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확인한 것은 오직 찰나의 눈빛뿐이었지만, 그 안에 고인 텅 비어버린 허무는 가계영의 뇌리를 여전히 잠식하고 있었다.
가계영은 지금 김강무의 말을 허투루 넘길 수 없었기에, 뉴스 화면을 응시하며 깊은 사유에 잠겼다.
그 소년의 몸은 바람결에도 흩날릴 듯 가냘팠고, 목소리는 감미로운 미성으로 귓가를 간지럽혔다.
특히나 서늘할 정도로 고왔던 눈매를 떠올리면, 마스크 뒤에 숨겨진 용모 또한 꽤 수려할 것이라 짐작되었다. 간호사 복장을 하고 능글맞게 웃으며 사람들의 경계심을 사근사근 녹여냈을 녀석의 모습. 녀석을 가늠하자 가계영의 얼굴에는 기묘한 열기가 올랐고, 무심하던 시선이 가늘게 흔들렸다.
화면 속 보도 내용을 지켜보던 가계영은, 녀석이 병원 심장부까지 잠입해 그 거대한 치부를 도려내 온 과정을 머릿속으로 세밀하게 그려 보았다.
완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기보다는 은밀하게 타인의 심연을 파고들었을 녀석. 가계영은 문득 실제 CCTV 속에 담겼을 녀석의 잔상을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때였다.
“계영아? 어이! 가계영!”
김강무의 날카로운 부름에 가계영은 그제야 현실로 회귀하며 고개를 돌렸다.
“왜?”
“불러도 왜 대답이 없어? 뭐가 그렇게 급해서 넋을 놓고 있어?”자신이 이렇게 한 인간에게 관심을 쏟다니.
스스로도 의아한 가계영이었다.
“계영아, 빨리 추진하고 홍콩으로 넘어가야 해.”
“그러게. 나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서 책을 읽고 뉴스까지 확인하더니, 재개발 지역까지 직접 챙긴다고? 너 정말 일 중독이냐?”가계영은 친구들의 말을 대충 흘려 넘기고는 텔레비전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협조해. 내 시간을 무의미하게 버리고 싶지 않으니까.”
김강무는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한규련을 향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김강무, 너 왜 나를 그렇게 한심하다는 듯 보지?”
그러고는 다시 가계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팔짱을 단단히 꼈다.
“하나는 시간이 남아돌아 한가함에 미쳐 날뛰고, 하나는 분 단위로 인생을 쪼개 스스로를 혹사하고···. 내 친구들은 왜 중간이 없냐?”
그 말에 한규련은 즐겁다는 듯 깔깔대며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는 가계영을 향해 유들거리는 어조로 은밀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긴, 가계영이 강북 쪽 사업을 마무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뭐가 이리 급한지 모르겠어. 그거 사실 욕구불만 아니야?”
“그냥 협조나 해.” “좀 쉬면서 하자는 거지. 김강무, 아무래도 가계영 저러다가 갑자기 엉뚱한 곳에 꽂히는 거 아닐까?”그 말에 김강무도 팔짱을 낀 채 설핏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렇게 지긋지긋하게 일만 하다가 어떤 여자한테 콱 꽂히는 순간이 오겠지. 그때는 눈이 180도 뒤집혀서 꽁무니만 쫓아다닐걸.”
순간, 한규련이 김강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가계영을 향해 짓궂게 눈을 흘겼다.
“명의 선생님, 아무래도 네 말이 정답 같다. 가계영 지금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고 있어.”
김강무는 가계영과 시선을 정면으로 맞부딪치며 묵직한 조언을 던졌다.
“가계영, 너 조심해라.”
“뭘?” “그냥, 부디 남들처럼 평범한 연애를 하길 바란다는 뜻이다.” “시끄러워.”한규련은 김강무의 어깨 위에 얹은 손가락을 은밀하게 지분거리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속삭였다.
“하하, 가계영. 어쨌든 세상은 넓고 여자는 널렸으니까. 나처럼 김강무 뒤꽁무니만 쫓지 말고 말이야.”
“그 입 닫아.”가계영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둔 채, 여전히 화면 속 의료 비리 사건 보도만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는 친구들의 농담을 시답잖은 소음으로 치부하며 시계를 확인하자마자 거침없이 몸을 돌렸다.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서둘러.”
“하하, 알았다니까. 가자고.”한규련과 김강무는 이미 멀어지는 가계영의 뒤를 쫓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참, 가계영. 그 재개발 지역에서 알박기하고 있다는 불탄 보육원 주인, 여자라며?”
“그렇다고 들었어.” “일단 부지라도 한 번 훑어보자. 그 여자, 연락 두절이라던데 단서라도 나올지 모르잖아.”김강무 역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한규련의 말을 경청하다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를 검색했다.
“그래, 좋아. 아, 내가 보육원 앞 주택에 방범 CCTV를 하나 심어뒀는데 우편물이 꽤 쌓였더라고. 조만간 누군가 나타날 것 같아.”
“오호, 역시 치밀해. 명탐정 김강무라니까. 자, 빨리 가자. 나도 거기 무지 궁금해.”옆에 있던 한규련이 신이 난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계영은 굳게 입을 다문 채 가장 앞장서서 병원 로비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떠나자, 로비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간호사들이 스멀스멀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가계영과 한규련, 김강무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숨죽여 지켜보던 그들은 참았던 탄성을 터뜨리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김강무 선생님, 정말 너무 멋지다. 저런 남자는 누가 데려갈까?”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 김강무 선생님 댁은 양가 부모님이 전부 대형 병원장에 어마어마한 자산가라잖아. 재벌가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걸?” “그 옆에 분들도 외모가 정말 환상적이야. 나이는 김강무 선생님보다 한두 살 어려도 가족보다 더 끈끈한 사이라고 하던데.”간호사들은 황홀한 표정으로 그들이 머물다 간 자리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금발 머리 그분은 HH그룹 재벌 3세 한규련 맞지? TV에서 본 것 같아!”
“지금 저 검은 머리 미남자는 고작 스물여섯인가 일곱이라는데, 자산이 조 단위라더라고.” “경호업체에 건설사, 해외 호텔까지 가진 엄청난 부호래.” “맞아! 빌딩이나 호텔 이름에 ‘켄즈’라고 붙어 있으면 전부 그분 소유라고 하던데······.”간호사들의 집요하고 끈적한 시선은 이미 사라진 가계영과 한규련, 김강무의 잔상을 쫓으며 한참 동안 로비를 서성였다.
도대체 저 완벽한 남자들이 어떤 여자와 얽히게 될지, 그녀들의 상상력은 끝도 없이 부풀어 올랐다.
*** 해가 급격히 기울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오후.서울 구도심의 폐허가 된 보육원 마당 위로 거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날카로운 메아리를 남겼다.
오늘은 또 어디서 몸을 뉘어야 하나. 현신은 요즘 들어 집 없는 설움이 뼈마디 마디에 사무치는 듯했다.
최근 머물던 쪽방촌마저 재개발의 광풍에 밀려 쫓겨난 처지였다. 게다가 자신이 돌보고 있는 보육원 출신 최주현이 입원한 요양 병원을 다녀오는 길이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심란해졌다.
이토록 마음이 부대낄 때마다 현신이 찾는 장소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꿈이 머물러 있고, 부모님과 함께했던 찬란한 추억이 깃든 곳.
‘우편물이라도 와 있으려나.’
서울 시내의 낡은 골목 끝자락, 산자락과 맞닿은 채 위태롭게 서 있는 이 보육원은 현신의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일한 유산이었다.
이제는 화마가 할퀴고 간 앙상한 뼈대와 을씨년스러운 적막만이 감도는 2층 건물이 되었지만 말이다. 오토바이를 몰아 보육원 입구에 다다르는 순간, 현신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불길한 예감은 단 한 번도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아······.”
골목 어귀를 점령한 검은 세단 세 대와 육중한 대형 밴들.
차들의 머리가 골목 끝이 아닌 반대편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 보육원 부지 안까지 제집처럼 드나들며 차를 돌려 세웠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런······!”
아니나 다를까, 적막해야 할 보육원 안에서 낯선 남자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신은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불에 그을려 뒤틀린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주인 없는 땅인 양 당당하게 점거하고 있는 무뢰한들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마당 중앙에는 대단한 기세를 풍기는 세 남자가 서 있었고, 그들을 철통같이 엄호하는 경호원들의 위세가 대단했다.
“너 누구야?”
경호원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현신을 발견하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왔다.
잘 단련된 근육과 날카로운 안광은 그가 예사롭지 않은 실력자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이, 소년! 어른이 묻는데 대답 안 해? 너 정체가 뭐야?”
“왜··· 이러시는 건데요?”내 땅에 발을 들이고도 도리어 고압적인 태도라니. 현신은 어이가 없었지만 기를 죽이지 않으려 애썼다.
“겁도 없이, 이 동네 사는 아이냐? 위험하니까 당장 돌아가!”
그는 현신을 길 잃은 불량 중고생쯤으로 치부했는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보육원 밖으로 몰아내려 했다.
“마 실장, 너무 소리 지르지 마. 애 긴장한 것 좀 봐. 와, 진짜 뽀송뽀송하게 귀엽게 생겼네? 요즘 남자애들은 아이돌처럼 왜 이렇게 곱상한 거야?”
“한규련, 그것도 성희롱이다. 자중해.” “김강무, 이건 순수한 칭찬이야. 저 녀석, 또래 여자애들 여럿 울리게 생겼다는 뜻이라고.”도대체 저자들은 누구인가. 현신은 치미는 화를 누르며 자신을 처음 불러세운 남자를 쏘아보았다.
당장 내 땅에서 꺼지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만약 이들이 소문으로 듣던 재개발 부지 매입을 종용하는 자들이라면 상황이 복잡해질 터였다.
현신은 신중하게 상황 파악부터 하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아. 이럴 수가.
현신의 등 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뒤이어 들려온 이름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녀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가계영, 김강무! 나 정말 반할 것 같아. 이 귀여운 녀석이 우리 무서워서 울며 도망가면 어쩌지?”
한규련의 금발 사이로 번득이는 푸른 눈동자가 현신을 꿰뚫듯 응시하자, 그녀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한규련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강무라는 사내도 천천히 현신에게로 몸을 틀었다.
“오호, 정말이네. 미소년이잖아? 얘야, 우리 너 안 잡아먹어.”
잡아먹지 않겠다는 말과는 달리, 탐색하는 듯한 그의 눈빛은 지극히 위협적이었다. 그때였다.
“이곳 관계자인가?”
현신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묘한 압박감에 숨이 턱 끝까지 막혀와 마른침만 간신히 삼켰다.
가계영의 목소리가 서늘한 유리 조각처럼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는 한 발, 두 발, 먹잇감을 조이는 포식자처럼 다가오며 현신을 향해 질문을 투척했다.
“너 뭐 하는 녀석이지? 여기는 왜 온 거야? 너, 정체가 뭐야?”
듣기 좋은 중저음에 일말의 감정도 싣지 않은, 권태롭고도 오만한 어조. 압도적인 피지컬과 수려한 마스크, 그리고 상대를 숨 막히게 만드는 지배적인 기운.
현신은 이 남자의 목소리와 풍기는 이미지를 조합하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공포를 맛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현신과 코끝이 닿을 듯한 지척까지 그 남자가 다가왔다.
시원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머스크 향이 코끝을 찔렀고,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인력을 뿜어내는 이 남자.
현신이 느낀 지독한 위화감의 실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젠장! 4만 달러! 그 남자잖아!’
일순간, 발밑이 꺼지는 듯한 극심한 현기증이 현신을 덮치고야 말았다.
#5. [나에게 다가오지 마세요!](2) 잠깐이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착각이 든 현신이었다.온몸이 마치 한겨울의 칼날 같은 북풍을 정면으로 맞은 듯, 지독한 오한과 함께 어깨가 떨려왔다.
일급 요원이라는 비밀스러운 신분과 이 보육원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정체가 동시에 탄로 난다면, 공들여 쌓아온 삶의 궤적이 단숨에 무너져 내릴 터였다.
이무휼과 서시온 부부의 안위까지 걸려 있는 문제였기에, 현신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며 창백해진 입술을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꽉 깨물었다.
현신이 필사적으로 평정심을 가장하며 생각에 잠긴 틈을 타, 가계영은 미미한 숨결이 서로의 살결에 닿을 만큼 지척으로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가계영의 눈동자가 하도 집요하고 형형하게 빛나서, 현신은 꼭 날카로운 칼날 아래 발가벗겨진 듯한 노골적인 수치심을 느꼈다. 그녀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바지춤을 꽉 움켜쥐었다.
“그 자식이 이 녀석보다 키가 조금 더 컸던 것도 같고. 눈동자 색도 분명 달랐는데···. 대신, 둘 다 선이 가늘고··· 곱상한 데다가··· 풍기는 분위기는··· 기묘할 정도로 닮았단 말이지.”
헛-! 가계영의 낮은 중얼거림이 현신의 귓속을 파고들자,
진정시키려 애썼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을 듯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
일본 도쿄의 한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 침실에서는 은은한 조명 아래, 보랏빛 눈동자가 신비로운 백인 남성 엘에프가 한 여인과 격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아흣-, 하학-.”
엘에프의 움직임은 정교하고 기계적이었으나, 여자의 비명 섞인 신음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위태롭게 흔들 정도로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엘에프는 여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의 미소는 지독하리만치 공허했다. 그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에는 그 어떤 흥분도, 열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반면 여인은 엘에프의 단단한 몸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온몸이 자지러질 듯한 쾌락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여인의 깊숙한 곳까지 자신을 밀어 넣으며,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할 정도로 대단히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인은 그 미소 하나만으로도 모든 보상을 받았다는 듯, 감격에 겨운 눈으로 엘에프를 쫓으며 마침내 절정에 도달했다.
그 역시 짐승 같은 포효 한 번 없이, 오직 내면으로만 밀려오는 카타르시스를 만끽하듯 눈을 지긋이 감고 관계를 마무리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남녀의 교합으로 질척였던 시간이 지나가고, 여인이 떠난 자리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엘에프는 냉소적인 샤워를 끝낸 뒤, 독한 위스키를 잔에 가득 채웠다. 실크 로브만을 느슨하게 걸친 채 도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로 나선 그는, 잔을 입술에 댄 채 유리벽 너머의 화려한 야경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그때, 그의 분신이자 충직한 오른팔인 헤르만이 테라스로 들어섰다.
오늘도 헤르만은 직접 거친 일을 처리하고 온 것인지, 그에게서는 비릿한 피 냄새가 묻어났다. 연한 하늘빛이 감도는 은발은 달빛 아래 유난히 번뜩였고, 영민한 은회색 눈동자는 엘에프에게 초점을 맞추며 다가왔다.
“Elfe, wie geht's dir? (엘에프, 좋은 시간 보냈어?)”
“Ja, es war schön, Hermann. (응, 나쁘지 않았어, 헤르만.)”엘에프는 입가에 화사한 미소를 띠며 헤르만에게도 술을 권했다. 헤르만은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그를 향한 충성심이 깃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 그 여자, 별로였나 보군. 난 임무 중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아. 엘에프, 이제 슬슬 마무리 지어야지.”
유창한 한국어가 정적을 깨뜨렸고, 엘에프의 눈동자는 헤르만을 향하며 서서히 그 표정을 지워냈다.
“헤르만, 한국어 실력이 꽤 늘었네?”
“네가 직접 배우라고 지시했잖아. 그 망할 '에스'를 찾으려면 말이야.”엘에프는 권태로운 시선으로 도쿄의 야경을 훑으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비틀었다.
“그래. 꼭꼭 숨어버린 나의 소중한 에스. 이렇게 쫓다 보면 죽기 전에는 한 번쯤 마주치겠지.”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키며, 시선을 도쿄 너머 아주 먼 곳으로 던졌다. 헤르만은 팔짱을 낀 채 엘에프가 바라보는 수평선 너머를 함께 응시했다.
“일단 일본과 홍콩에서 시급한 문제들부터 정리하자고.”
“난 기다릴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데.” “그래, 우리에게 시간은 사치지.”엘에프는 그제야 헤르만에게 시선을 돌리며, 한껏 화사하고도 잔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에 다시 만나면, 에스에게 특별한 기회를 줘야겠어.”
헤르만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창밖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녀석은 또다시 자유를 찾아 저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가 버릴걸?”
엘에프는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비워내며,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흘렸다.
“그럼, 아주 커다랗고 화려한 새장에 가둬두면 돼. 두 번 다시 날개를 펴지 못하도록.”
퇴고 과정에서 중간 내용이 생략되어 2회차 분량을 서비스 하였습니다.무료 회차라 참 다행입니다. 글자수가 많아 죄송합니다. 안 그러면 유료 회차가 더 늘어나 독자분들 부담이 생기실 것 같아서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무의미하게 회차만 늘리고 글자수만 때우는 식의 소설은 쓰기 싫어서 조금 속도감을 높여 달려가겠습니다. 참고해 주시길요.
사랑하고 존경하는 굿노벨 독자님들, 안녕하세요. 작가 [silver구슬]입니다.그동안 부족한 글이었음에도 에 큰 사랑을 보내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외전 는 굿노벨 심사가 끝나는 대로 9월 1일부터 매일 한국 시간 오전 1시 5분에 헤르만의 이야기로 차근차근 선보일 예정입니다.지난 4월 12일 굿노벨에서 연재를 시작한 이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글로 찾아뵈었습니다. 사실 다른 작품을 작업하고 공모전에도 도전하면서 진행했던 터라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조금 의욕이 과했나 싶기도 했네요.한국에서 출간되어 나름대로 좋은 성과를 냈던 완성 원고가 있었지만, 매일 정해진 시간에 예약 등록을 하는 작업은 정말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 하지만 또 그 힘겨움 만큼이나 큰 희열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제 취향껏 쓴 글이라, 수년 만에 다시 진행한 퇴고 작업마저 가슴 뭉클하고 즐거웠습니다.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분께서 읽어주셨고, 덕분에 글로벌 4개 국어 서비스까지 도전하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이었습니다.그동안 읽어주신 님/ 댓글 주신 님/ 보석주신 님/ 이 글의 편집을 도와주신 Yino Song 님/게다가 대단한 드라마와 영화를 자문하시는 종로 경찰서 및 광역 수사대에서 근무하신 이회림 형사님/의학 자문을 해주신 송X전문의 의사 선생님 등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라ON(요원 양성 기관) - 한비단(한국 비밀 첩보 단체) - 빅토리아(세계 요원 양성 기구)로 이어지는 이 세계관을 처음 떠올린 건 중학교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연습장에 끄적끄적 메모하며 혼자 구상했던 설정이었는데, 몸이 아파 갑작스레 시간이 생겼을 때 집필을 시작하면서 지금의 'silver구슬'이라는 부캐릭터가 탄생했습니다.매일 글을 쓰며 마음을 다스린 덕분일까요. 회복에 집중하여 무사히 건강의 이무를 되찾았고, 지금은 직장 생활도 잘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정기검진을 받으며 꾸준히 건강을 살피고 있지만, 덤으로 얻은 삶이라 생각
새벽. 현신이 잠든 얼굴을 가만히 살피고 나서야 계영은 조용히 거실로 나올 수 있었다.현신이 최주현을 만나기 전, 마지막 미션을 위해 고뇌하며 아침을 맞이했던 그날이 계영의 머릿속에 또렷이 스쳤다. ‘네가 바라보았을 풍경이 바로 이거였구나.’창밖의 서울 시내는 청회색이 감도는 묘한 정적과 밝음을 품고 있었다.계영은 작게 심호흡을 하고 엘에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켄즈 대표. 참 빨리도 전화하는군.“용건만 말해. 다음 행선지는 어디야?” -이해가 빠르니 좋군. 영국 런던.유럽을 좀 더 확실하게 장악하려는 엘에프의 거대한 계획이 엿보였다.“현신을 보내주고 싶지 않아.”- 글쎄. 약속을 잘 지키는 에스라서.계영은 다시 생각이 깊어졌다. 잠시 두 눈을 서울 상공으로 향했다.“······현신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나는 당연히 현신 옆에 설 거고.”- 뭐, 혹처럼 붙겠다는 건가?“그래, 그리고 난 그녀를 옥스퍼드로 데려가고 싶어. 어때, 교차점이 되었지?”계영은 돌발적으로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국내든 국외든 현신은 대학생이 되고 싶어 하는 꿈이 있었다.그때 엘에프는 계영의 마음을 잘 읽어 내기라도 하듯 천천히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거 알고 있나? 나의 사랑스러운 에스는 똑똑해서 예전에 그곳 대학에 합격했던 이력도 있어. 나 역시 그래서 런던으로 좌표를 잡았지.계영은 너무 놀라 순간 가슴이 뛰었다. 이미 엘에프는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던 건가. “재미있군. 그럼 나도 그녀 옆에서 평생교육원(Department for Continuing Education) 과정이나 다녀야겠어.”- 켄즈 대표. 어지간히도 질척거리는 사내 같아.“빠르면 올해 10월 학기(Michaelmas Term)를 다니면 되니, 영국은 당장 가야겠어.”엘에프와는 그렇게 의견의 일치가 빠르게 되어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늘 느끼는 것이지만, 엘에프와는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금세 명확한 답을 도출해 내는 게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
드디어 3월 중순.현신과 계영은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입술을 맞대며 배시시 미소를 주고받았다.“또 몇 달은 지난 것 같아요. 계영 님의 집은 올 때마다 늘 새롭네요.” “이제야 나도 맘 편히 발 뻗고 자겠다.”그 나지막한 고백에 현신은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자신 때문에 그동안 이 남자의 심장이 얼마나 철렁거렸을지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아 그저 죄송할 따름이었다.“죄송해요, 계영 님.”현신이 조심스레 사과하자, 계영은 다시금 그녀의 입술을 입맞춤으로 가볍게 훔쳐내며 다정한 시선을 맞추었다.“현신. 그래도 이번엔 달랐어. 네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믿었으니까.”계영은 가슴 정장 안쪽 주머니에서 샛노란 황금 손수건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다정한 손길로 주머니에 다시 쓱 넣으며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고마움과 면목 없음이 얽혀 현신은 천천히 손을 올려 제 목덜미를 더듬었다.“저도 이제 습관처럼······ 이 목걸이가 제 몸의 일부가 된 것 같아요. 계영 님의 마음이 저를 몇 번이고 살려줬어요.”이번 사건은 물론, 지난 JJ창립기념일 파티 때도 목걸이만큼은 계영이 준 것을 꼭 걸고 싶어 일부러 목이 올라오는 하이넥 드레스를 고르고 골라 입었었다. 결국 그 집요하고도 깊은 애정이 담긴 목걸이 덕분에 현신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현신은 계영의 큰 손을 끌어당겨 목걸이가 닿아 있는 제 쇄골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항상 걸어줘서 고마워.” “우리는 이렇게 늘 마음이 이어져 있었네요.”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깊은 숨결 속에 담긴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그리고 참아왔던 계영의 열망이 폭발하듯 현신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침실로 걸어갈 여유조차 없었다. 두 사람은 성마른 손길로 서로의 옷을 허물어뜨리며 거실 소파 위로 엉켜 내렸다.거친 신음과 뜨거운 숨소리가 거실 가득 울려 퍼졌다. 지옥 같은 고난을 버텨낸 뒤 찾아온 관계는 한층 더 격정적이었고, 공간 전체를 활활 태울 듯 뜨겁게
현신을 먼저 보낸 뒤, 주효진은 엘에프와 티타임을 이어 나갔다.헤르만도 오늘 밤은 주효진에게 맡기고 넘버들을 데리고 일을 처리하러 나갔기에 둘만의 시간은 아주 달콤하기만 했다.“어머, 당신 너무한 거 아니에요? 신은 참 불공평해.” “그대, 그 예쁜 입으로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효진은 홍차와 마카롱, 타르트, 과일, 당고, 샌드위치까지 지지대가 휘어질 정도로 간식을 세팅해 두었다.“아픈 사람이 이렇게 섹시해도 돼요? 얼굴만 보면 당장이라도 나를 안아 들고 호텔로 직행할 것처럼 에너지가 넘치는데. 자, 어서 먹고 벌떡 일어나요.” “거듭 말하지만, 이 디저트를 다 먹으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아.” “잘 먹어야 낫죠!”엘에프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어머, 당신 화났어요? 아하, 술이 없어서 그렇구나?” “이제 나를 좀 아는군.”효진은 딸기를 콕 찍어 엘에프에게 건네며 활짝 웃었다.“당신, 꽤 위험한 남자였더군요.”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니, 난 그게 더 놀라운데.” “그쪽 위험한 거 말고요. 우리 JJ그룹 주가가 내부 요인으로 휘청거렸는데, 당신이 바로 사업 파트너로 지정해 준 덕에 주식이 폭등 중이에요.”엘에프는 무심하게 딸기를 받아먹고는 포크를 내려놓았다.“나랑 헤르만도 돈 벌려고 투자한 거야.” “우리 집 재산을 늘려 주고 섹시하게 유약한 척을 해도 소용없어요. 당신이랑 나는 서로 즐기는 사이일 뿐이에요. 알죠?” “그대는 그래서 매력적이야.” “난 전 대륙을 누비는 프리마돈나가 될 때까지 절대 가정을 꾸리지 않을 거거든요.”엘에프가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앞으로 난 그대 공연에서 '브라바'를 더 오래 외칠 수 있게 되었군.” “올해도, 내년에도, 후년에도 내 공연 보러 와줘요. 아, 못 참겠네. 나랑 키스해요.”효진이 슬며시 병상 침대 위로 올라왔다.“이런, 취향이 또 바뀌겠어.” “당신에게 가을과 겨울이 생겼다니 기뻐요.” “그대, 화장 안 한 얼굴이 근사하군. 물론 옷
역시 이것도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엘에프가 닦아 주었다.웃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눈물만 나왔다.가계영이 엘에프를 믿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며 '선물'이라는 표현까지 쓰다니.“······엘에프 선배, 기분 나쁘신가 봐요.” “그래. 내가 좋을 리가 없잖아? 레이디를 울리는 건 취향이 아니거든.”이리도 아름답게 웃으면서 하는 소리라니.농담이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가벼이 굴 수 없었다. 진심으로 이 애증의 남자가 이제는 꼭 가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이리 와.”엘에프는 웃음기를 거두고 덤덤한 표정으로 현신을 바라보았다.현신이 침상에 걸터앉아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가 손을 뻗어 현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복잡한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래도 선배 살리고 싶었는데······ 내 손으로 해냈어요.”엘에프의 짙은 보라색 눈동자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여전히 아름답고, 신비롭게 사람을 홀리는 눈이었다.“왜 매번 살려?”현신은 울지 않기 위해 울먹이면서도 입을 삐죽거렸다.“선배, 저 때문에 총까지 맞아 가며 나 살려 줬잖아요. 나도······ 그날 딱 살기 싫었는데.” “그날은 네가 원했어. 한국에 오고 싶다고 했잖아.”틀린 말이 없었다. 키맨을 찾으려했던 것은 바로 현신의 의지였다. 현신은 울컥해서 목이 따끔거렸지만, 깊게 숨을 마시며 감정을 가라앉혔다.“네. 그 지옥은 제가 선택했어요.” “게다가 악당의 간이 왜 내 몸에 붙어 있는 거야?” “악당에게 벌주려고요.”그때 엘에프의 듣기 좋은 웃는 목소리가 현신의 귓전을 파고들었다.“맘에 안 들어. 앞으로 제대로 몸을 좀 혹사해야겠군.”현신은 대꾸 대신 싱겁게 웃어 버렸다. 이 와중에도 엘에프는 느긋하게 남 일처럼 말하고 있었다.“내 병, 언제 눈치챘어?”이제 심각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가. 계영이 주고간 주스를 한 모금 마신 현신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분당에서 번지점프할 때 무언가 이상했어요. 그 뒤로도 계속
마음이 급해진 김민철은 갑자기 여러 권의 장부를 꺼내 놓으며 설명을 시작했다.그의 시선이 닿는 곳은 가계영도, 한규련이나 김강무도 아니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자 자신에게 철퇴를 내릴 전권을 쥐게 된 현신을 향해 있었다.“내가 원하는 건 세상이 바로 서는 거야.”김민철이 한비단 코드 타워로서 역할을 해냈다는 증거물에는 악행만 적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한비단에서 세운 업적과 굵직한 사건들, 그리고 제법 바르게 세워진 정의로운 결과물도 나열되어 있었다.수기로 작성된 매우 낡은 수첩부터 최근 엑셀로 정리되어 출력된 파일까지. 현신이 직접 살펴보니 그것들은 수십 년 전부터 완수된 한비단의 임무 목록이었다. 초창기 임무에는 현신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고, 세월이 흘러 검정 잉크가 보라색과 파란색으로 번져 버렸지만 여전히 알아볼 수 있게 정돈되어 있었다.“난 내 아버지로부터 이것을 물려받았을 때, 요원들의 그 피땀 어린 노력을 감사하게 생각했어.”최근 장부를 보니 현신이 해낸 임무도 적혀 있었다. 계영을 처음 만난 의료 비리, 서울에서 증거를 확보한 경찰 비리, 한규련 회사 침입 사건까지. 모두 실제 일어난 사실이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한비단에서 정의로 이끈 역사가 나열된 상태였다.“우리 회사 창립기념일 침입 사건은 결국 배후가 백사장이었네? 그럼 엘에프는 뭐야. 도와주러 온 거였어? 날 지키라고 의뢰했잖아?” “알바생을 홍콩으로 데려간 것도 결국 엘에프가 구해주려 한 거였군.”장부에는 현신이 나라의 기밀을 유출하려는 배신자 요원이라고 누명이 씌워진 데다가, 심지어 H건설 기술을 빼돌리려는 산업 스파이 목록에도 올라 있었다.“에스, 난 그냥 최주현을 계속 믿은 것뿐이야. 네가 심지어 엘에프를 부추겨 빅토리아를 무너뜨리고 가계영도 휘둘러서 한비단을 세상에 드러내 와해하려는 인물인 줄 알았어. 널 죽이려고 한 건 사과할게.”현신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이어 펼쳐진 자료는 한비단의 회계장부였다
죄를 지었냐고.현신은 너무 많은 죄를 지어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또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아니요.”“풋, 귀엽게!”“살면서 죄 안 짓는 사람 없다. 거짓말도 죄지.”현신이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말하자, 한규련과 김강무의 입가에 그 모습이 귀엽다며 옅은 미소가 번졌다.대기업 본사의 로비는 굵직한 해외 파트너사들과의 미팅 준비로 소란스러웠으나, 소파에 모여 앉은 이 세 남자는 마치 다른 시간대 위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 여유로웠다.지나가는 직원들이 사장과 그 거물급 친구들의 등장에 놀라 시선을
3월의 끝자락, 창밖의 공기는 여전히 냉소적이었으나 사무실 안은 화이트칼라들이 뿜어내는 기묘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서류 더미가 스치는 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음 사이로 현신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제안서 복사 끝났습니다, 최 대리님!”“어이, 알바생! 여기 오타 좀 확인해 봐.”“예, 갑니다!”현신은 기계적으로 발을 놀렸다.지금 그녀가 걸친 헐렁한 셔츠와 알바생이라는 가명은 정체를 감추기 위한 완벽한 껍데기였다.현신은 구석진 제 책상에 앉아 엘리트들이 내놓은 오만한 종이 뭉치들을 넘겨보았다. 무미건조한 숫자와
이무휼은 현신만 생각하면 미안하고 너무 무모해 스스로에게 화만 났다.“그 자식, 이제 갈 곳도 마땅치 않을 텐데······.”자신은 서시온을 돌봐야 했기에 가장 위험한 활동은 현신 혼자 보냈기 때문에 자괴감만 들었다.“우리 집이 너무 좁아서 안 오는 걸까? 아니면 혹시 뒤라도 밟힌 건가?”“임무 끝나면 원래 철저하게 몸 숨기는 녀석이니까······.”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음에도 현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선뜻 수저를 들지 못했다. “내가 다쳐서··· 현신이가 힘든 임무는 혼자 다 도맡아 하는 것 같아.”서시온의 자
현신의 가느다란 손끝이 수치심과 분노로 부르르 떨려왔고,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막으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오토바이를 몰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가계영이 남긴 압도적인 잔상 때문인지 발끝이 바닥에 접착제라도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진짜. 살다 살다 이토록 황당하고 억울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더니, 제 땅에 발을 들이고도 도리어 침입자 취급을 당하는 현실에 현신은 기가 찼다. 마동현 실장이 무심하게 펜을 돌리며 턱을 괴고 그녀를 응시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