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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찰나의 온도

Author: ALL장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4 23:18:46

11.

다음 날, 해솔은 당당하게 시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서울도 아닌 1950년대의 강원도 소도시에서 번듯한 일자리를 구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바랐던 또래들과의 교류나 새로운 인연은커녕, 정당한 노동의 기회를 얻는 것조차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터덜터덜 지친 몸을 끌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현관에 있던 찬솔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어디 다녀와, 해솔아?”

“응? 그냥… 일거리나 알아볼 겸 시내 좀 다녀왔어. 그런데 형은 오늘 일찍 왔네?”

해솔은 찬솔의 물음에 대충 둘러대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커다란 덩치의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손님이 오셨네?”

소파에 누굴 앉혀놓은 건지 소파가 작아 보일 정도로 커다란 남자는, 해솔이 들어서자마자 벌떡 일어나더니 듬직한 체구와 달리 꽤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도웅이라고 합니다.”

“아, 이쪽은 내 동생 박해솔입니다. 해솔아, 이분은 우리 부대에 새로 전입해 오신 군인이신데… 이분도 산신님이시래. 랑이님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하셔서 집으로 모셔 왔어.”

“…산신님?”

해솔은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새로운 산신의 존재에 입을 떡 벌린 채 찬솔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찬솔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덧붙였다.

“도웅님, 제 동생을 따라 산으로 가시면 랑이님을 금방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갑자기…? 랑이한테 말도 없이 데려가도 괜찮으려나…”

랑과 적당히 거리를 두겠다고 다짐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오늘 또 그의 얼굴을 봐야 한다니. 해솔은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도웅을 유심히 살폈다.

도웅 역시 랑 못지않게 거대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차갑고 신령스러운 랑과 달리, 도웅은 순박하면서도 묘하게 귀여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큼직한 얼굴에는 약간의 긴장감과 어색한 미소가 서려 있었는데, 그 대형견 같은 분위기가 사람의 경계심을 해무처럼 풀어주었다.

‘와… 이쪽도 장난 아니게 잘생겼네. 아니, 도대체 산신들은 왜 하나같이 다 미모가 빼어난 거야…?’

해솔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짐짓 담담한 척 도웅을 향해 말했다.

“저, 따라오세요.”

“예!”

도웅의 씩씩하고 힘찬 대답에 해솔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산길을 향해 앞장섰다. 뒤를 따라오는 도웅의 묵직한 군화 발소리가 흙길을 울렸다.

‘…연애는 포기하는 게 맞겠다. 매일 이런 얼굴들을 보고 사는데 내 눈에 평범한 사람 얼굴이 들어오겠냐고. 다 잘생겨서 눈 호강하니 좋은데,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잖아. 어휴.’

해솔은 속으로 몇 번째인지 모를 속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오솔길을 걸어갔다. 해솔의 자그마한 걸음걸이에 어떻게든 속도를 맞추려고 큼직한 다리로 잰걸음을 걷는 도웅의 모습이 어딘가 엉성하고 귀여웠지만, 해솔은 모른 척하며 묵묵히 발을 옮겼다.

깊은 숲길 안쪽으로 들어서자, 해솔은 멈춰 서서 입가에 손을 오목하게 모아 쥔 채 숲을 향해 소리쳤다.

“랑아! 석지야!”

해솔이 울창한 숲을 향해 망설임 없이 힘껏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 서 있던 도웅은 위엄 넘치는 산신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대는 모습에 기절할 듯 놀라, 다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 아니! 랑이님을 그리 부르신단 말입니까? 혹여 노여움이라도 사시면 어쩌시려고요!”

해솔은 살짝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 뭐랄까, 저희끼리는 나름 친구 같은 사이라서요.”

“친구라니, 랑이님과 말입니까…?”

도웅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솔을 바라보던 바로 그 순간, 머리 위 깎아지른 바위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우뚝 선 은빛 늑대의 모습을 한 랑이였다.

랑은 바위 아래 서 있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으나, 그의 황금빛 시선은 낯선 방문객보다 해솔과 너무 바싹 붙어 서 있는 도웅의 자그마한 거리에 유독 가시처럼 꽂혀 있었다. 랑이 나직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둘이 어찌 같이 있는 것이냐.”

낮게 울리는 랑의 음성에 도웅은 놀라 황급히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깍듯이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건넛마을 자그마한 산을 지키던 산신, 도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랑이님을 뵈러 찾아왔습니다!”

랑은 날카로운 눈매를 조금 찌푸린 채, 여전히 해솔의 곁을 서성이는 도웅을 경계하듯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를? 무슨 이유로.”

“제가 가꾸던 산을 인간들이 허물려 합니다. 아직 산자락에 무수한 짐승들이 살아가고 있거늘, 제가 직접 인간으로 현신하여 타일러도 듣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산신의 존재조차 미신이라 치부하더군요…”

도웅의 씁쓸한 고백에 랑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랑의 머릿속에 지난날 해솔이 들려주었던 아득한 미래의 풍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높디높은 건물들이 푸른 자연을 덮어버리고, 숨 쉴 곳조차 사라져간다는 그 무자비한 세계. 어쩌면 그 잔인한 변화가 바로 이 작은 산골에서도 시작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랑은 잠시 묵직한 침묵에 잠겼다가 이내 결단력 있게 입을 열었다.

“그곳의 짐승들은 그 수가 얼마나 되느냐? 우선 모두 이 산으로 터전을 옮기도록 해라. 터전을 떠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나, 인간들 역시 살아남아야 하는 생명이 아니겠느냐. 땅은 좁고 살 사람은 많으니, 우리들이 품을 내어주어야지.”

랑의 아량 넓은 처사에 도웅은 울컥하는 감정을 누르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제 터전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서글프나, 랑이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혹 이곳에서는 제 본래 모습으로 지내도 괜찮겠습니까? 제가 있던 산은 워낙 작아 늘 불편한 인간의 형상으로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 이곳에선 네 본래의 모습으로 지내도 좋다.”

랑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웅은 기다렸다는 듯 기쁨의 숨을 내쉬며 제 본체를 풀어헤쳤다. 쿠쿵, 하는 묵직한 진동과 함께 해솔의 바로 눈앞에서 집채만 한 거대한 곰의 형상이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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