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채혈을 마친 이서영은 마치 쓰레기처럼 한상궁의 손에 내던져지고 말았다.힘없이 다리가 풀린 그녀는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고, 더는 일어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애초에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였다면 사람들도 쉽게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크게 당황한 그녀의 모습에 대전 안의 모든 사람은 그녀가 가짜라고 확신하게 되었다.이렇게나 치밀하게 계획을 꾸몄을 줄이야. 국사의 친자 확인법으로도 가짜를 가려내지 못하다니.어쩌면 이 모든 일이 정말 거대한 음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남경은 한참 동안 이서영을 주시하다가 천천히 자신의 손가락을 내밀었다.남백훈은 그녀 앞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폐하, 실례하겠습니다."남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그녀는 누군가에게 속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다.만약 이서영이 정말 자신을 속인 것이라면, 반드시 직접 가죽을 벗기고 뼈까지 발라내리라 다짐했다.이내 남백훈은 채혈을 마치고 그릇을 거두었다.남경이 잔뜩 분노한 것을 눈치챈 남백훈은 전보다 더욱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폐하, 일단 수중의 일들은... 진실이 밝혀진 뒤에 결정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폐하의 옥체가 가장 중요하옵니다."남경은 한 차례 깊이 숨을 들이쉰 뒤,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남백훈은 몸을 돌려 이경에게 다가갔다."구공주 마마, 받으시지요."이경은 그의 손에서 그릇을 건네받고, 그 안의 피를 약수로 깨끗이 씻어 둔 용기에 부었다."안 돼..."이서영은 절망적인 얼굴로 머릿속에서 도망칠 방법을 미친 듯이 떠올리고 있었다.그러나 그녀가 일어서려는 순간, 한상궁이 재빨리 그녀를 다시 눌러 앉혔다.이서영은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기계 위의 용기가 다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이경은 용기가 멈추자 그 안에서 시험지를 꺼내 들었다.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어떻게 이럴 수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딸의 설득에도 양상서는 승낙하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을 찌푸렸다."너와 나는 당연히 모녀 사이인데, 이걸 왜 굳이 시험해 봐야 한다는 거야? 이 여자는 초나라 첩자라니까. 아직도 모르겠어?"양상서의 딸은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사실 그녀는 시험 한 번 해보는 것쯤은 전혀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남들이 다 하는 일을, 지극히 평범한 자신들만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건 오히려 난처한 일이고, 괜히 거절했다가 미움을 살 수도 있었다.바로 그때, 이경이 양상서를 바라보며 문득 웃었다."설마 이 친구가 자신의 친딸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계셨던 건 아니겠지요?""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양상서는 몹시 흥분한 나머지 얼굴이 순식간에 자줏빛으로 물들었다."한 번만 더 헛소리를 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읍…!"쓸데없이 말이 길어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윤세현은, 보다 못해 손을 들어 그녀의 혈도를 막아버렸다."어머니!"딸은 벌벌 떨며 쿵 소리가 나도록 땅에 무릎을 꿇었다."폐하, 어머니께서는 그저 저를 지나치게 아끼실 뿐입니다. 절대 폐하께 다른 마음을 품으신 것은 아닙니다."남백훈도 더는 설득하지 않고 곧장 양상서의 손가락을 잡아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양상서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눈가에는 희미하게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그녀의 딸은 어머니의 속마음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그저 손가락을 내밀었다.마침내 마지막 시험이 시작되었다.그런데 얼마 후, 마지막 시험지에는 아무런 색도 나타나지 않았다.뜻밖의 결과에 이서영은 손뼉까지 치며 몹시 기뻐했다."폐하, 보세요! 저것 좀 보세요! 모녀 사이라는데 시험지에 색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잖아요!""제가 뭐라고 했어요? 저 여자는 사기꾼이에요. 그저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여자라고요! 폐하, 보세요! 제 말이 틀리지 않았지요?"그러나 대전 안에서 흥분해 소리치는 사람은 오직 이서영뿐이었다.그 외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이내 남경이 손을 흔들자,
곧이어 남백훈은 남양과 남경의 피를 채취했다.투명한 그릇에 담긴 두 사람의 피는 이내 투명한 기구 속으로 부어졌다.그 안에는 약간의 물이 들어 있었는데, 두 방울의 피가 서로 섞이지 않은 채 선명하게 떠 있었다.이건 흔히 말하는 핏방울로 친자 확인을 하는 방법 같았다. 다들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런데 바로 그때, 이경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로 탁자 위의 두 기구를 연결했다.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구 안의 용기가 핏물과 약수와 함께 갑자기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회전 속도가 너무 빨라 육안으로는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였다.그런데 아무도 용기를 건드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 용기가 저절로 돌 수 있는 거지?한상궁은 남경의 앞을 막아서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그때 남양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기구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회전하는 용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사실 이경은 알고 있었다. 눈앞의 사람들이 ‘전기’가 무엇인지 알 리 없다는 것을.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설명할 때가 아니었다.그녀의 뒤에 선 윤세현 역시 기구 한가운데서 빠르게 회전하는 용기를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잠시 후, 이경이 정지 버튼을 누르자 용기는 회전을 멈추었다."구공주, 이게 대체 무엇이냐?"남양의 표정은 몹시 못마땅해 보였지만, 내심 궁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장공주 마마, 이 시험지를 한번 보시지요.""이게 무엇인데?"남양은 이경이 용기 속에서 꺼내 건넨 시험지를 받아들었다.남양은 제 자식을 죽인 그 못된 여자와는 말 한마디 섞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차오르는 호기심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장공주 마마와 폐하께서는 분명한 모녀 사이이시니, 시험지의 색이 유독 짙게 나타난 것입니다."현재 기술로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이 시대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무엇보다 이 시대에는 컴퓨터 프로그램 같은 것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조부모와 손녀 사이라면 색이 조금 옅게 나타납니다. 지금 바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이내 이경은
남백훈이 데려온 사람들은 남경과 한상궁, 그리고 남양에게도 매우 낯익은 이들인, 바로 남진의 대신들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들 모두가 자신의 자녀와 손녀, 손자들까지 데리고 이곳에 와 있었다.“너희들이…… 구공주의 증인으로 나서겠다는 것이냐?”한상궁은 눈썹을 찌푸렸다.대체 언제부터 구공주와 알고 지낸 거지? 또 언제부터 전하와 접촉하기 시작한 거지?그런데 뜻밖에도 대신들은 서로 얼굴만 마주 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폐하, 저희는…… 저희 역시 무슨 일로 부름을 받아 이곳에 온 것인지 잘 모릅니다.”그중 한 노신하가 두려움에 떨며 아뢰었다.이내 다른 이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그…… 삼황자께서 저희더러 이곳으로 오라 하셨는데, 그… 그게 아니었단 말입니까?”자고로 관계는 확실히 해두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한순간 줄을 잘못 서서 엉뚱한 편에 설 수도 있었다.한편 전당에는 폐하뿐만 아니라 장공주까지 함께 있었다.두 모녀가 겉으로는 화목한 듯 지내지만, 실제로는 은근히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잘못된 편에 서면 자신은 물론 가문 전체의 앞날까지 크게 흔들릴 수 있었다.“이 신하들은 제가 불러 모은 사람들입니다. 많은 이들을 모으기 위해 최대한 황궁 가까이에 사는 이들을 불렀습니다.”남백훈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남경과 남양에게 각각 예를 올린 뒤 말을 이어갔다.“이후의 일은 구공주가 직접 진행할 겁니다.”사실 그 역시 절차를 알고 있었고 곁에서 충분히 도울 수 있었지만, 구체적인 과정은 구공주가 현장에서 지시해야만 했다.즉, 오늘 이 일은 이경이 주도하고 있는 셈이었다.“대체 뭘 하려는 거야?”어느새 이서영의 등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당황한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됐다.이서영은 눈앞의 대신들과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그래서 이경이 분명 무슨 꾀를 부려 일부러 자신을 겁먹게 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다.이 상황에서 자신이 두려워할 것은 전혀 없다고
그러나 이경은 이 질문에 당장 답할 수 없었다.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21세기의 이경은 분명 어머니의 친딸이었다.그러나 지금 이경의 영혼은 구공주의 몸에 깃들어 있었고,궁중의 공주인 구공주가 남성과 대체 어떤 관계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혹시 자신이 초나라 황족에 의해 바뀐 아이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하지만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만약 황제나 태후가 남성의 딸을 대신할 가짜를 찾으려 했다면, 남성의 진짜 딸은 진작 죽여 입을 막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진짜 딸을 무사히 지금까지 살려둘 이유가 있겠는가?하물며 남진으로 가 남경과 만날 기회까지 준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이 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황제와 태후가 정말 멍청하지 않고서야… 이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남성이 정말 이경의 어머니라 해도, 이 육체의 원래 주인인 이경은 정작 남성과 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유일하게 관련이 있다면, 바로 구공주의 몸에 깃든 이경의 한 줄기 영혼뿐이라고 믿었다."날 믿어?"이경은 윤세현을 바라보며 물었다.윤세현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아주었다.“남백훈더러 누구를 찾으라고 한 거야?""이따 대전에 가면 알게 될 거야."그의 묵묵한 신뢰는 이경에게 이미 큰 용기를 주고 있었다.적어도 누군가 진심으로 자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이경은 깨달았다.오늘 밤은 분명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것이라는 것을…어느새 시간은 동틀 무렵이 되었다.남경은 막 잠에 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상궁이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서영이가 내 손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겠다고? 참으로 터무니없는 소리로구나!"마찬가지로 잠든 지 반 시진도 되지 않은 이서영은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이 순간 이경이 너무나도 미웠다.자기가 안 잔다고 남들도 안 잘 거라 생각하는 건가?하지만 한상궁의 말을 듣자마자 이서영은 졸음이 확 달아났다.순식간에 정신이
이서영이 남성의 딸이 아니라니!이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청지가 아는 이서영은, 태후가 분명 궁으로 데려와 어릴 적부터 길러낸 아이였다.심지어 당시 공관 부인과 장군 부인 역시 직접 궁에 들어와 후궁에서 한동안 이서영과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그들이 직접 돌본 아이인데, 어떻게 신분이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그들은 이서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공주 마마, 혹시 오해하고 계신 건 아닙니까?"청지는 한참 동안 충격에 빠져 있었다.사실 그는 아직도 이경을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필경 전과가 있었으니.하지만 지금 구공주와 세자는 분명 같은 편에 서 있었다.즉, 구공주의 행동 하나하나가 세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구공주가 함부로 움직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마마, 정말 증거가 있는 겁니까?""초아가 왜 죽임을 당했는지 알아?"이경은 그의 말을 가볍게 끊으며 되물었다."그들의 목적은 애초에 유아이고, 초아는 그저 희생양일 뿐이야.""마마……""그 유아라는 아이가 이서영의 비밀을 알고 있어."이경은 고개를 들어 윤세현을 힐끗 바라보았다.그는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이경이 계속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리는 듯했다.충격에 빠진 청지와 달리, 윤세현은 내심 크게 놀라기는 했지만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경은 자신만의 확신이 없으면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확신이 없는 일은 더더욱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을.하지만 청지는 몹시 조바심이 났다.이건 꽤나 심각한 일이었다. 만약 이경의 추측이 틀린 것으로 확인되면 황실 혈통을 모독한 중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어차피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떠날 거면 지금 떠나. 이후에는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거야."윤세현은 몹시 태연했다. 더 이상 결과가 나빠져 봤자 더 나빠질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무엇이 됐든 남경에게 얽매이게 되는 처지가 되었으니."세자 나리……"청지는 구공주가 완전히 미쳤다고 생
영은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녀는 확실히, 이경을 떠올리게 되면 기분이 매우 안 좋아졌다."영은 언니, 지금의 이경은 과거의 그 어릿따운 미모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경과는 완전히 달라."이서영은 실눈을 뜬 채 영은의 눈빛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그 여자가 이젠 엄청 똑똑해지고 자신만의 수단도 있다는거 몰라?""난 단지 그 여자가 내 남자를 빼앗는걸 증오할 뿐이야. 그러나 사실 이경은 나에게 있어서 그렇게 큰 위협이 되는건 아니야. 난 필경 이후 남진에서 여왕이 될 사람이니까. 하지만 너는... 다르지."
칼빛이 번쩍이는 동시에 칼바람이 불어오면서 의모의 얼굴을 때렸다.놀란 의모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 큰 소리로 구조를 요청할 겨를도 없이, 단도는 어느새 그녀의 코 앞까지 다가왔다.연지는 저도 모르게 나서서 막으려 했지만 이내 멈추었다.그는 공주와 세자가 더 이상 다투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긴 했지만, 공주로서는 눈 앞의 이 의모를 죽여야만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그 한을 풀어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그럼 이 의모는 타살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구공주의 칼날이 의모의 목에 닿았지만, 칼은 멈출 기세가 없어보였다. "왜?
그렇게 이경은 도움을 받아 방으로 부축되었다.곧이어 의모가 긴장한 모습으로 찾아왔다."공, 공주마마. 제가... 상처를 한번 확인하겠습니다.""너무 아파. 얼른, 얼른 나를 낫게 해줘. 그렇지 않으면 네 목숨을 뺏을 거야!"이내 이경은 자신의 종아리를 내밀었다. 그녀의 종아리에는 긴 한 줄기의 상처가 있었다.상처가 짧은 편은 아니었고 적어도 손바닥 반쪽만큼 길었다.의모는 여태 한번도 구공주를 치료해준 적은 없었지만, 그녀와 현주는 전에 앙숙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자신이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면, 공주가 언제든
"의모가 갖고 있던 그 약들 다 사라졌어! 이경이 한 짓이야. 분명 이경 그 천한 년이 한 짓이 틀림없었어!"의모의 방을 치우고 있던 유아는 도무지 그 독약을 찾을 수 없었다. 이서영은 이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천한 년 같으니라고! 당장 오라버니한테 가서 고발할 거야. 이 모든 게 그 여자가 직접 설계한 거라고!""미쳤어?" 여태 의자에 앉아있던 한 궁녀는 여전히 아무 말없이 있기만 했다. 이서영이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차를 마시기만 할 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런데 방금 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