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한은 미간을 꾹 누른 채 시선이 옆에 있는 심미연에게로 향했다.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심미연을 편애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이노하이브의 지분도, 강씨 가문의 가보도 툭툭 넘겨주었다.심미연 이 여자는 권모술수도 많고 악랄한데 뭐가 좋다고!“병원에 곧 도착하니까 만나서 얘기해요. 심미연이랑 같이 있어요.”심미연도 함께 있다는 말을 들은 강준형의 말투가 한층 누그러졌다.“그래, 기다리마.”전화를 끊으며 강지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강준형이 갑자기 온지유를 해외로 보낸다는 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심미연이 뒤에서 허튼수작을 부린 게 밝혀지면 그도 수단 가리지 않고 상대할 생각이었다.곧 차가 병원 앞에 멈춰 섰고 강지한은 손을 뻗어 심미연을 차에서 끌어 내렸다.손목이 아프게 꺾이자 심미연은 얼굴을 찡그렸다.“강지한, 손 놔!”강지한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놓으면 도망가게?”그러면서도 손에 힘이 살짝 풀렸다.심미연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할머니 주치의가 전화해서 특효약에 대해 말해줬어. 당신이 약속 지켰으니까 나도 말한 대로 할 거야. 걱정하지 마, 억울하더라도 온지유에게 사과할 거니까.”강지한은 경성에서 손으로 하늘도 가릴 사람이라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는 건 쉬웠다.하지만 그가 진실을 알아내기보다는 온지유의 일방적인 말을 믿고 싶어 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나. 차라리 순순히 온지유에게 사과하면 강지후가 좋게 봐줘서 다음 약을 얻는 게 더 쉬워질 수도 있었다.부부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건지, 마음이 씁쓸했다.강지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할아버지 앞에서 말 제대로 해.”심미연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듣고 가슴이 아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알아.”강지한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할머니는 그의 손에 있는 약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강지한은 그녀를 슬쩍 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심미연은 단화를 신고 있었지만 그래도 강지한보다 다리가 짧아서 빠르게 걷는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박유진의 물음에 심미연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되물었다.“무슨 증거?”온지유 차 사고에 대한 증거를 말하는 건가?근데 그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 신하린 조차 모르고 있을 텐데...“네 형님의 차 사고에 대한 증거 말이야.”순간 심미연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진짜네? 근데 이걸 박유진이 어떻게 알고 있지?“걱정하지 마. 증거들은 모두 합법적인 방식으로 알아낸 거니까.”심미연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박유진은 냉큼 그녀에게 해명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증거들을 모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지금 내가 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이따가 다시 연락하면 안 될까?”심미연도 알다시피 지금 당장 모든 증거를 강지한 쪽으로 돌려도 이 일을 자신이 했다고 믿지 않을 것이고 그저 그녀가 증거를 위조했다고만 여길 것이다.강지한도 당연히 그녀를 보호해 줄 것이다. “그래. 그럼 네 전화 기다릴게.”박유진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심미연은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문득 박유진이 알아낸 증거가 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박유진이 뭐라고 했기에 이렇게 혼이 빠진 상태야.”강지한의 싸늘한 목소리에 심미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나랑 유진이는 거의 친남매 사이란걸 알잖아. 근데도 그렇게 질투하고 싶으면 말리지는 않을게.” 심미연을 믿는 사람은 그녀가 굳이 해명하지 않아도 다 믿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해명해도 듣지 않는다. 하여 쓸데없이 구구절절 해명할 필요가 없다.“이 강지한의 여자라면 파멸할지언정 다른 남자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아!”강지한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박유진이 돌아온 뒤로부터 심미연은 이틀이 멀다 하고 이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참나...그의 말대로 그가 얻지 못하는 여자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심미연은 사실 이 말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들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심미연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네!”강준형은 그제야 시름 놓고 밖으로 나갔다.강지한이 어떻게 행동하든, 그는 심미연이 기분 좋으면 된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강준형이 병실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강지한에게 눈치 줬다.“지한 씨도 나가 있어. 나랑 미연 씨가 조용히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 강지한이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심미연이 말을 끊었다.“아니, 나가지 말고 여기에 증인으로 있어!”심보가 고약한 온지유가 자신이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강지한을 시켜 또다시 찾아와 난리 칠 것 같았다. 강지한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이 여자가 대체 무슨 꿍꿍이지?심미연은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넘긴 뒤 사뿐사뿐 온지유의 침대 쪽으로 다가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미안해.”사실 여기에 오기 전까지 이 세 글자를 입 밖에 꺼내기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뱉고 나니 별것 아닌 것 같았다.그저 감정 없이 내뱉으면 되는 것이었다.온지유는 고개를 들고 한껏 창백한 얼굴과 아직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물었다.“미연 씨, 왜 그런 일을 벌인 거야? 내가 그렇게 미웠어?”심미연이 여기까지 와서 사과했다는 건 분명 그 일을 자신이 했다고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온지유가 이렇게 물어보는 건 당연했다.심미연은 허리를 다시 곧게 세우더니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사과했으니 이제 가도 되지?”사과만 하러 왔기에 굳이 다른 물음에 대답할 필요까지 없다고 생각했다.또한 온지유의 이 두 가지 질문을 한 목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나중에 증거를 손에 넣고 나서 다시 온지유한테 따지리라 다짐했다.온지유는 한치의 죄책감도 없이 덤덤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대체 뭘 믿고 이리도 뻔뻔하고 당당한 걸까?“미연 씨, 요즘 지한 씨가 자주 나한테 와있어서 미연 씨가 많이 섭섭하다는 걸 잘 알고 있어. 근데 내가 임신하면서 몸도 안 좋고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강지한은 단번에 그녀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얌전히 누워있어. 그리고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사과까지 하는 거야?”그는 한껏 다정한 말투로 그녀를 탓했다.심미연은 자기 남편이 자기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에 가슴 쓰라렸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온지유는 그녀가 떠나려는 모습에 재빨리 강지한을 밀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쿵!”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는데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심미연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미연 씨, 내가 미안해.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말이야. 지한 씨한테 너무 섭섭해하지 말아줘.”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하는 모습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심미연은 잠시 걸음을 멈칫했다가 얼굴을 찌푸린 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온지유, 저 여자는 워낙 불쌍한 연기를 잘하는 사람인데 오늘 옆에 강지한까지 있으니 더 오바하는 것 같았다. 하여 여기서 입씨름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낀 심미연은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강지한은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껏 차갑고 매서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심미연, 거기 서!”그의 목소리에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심미연도 짜증 났지만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온지유는 본 체도 하지 않고 오직 강지한을 향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강지한 씨, 아까도 말했는데 분명 난 여기에 사과만 하러 온 거야. 그럼 이제 가도 되는 건데 여기서 뭘 더 바래?”심미연이 오늘 여기에 사과하러 온 건 오직 강지한이 외할머니의 일주일 치 약을 끊어줬기 때문이다.근데 온지유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무릎을 꿇은 걸 그녀더러 어쩌라고?설마 이 상황에 온지유를 위로하라는 건 아니겠지?“지유가 지금 말하고 있잖아? 사람이 말하는데 가버리는 건 무슨 매너야?”그러면서 냉큼 온지유를 일으켜 세웠다.“바닥이 차가운데 일단 일어서서 말해.”하지만 온지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
강지한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지금 배속에 태아가 아직 불안정해서 무슨 일이 있든지 다 양보해 주고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 이러다가 혹시나 뱃속의 아기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땐 아주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명심해!”강지한의 단호한 말투에 심미연은 무섭기고, 또 서럽기도 해서 울음이 왈칵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들고 애써 눈물을 삼킨 뒤 다시 남자를 보며 덤덤하게 답했다.“지한 씨, 날 한 번이라도 자기 아내라고 생각해 본 적 있어? 날 아내 취급해 준적이 있냐고. 어떻게 우리가 결혼한 지 3년이 되었는데 애인보다 더 못한 취급을 할 수 있어?”밖에 남자들은 자기 아내한테 꽃은 물론이고 집이랑 자동차까지 통 크게 선물하고 또 접대 자리에도 꼭 데려간다는데 심미연은 여태껏 그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강지한은 한껏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에게 되물었다.“왜? 사모님 소리라도 듣고 싶었나 보지? 심미연 씨, 너무 욕심이 많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심미연은 그의 말에 갑자기 모든 게 재미없어졌다.“내일 시간 있으면 동사무소에 가자. 이제부터 어차피 사모님도 아니니까 내가 뭘 하든 상관하지 마.”두 사람은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심미연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여 별로 득 본 것도 없었거니와 하루가 멀다고 강지한에게 모욕이나 당하면서 살아왔는데 더 이상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게 너무 지겨웠고 일찍이 이혼해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이혼? 꿈도 꾸지 마!”강지한은 차갑게 이 말을 내뱉은 뒤 온지유를 안고 다급히 병실 밖으로 나갔다.그렇게 심미연은 두 주먹을 꼭 쥔 채 병실에 홀로 남겨졌다.무슨 일이 있어도 저 사람과 이혼할 거야!이렇게 살다가는 언젠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미연아, 괜찮아? 지한이 저놈이 널 괴롭힌 건 아니지?”귓가에 강준형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심미연은 재빨리 표정을 감추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전 괜찮아요. 할아버지!”그리고 그에게 다가갔는
그녀고 강준형이 이렇게 해야만 마음이 놓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저 말없이 들어줬다.로펌에 도착 후, 심미연은 강준형을 다시 돌려보냈다. 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돌아섰는데 주아연이 멀지 않은 곳에서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아이고, 우리 심 변호사님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언제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까지 꼬셨대?”방금 심미연이 차 문을 열었을 때 분명 차 안에는 백발을 한 강준형이 있었는데 자기 실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벌이고 다닌다고 생각했다.나이가 한참 많아 보이는 늙은이를 어떻게 설득했는지도 의문이었다.하지만 심미연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직진했다.매번 주아연과 입씨름하고 나면 후회스러웠다. 저런 사람한테도 인정을 베풀었던 자기 자신이 매우 미련해 보였기 때문이다.주아연은 심미연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모습에 더욱 기고만장해서 말을 이었다.“혹시 제가 정곡이라도 찔렀나요? 미연 씨, 전 미연 씨의 그 가증스럽고 쿨한 척하는 모습이 제일 싫어요!”언제나 주아연의 앞에서는 담담하고 여유로운 모습만 보여줬기에 그런 심미연이 질투 나기도 했고 또 그녀의 진짜 면모를 언젠가 드러내게 만들고 싶었다.주아연의 듣기 싫은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울리자 심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저는 그쪽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지 않은데요? 하루 종일 저를 감시하고 제 잘못을 잡아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것 같은데, 제가 아무리 리우에서 나온다고 해도 당신은 여전히 지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 같네요. 제 자리는 언젠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주아연 씨, 예전에 그나마 당신에게 잘 대해줬던 것을 봐서라도 우리 이제 남남으로 지내면 안 될까요? 제발 인사도 하지 말아줘요.”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회사에는 친구보다도 적이 많아지기 마련이라 대부분의 사람이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다.그녀도 이해하지만 주아연한테만큼은 당하고 싶지 않았다.주아연은 심미연의 단호함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임현은 심미연의 안색이 안 좋아진 모습에 재빨리 사무실에서 나왔다.그렇게 전화가 세 번이 울린 뒤에 심미연은 전화를 받았는데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의 짜증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언니, 간이 부었네? 감히 내 전화도 안 받고!”심미연은 한껏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무슨 일이야?”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친여동생인 심서연이었다. 어릴 적 잃어버리면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다시 찾게 된 뒤로부터 계속 태클을 걸어왔다. 심미연이 시집가기 전, 심서연은 심씨 가문에서 아주 고통스럽게 지냈다.“방금 유진 씨가 우리 집에 와서 파혼하겠다고 하더라. 이 빌어먹을 계집애, 언제 나 몰래 또 박유진까지 꼬신 거야!”대갓집 규수다운 면모는 온데간데없이 심서연은 수화기에 대고 거침없이 욕설을 퍼부었다.심서연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날 박유진이 자신과 만나자고 했던 게 차 사고에 대한 증거는 미끼였고 진짜 그녀와 하려 했던 말은 파혼에 대해서였던 것 같았다.다행히 그날 박유진과 만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심서연의 성격에 찾아와 일을 더 크게 벌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박유진과 심미연의 관계도 풀기 힘들어 지게 된다.사실 다른 사람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하지만 혹시나 강지한이 미쳐서 박유진을 찾아갈까 봐 두려웠다.“지금 대답하지 못한다는 건 너도 마음이 찔린다는 소리고, 찔린다는 건 맞다는 소리야!”심서연은 이를 악물고 다시 말을 이었다.“이 나쁜 계집애, 네 남자가 성에 안 차면 널린 게 남잔데 그 남자들한테 들이대지, 왜 하필 내 남자한테 꼬리 쳐!”열일곱 살의 심서연을 되찾은 뒤로부터 거의 매일 이런 심술과 투정을 받아줘야 했다. 3년 전, 박유진이 갑자기 출국하고 심미연이 뜻밖에 강지한과 결혼하게 되면서 그나마 소란이 잦아들었다.하지만 지금 박유진이 파혼을 먼저 제기하면서 또다시 심서연이 매일 찾아와서 괴롭힐까 봐 너무 걱정되었고 생각만 해도 짜증이 몰려왔다.“그런 짓을 벌이고도
말을 마친 뒤 심서연은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의 목소리가 너무 무서웠지만 그가 심미연한테 가서 난리 치겠다고 생각하니 또 기분이 좋았다.모든 이야기를 들은 강지한은 낯빛이 매우 어두웠다.심미연, 어디 두고 봐!바로 이때, 응급실 문이 열렸고 강지한은 재빨리 다가가 의사에게 물었다.“괜찮나요?”“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다.”의사는 한숨을 한번 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이대로 가다간 뱃속의 아이도 지켜내기 힘들 것 같습니다.”하루가 멀다하고 넘어지고 차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는 임산부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아직 임신한 지 석 달도 안 됐는데 이렇게 다치면 아이는 물론이고 어른한테도 분명 안 좋을 것이다.강지한은 핏기 없는 얼굴로 누워있는 온지유를 한번 바라보더니 어렵게 대답했다.“제가 조심하겠습니다.”의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자리를 떴다.뒤따르던 간호사는 그제야 강지한의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훤칠하고 잘생긴 외모에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헉!잘생겼다! 하지만 강지한이 차가운 눈빛으로 간호사를 쏘아보자 그녀는 냉큼 시선을 거두고 의사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온지유를 병실로 데려다주고 그녀의 침대 옆에 앉은 강지한은 또다시 아까 심서연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자기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어쩐지 최근에 심미연이 이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있더니 진작에 박유진과 뭔가 있어 보였다.이때, 온지유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한껏 힘없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지한 씨...”“내가 간병인을 불렀는데 이따 올 거야.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가야 할 것 같아.”강지한은 말을 마친 뒤 문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온지유는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다급히 그를 불렀다.“지한 씨!”강지한이 왜 그냥 가겠다고 하지?원래 옆에서 그녀를 간호해 줄 텐데?분명 심미연, 그 불여우가 또 옆에서 뭐라고 했겠지?강지한은 그길로 로펌에 갔다.주아연은 한창 로펌 사람들에게 심미연의 그 백발노인에 대해 헛소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