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나의 에스. 영광이야.”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경우의 수를 굴리느라 엘에프의 표정을 살필 여유 따윈 없었다. 어떻게든 잠자리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일념에 현신의 손끝이 하얗게 경직되었다. 엘에프는 그 초조함을 기꺼이 즐기며, 가볍게 폰을 움직였다.
“힘으로 널 가지려 했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이 순간이 꽤 즐겁군.”
남은 10개월의 운명이 이 한 판에 걸려 있었다. 현신은 타오르는 집념으로 체스판을 매섭게 응시했다.
“선배, 저 집중 좀 할게요. 폰이 아니라 나이트를······ 아, 키스해야 하는데·&middo
현신은 납으로 가득 찬 듯 무거운 발걸음으로 E호텔 로비에 들어섰다.가계영의 잔상이 심장을 지독하게 찔러대어, 숙소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로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독한 술기운에 취한 것인지, 그보다 더 지독한 감정에 취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계영과 함께했던 그 짧고 먹먹한 시간의 여운이 너무도 달콤해서, 설령 이것이 부서질 꿈일지라도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현신은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듯 통유리창 앞 대기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그리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비에 젖어드는 잿빛 침사추이 거리를 망연히 바라보았다.“에스, 뭐야? 왜 여기 이러고 있어?”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정적을 깨뜨렸다.고개를 들자, 눈앞에 부드러운 무표정을 지은 엘에프가 거짓말처럼 서 있었다.***홍콩의 거리는 여전히 젖어가고 있었다.그리고 흐릿한 제 시야 앞에도 엘에프가 일렁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현신은 허탈하게 웃었다. 확실히 오늘은 제 생애 처음으로 꾸는, 기괴하리만치 대단하고 선명한 꿈이 분명했다.“······쳇, 선배.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시네요. 꿈속이라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체스판을 벌여놓다니, 정말 악취미예요. 흥.”엘에프는 그제야 가볍게 실소를 터뜨리며 현신의 곁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그의 몸에서 배어 나온 시원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향수가 현신의 깃을 스쳤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현신은 조금 전 골목길에서 나누었던 계영과의 입맞춤이 번뜩 떠올랐다. 거칠게 입술을 훔쳐내려다, 이내 스르륵 손을 내렸다.
헤르만이 천천히 사업 계획서를 넘기며 수시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시간이 지날수록 엘에프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이었다.모든 일과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늘한 시선은 노트북 화면 한구석에 띄워진 CCTV 화면에서 좀체 떨어질 줄을 몰랐다.“이번에 홍콩 지사를 확실히 정리하고 나면, 마카오 쪽에 들렀다가 상하이로 넘어갈 거야.”“그래.”“그럼 10월 말에는 나와 같이 유럽으로 가야겠어. 현지 라인과 조율할 게 많아.”헤르만의 말에 엘에프는 자리에서 느리게 일어났다. 평소 즐기던 와인 대신 투명한 생수병을 집어 든 그가 다시 소파로 돌아와 낮게 읊조렸다.“무조건 10월 말은 홍콩에 있을 거야.”“이탈리아 진출에 가장 중요한 시기야.”“나한테는 홍콩이 더 중요해서 말이지.”푹신한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였지만, 엘에프는 대화 중간중간 창밖의 험악해지는 날씨와 노트북 화면만 집요하게 번갈아 살폈다.단호하다 못해 서늘한 그의 어조에 헤르만은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다. 대체 무엇이 그 대단한 엘에프의 발을 이 홍콩에 묶어두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그때쯤이면, 나는 대대적으로 넘버들의 손을 좀 볼 생각이야. 싹 갈아엎어야지.”헤르만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불길한 예감에 숨을 삼키며 다시 한숨을 흘렸다.“에스는 제 발로 안 돌아올 거야. 그냥 강제로 끌고 올게.”그 순간, 엘에프의 입꼬리가 더욱 아름답게 호선을 그렸다. 생수를 한 모금 축인 그가 수려한 눈매를 가늘게 떴다.“아무
잠시 흔들렸던 엘에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로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었다.“음, 이탈리아 또 가야 하나? 피곤한데.”그리고 노트북을 펼쳐서 이탈리아 진출 관련 사업 보고를 느긋하게 확인만 했다.“엘에프, 그건 걱정 마. 나 혼자 갔다 올게. 그리고 아까 의아한 일이 있었어.”“상하이 세력 이야기라면, 걱정 마.”“그래?”엘에프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켄즈 대표가 움직일 것 같아.”“그럼 큰일이잖아!”헤르만은 현신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현신 본인은 모르겠지만, 엄청난 세력들이 엘에프 주변으로 움직이는 상황이었다.‘이제 에스를 한국으로 데려갈 텐데······.’헤르만은 걱정이 밀려왔다.현신이 사라지면 얼마나 더 일이 복잡해질까? 다 어긋나게 생겼다.“그것도 걱정 마, 헤르만.”“왜?”“에스는 내게로 돌아올 테니까.”헤르만은 엘에프가 너무 의연해서 이상할 정도였다.설마 든든한 뒷배가 자신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걸고 지키고 있는데, 미쳤다고 여길 다시 올까?헤르만은 엘에프의 어깨너머로 창밖을 보았다. 폭풍우가 가까워지고 있었다.“에스가 울면서 뛰쳐나갔고, 그 저승사자가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의구심을 갖고 엘에프를 살폈지만, 그는 아주 이성적이었다.“그래.”“에스를 믿는 거야?”&l
“나는 달라. 널 지킬 힘이 있어.”“그 힘을 제게 쓰지 마세요. 더 값진 곳에 쓰셔야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사과드려야 하는 게 있었는데······.”현신은 결연한 의지를 담아 계영을 향해 박력 있게 고개를 뚝 꺾어 인사를 올렸다.“실망을······ 드려 정말 고개를 들 면목이 없습니다. 더 속이고 있는 것도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게 아직 있네요. 이제······ 진짜 두 번 다시 계영 님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꿈에서라도······ 안 잡을게요.”현신은 쓰라린 손등으로 다시 눈물을 대충 닦아내며, 그것이 마지막 유언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계영을 향해 모질게 읊조렸다.계영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 머리가 미칠 지경이었다.“괜찮아. 난 다 괜찮아.”“계영 님, 그런데 홍콩은 너무 위험해서 걱정되네요. 제가 거짓말은 밥 먹듯 너무 많이 했지만······, 계영 님을 지켜드리고 싶은 것은 진심이에요. 목숨을 걸고 제가 안전하게 호텔로 모셔 드릴게요.”계영은 다 포기했다. 사실 엘에프는 자신의 호텔을 다 버릴 각오인지 엄청난 인력을 지금 현신 하나를 찾기 위해 풀어놓은 상태였다.관광객보다 엘에프의 부하들 숫자가 너무 많은 상태였다.큰 한숨을 내뱉고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린 후 말했다.“그래. 이 거짓말쟁이.&
그토록 보고 싶어 뼈마디가 아릴 정도로 그리워했던 가계영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낯선 이국땅의 익숙지 않은 거리.시야를 가득 채우는 검은 머리카락, 흔들림 없는 깊은 검은 눈동자, 온몸의 감각을 일깨우는 시원한 머스크 향과 단단한 품.매일 밤 꿈속에서도 닳도록 되뇌던 이름, 오늘 하루 종일 입안에서 애달프게 속삭였던 이름이······. 하루도 빠짐없이 마음에 문신처럼 새겼던 그 가계영이 지금 기적처럼 제 앞에 서 있었다.“계영 님?”“너, 이 꼴이 뭐야?”귓가를 때리는 낮고 묵직한 목소리도 여전했다. 그리고 저를 보며 서슴없이 화를 내는 성정까지 여전하다니.“아······ 계영 님. 아, 저, 저기······. 꿈이어도 되게 생생하네요. 와······.”“······꿈 아니야. ······신.”차라리 깨지 않을 생생한 꿈이라면 좋으련만, 제 눈앞에서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화가 난 계영의 포성에 현신의 유약한 몸이 본능적으로 굳어 버렸다.“······아, 화나셨죠? 죄송합니다.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셨는데&mid
“흐흐흑, 그만요! 제발!”그 황금색 눈은 물기가 그렁그렁 가득 차 넘치고 있었다. 순간, 엘에프의 움직임이 찰나의 순간 굳어버렸다.“왜 울지?”낮게 가라앉은 질문이 무색하게, 현신은 휙 하고 그를 밀쳐내고는 엘에프에게서 멀어졌다.오만한 포식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현신은 객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하지만 문밖에는 복도를 삼엄하게 지키고 서 있던 엘에프의 가드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어디 가십니까!”“흐흑! 흐흑!”가드들의 거구에 막혀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는 현신의 거친 숨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엘에프는 문가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깊은 한숨만 흘렸다.그리고 지독한 갈증을 느끼듯 잠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가게 놔둬.”엘에프의 묵직한 명령이 복도를 울리자마자 가드들은 현신을 막았던 팔을 거두었다. 앞길이 열리자마자, 울고 있는 현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복도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엘에프는 그런 그녀가 결국 막다른 길에서 비상구 계단 철문을 밀치고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엘에프는 서늘한 집착이 서린 눈빛으로 한참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지금 가계영의 특수 수색팀에는 반가운 비상이 걸렸다.E 호텔 내부 CCTV와 외부 감시카메라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던 분석실의 대형 모니터 위로, 그토록 찾아 헤매던 현신의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드디어!”마 실장이 다급하게 태블릿 PC을 흔들며 화상회의를 하고 있는 세미나실로 향했다.&ld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