. 귀 막고 보지도 듣지도 마.” 이다은은 겁에 질려 온
심미연은 아침에 임현과 함께 피해자의 이웃과 친척을 찾아갔다가 방금 사무실로 돌아왔다. 자료를 정리하려던 참에 이진영이 육현성을 끌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세 사람이 마주 앉자 심미연은 침착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반면 육현성은 얼굴이 일그러지며 말했다. “지금 천성은 아직 육영 그룹의 법무 대리인입니다. 심미연 씨, 당신이 이다은의 이혼 사건을 맡으면 고소할 거예요.” 심미연은 차분하게 미소 지으며 뒤돌아 임현에게 말했다. “우리랑 육영 그룹 간의 계약서, 한 번 꺼내서 육 대표님께 보여 드려요.” 임현은 곧 계약서를 찾아서 육현성에게 건넸다. “계약은 어제 만료되었습니다. 갱신하지 않으셨으니 자연스럽게 종료된 상태죠.” 육현성은 계약서 상의 날짜를 보고 얼굴이 붉어지며 분노를 터뜨렸다. “지금 일부러 나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거예요?” 심미연은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띄며 말했다. “어젯밤, 저는 진심으로 계약을 맺고 싶었어요. 아쉽게도 기회를 주지 않으셨죠. 맞죠?”육현성은 심미연을 노려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심미연 씨, 잘 생각하세요. 나랑 강지한 사이가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는 거 아시죠? 내 적이 된다면 그건 강지한과도 적이 되는 거예요.” 강지한이라는 이름을 들자 심미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강지한과 적이 된다든지, 그런 건 전혀 상관없어요. 그 사람이 나한테 뭘 할 수 있겠어요?”그녀의 자만에 찬 말투에 육현성은 심미연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느꼈다. “좋아요, 심미연 씨. 그럼 한 번 두고 봅시다.” 심미연은 입꼬리에 냉소적인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언제든 준비돼 있으니까.” ‘강지한을 들먹여 나를 위협하려 한다니. 정말 그 사람이 나를 겁줄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육현성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육현성이 떠난 후 심미연은 이진영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먼저 자세한 상황부터 설명해 주세요
“임 변호사님, 먼저 사무실로 돌아가세요.” 심미연이 임현에게 말했다. “경찰에 신고할까요?” 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어서 가세요.” 그녀는 강지한이 지금 자신에게 함부로 할 리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임현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럼 조심하세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 주세요. 제가 바로 달려갈게요.” “알겠어요.” 심미연은 임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었고 자신이 다칠까 봐 지켜주고 싶어서 그런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수많은 일을 겪으며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진 사람이었다. 임현이 자리를 떠나자 심미연은 주저 없이 강지한 쪽으로 걸어갔다.“강 대표님,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오셨나요?” 심미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육현성 그 쓰레기 때문에 온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나도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강지한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들을 못 보게 한 이유가 뭐야? 도대체 뭐 하자는 거지?” 그의 말투는 거칠고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섞여 있었다. 사실 그는 아들을 데리러 유치원에 갔지만 심미연이 미리 연락을 해둬서 선생님이 아예 데려가지 못하게 막았던 상황이었다. ‘내가 애 친아빠인데 얼굴 한 번 못 본다고?’‘이걸 밖에 말하면 누가 믿겠어?’심미연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인상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그게 네가 여기 온 이유라면 이제 그만 가.”“너한텐 절대 아이 안 보여줄 거니까.”당시 온지유가 임신했을 때 강지한은 그녀에게 임신하면 반드시 낙태하라고 했었다. 만약 그녀가 가짜 죽음을 가장해 경성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이는 살지 못했을 것이다. “심미연! 너는 대체 왜 나랑 태하가 만나는 걸 막는 거야?” 강지한은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며 말했다. ‘이 여자가 정말 건방지네.’ “난 분명히 말했어. 태하는 네 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박시훈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수술복을 입은 심미연을 단번에 알아봤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맑고 빛나는 눈동자는 도저히 다른 사람과 헷갈릴 수 없는 것이었다. “날 좀 밀어줘.” 박시훈이 간병인에게 다급히 말했다. 간병인은 곧장 그의 휠체어를 밀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를 이어 강준형도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심미연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미연아, 상황이 어때?” 강준형의 목소리엔 감추지 못한 초조함이 담겨 있었다. 그때 박시훈의 시선이 다시금 심미연에게로 향했다. “당신 의사예요?”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직이 말했다. 세계 최고 해커, 그리고 의사. 그녀가 가진 아우라는 더없이 눈부셨다. 박시훈은 점점 더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상태가 조금 위중해요. 지금은 언제 깨어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요.” 심미연이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강준형이 가장 궁금해할 말이었다. 그녀는 그걸 알고 있었고 일부러 마지막 문장을 강조했다. “그래... 다행이구나.” 강준형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심미연의 손을 꼭 잡았다. “미연아, 정말 고맙다. 수고 많았어.” 심미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 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 강지한은 그녀를 구해준 적이 있다. 이제 그녀가 그를 구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할아버지, 강지한이 깨어나면 병원에서 바로 연락드릴 거예요. 지금은 먼저 집에 가 계세요.” 심미연은 그의 머리 위로 보이는 은빛 머리카락을 보며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시려왔다. 몇 년 만에 다시 본 강준형은 이전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미연아, 혹시 아이 좀 데려와서 나한테 보여줄 수 있겠니?” 그는 줄곧 강지한이 그녀와 아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그
심미연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강지한은 자신을 구하려다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그 순간, 이지연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보스를 죽이려고 해요.’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 밤 그 대형 교통사고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대형 트럭을 이용해 그녀를 노렸고 때마침 강지한의 차량이 그 사이에 끼어들면서 그가 대신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게다가 차량이 폭발했다면 강지한이 그 안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사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연아?” 말이 없던 심미연을 걱정한 강준형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전화를 끊은 줄 알고 불안해졌는지 목소리엔 떨림이 섞여 있었다. “지금 바로 갈게요.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제가 꼭 강지한 살려낼게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꼭 쥔 채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장 안으로 들어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핸드백과 폰을 챙겨 계단을 내려섰다. 그녀는 몰랐다. 서재 문 앞에 조용히 서 있던 박유진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박유진의 눈빛은 텅 빈 허공을 떠돌 듯 쓸쓸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이 누구인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야만 했다. 강지한이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켰다면 그녀는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아마 오늘 구청이 문을 열었더라도 심미연은 박유진과 그곳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박유진은 마음이 아프지 않은 척 조용히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아. 당연한 거야. 나라도 갔을 거야.’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그건 위로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속이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했다. 잠시 후, 그는 조용히 서재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켰지만 화면 속 글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엔 오직 한 사람, 심미연. 지금 그 순간에도 그녀만이 그의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
‘강 할아버지’라는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뜨는 순간, 박유진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강지한의 할아버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는 건 분명 강지한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강지한이 심미연을 구하려다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녀가 당연히 그를 찾아갈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미연아, 갑자기 급한 회의가 생각났어. 먼저 전화 받아. 난 서재에서 회의 좀 하고 있을게.” 박유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 또한 신중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흔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레 말하려 애쓰는 듯했다. 심미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다. “응. 다녀와. 나도 통화 좀 할게.” 박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통화 끝나면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푹 쉬어. 알았지?” “응. 오빠도 회의 끝나고 푹 쉬어.”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박유진은 언제나 그녀에게 따뜻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몇 번이나 외면하고 져버렸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그럼 난 먼저 갈게.” 그는 그녀의 체온을 놓치기 아쉬운 듯 한동안 손끝을 망설였지만 결국 손을 놓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예전에 박유진의 어머니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미연이와 결혼하고 싶다면 그 아이를 절대 놓치지 마라.’ 하지만 만약... 심미연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원하지 않는 선택을 강요하는 건 박유진이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불편해하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그에겐 견딜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서재 문이 조용히 닫히자 심미연은 곧장 안방으로 향했다. 소파에 앉자마자 아까 걸려온 전화를 다시 눌러 받았다. “미연아, 나야. 혹시 내가 깨운 건 아니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하구나.” 강준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지쳐 있었고 그 안엔
강지한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 박시훈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뉴스 봤어. 네 카이엔이 폭발했다길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네가 무사하니까 이제야 좀 안심이 된다.” “그 대형 트럭, 당장 확인해. 전부 조사하고 운전자는 반드시 찾아.” “알겠어. 지금 바로 확인해볼게.”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박시훈의 표정도 금세 굳어졌다. “조금만 기다려. 바로 연락할게.” “응. 최대한 빨리.” 강지한은 단호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마치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편, 심미연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2층 서재로 향했다. 노크를 하려던 순간, 가방 안에서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잠시 망설인 끝에 그녀는 전화를 먼저 받았다. “보스, 큰일 났어요. 누가 보스를 죽이려고 해요.” 이지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대로 귀에 박혔다. 심미연의 머릿속엔 낮에 있었던 사고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 대형 트럭. 정말 자신을 노리고 달려든 게 맞았던 거다. 만약 그 카이엔이 없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연 씨, 천천히 말해봐요.”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최대한 침착하게 반응했다. ‘도대체 누가 날 죽이려는 거지?’ ‘온지유?’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온지유는 지금 그녀 손에 있고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다. “저도 방금 들었어요. 육현성 씨가 누군가랑 통화한 녹음이 있었는데 거기서 보스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어요.”이지연은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말을 쏟아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봤어요?” 육현성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온지유까지 그녀 손에 있는 상황이니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말한 그 목소리는 육현성이 아니었다. 그게 더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