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전혀 엉뚱한 곳이 한비단의 제2 근거지로 지목되다니.
그곳은 다름 아닌 계영이 재개발로 추진하려던 지역이었다.
의아함이 머리를 스쳤지만, 현재로서는 다시 급습하여 판을 깨부수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좋아. 헤르만이 준 정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지.”
― 살펴봐서 나쁠 건 없어.
그 뒤로도 계영은 강무와 긴밀하게 통화를 이어가며 작전을 순조롭게 진행시켰다.
마 실장은 경찰과 공조하여 수완 좋게 요양 병원에 고용된 자들을 회유해 나갔고, 덕분에 하나둘 불법적인 행각에 대한 진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임무 조작은 물론, 요원들에게 지급되는 임무 완수금 중 일부를 편취해 빼돌린 정황까지 드러났다.
평범하게 고용되었던 간호사들과 환자들도 그간의 비밀을 하나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곳에서는 임무를 거부한 한비단 요원들의
수색 구역을 몇 번이고 훑었지만 현신은 흔적조차 잡히지 않았다.헬기 안, 계영의 심장은 피가 바짝 타들어가다 못해 잿더미가 되어가고 있었다.바람이 조금이라도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는 시선. 계영은 기괴할 만큼 침착한 태도로 헬기 창밖을 내려다보며 산 전체를 부감했다.마 실장은 제 무릎 위에 노트북 두 대를 펴놓고, 연신 새로고침을 누르며 초조하게 계영의 눈치를 살폈다.“이 여자가······또 거짓말을 했어. 내게 온다는 선택지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어.”“현신 님의 거짓말에는······ 늘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마 실장은 연신 다른 노트북을 두드리며 현신을 추적하고, 한규련과 정보를 주고받았다.저 벼랑 밑 어디엔가 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버려져 있을 거라 생각하자, 계영의 분노와 절망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현신은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재주가 있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언제나 죽음을 삶의 옆자리에 두고 살아가던 여자. 그럼에도 제 삶의 마지막을 맡길 수 있을 만큼 자신을 믿어주었다는 사실에 계영은 처절한 허무함을 느꼈다.“늘 지켜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현신 님은 아주 유능한 요원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신 겁니다.”마
현신의 참았던 눈물이 최주현의 어깨를 적시던 바로 그 순간.털컹.최주현은 방아쇠조차 당기지 못한 채, 손에 쥐고 있던 총을 바닥으로 맥없이 떨어뜨렸다. 지독한 무력감과 절망이 뒤섞인 비명이 그녀의 목구멍을 찢고 터져 나왔다.“하하! 지긋지긋한 아가씨, 제발······ 날 좀 그냥 둬! 그럼 나도 널 진작 놔줬을 거 아니야! 흑······, 흑흑!”드디어 다 포기한 것일까. 미쳐버린 광기 끝에서 마침내 아무도 해치지 않은 채 이 비극을 끝맺으려는 걸까.하지만 감도는 공기가 이상했다. 자수하려는 분위기도, 그렇다고 현신을 죽이려는 살기조차 아니었다.“······할멈. 내가 제일 잘하는 게······ 지키는 거야. 그거, 내 특기잖아.”“하하! 오만하긴······, 다 싫어! 누구에게 지켜지는 삶 따위······, 이제 질색이라고! 흑, 흑흑!”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악에 받친 음성이 현신의 귓전을 때렸다.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때늦은 반성일까, 아니면 평생 김민철을 바라보며 품었던 이루지 못한 욕망에 대한 슬픔일까.현신이 감상에 잠겨들던 바로 그 찰나—최주현이 갑자기 현신의 품을 거세게 뿌리치더니, 두 손으로 현신의 어깨를 강하게 밀쳐 버렸다.“싫어!
현신은 최주현의 뒤를 따라 칠흑 같은 숲속 좁은 흙길을 차갑게 가르며 달렸다.어린 시절 시온, 무휼과 함께 숨바꼭질을 하며 뛰놀던 곳이자, 밤이 되면 할멈이 우리를 찾으러 산등성이를 헤매던 바로 그 길이었다.앞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현신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의존해 최주현의 뒤를 쫓았다.“오지 마! 내 품엔 수류탄도 있어!”그때—공기를 찢는 둔탁한 로터음이 머리 위를 가득 메웠다.두- 두- 두- 두- 두—!현신의 발걸음이 찰나 동안 멈춰 섰다.어느새 야산은 기괴할 만큼 검은 밤에 삼켜져 있었고, 먹구름을 뚫고 내려온 헬리콥터에서는 검은 형체의 누군가가 패스트 로프(fast rope)를 타고 하강을 시도하고 있었다.아니길 바랐지만, 본능이 저 미련한 사내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었다.‘계영 님!’이 밤중에 좌표를 추적해 제 목숨을 던지러 올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현신은 목이 찢어져라 하늘을 향해 외쳤다.“최주현은 제가 직접 생포합니다! 타깃은 총과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으니 아무도 접근하지 마십시오!”하지만, 그 순간탕! 탕!최주현은 이미 이성을 잃고 허공을 향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절대 오지 마! 조금만 가까이 내려오면! 에스의 심장을 뚫어 버릴 테다!”살려달라는 비명이었다면 저 사내는 주저 없이 내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현신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하강하던 헬기에서 일순 찰나의 주춤거림이 느껴졌다.탕! 탕!야산 전체를 찢발기는 총성과 함께 헬기가 고도를 조금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추적하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절대로 다가오지 마세요!”단방향 음성 채널로 기기를 변경한 현신은 헬기를 돌려보내라는 지시를 남겼다. 마침내
할멈이 자신에게 총을 쏘았다.복부를 차내던 발길질에는 연약한 노인의 흔적 따위는 없었다. 무자비하고 단단한 살의만이 실려 있었을 뿐.지독한 변명이라도, 어쩔 수 없었던 사고라는 일말의 거짓말이라도 해 주길 바랐건만.허벅지를 타고 피가 뚝뚝 흘러내렸지만, 그보다 심장 깊은 곳이 피비린내 나게 찢겨 나가는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콰앙—!현신은 절뚝이는 다리를 끌며 최주현이 도망친 문을 걷어차 열고 소형 폭탄 하나를 터뜨렸다.“할멈! 난 지금 내 손으로 운명의 문을 열었어!”이미 각오한 길이었다. 현신은 최주현을 향해, 그리고 제 자신을 향해 나직하게 읊조렸다.이것이 생의 마지막 임무가 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최주현의 모든 자백은 이미 가계영에게 전송되었고, 요원들과 이신 소년까지 무사히 탈출시켰으니 가슴 한구석은 차라리 홀가분했다.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생사와, 최주현의 완전한 처단뿐이었다.“오지 마! 에스, 당장 서지 못해?! 한 걸음만 더 오면 네놈 머리통을 날려버리겠다!”2층 뒷산과 바로 연결된 창틀에 걸터앉아 뛰어내리려던 최주현이, 표독스러운 살기를 뿜어내며 고함을 질렀다.현신은 가차 없이 스위치를 눌렀다.콰앙—!“할멈, 그만 자수해. 순순히 법의 심판대를 밟아. 그리고 사죄하며 새 삶을 살아.”“네 목적은 이미 달성했잖아! 그러니 날 풀어줘! 너도 이쯤에서 도망쳐! 그러면 더는 널 죽이려 들지 않을 테니까!”가당찮은 소리.목숨 하나 보전하겠다고 마지막 임무를 내팽개치고 도망칠 사람으로 본 것인가.“할멈, 날 몰라도 한참 잘못 봤어. 임무를 목전에 두고 살겠
분노와 절망으로 일그러진 최주현을 내려다보며, 현신은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할멈······ 한비단은 본래 사람을 살리고 지키기 위한 숭고한 곳이었어.”“그런 훌륭한 곳을 너희 같은 것들이 부수려 들잖아!”억눌러왔던 울분이 현신의 가슴속에서 검붉게 타올랐다.“할멈이 그 한비단을 당신의 추악한 욕망으로 더럽혔어!”“난 그저 그 남자가 이 나라의 꼭대기에 오르길 바랐을 뿐이야! 그가 우두머리가 되어야 이 썩어빠진 세상이 바로 서는 거니까!”최주현은 주먹을 움켜쥔 채 비명에 가까운 광기를 토해냈다.“아니! 그건 세상을 위한 게 아니라, 그저 할멈 당신의 이기적인 탐욕일 뿐이야! 꼴좋네! 평생을 바쳐 믿었던 남자에게 버려지다니!”현신의 눈동자에도 붉은 광기가 일렁였다.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최주현은 발악하며 주변을 에워싼 요원들을 향해 소리쳤다.“안 되겠어! 저년을 당장 포박해! 가계영을 죽이려면 저년을 미끼로 써야 해!”죽어도 홀로 죽겠다는 서늘한 각오를 품은 현신이 요원들과 눈을 맞추었다. 이미 마음이 돌아선 요원들은 주춤거리며 현신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한 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최주현은 제 부모를 죽이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도 모자라 우리가 피 흘려 얻은 대가를 갈취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죄를 짓지 말고 도망치세요!”“시끄러워! 당장 에스를 포박하지 않으면 너희부터 총으로 쏴 버릴 거야!”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악마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후 4시가 다다르자, 계영의 저택은 묵직한 정적 속에서 서서히 숨을 죄어오기 시작했다.지난 며칠간 그들은 이 집념의 공간에 모여 사력을 다했다. 오늘 맞이할 한비단의 진짜 흑막, 최주현의 목을 옥죄기 위한 거대한 사냥 작전이었다.“이제 마지막입니다.”“마 실장. 헬기 허가는 떨어졌나? 그리고 한비단 내부 요원들 동향은.”“예. 포섭할 수 있는 인력은 전부 회유하여 우리 쪽 편대로 돌려놓았습니다.”마 실장과 계영은 현신이 사지로 발을 내딛기 전, 마지막으로 모든 변수를 점검하고 있었다.“현신, 네 몸에 차고 있는 통신 장치, 그리고 대인 방어 무기와 비상용 소형 폭탄까지 다 너를 지켜주는 것들이니 잊지 마.”“걱정 마세요. 잘 알고 있어요.”현신은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전투복 안에 모기장처럼 얇은 체인메일(Chainmail) 형태의 특수 섬유 전신 방탄복을 조용히 받아 입었다.살을 파고드는 차가운 감촉이 도리어 정신을 서늘하게 깨웠다.혼자라면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할 작전이었다. 그러나 제 몸을 미끼로 악의 뿌리를 통째로 뽑아내려는 이 사냥은 어지간한 테러 조직을 궤멸시킬 법한 거대한 작전으로 번져 있었다.모든 무장을 갖춘 현신이 침묵을 깨고 계영을 향해 얕은 숨을 내쉬었다.“계영 님. 무사히 잘 다녀올 테니 너무 염려 마세요. 약속할게요.”“너는 내가 아는 가장 유능한 요원이야. 당연히 믿어. 그러니 그 약속, 반드시 지켜.”계영의 거대하고 따스한 손이 현신의 여린 손가락에 조용히 고리를 걸어왔다.단지 이것만으로 온전할 수 있을까. 밀려드는 불안감이 현신의 가슴을 할
죄를 지었냐고.현신은 너무 많은 죄를 지어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또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아니요.”“풋, 귀엽게!”“살면서 죄 안 짓는 사람 없다. 거짓말도 죄지.”현신이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말하자, 한규련과 김강무의 입가에 그 모습이 귀엽다며 옅은 미소가 번졌다.대기업 본사의 로비는 굵직한 해외 파트너사들과의 미팅 준비로 소란스러웠으나, 소파에 모여 앉은 이 세 남자는 마치 다른 시간대 위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 여유로웠다.지나가는 직원들이 사장과 그 거물급 친구들의 등장에 놀라 시선을
3월의 끝자락, 창밖의 공기는 여전히 냉소적이었으나 사무실 안은 화이트칼라들이 뿜어내는 기묘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서류 더미가 스치는 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음 사이로 현신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제안서 복사 끝났습니다, 최 대리님!”“어이, 알바생! 여기 오타 좀 확인해 봐.”“예, 갑니다!”현신은 기계적으로 발을 놀렸다.지금 그녀가 걸친 헐렁한 셔츠와 알바생이라는 가명은 정체를 감추기 위한 완벽한 껍데기였다.현신은 구석진 제 책상에 앉아 엘리트들이 내놓은 오만한 종이 뭉치들을 넘겨보았다. 무미건조한 숫자와
이무휼은 현신만 생각하면 미안하고 너무 무모해 스스로에게 화만 났다.“그 자식, 이제 갈 곳도 마땅치 않을 텐데······.”자신은 서시온을 돌봐야 했기에 가장 위험한 활동은 현신 혼자 보냈기 때문에 자괴감만 들었다.“우리 집이 너무 좁아서 안 오는 걸까? 아니면 혹시 뒤라도 밟힌 건가?”“임무 끝나면 원래 철저하게 몸 숨기는 녀석이니까······.”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음에도 현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선뜻 수저를 들지 못했다. “내가 다쳐서··· 현신이가 힘든 임무는 혼자 다 도맡아 하는 것 같아.”서시온의 자
현신의 가느다란 손끝이 수치심과 분노로 부르르 떨려왔고,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막으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오토바이를 몰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가계영이 남긴 압도적인 잔상 때문인지 발끝이 바닥에 접착제라도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진짜. 살다 살다 이토록 황당하고 억울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더니, 제 땅에 발을 들이고도 도리어 침입자 취급을 당하는 현실에 현신은 기가 찼다. 마동현 실장이 무심하게 펜을 돌리며 턱을 괴고 그녀를 응시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