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확인한 것은 오직 찰나의 눈빛뿐이었지만, 그 안에 고인 텅 비어버린 허무는 가계영의 뇌리를 여전히 잠식하고 있었다.
가계영은 지금 김강무의 말을 허투루 넘길 수 없었기에, 뉴스 화면을 응시하며 깊은 사유에 잠겼다.
그 소년의 몸은 바람결에도 흩날릴 듯 가냘팠고, 목소리는 감미로운 미성으로 귓가를 간지럽혔다.
특히나 서늘할 정도로 고왔던 눈매를 떠올리면, 마스크 뒤에 숨겨진 용모 또한 꽤 수려할 것이라 짐작되었다. 간호사 복장을 하고 능글맞게 웃으며 사람들의 경계심을 사근사근 녹여냈을 녀석의 모습. 녀석을 가늠하자 가계영의 얼굴에는 기묘한 열기가 올랐고, 무심하던 시선이 가늘게 흔들렸다.
화면 속 보도 내용을 지켜보던 가계영은, 녀석이 병원 심장부까지 잠입해 그 거대한 치부를 도려내 온 과정을 머릿속으로 세밀하게 그려 보았다.
완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기보다는 은밀하게 타인의 심연을 파고들었을 녀석. 가계영은 문득 실제 CCTV 속에 담겼을 녀석의 잔상을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때였다.
“계영아? 어이! 가계영!”
김강무의 날카로운 부름에 가계영은 그제야 현실로 회귀하며 고개를 돌렸다.
“왜?”
“불러도 왜 대답이 없어? 뭐가 그렇게 급해서 넋을 놓고 있어?”자신이 이렇게 한 인간에게 관심을 쏟다니.
스스로도 의아한 가계영이었다.
“계영아, 빨리 추진하고 홍콩으로 넘어가야 해.”
“그러게. 나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서 책을 읽고 뉴스까지 확인하더니, 재개발 지역까지 직접 챙긴다고? 너 정말 일 중독이냐?”가계영은 친구들의 말을 대충 흘려 넘기고는 텔레비전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협조해. 내 시간을 무의미하게 버리고 싶지 않으니까.”
김강무는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한규련을 향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김강무, 너 왜 나를 그렇게 한심하다는 듯 보지?”
그러고는 다시 가계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팔짱을 단단히 꼈다.
“하나는 시간이 남아돌아 한가함에 미쳐 날뛰고, 하나는 분 단위로 인생을 쪼개 스스로를 혹사하고···. 내 친구들은 왜 중간이 없냐?”
그 말에 한규련은 즐겁다는 듯 깔깔대며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는 가계영을 향해 유들거리는 어조로 은밀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긴, 가계영이 강북 쪽 사업을 마무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뭐가 이리 급한지 모르겠어. 그거 사실 욕구불만 아니야?”
“그냥 협조나 해.” “좀 쉬면서 하자는 거지. 김강무, 아무래도 가계영 저러다가 갑자기 엉뚱한 곳에 꽂히는 거 아닐까?”그 말에 김강무도 팔짱을 낀 채 설핏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렇게 지긋지긋하게 일만 하다가 어떤 여자한테 콱 꽂히는 순간이 오겠지. 그때는 눈이 180도 뒤집혀서 꽁무니만 쫓아다닐걸.”
순간, 한규련이 김강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가계영을 향해 짓궂게 눈을 흘겼다.
“명의 선생님, 아무래도 네 말이 정답 같다. 가계영 지금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고 있어.”
김강무는 가계영과 시선을 정면으로 맞부딪치며 묵직한 조언을 던졌다.
“가계영, 너 조심해라.”
“뭘?” “그냥, 부디 남들처럼 평범한 연애를 하길 바란다는 뜻이다.” “시끄러워.”한규련은 김강무의 어깨 위에 얹은 손가락을 은밀하게 지분거리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속삭였다.
“하하, 가계영. 어쨌든 세상은 넓고 여자는 널렸으니까. 나처럼 김강무 뒤꽁무니만 쫓지 말고 말이야.”
“그 입 닫아.”가계영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둔 채, 여전히 화면 속 의료 비리 사건 보도만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는 친구들의 농담을 시답잖은 소음으로 치부하며 시계를 확인하자마자 거침없이 몸을 돌렸다.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서둘러.”
“하하, 알았다니까. 가자고.”한규련과 김강무는 이미 멀어지는 가계영의 뒤를 쫓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참, 가계영. 그 재개발 지역에서 알박기하고 있다는 불탄 보육원 주인, 여자라며?”
“그렇다고 들었어.” “일단 부지라도 한 번 훑어보자. 그 여자, 연락 두절이라던데 단서라도 나올지 모르잖아.”김강무 역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한규련의 말을 경청하다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를 검색했다.
“그래, 좋아. 아, 내가 보육원 앞 주택에 방범 CCTV를 하나 심어뒀는데 우편물이 꽤 쌓였더라고. 조만간 누군가 나타날 것 같아.”
“오호, 역시 치밀해. 명탐정 김강무라니까. 자, 빨리 가자. 나도 거기 무지 궁금해.”옆에 있던 한규련이 신이 난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계영은 굳게 입을 다문 채 가장 앞장서서 병원 로비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떠나자, 로비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간호사들이 스멀스멀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가계영과 한규련, 김강무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숨죽여 지켜보던 그들은 참았던 탄성을 터뜨리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김강무 선생님, 정말 너무 멋지다. 저런 남자는 누가 데려갈까?”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 김강무 선생님 댁은 양가 부모님이 전부 대형 병원장에 어마어마한 자산가라잖아. 재벌가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걸?” “그 옆에 분들도 외모가 정말 환상적이야. 나이는 김강무 선생님보다 한두 살 어려도 가족보다 더 끈끈한 사이라고 하던데.”간호사들은 황홀한 표정으로 그들이 머물다 간 자리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금발 머리 그분은 HH그룹 재벌 3세 한규련 맞지? TV에서 본 것 같아!”
“지금 저 검은 머리 미남자는 고작 스물여섯인가 일곱이라는데, 자산이 조 단위라더라고.” “경호업체에 건설사, 해외 호텔까지 가진 엄청난 부호래.” “맞아! 빌딩이나 호텔 이름에 ‘켄즈’라고 붙어 있으면 전부 그분 소유라고 하던데······.”간호사들의 집요하고 끈적한 시선은 이미 사라진 가계영과 한규련, 김강무의 잔상을 쫓으며 한참 동안 로비를 서성였다.
도대체 저 완벽한 남자들이 어떤 여자와 얽히게 될지, 그녀들의 상상력은 끝도 없이 부풀어 올랐다.
*** 해가 급격히 기울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오후.서울 구도심의 폐허가 된 보육원 마당 위로 거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날카로운 메아리를 남겼다.
오늘은 또 어디서 몸을 뉘어야 하나. 현신은 요즘 들어 집 없는 설움이 뼈마디 마디에 사무치는 듯했다.
최근 머물던 쪽방촌마저 재개발의 광풍에 밀려 쫓겨난 처지였다. 게다가 자신이 돌보고 있는 보육원 출신 최주현이 입원한 요양 병원을 다녀오는 길이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심란해졌다.
이토록 마음이 부대낄 때마다 현신이 찾는 장소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꿈이 머물러 있고, 부모님과 함께했던 찬란한 추억이 깃든 곳.
‘우편물이라도 와 있으려나.’
서울 시내의 낡은 골목 끝자락, 산자락과 맞닿은 채 위태롭게 서 있는 이 보육원은 현신의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일한 유산이었다.
이제는 화마가 할퀴고 간 앙상한 뼈대와 을씨년스러운 적막만이 감도는 2층 건물이 되었지만 말이다. 오토바이를 몰아 보육원 입구에 다다르는 순간, 현신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불길한 예감은 단 한 번도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아······.”
골목 어귀를 점령한 검은 세단 세 대와 육중한 대형 밴들.
차들의 머리가 골목 끝이 아닌 반대편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 보육원 부지 안까지 제집처럼 드나들며 차를 돌려 세웠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런······!”
아니나 다를까, 적막해야 할 보육원 안에서 낯선 남자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신은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불에 그을려 뒤틀린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주인 없는 땅인 양 당당하게 점거하고 있는 무뢰한들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마당 중앙에는 대단한 기세를 풍기는 세 남자가 서 있었고, 그들을 철통같이 엄호하는 경호원들의 위세가 대단했다.
“너 누구야?”
경호원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현신을 발견하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왔다.
잘 단련된 근육과 날카로운 안광은 그가 예사롭지 않은 실력자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이, 소년! 어른이 묻는데 대답 안 해? 너 정체가 뭐야?”
“왜··· 이러시는 건데요?”내 땅에 발을 들이고도 도리어 고압적인 태도라니. 현신은 어이가 없었지만 기를 죽이지 않으려 애썼다.
“겁도 없이, 이 동네 사는 아이냐? 위험하니까 당장 돌아가!”
그는 현신을 길 잃은 불량 중고생쯤으로 치부했는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보육원 밖으로 몰아내려 했다.
“마 실장, 너무 소리 지르지 마. 애 긴장한 것 좀 봐. 와, 진짜 뽀송뽀송하게 귀엽게 생겼네? 요즘 남자애들은 아이돌처럼 왜 이렇게 곱상한 거야?”
“한규련, 그것도 성희롱이다. 자중해.” “김강무, 이건 순수한 칭찬이야. 저 녀석, 또래 여자애들 여럿 울리게 생겼다는 뜻이라고.”도대체 저자들은 누구인가. 현신은 치미는 화를 누르며 자신을 처음 불러세운 남자를 쏘아보았다.
당장 내 땅에서 꺼지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만약 이들이 소문으로 듣던 재개발 부지 매입을 종용하는 자들이라면 상황이 복잡해질 터였다.
현신은 신중하게 상황 파악부터 하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아. 이럴 수가.
현신의 등 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뒤이어 들려온 이름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녀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가계영, 김강무! 나 정말 반할 것 같아. 이 귀여운 녀석이 우리 무서워서 울며 도망가면 어쩌지?”
한규련의 금발 사이로 번득이는 푸른 눈동자가 현신을 꿰뚫듯 응시하자, 그녀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한규련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강무라는 사내도 천천히 현신에게로 몸을 틀었다.
“오호, 정말이네. 미소년이잖아? 얘야, 우리 너 안 잡아먹어.”
잡아먹지 않겠다는 말과는 달리, 탐색하는 듯한 그의 눈빛은 지극히 위협적이었다. 그때였다.
“이곳 관계자인가?”
현신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묘한 압박감에 숨이 턱 끝까지 막혀와 마른침만 간신히 삼켰다.
가계영의 목소리가 서늘한 유리 조각처럼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는 한 발, 두 발, 먹잇감을 조이는 포식자처럼 다가오며 현신을 향해 질문을 투척했다.
“너 뭐 하는 녀석이지? 여기는 왜 온 거야? 너, 정체가 뭐야?”
듣기 좋은 중저음에 일말의 감정도 싣지 않은, 권태롭고도 오만한 어조. 압도적인 피지컬과 수려한 마스크, 그리고 상대를 숨 막히게 만드는 지배적인 기운.
현신은 이 남자의 목소리와 풍기는 이미지를 조합하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공포를 맛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현신과 코끝이 닿을 듯한 지척까지 그 남자가 다가왔다.
시원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머스크 향이 코끝을 찔렀고,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인력을 뿜어내는 이 남자.
현신이 느낀 지독한 위화감의 실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젠장! 4만 달러! 그 남자잖아!’
일순간, 발밑이 꺼지는 듯한 극심한 현기증이 현신을 덮치고야 말았다.
#5. [나에게 다가오지 마세요!](2) 잠깐이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착각이 든 현신이었다.온몸이 마치 한겨울의 칼날 같은 북풍을 정면으로 맞은 듯, 지독한 오한과 함께 어깨가 떨려왔다.
일급 요원이라는 비밀스러운 신분과 이 보육원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정체가 동시에 탄로 난다면, 공들여 쌓아온 삶의 궤적이 단숨에 무너져 내릴 터였다.
이무휼과 서시온 부부의 안위까지 걸려 있는 문제였기에, 현신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며 창백해진 입술을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꽉 깨물었다.
현신이 필사적으로 평정심을 가장하며 생각에 잠긴 틈을 타, 가계영은 미미한 숨결이 서로의 살결에 닿을 만큼 지척으로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가계영의 눈동자가 하도 집요하고 형형하게 빛나서, 현신은 꼭 날카로운 칼날 아래 발가벗겨진 듯한 노골적인 수치심을 느꼈다. 그녀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바지춤을 꽉 움켜쥐었다.
“그 자식이 이 녀석보다 키가 조금 더 컸던 것도 같고. 눈동자 색도 분명 달랐는데···. 대신, 둘 다 선이 가늘고··· 곱상한 데다가··· 풍기는 분위기는··· 기묘할 정도로 닮았단 말이지.”
헛-! 가계영의 낮은 중얼거림이 현신의 귓속을 파고들자,
진정시키려 애썼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을 듯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
일본 도쿄의 한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 침실에서는 은은한 조명 아래, 보랏빛 눈동자가 신비로운 백인 남성 엘에프가 한 여인과 격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아흣-, 하학-.”
엘에프의 움직임은 정교하고 기계적이었으나, 여자의 비명 섞인 신음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위태롭게 흔들 정도로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엘에프는 여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의 미소는 지독하리만치 공허했다. 그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에는 그 어떤 흥분도, 열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반면 여인은 엘에프의 단단한 몸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온몸이 자지러질 듯한 쾌락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여인의 깊숙한 곳까지 자신을 밀어 넣으며,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할 정도로 대단히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인은 그 미소 하나만으로도 모든 보상을 받았다는 듯, 감격에 겨운 눈으로 엘에프를 쫓으며 마침내 절정에 도달했다.
그 역시 짐승 같은 포효 한 번 없이, 오직 내면으로만 밀려오는 카타르시스를 만끽하듯 눈을 지긋이 감고 관계를 마무리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남녀의 교합으로 질척였던 시간이 지나가고, 여인이 떠난 자리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엘에프는 냉소적인 샤워를 끝낸 뒤, 독한 위스키를 잔에 가득 채웠다. 실크 로브만을 느슨하게 걸친 채 도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로 나선 그는, 잔을 입술에 댄 채 유리벽 너머의 화려한 야경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그때, 그의 분신이자 충직한 오른팔인 헤르만이 테라스로 들어섰다.
오늘도 헤르만은 직접 거친 일을 처리하고 온 것인지, 그에게서는 비릿한 피 냄새가 묻어났다. 연한 하늘빛이 감도는 은발은 달빛 아래 유난히 번뜩였고, 영민한 은회색 눈동자는 엘에프에게 초점을 맞추며 다가왔다.
“Elfe, wie geht's dir? (엘에프, 좋은 시간 보냈어?)”
“Ja, es war schön, Hermann. (응, 나쁘지 않았어, 헤르만.)”엘에프는 입가에 화사한 미소를 띠며 헤르만에게도 술을 권했다. 헤르만은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그를 향한 충성심이 깃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 그 여자, 별로였나 보군. 난 임무 중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아. 엘에프, 이제 슬슬 마무리 지어야지.”
유창한 한국어가 정적을 깨뜨렸고, 엘에프의 눈동자는 헤르만을 향하며 서서히 그 표정을 지워냈다.
“헤르만, 한국어 실력이 꽤 늘었네?”
“네가 직접 배우라고 지시했잖아. 그 망할 '에스'를 찾으려면 말이야.”엘에프는 권태로운 시선으로 도쿄의 야경을 훑으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비틀었다.
“그래. 꼭꼭 숨어버린 나의 소중한 에스. 이렇게 쫓다 보면 죽기 전에는 한 번쯤 마주치겠지.”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키며, 시선을 도쿄 너머 아주 먼 곳으로 던졌다. 헤르만은 팔짱을 낀 채 엘에프가 바라보는 수평선 너머를 함께 응시했다.
“일단 일본과 홍콩에서 시급한 문제들부터 정리하자고.”
“난 기다릴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데.” “그래, 우리에게 시간은 사치지.”엘에프는 그제야 헤르만에게 시선을 돌리며, 한껏 화사하고도 잔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에 다시 만나면, 에스에게 특별한 기회를 줘야겠어.”
헤르만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창밖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녀석은 또다시 자유를 찾아 저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가 버릴걸?”
엘에프는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비워내며,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흘렸다.
“그럼, 아주 커다랗고 화려한 새장에 가둬두면 돼. 두 번 다시 날개를 펴지 못하도록.”
퇴고 과정에서 중간 내용이 생략되어 2회차 분량을 서비스 하였습니다.무료 회차라 참 다행입니다. 글자수가 많아 죄송합니다. 안 그러면 유료 회차가 더 늘어나 독자분들 부담이 생기실 것 같아서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무의미하게 회차만 늘리고 글자수만 때우는 식의 소설은 쓰기 싫어서 조금 속도감을 높여 달려가겠습니다. 참고해 주시길요.
현신은 자신이 지금 살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죽기 일보 직전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의식이 돌아온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져 나가는 듯한 통증, 그리고 제 얼굴을 감싸 쥔 계영의 뜨겁고 일그러진 손길만큼은 지독하게 생생했다.계영은 그녀를 안아 암반 안쪽으로 조심스레 끌어당긴 상태였고, 강무 역시 드론 통신을 통해 계영의 수신기 너머로 희미한 지시를 보태고 있었다.“······어떻게 여기까지······.”입에 피가 고여 그런지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네 생일에 건넸던 그 선물······ GPS를 심어 놓았어.”계영은 사색이 되어 현신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그래도 차분하게 대답을 건네 주었다.설마 홍콩에서부터 계영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던 것인가.지독하고 병적인 집착. 통제 불능의 스토킹에 가까운 행태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미친 집착 덕분에 현신은 오늘 밤 목숨을 건졌다.“······진짜 너무하시네요.”“모른 척해. 넌 사선을 넘나드는 여자잖아, 벌을 주고 싶으면 줘. 달게 받을 테니까······ 살기만 해. 부탁이야. 제발.”현신은 떨리는 팔을 힘들게 밀어 올렸다.벌이라니. 이 집요하고 오만한 사내에게 줄 것은 오직 상뿐이었다. 계영의 얼
설마, 아니겠지. 실종되었던 김강무의 목소리가 들리다니.그게 아니라면 최주현이 깔아놓은 함정일까.그러나 현신은 찰나의 순간, 그를 믿기로 했다. 스러져가는 의식의 끈을 이를 악물고 부여잡은 채, 인이어 너머의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알바생, 내 말 잘 들어! 나뭇가지는 끌어안지 마! 몸을 반대쪽으로 돌려! 절벽 같아 보여도, 바로 거기에 튀어나온 평평한 암반이 있어!]그러다 균형이라도 잃고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면.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서 현신이 죽는다고 김민철의 죄악이 깔끔히 세탁되는 것도 아니었다. 증거는 이미 흘러넘치도록 모아두었으니까.강무의 서늘한 경고가 아니었다면 부서져가는 고목을 끌어안았을 터였다. 현신은 온몸의 신경을 짓누르는 고통을 씹어삼키며 강무가 일러준 방향으로 제 몸을 비틀어 넘겼다.털썩—.아슬아슬하게 허공을 감돌던 몸뚱이가 드디어 견고하고 차가운 바위 위로 안정되게 안착했다.이 깊은 밤, 칠흑 같은 산속. 강풍이 휘몰아치고 수색 헬기 소리마저 까마득히 멀어진 이 사지에서.[바로 그거야! 잘했어!]강무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깨고 선명하게 현신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야간 투시 고글이라도 끼고서 현신의 처절한 몸부림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그리고 그 순간, 공허한 정적을 갈라치며 또 하나의 익숙한 음성이 쏟아져 들어왔다.[현신! 임무 완수해야지! 곧 갈게! 살아만 있어 줘!]‘설마, 계영 님?’꿈이 아니었다.가계영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현신의 귓가에 번져나갔다.***계영의 피는 이미 바짝 말라붙어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십수 미터 절벽에서 추락했으니 생존율은
수색 구역을 몇 번이고 훑었지만 현신은 흔적조차 잡히지 않았다.헬기 안, 계영의 심장은 피가 바짝 타들어가다 못해 잿더미가 되어가고 있었다.바람이 조금이라도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는 시선. 계영은 기괴할 만큼 침착한 태도로 헬기 창밖을 내려다보며 산 전체를 부감했다.마 실장은 제 무릎 위에 노트북 두 대를 펴놓고, 연신 새로고침을 누르며 초조하게 계영의 눈치를 살폈다.“이 여자가······또 거짓말을 했어. 내게 온다는 선택지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어.”“현신 님의 거짓말에는······ 늘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마 실장은 연신 다른 노트북을 두드리며 현신을 추적하고, 한규련과 정보를 주고받았다.저 벼랑 밑 어디엔가 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버려져 있을 거라 생각하자, 계영의 분노와 절망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현신은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재주가 있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언제나 죽음을 삶의 옆자리에 두고 살아가던 여자. 그럼에도 제 삶의 마지막을 맡길 수 있을 만큼 자신을 믿어주었다는 사실에 계영은 처절한 허무함을 느꼈다.“늘 지켜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현신 님은 아주 유능한 요원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신 겁니다.”마
현신의 참았던 눈물이 최주현의 어깨를 적시던 바로 그 순간.털컹.최주현은 방아쇠조차 당기지 못한 채, 손에 쥐고 있던 총을 바닥으로 맥없이 떨어뜨렸다. 지독한 무력감과 절망이 뒤섞인 비명이 그녀의 목구멍을 찢고 터져 나왔다.“하하! 지긋지긋한 아가씨, 제발······ 날 좀 그냥 둬! 그럼 나도 널 진작 놔줬을 거 아니야! 흑······, 흑흑!”드디어 다 포기한 것일까. 미쳐버린 광기 끝에서 마침내 아무도 해치지 않은 채 이 비극을 끝맺으려는 걸까.하지만 감도는 공기가 이상했다. 자수하려는 분위기도, 그렇다고 현신을 죽이려는 살기조차 아니었다.“······할멈. 내가 제일 잘하는 게······ 지키는 거야. 그거, 내 특기잖아.”“하하! 오만하긴······, 다 싫어! 누구에게 지켜지는 삶 따위······, 이제 질색이라고! 흑, 흑흑!”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악에 받친 음성이 현신의 귓전을 때렸다.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때늦은 반성일까, 아니면 평생 김민철을 바라보며 품었던 이루지 못한 욕망에 대한 슬픔일까.현신이 감상에 잠겨들던 바로 그 찰나—최주현이 갑자기 현신의 품을 거세게 뿌리치더니, 두 손으로 현신의 어깨를 강하게 밀쳐 버렸다.“싫어!
현신은 최주현의 뒤를 따라 칠흑 같은 숲속 좁은 흙길을 차갑게 가르며 달렸다.어린 시절 시온, 무휼과 함께 숨바꼭질을 하며 뛰놀던 곳이자, 밤이 되면 할멈이 우리를 찾으러 산등성이를 헤매던 바로 그 길이었다.앞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현신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의존해 최주현의 뒤를 쫓았다.“오지 마! 내 품엔 수류탄도 있어!”그때—공기를 찢는 둔탁한 로터음이 머리 위를 가득 메웠다.두- 두- 두- 두- 두—!현신의 발걸음이 찰나 동안 멈춰 섰다.어느새 야산은 기괴할 만큼 검은 밤에 삼켜져 있었고, 먹구름을 뚫고 내려온 헬리콥터에서는 검은 형체의 누군가가 패스트 로프(fast rope)를 타고 하강을 시도하고 있었다.아니길 바랐지만, 본능이 저 미련한 사내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었다.‘계영 님!’이 밤중에 좌표를 추적해 제 목숨을 던지러 올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현신은 목이 찢어져라 하늘을 향해 외쳤다.“최주현은 제가 직접 생포합니다! 타깃은 총과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으니 아무도 접근하지 마십시오!”하지만, 그 순간탕! 탕!최주현은 이미 이성을 잃고 허공을 향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절대 오지 마! 조금만 가까이 내려오면! 에스의 심장을 뚫어 버릴 테다!”살려달라는 비명이었다면 저 사내는 주저 없이 내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현신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하강하던 헬기에서 일순 찰나의 주춤거림이 느껴졌다.탕! 탕!야산 전체를 찢발기는 총성과 함께 헬기가 고도를 조금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추적하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절대로 다가오지 마세요!”단방향 음성 채널로 기기를 변경한 현신은 헬기를 돌려보내라는 지시를 남겼다. 마침내
할멈이 자신에게 총을 쏘았다.복부를 차내던 발길질에는 연약한 노인의 흔적 따위는 없었다. 무자비하고 단단한 살의만이 실려 있었을 뿐.지독한 변명이라도, 어쩔 수 없었던 사고라는 일말의 거짓말이라도 해 주길 바랐건만.허벅지를 타고 피가 뚝뚝 흘러내렸지만, 그보다 심장 깊은 곳이 피비린내 나게 찢겨 나가는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콰앙—!현신은 절뚝이는 다리를 끌며 최주현이 도망친 문을 걷어차 열고 소형 폭탄 하나를 터뜨렸다.“할멈! 난 지금 내 손으로 운명의 문을 열었어!”이미 각오한 길이었다. 현신은 최주현을 향해, 그리고 제 자신을 향해 나직하게 읊조렸다.이것이 생의 마지막 임무가 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최주현의 모든 자백은 이미 가계영에게 전송되었고, 요원들과 이신 소년까지 무사히 탈출시켰으니 가슴 한구석은 차라리 홀가분했다.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생사와, 최주현의 완전한 처단뿐이었다.“오지 마! 에스, 당장 서지 못해?! 한 걸음만 더 오면 네놈 머리통을 날려버리겠다!”2층 뒷산과 바로 연결된 창틀에 걸터앉아 뛰어내리려던 최주현이, 표독스러운 살기를 뿜어내며 고함을 질렀다.현신은 가차 없이 스위치를 눌렀다.콰앙—!“할멈, 그만 자수해. 순순히 법의 심판대를 밟아. 그리고 사죄하며 새 삶을 살아.”“네 목적은 이미 달성했잖아! 그러니 날 풀어줘! 너도 이쯤에서 도망쳐! 그러면 더는 널 죽이려 들지 않을 테니까!”가당찮은 소리.목숨 하나 보전하겠다고 마지막 임무를 내팽개치고 도망칠 사람으로 본 것인가.“할멈, 날 몰라도 한참 잘못 봤어. 임무를 목전에 두고 살겠
자신을 정교하게 뜯어보는 가계영의 날카로운 안광에 현신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회피하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차갑게 정리해 나갔다.현신은 늘 타인의 신분을 빌려 살아왔기에, 임무를 수행할 때는 항시 머리색과 눈동자 색을 위장하고 체격이 커 보이는 두꺼운 소재의 옷과 굽이 높은 군화를 애용했다. 게다가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마스크까지 썼으니, 제아무리 가계영이라 해도 실체를 특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가슴을 조여오는 불안감에 자신은 가계영의 눈을 차마 마주하지 못한 채, 겁에 질린 가냘픈 소년의 배역에 몰입
-안 그래도 규련이하고 궁금해하던 참이야.전화기 너머의 주인공은 가계영의 절친이자 종합병원 레지던트인 김강무다. 명문 의료가 집안의 김강무와 재벌 3세 한규련은 계영과 함께 ‘라ON’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며 도시의 추악한 이면을 정화하는 데 뜻을 같이해온 유일한 이해자들이었다.“라ON 애들, 요즘도 한비단 미션 하러 다니나?”-너도 그랬으면서 새삼스럽긴.가계영 역시 금수저로 태어났으나, 부모가 악인들에게 희생되는 비극을 겪으며 세계가 무너지는 고통을 맛보았다. 하지만 김강무와 한규련의 지원 속에 요원으로 거듭났고, 제 손
독일 출신이자 이탈리아 대 부호 엘에프는 집요하게 동양인 여인의 유두를 비틀어 올리며 숨결을 앗아갔다. 그리고 갑자기 힘을 빼고 피부를 스치는 듯한 가벼운 애무로 전환해 그녀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여성은 허리를 요염하게 비틀면서 몸을 돌리려던 그때, 그는 이내 여성의 허리를 잡더니 피스톤질에 속도를 가했다.“하······!”남성은 다시 여성의 등에 입을 맞추면서 이번에는 엉덩이를 한번 거칠게 잡아 쥐었다. 그리고···.찰싹! 찰싹!한 대, 두 대. 그 엉덩이를 소리 나게 때리자, 여성에게서는 “앗! 읏!” 짧은 비명을
현신의 가느다란 손끝이 수치심과 분노로 부르르 떨려왔고,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막으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오토바이를 몰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가계영이 남긴 압도적인 잔상 때문인지 발끝이 바닥에 접착제라도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진짜. 살다 살다 이토록 황당하고 억울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더니, 제 땅에 발을 들이고도 도리어 침입자 취급을 당하는 현실에 현신은 기가 찼다. 마동현 실장이 무심하게 펜을 돌리며 턱을 괴고 그녀를 응시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