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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한계(限界)- 벌써 힘겨워

작가: silver구슬
last update 게시일: 2026-05-21 12:05:40

다시 열흘이 훌쩍 흘렀다.

어느덧 홍콩은 9월 중순의 한복판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제 같은 오늘, 그리고 내일도 지독하게 비슷할 것 같은 무채색의 나날들.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지하 세계에만 갇혀 산 지도 어느덧 7주 차에 접어들자, 현신은 완전히 시간 감각을 잃어버렸다. 낮과 밤의 경계가 무너진 그곳에서 그녀를 깨우는 것은 오직 기계적인 신호뿐이었다.

붕― 붕― 붕―.

묵직한 뱃고동 소리를 닮은 알람이 지하 5층 부품 공장의 적막을 깨트리며 울려 퍼졌다.

[Thank you all for your hard work. That's it for today. (모두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지직거리는 스피커 너머로 퇴근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흐르자, 현신은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티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가슴을 압박하는 붕대 위로 매끄러운 척추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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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131. 하룻밤을 건 승부(勝負)

    엘에프는 품 안에서 잠든 채 무어라 웅얼거리는 현신을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나의 에스는 꿈속에서조차 평화롭지 못한 모양이군. 대체 이런 너를 어떤 체스 말로 써야 하나.”객실로 돌아온 엘에프는 일단 소파 위로 현신을 조심스레 눕혔다.그러고는 자리에 앉아 조금 전 무휼이 정황을 흘려보낸 극비 정보부터 찬찬히 확인해 나갔다. 자료를 훑어내리는 그의 수려한 눈매가 가늘어졌다.‘한비단 놈들도 하는 짓거리는 빅토리아와 매한가지군.’결코 유쾌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입안이 씁쓸해진 엘에프가 와인병과 잔을 챙겨 소파로 돌아왔을 때, 현신이 마른 신음과 함께 몸을 꿈틀거리며 의식을 부지하려 애쓰고 있었다.“어······ 왜 제가 여기에······.”“글쎄. 네가 왜 내 침실 소파에 누워 있을까.”“저······ 체스 둬야 하나요?”“나는 시체와 게임을 즐기는 취향은 없는데.”“······다행이네요.”여전히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지 그녀는 멍한 상태였다.현신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제 앞에 앉은 엘에프를 그저 물끄러미 응시했다.그런 그녀의 대책 없는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엘에프가 와인잔을 부딪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에스. 나는 술주정 부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131. 경계선(境界線) 위에 선 남자들

    엘에프는 품에 안긴 현신을 내려다보며 걸어가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다.이토록 무방비하게 경계를 풀어버리다니. 만약 자신이 이 자리에 없었다면, 연회장에 가득한 그 거구의 넘버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였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현신은 머리가 어지러운지 가느다란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술기운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실루엣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와······. 엘에프 선배, 변했어요? 나 지금······ 안아 준 건가? 와, 높다.”“나의 에스가 아주 창의적인 방식으로 내 속을 뒤집는군. 지루할 틈을 안 주어.”“아, 졸려······. 계영 님에게 답장해야 하는데.”현신이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헤실헤실 웃으며 중얼거리자, 엘에프의 수려한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빛나던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이내 짙은 안개 속으로 가라앉듯 흐려졌다.그때, 멀리서 독한 술을 즐기던 헤르만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엘에프에게 다가왔다. 현신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시선이었다.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뽀얗고 둥근 이마와, 붉게 물든 뺨 위로 길게 음영을 드리운 속눈썹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에스는 술 마시고 완전히 뻗은 건가?”“그래서 손이 많이 가는군.”헤르만은 상념에 잠긴 듯한 엘에프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서늘한 비즈니스 톤으로 화제를 전환했다.“엘에프. 조금 전 코드명 ‘휼&rsq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130. 들끓는 마음, 집착(執着)

    엘에프가 넘버들에게 그동안 고생했다고 선사한 일종의 연회가 시작되었다.그 화려한 음식의 향연은 현신에게 혀를 내두를 만큼 대단했고, 좋아하는 디저트가 다양해 뭐부터 먹어야 하나 황홀하기까지 했다.이리 좋은 것을 먹으니 당연히 계영이 생각났다. 현신은 잠깐 구석에서 핸드폰을 열었다.[회의 끝나면 연락해.]계영의 연락이 또 와 있었다. 이건 정말 온몸에 피가 들끓을 정도로 행복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현신의 요즘 삶의 낙이라면 바로 계영과의 메시지 주고받기다.웃음꽃이 피는 것을 겨우 참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계영 님. 저는 회의 잘 끝냈어요. 계영 님도 바쁘시겠지요? 식사 잘 챙겨 드세요.]잠시 뒤 금방 답장이 왔다.[그래. 너도 위험한 일 하지 말고, 바빠도 꼭 잘 먹어.]현신은 그냥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바로 옆에서 계영이 말을 해주는 것처럼 그리 다정할 수가 없어 마음이 수런거렸다.[네.]현신은 이 글자들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몇 줄 글만 읽어도 기뻐서 춤이라도 출 수 있을 것 같았다.“넘버 30번 님!”그때 팔에 깁스를 한 왕첸이 현신을 보자마자 달려왔다.“왕첸, 잘 챙겨 먹고 약도 잊지 마세요.”“네! 제 생명의 은인이신 에스 님! 지하 넘버 10명은 모두 에스 님께 목숨을 바칠 겁니다.”“그건 사양이에요. 나 말고 엘에프 선배와 조직에 충성을 다해 주세요.”“넵!”와인 잔, 샴페인 잔, 맥주잔 등 넘버들이 애주가 현신 주변으로 술잔들을 들고 슬금슬금 모이기 시작했다.“한잔하시죠! 형님!”“제 잔도 받아주세요!&r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129. 새장을 벗어날 희망, 면죄부(免罪符)

    이틀 뒤, 호텔 최상층.현신은 엘에프가 점유하고 있는 펜트하우스 바로 옆 회의실에 소집되었다.사방이 방음벽으로 차단된 정적 속에서 상위 넘버 서른 명과 어제 늦은 밤 급하게 귀국한 엘에프, 그리고 헤르만이 마주 앉아 있었다.회의석 말단에 앉은 현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운 좋게 마카오 상황을 정리하긴 했지만, 다쳐 나간 지하 넘버들을 목격한 잔상이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게다가 해외 일정을 마친 엘에프가 기어코 이 공식적인 회의 석상에 자신을 동석시킨 탓에, 목덜미를 짓누르는 긴장감이 한층 더 팽팽해졌다.브리핑이 끝난 뒤, 엘에프는 상위 넘버들을 물리고 현신과 헤르만만 남겨둔 채 사적인 담소를 나누는 자리를 자연스럽게 유도했다.“컨디션은 나쁘지 않군.”“엘에프, 안색이 요즘 좋아 보여.”헤르만의 말대로 엘에프는 현신이 봐도 무언가 사는 재미를 찾은 사람처럼, 눈에 띄게 활력이 넘쳤다.“대신 나의 에스는 제대로 먹고는 다니는 건가? 그새 얼굴이 더 작아졌군.”현신은 말없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제 뺨을 만졌다. 요즘 입맛이 돌 리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시간만 흐르기를 바라며 매일 아침 휴대전화 속 달력의 날짜만 확인하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운동량이 부쩍 늘어서 그런지 도통 입맛이 없더라고요. 잘 챙겨 먹을게요.”현신이 적당히 둘러대자, 헤르만이 빔프로젝터 스크린에 아시아 지도를 띄우며 본격적인 비공식 브리핑을 시작했다.“엘에프, 에스 덕분에 지하 넘버들을 이끌고 마카오로 넘어가 소요 사태를 깔끔하게 정리했어. 중국 본토 세력이 홍콩 쪽 국경을 침범하려던 움직임은 내가 차단했고.”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128. 출정(出征), 날갯짓을 응원하며

    벌써 홍콩에도 가을은 깊어져 어느덧 11월 말에 접어들고 있었다.오늘도 처절한 넘버 배틀을 끝내고 사각의 링을 내려온 현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에 젖은 손으로 휴대전화 속 달력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숫자가 바뀔 동안 그녀의 세계는 이 호텔 안에 철저히 갇혀 있었다. 엘에프가 교묘하게 세워놓은 ‘절대 호텔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규칙은, 역설적이게도 현신에게 기괴할 만큼 무료하고 안전한 나날을 선물하고 있었다.바깥세상과 단절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지하 공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거나, 땀을 뿌리며 링 위에서 넘버 배틀을 치르는 것뿐이었다.현신이 가쁜 숨을 고르며 링 사이드로 걸어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왕첸이 서둘러 다가와 깨끗한 수건과 시원한 물병을 건넸다.“와! 에스 님, 드디어 지상 넘버 30번 돌파예요! 진짜 축하드려요!”“······감사해요, 왕첸.”지상 서열 30위.그동안 차곡차곡 한 명씩 거물들을 꺾고 올라온 결과였다. 지상에서 자신의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현신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링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넘버들의 눈빛이 경계에서 경외로 바뀌고, 저를 따르는 숨은 세력들이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더 빨리 치고 올라가야죠. 그래야······ 결국 그게 보스에게 힘이 될 테니까요.”현신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녀는 왕첸과 함께 링 옆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아, 방금 끝난 자신의 배틀을 구경하고 체육관을 빠져나가는 엘에프의 수하들을 눈으로 쫓았다.그런데 오늘 따라 사내들의 움직임이 비정상적으로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127. 기다리는 그 마음: 약속(約束)

    순간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듯한 서늘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현신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과 함께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지하 공장의 가혹한 형광등 불빛 아래, 먼지 하나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완벽한 수트 차림을 한 엘에프가 서 있었다. 이런 퀴퀴하고 어두운 지하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며, 그가 한 걸음씩 현신을 향해 다가왔다.현신은 본능적으로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움켜쥐며 미간을 좁혔다. 대체 이 남자가 여기까지 왜 내려온 건지, 그리고 방금 제 선언을 어디서부터 들은 건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왜요?”현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엘에프는 현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상체를 슬며시 숙였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소유욕으로 물들며 잔인하리만큼 다정하게 휘어졌다.“네가 너무 소중해서 말이지.”그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현신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손길이었다.“나쁜 사냥개들이 널 찾으러 올지도 모르니까 넌 안전만 누려. 내가 널 지켜줄 테니까.”엘에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잔혹한 말에 현신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시간 감각이 점차 흐려져 갔다.사방이 통제된 호텔이라는 거대한 감옥 안에서 날짜를 세는 것은 무의미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계영을 만났던 그 꿈같은 새벽으로부터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 있었다.현신은 오늘 아침, 엘에프가 급한 정계 인사들과의 밀담을 위해 홍콩을 비우고 며칠간 출장을 나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포식자의 감시망이 일시적으로 느슨해진 틈을 타, 계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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