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나는 신하린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기괴하게 웃었다. “급할 거 없어. 곧 너도 처리할 테니까. 어차피 오늘 너희 둘, 가만두지 않을 거야.” 신하린은 입술을 꽉 깨물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지금 이 시간, 자정이 가까운 이때에 한유나가 갑자기 찾아온 이유는 분명히 이진영이 오지 않는 걸 알고 온 것이었다. 집에 있는 가정부들만으로는 도와줄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처지는 점점 더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그 생각에 손이 본능적으로 베개 밑에 있는 핸드폰을 찾았다. 화면을 눌러 긴급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한유나의 모습은 점점 더 비정상적으로 변해갔다. 그녀가 미쳐서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신하린을 엄습했다. 사람은 때때로 이성을 잃으면 미친 짓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하린이 전화를 걸자마자 한유나는 순식간에 달려들어 손으로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다. 신하린은 다리에 힘이 풀려 눌려져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한유나는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비웃었다. “왜? 심미연에게 연락하려고? 지금 심미연은 자기 일도 바쁠 거야. 너 같은 년에게 신경 쓸 여유 없을걸?” 그 말을 들은 신하린의 가슴 속에 불안이 밀려왔다. “미연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뉴스나 실시간 검색어에서 심미연에 관한 소식을 전혀 보지 못했기에 한유나가 알고 있다는 건 그녀가 심미연에게 무언가 했음을 의미했다. “너 심미연의 가장 친한 친구 아니야? 심미연이 이런 일도 너한테 말 안 해줬어?” 한유나는 신하린을 쳐다보며 웃었지만 그 웃음엔 단 한 점의 따스함도 없었다. “지금쯤 심미연은 아마 아들 장례 준비로 바쁠 거야. 네 전화 받을 여유가 있을까?” 신하린의 머리가 하얘졌다. 심태하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었다. “헛소리 하지 마.” 신하린은 한유나을 똑바로 쳐다보며 눈에 불타는 분노를 담았다. 그 눈빛엔 분노와 의심이 뒤
세상 모든 여자가 강지한을 사랑한다고 해도 심미연은 절대로 그 중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심미연이 강지한에 대한 감정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사실을 신하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넌 당연히 심미연 편을 들겠지.”한유나는 신하린의 말을 믿지 않았다. “믿든 말든 상관 없어. 어쨌든 미연이는 강지한에게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신하린은 더 이상 한유나와 말을 길게 이어가고 싶지 않아 얼굴을 돌려 그녀를 보지 않았다. 한유나는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서 있었다. 그때 화면에서 낮고 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볼륨은 크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엔 단호한 힘이 실려 있었다. “내가 남의 남자를 빼앗으려 했다면 최소한 그 정도는 했겠지. 하지만 한유나, 너는?”“몇 년 동안 이진영 씨를 쫓아다니며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국 이진영 씨의 침대에도 올라가지 못했잖아? 참 안타깝고 웃기네.”그 목소리는 심미연의 것이었다. 그녀는 한유나와의 싸움을 피하려 애썼다. 그동안 참아왔던 말들을 꺼내지 않으려 했지만 한유나의 도발이 점점 더 지나쳐갔다. 결국 참을 수 없었다. 심미연의 말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유나의 마음을 정확히 찔렀다. 한유나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본능적으로 눈을 크게 뜨며 신하린의 손에 쥐어진 전화를 노려보았다. “이 천박한 것, 핸드폰 내놔!” 신하린은 한유나를 무시한 채 손에 든 핸드폰 화면을 여전히 응시했다. 전화는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공기 중엔 억눌린 침묵만이 가득했다. 오직 자신이 뛰는 심장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만이 그 침묵을 깨고 있었다. 한유나의 말이 떠오르며 신하린의 마음속엔 불길한 예감이 솟구쳤다. 목구멍이 마르고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미연아, 태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떻게 된 거야?” 신하린은 손가락으로 핸드폰 가장자리를 문지르며 작은 행동 속에서 안도감을 찾으
“하린아, 잘 들어. 내가 지금 가고 있으니까 최대한 시간을 끌어. 꼭 조심하고.”심미연의 목소리에는 낮은 압박감이 묻어 있었다. 신하린은 왜곡된 표정을 지은 한유나를 바라보며 깊게 숨을 쉬었다. “알았어.”심미연이 오겠다고 하니 신하린은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 자신이 상처를 입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누군가가 대신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힘이 솟았다. 그때 한유나는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신하린에게 돌진했다. 신하린은 급히 손으로 막으며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경계했다. “거기 멈춰.”‘이 여자가 왜 갑자기 또 발악하는 거지?’신하린이 그 생각을 하기도 전에 한유나의 강한 손바닥이 얼굴을 가격했다. “내가 아까 말했지. 밖에 하인 처리하고 너도 처리할 거라고. 내가 지금 장난치는 거로 보여?”신하린은 아픈 얼굴을 찡그리며 한유나의 옷깃을 잡고 빠르게 반격했다. “네가 뭔데 나한테 손을 대?”지금 배고픔에 어지러워서 한유나를 때리기조차 힘들었지만 그건 상관없었다.한유나는 신하린이 이렇게 된 상황에서도 반격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신하린, 감히 나한테 덤벼? 무슨 자신감이지?’“한유나, 너랑 이진영 씨 문제는 나한테 찾아오지 마. 너 상대 잘못 골랐어. 엄연히 말하면 나도 피해자야.”신하린의 몸은 약해 보였지만 그녀의 말투는 강한 기세를 띠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한유나에 대한 경멸과 역겨움이 뒤섞여 있었다. 한유나는 그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입술을 씰룩이며 신하린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손을 뻗어 신하린의 목을 조여왔다. “네가 계속 들러붙지 않았다면 진영 씨 눈에 내가 안 보일 리가 없잖아.”한유나는 갑자기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느 날, 쇼핑몰에서 이진영이 신하린과 함께 옷을 고르고 있을 때 그의 눈빛에 가득 담긴 사랑을 목격했다. 그 순간, 신하린이 있는 한 이진영의 마음에 다른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그때였다. 문이 거세게 부서질 듯 열리며 이진영이 살기를 가득 안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한유나!”낯선 분노에 찬 그의 외침에 한유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순식간에 그의 손에 붙잡힌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죽고 싶냐?”이진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놓았다. 쿵.“아아악!”한유나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찔거렸다.예상치 못한 충격이 다리부터 허리를 타고 올라오며 뼈가 금이라도 간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숨이 멎을 듯한 고통에 정신이 아찔해졌고 그녀는 바닥에 엎드린 채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한유나는 다리를 부여잡은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이진영의 시선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더 큰 두려움으로 그녀를 짓눌렀다. “진영 씨... 진짜 너무해요...”그녀는 울먹이며 애처롭게 말했다. “신하린이 먼저 날 욕했단 말이에요... 나도 그냥...”이진영은 차디찬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누가 하린이한테 손대라고 했어?”말끝에 담긴 살기는 얼음송이처럼 날카로웠고 그의 발끝이 한유나의 다리 근처를 가볍게 누르자 한유나는 숨이 멎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아악! 제발... 발 좀 빼줘요... 뼈가 부러질 것 같다고요.”그녀는 울먹이며 필사적으로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하지만 이진영은 미동도 없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죽는 게 소원이야?”그는 낮고 무심하게 말하며 눈빛 하나로 그녀의 숨을 죄었다. “그럼 내가... 아주 만족스럽게 보내줄게.”그는 여자를 때리지 않지만 지금 한유나는 선을 넘었다. 교훈을 주지 않으면 이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진영 씨, 정말...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야 돼?”한유나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들을 쏟아냈다. 강했던 자존심도, 매번 애써 웃던 얼굴도 이 순간만큼은 다 무너졌다.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대체 신하린을 얼마
“도련님, 어서 가서 보세요! 저 사람들 기세가 장난이 아니에요... 너무 무서워요.” 가정부는 방금 본 광경을 떠올리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손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대문 앞이 아니라 저택 안쪽에 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아니었다면? 지금쯤 무너진 잔해더미 속에 깔려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이진영은 미동도 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단숨에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감히 누가 굴삭기를 몰고 들어왔는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정말이지,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 차가움보다 더 서늘한 것은 이진영 자신의 살기였다. 가정부는 황급히 감정을 추스르며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대문 밖. 깊고 어두운 밤을 뚫고 하얀 조명이 사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진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시야를 조정했다. 그때 멀리 서 있는 한 사람.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그 곳에 심미연이 서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냉랭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진영의 발걸음이 아주 잠시 멈칫했다. ‘심미연이 왜 여기에 있지?’ “하린이... 왜 이래요?” 이진영이 신하린을 안고 나오는 걸 본 순간, 심미연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달려왔다. 그리고 창백하게 축 늘어진 신하린을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순간, 숨이 턱 막혔다. “기절했어요. 병원에 데려가려던 참이에요.”이진영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심미연이 묻기도 전에 먼저 설명하는 걸 보니 그 역시 그녀의 걱정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심미연은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내 차로 옮기세요. 내가 먼저 상태를 확인해 볼게요.” 지금은 감정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신하린이 의식을 잃은 이상, 그녀를 살리는 게 가장 중요했다. 이진영이 한쪽
“알았어. 하지만 나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사람이 하나 있어.” 심미연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금방 끝낼게.”“응. 기다릴게.” 신하린은 바닥에 앉아 있는 한유나를 보고 자신을 거의 죽일 뻔했던 그녀에게 반드시 갚아줘야 한다고 결심했다. 심미연은 몸을 곧게 펴고 한유나에게로 걸어갔다. 심미연은 한유나를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봐. 뭘 알고 있어?”심태하 실종 사건은 철저히 은폐됐지만 만약 한유나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분명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너 잘났잖아. 직접 조사를 해보지 그래?” 한유나는 그 어떤 것도 쉽게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와 심미연은 원한이 깊은 관계였으니까. “말 안 하겠다? 좋아.” 심미연은 차분하지만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한유나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빛이 싸늘하게 번쩍였다. “뭘 하려는 거야?” 한유나는 순간 목이 말라오는 듯한 두려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심미연은 화를 내지 않고도 상대를 압도하는 존재였다.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와 그저 담담한 말 한마디에 한유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 말은 무겁고 날카롭게 다가와 온몸에 서늘한 기운을 퍼뜨렸다. “임지혜가 내 아들을 납치한 걸 알고 있지? 그럼 임지혜가 내 아들을 어디로 데려갔는지도 알겠네?” 그녀는 아들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 기다림은 점점 더 무섭게 그녀를 짓누르며 그녀의 마음속에 서서히 초조함이 스며들었다. 불안과 초조는 점점 더 강해졌고 그녀의 마음은 이제 더 이상 평온할 수 없었다. 순간, 한유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한유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심태하의 실종 사실을 알게 된 건 우연히 그 남자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걸 엿들고 나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심미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차가운 미소를
심미연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한유나를 바라봤다. “미연아, 그 여자가 나를 거의 죽일 뻔 했어.” 그때 신하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심미연은 신하린의 목을 살펴보며 아무런 상처도 보지 못한 채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 여자는 내가 죽기를 바랐어.” 신하린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녀가 의식이 없었을 때 한유나가 멈추지 않았다면 그녀는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 한유나는 내가 절대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 심미연은 단호하게 말하며 신하린을 부드럽게 안아 밖으로 향했다. 신하린은 매우 가벼웠지만 그녀를 오랫동안 안고 있자 심미연도 점차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가며 심미연은 발걸음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이진영이 다가와 그녀를 가로막았다. “하린이는 데려갈 수 없습니다.” 심미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요? 나한테서 뺏으려는 건가요?” 이진영은 신하린을 안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린아, 나한테 와. 다시는 한유나가 널 찾지 못할 거야.” 그는 한유나가 어떻게 집에 들어왔고 어떻게 2층으로 올라갔는지에 대해 계속 조사하고 있었다. 집안의 가정부에게 모두 물어봤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알지 못했다. “만약 내가 하린이를 당신에게 줄 수 없다면요?” 심미연은 신하린을 더 꽉 안으며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이진영은 사람을 강제로 빼앗으려 했다. 어차피 그는 두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더 악역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이진영 씨, 이렇게 계속 나오신다면 저도 더 이상 참지 않겠습니다.” 심미연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하린이는 내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 있어야 해요.” 이진영은 강압적으로 말했다. 그는 신하린이 그를 떠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를 미워하든 말든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진
“그 말은... 결국 나를 내보내지 않겠다는 거군요?”심미연이 차갑게 물었다. 신하린은 본능적으로 심미연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그녀는 죽어서라도 이진영과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이진영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하린이를 남겨두면 심미연 씨는 나갈 수 있습니다.” 그의 눈은 신하린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눈동자 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빨 사이로 겨우 빠져나온 듯한 그의 말은 반박할 여지 없이 강렬하게 전해졌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신하린이 그를 떠난다면 그것은 마치 끊어진 실처럼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그 깊은 감정은 결국 무한한 후회와 고통으로 변할 터였다. ‘반드시 붙잡아야 해.’그 집착은 뜨겁게 불타듯 그의 가슴 속을 태웠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심미연은 입꼬리에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의 집착을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진영 씨가 하린이를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냉소와 경멸이 섞여 있었다. 그러곤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이 손을 휘두르며 명령을 내렸다. “들어와.”순식간에 문 밖에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일제히 들어왔다. 그들의 발걸음은 일사불란하게 맞춰져 있었고 마치 풀려난 맹수처럼 위압적이었다. 방 안은 긴장감이 감돌며 공기 속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팽팽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진영은 차가운 시선으로 경호원들을 훑어보며 비웃었다. 그의 입술에는 섬뜩한 냉소가 떠올랐다.마치 겨울의 날카로운 칼날처럼 차갑고 예리했다. “누가 강지한의 여자가 아니랄까 봐. 다르긴 다르네요. 지한이의 수단을 그대로 배워 오셨군요. 대단하시네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운 톤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겨우 끌어내듯 말했다. 차가운 콧김이 그의 코에서 터져 나오며 그 소리는 마치 짐승이 으르렁대는 듯 방 안을 진동시켰다. 심미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