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본선 1라운드의 주제는 황실의 기억을 담은 수프였다.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그래서 더 불쾌했다. 황실은 늘 그랬다. 가장 위험한 것에 가장 우아한 이름을 붙였다. 감각을 누르는 향을 평온이라 불렀고, 사람을 조용하게 만드는 빵을 은혜라 불렀다. 이번에는 기억이었다. 엘리제는 주제가 적힌 종이를 조리대 위에 놓았다. "황실의 기억이라……" 마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셰프님, 이 주제가 공작 전하와 관련 있을까요?" "거의 확실해." "리아나 황후님의 마지막 수프 때문입니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나 황후. 칼릭스의 어머니. 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먹었다는 수프. 그리고 칼릭스가 어린 시절 함께 먹었다는 수프. 그 뒤로 칼릭스는 맛을 잃었다. 아직 모든 증거가 모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냄새는 이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월영초. 달그늘꽃. 황실 의관단. 그리고 수프. 베른이 낮게 말했다. "황실이 본선 주제로 공작 전하의 상처를 꺼낸 셈입니다." "맞아요." 엘리제는 종이를 접었다. "요리 대회인 척하지만, 칼릭스 공작님의 반응을 확인하려는 걸 수도 있어요." 마리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공작 전하께 말씀드려야……" "말해야지." 엘리제는 잠시 멈췄다. 전생의 자신이라면 혼자 분석했을 것이다. 위험을 먼저 확인하고, 증거를 잡은 뒤에야 말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혼자 삼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엘리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님께 갑시다." *** 칼릭스는 황궁 북쪽 회랑에 있었다. 검은 기둥이 늘어선 긴 복도. 창밖에는 황궁 정원이 보였지만, 밤이라 색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칼릭스는 창가에 서서 어둠을 보고 있었다. 그는 엘리제가 다가오는 것을 듣고도 돌아보지 않았다. "주제가 나왔나." "네." "좋지 않은가 보군." 엘리제는 잠시 숨을 골랐다. "황실의 기억을 담은 수프입니다." 칼릭스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수프." "네."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아니요." 엘리제는 솔직하게 답했다. "공작님 반응을 보려는 것 같아요. 또는 저를 흔들려는 거고요." 칼릭스는 한참 침묵했다. 표정은 차가웠지만, 엘리제는 그의 손끝을 보았다. 굳어 있었다. 전장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손. 그 손이 아주 조금 굳어 있었다. 엘리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칼릭스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괜찮다고 했을 것이다. 아니, 그는 괜찮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감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는 달랐다. "불쾌하다." "좋아요." "또 좋은 신호인가." "네. 느끼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칼릭스는 희미하게 숨을 내쉬었다. "내 어머니의 마지막 식탁을 주제로 삼다니. 황실다운 방식이군."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있었다. 차갑고 낮은 분노. 엘리제는 그 분노를 지우려 하지 않았다. 지우면 안 된다. 분노는 때로 사람을 살게 한다. 다만 그것이 사람을 태우지 않게 해야 한다. "이번 수프는 공작님을 위한 거로 만들게요." 칼릭스의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심사용이 아니라?" "심사용이기도 하죠. 그런데 먼저 공작님을 위한 수프여야 해요." "왜." "남들이 정한 기억 말고, 공작님이 직접 삼킬 수 있는 기억이어야 하니까요." 칼릭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엘리제는 가볍게 웃으려 했다. "물론 맛도 있어야 하고요. 저는 미식회 참가자니까." "엘리제."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 하나뿐인데, 엘리제는 어쩐지 걸음을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해요." "이번엔 네가 먼저 먹지 마라." "……그럴 생각 없어요." "정말인가." "정말." 칼릭스는 그녀를 오래 보았다. "믿겠다." 그 말이 이상하게도 더 무겁게 다가왔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공작님도 약속해요." "무엇을." "불쾌하면 불쾌하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맛이 이상하면 이상하다고 말하기." 칼릭스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명령인가." "셰프 지시입니다." "따르지." 그는 너무 순순히 답했다. 엘리제는 괜히 시선을 돌렸다. 왜 이런 말들이 점점 마음에 남는지 모르겠다. *** 본선 1라운드는 다음 날 오전에 열렸다. 심사장은 전보다 크고 엄숙했다. 예비 심사와 달리 귀족 관람석도 열려 있었다. 황실 미식회 본선답게, 각 가문에서 온 귀족들이 화려한 옷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주제는 수프. 그러나 조리대 위에 놓인 재료들은 단순하지 않았다. 흰 뿌리채소, 말린 꽃잎, 닭 육수, 북부산 말린 고기, 달콤한 향초, 쓴 허브, 그리고 작은 검은 병. 엘리제는 검은 병을 보자마자 눈빛이 식었다. 냄새가 있었다. 달그늘꽃. 희석됐지만 분명했다. 마리가 옆에서 기록했다. "검은 병. 달고 무거운 끝향. 목 안쪽보다 머리 뒤쪽." "잘했어. 사용하지 마." "네." 다른 참가자들은 병을 신중히 사용했다. 향초와 섞으면 수프에 부드러운 깊이가 생겼다. 황실 심사관들이 좋아할 법한 맛이었다. 르시앙도 병을 보았다. 그는 병을 열어 냄새를 맡더니, 아주 잠깐 엘리제를 보았다. 그 시선은 묘했다. 그도 알고 있다. 엘리제는 그렇게 느꼈다. 그럼에도 르시앙은 검은 병을 아주 한 방울 사용했다. 엘리제는 이를 악물지 않았다. 분노는 나중에 쓰는 재료다. 지금은 수프를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닭 육수 위에 북부산 말린 고기를 아주 조금 넣었다. 칼릭스의 기억과 연결되는 북부의 향. 그러나 너무 강하게 넣으면 전장 냄새가 난다. 그래서 육수의 바탕만 잡았다. 흰 뿌리채소는 오래 끓이지 않았다. 형태가 무너지기 직전까지 부드럽게 익히고, 일부는 얇게 저며 마지막에 띄웠다. 쓴 허브는 아주 약하게. 달콤한 꽃잎은 쓰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구운 보리 물을 만들었다. 구운 보리의 향은 화려하지 않지만, 사람을 바닥으로 내려앉힌다. 현실적인 맛. 살아 있는 곡물의 냄새. '기억은 향기로 꾸미는 게 아니야.' 기억은 때로 쓰고, 때로 거칠다. 그래도 삼킬 수 있어야 한다. 엘리제의 수프는 맑았다. 황실의 기억이라는 주제에 비해 너무 소박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북부의 말린 고기 향, 흰 뿌리채소의 단맛, 구운 보리의 따뜻함, 아주 약한 쓴 허브의 끝맛이 있었다. 그녀는 이름을 적었다. [돌아온 수프] 마리가 작게 물었다. "돌아온…… 수프입니까?" "응." "누가 돌아오는 겁니까?" 엘리제는 시선을 들어 칼릭스를 보았다. 그는 관람석 아래쪽에 서 있었다. "기억이든, 사람이든." *** 시식이 시작됐다. 르시앙의 수프는 완벽했다. 진한 육수, 부드러운 향, 꽃잎의 은은한 단맛, 검은 병의 향이 아주 미세하게 배어 있었다. 심사관들은 만족했다. "황실의 품격이 느껴집니다." "고요하고 깊군요." "기억이라는 주제에 어울립니다." 르시앙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웃지 않았다. 엘리제는 그가 자신의 수프를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는 걸 보았다. 다음은 엘리제의 수프였다. 첫 번째 심사관은 그릇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맑군. 너무 맑아." "네." "황실의 기억이라는 주제치고는 장식이 부족하다." "기억이 늘 장식되어 있지는 않으니까요." 심사관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수프를 맛봤다. 처음에는 조용했다. 그다음 그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쓴맛이 있군." "네." "그런데 거슬리지는 않는다." 두 번째 심사관도 맛봤다. "구운 곡물 향이 늦게 올라옵니다." 세 번째 심사관은 오래 침묵했다. "이상하군. 화려하지 않은데…… 먹고 나니 숨을 쉬게 됩니다." 관람석이 술렁였다. 엘리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칼릭스에게 있었다. 칼릭스는 심사위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실은 그가 반응하길 원했다. 그래서인지 심사관 중 하나가 말했다. "블레이크 공작 전하께서도 맛보시겠습니까? 황실의 기억이라는 주제이니, 전하의 의견도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엘리제의 손끝이 굳었다. 역시. 그들은 칼릭스를 끌어내려 했다. 칼릭스는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그는 르시앙의 수프와 엘리제의 수프를 모두 보았다. 먼저 르시앙의 수프. 한 모금. 그의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제는 보았다. 손끝이 굳었다. 아주 미세하게. "고요하다." 칼릭스가 말했다. 르시앙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데 내 기억은 아니다." 그리고 엘리제의 수프. 칼릭스는 숟가락을 들었다.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는 한 모금 삼켰다. 조용했다. 아주 긴 침묵. 관람석의 귀족들이 숨을 죽였다. 칼릭스가 천천히 말했다. "쓰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따뜻하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북부의 겨울 막사에서 마셨던 물과 닮았다. 맛은 거의 없었지만, 손을 녹였다." 그는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황실 심사관들의 얼굴에 미세한 실망이 스쳤다. 그러나 칼릭스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도망가고 싶지는 않다." 연회장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엘리제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말을 잃었다. 그가 피하지 않았다. 쓴 기억 앞에서. 황실이 꺼낸 상처 앞에서. 칼릭스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그릇을 내려놓고 엘리제를 보았다. "좋은 수프다." 그 말은 어떤 심사평보다 무거웠다.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이번엔 웃음으로 넘기고 싶지 않았다. *** 본선 1라운드 결과, 엘리제는 상위권으로 통과했다. 르시앙도 통과했다. 그러나 황실의 의도는 실패했다. 칼릭스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모두 앞에서 자신의 불쾌함과 기억을 말했고, 엘리제의 수프를 좋은 수프라 인정했다. 심사가 끝난 뒤, 엘리제는 복도에서 칼릭스를 따라잡았다. "괜찮아요?" 그는 멈췄다. "괜찮지 않다." 엘리제는 숨을 삼켰다. "그런데 도망가고 싶지는 않다." 칼릭스는 그녀를 보았다. "네 수프가 그랬다." "수프가요?" "쓰고 따뜻했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너도 가끔 그렇다." 엘리제는 눈을 깜빡였다. "제가요?" "나를 불편하게 하고, 따뜻하게 한다. 동시에." 호흡이 잠깐 흔들렸다. 복도 끝에 마리와 베른이 있었고, 멀리 황실 하인들이 오갔다. 누가 봐도 말을 아껴야 할 자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엘리제가 먼저 물러나지 못했다. 칼릭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 "이것도 예열인가." 엘리제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공작님……" "상황인가?" 그는 낮게 물었다. 엘리제는 겨우 대답했다. "네." "알겠다." 그는 물러섰다. 하지만 시선은 물러서지 않았다. 엘리제는 그 시선이 너무 오래 남는다고 생각했다. 그때 르시앙이 복도 반대편에서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굳어 있었다. "라벤느 영애." 엘리제는 정신을 차렸다. "뭐죠?" 르시앙은 주변을 살핀 뒤 아주 낮게 말했다. "검은 병. 황실 주방 기본 재료 목록에는 없었습니다." 엘리제의 눈빛이 변했다. "누가 넣었죠?" "오늘 새벽, 황태후 직속 의관단에서 전달했습니다." 칼릭스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르시앙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병의 향…… 저는 전에 맡은 적이 있습니다." "어디서요?" 르시앙의 시선이 칼릭스에게 향했다가, 다시 엘리제에게 돌아왔다. "리아나 황후의 마지막 식단 기록에서." 복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리제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본선 첫 라운드는 끝났다. 하지만 진짜 기억의 수프는 이제 막 끓기 시작했다.제국 북부의 거대한 설산을 집어삼킬 듯 무섭게 몰아치던 동토의 새벽바람이 마침내 잔인한 비명을 거두고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블레이크 공작성의 가장 높은 탑 위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자, 수십 년간 얼어붙어 있던 성벽의 성에들이 투명한 보석처럼 부서지며 눈부신 황금빛을 사방으로 반사해 내기 시작했다. 길고 길었던 황궁의 더러운 암투도, 마차 안과 귀빈실을 거쳐 이곳 공작가의 대침실까지 이어지던 파괴적이고도 농밀한 탐닉의 밤도 마침내 잿빛 안개 속으로 완전히 녹아내린, 지독하리만치 평화로운 아침이었다.그러나 오직 두 사람만의 숨소리와 맥박으로 가득 찬 공작의 대침실 내부만큼은 여전히 시간이 완전히 정지한 듯, 낮고 진득한 열기가 고스란히 정체되어 있었다.사방으로 어지럽게 흩어진 순백의 예복 실크 조각들과 뜯겨 나간 은색 단추들, 지난밤의 격렬했던 신체적 마찰을 증명하듯 기괴하게 뒤틀린 채 젖어 있는 침대 시트, 그리고 공간을 가득 메운 짙은 샌달우드 향과 달콤한 무화과 향의 잔향이 뇌리를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방 안의 밀도는 여전히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으음…….”엘리제는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리며 가녀린 신음을 입술 사이로 흘렸다.전신을 지독하게 난도질하는 듯한 뻐근한 통증이 척추 뼈마디 하나하나를 타고 무겁게 밀려왔다. 단 한 치의 자비도, 단 한 순간의 유예도 없이 그녀의 살결을 탐닉해 들어왔던 칼릭스의 잔인한 소유욕이 남긴 흔적이었다. 전생의 강서진으로서 그 어떤 혹독한 주방의 노동과 폭군 같은 선배들의 압박도 버텨냈던 그녀였지만, 모든 감각을 회복한 북부의 괴물이 밤새도록 쏟아부은 원초적인 집착을 받아내는 것은 차원이 다른 파멸적인 피로였다.그녀가 몸을 미세하게 움직이려 하자마자,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움켜쥐고 있던 거대하고 단단한 팔뚝에 소름 끼칠 정도로 강한 악력이 다시금 들어왔다.“깨웠나.”낮고 진득하게 잠긴, 낮의 태양마저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서늘하고도 뜨거운 목소리가 엘리제의 뒷덜미를 거칠게 긁어내렸다.칼릭
수도에서 북부의 심장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밤의 질주가 마침내 끝을 고했다.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블레이크 공작성의 거대한 대문이 육중한 쇳소리를 내며 열렸고,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마필들의 더운 숨결을 흩날리며 안뜰 정중앙에 멈춰 섰다. 북부의 한밤동을 지배하는 동토의 차가운 바람이 마차 외벽을 사정없이 때려대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지만, 그 서늘한 냉기조차 마차 내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지독하고 끈적한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달각.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칼릭스는 무릎 위에 늘어져 있던 엘리제를 단 한 순간도 바닥에 디디게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두꺼운 모피 망토로 그녀의 전신을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아침에 드레스룸에서 그토록 정성스럽게 채웠던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예복은 이미 마차 안에서 벌어진 난폭한 탐닉으로 인해 단추가 전부 뜯겨 나가고 옷깃이 처참하게 찢어진 상태였다. 다른 하녀들이나 성 안의 기사들에게 아내의 노출된 살결과 자신이 새겨놓은 붉은 낙인들을 단 한 자락도 보이지 않겠다는 괴물의 철저한 구속이자 독점욕이었다.“공작 전하를 뵙습니…….”성 문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과 하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으나, 칼릭스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본관의 대리석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살기와 제압감은 전장으로 향하는 총사령관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서슬 퍼런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엘리제는 그의 단단한 목덜미에 두 팔을 감아쥔 채, 모피 망토 안쪽의 은밀한 어둠 속에서 가쁜 숨을 골랐다. 셔츠 자락 틈새로 느껴지는 그의 우람한 가슴팍 근육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채 터질 것처럼 거칠게 맥박치고 있었다.복도를 지나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해 허락된 성의 가장 깊숙한 안동, 공작의 대침실 문이 열렸다. 칼릭스는 발끝으로 문을 부서질 것처럼 거칠게 닫아걸었다.쿵! 철컥.육중한 참나무 문이 닫히고 묵직한 금속 걸쇠가 완전히 잠기는 순간, 엘리제는 비로소 자신들이
황제와의 숨이 막힐 듯한 공식 오찬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고, 황궁 안동의 깊숙하고 창백한 대리석 통로를 지나 마침내 블레이크 공작가의 대형 마차 문이 닫히는 순간.장내를 압박하던 화려하고 가식적인 금빛 세계는 완벽하게 차단되었고, 마차 내부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호흡할 수 있는 지독하리만치 은밀하고 거대한 어둠의 장막이 내려앉았다. 마차 바퀴가 수도의 거친 돌길을 짓이기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둔탁한 소음이 정적을 흔들었으나, 그 소음마저 마차 안을 가득 채운 칼릭스의 파괴적인 살기와 소유욕 앞에서는 한 자락의 먼지처럼 흩어질 뿐이었다.철컥, 철컥.마차가 코너를 돌 때마다 육중한 차체가 크게 흔들렸지만, 칼릭스는 엘리제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 채 그녀의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강하게 껴안고 있었다.그는 오찬이 진행되는 내내, 그리고 황제가 엘리제에게 호의 어린 손을 내밀며 “조련”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던 그 찰나의 순간부터 이성의 끈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완벽하게 재단된 검은색 제복 상의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심장 박동은 평소의 침착함을 완전히 잃은 채, 폭주하는 마법 엔진처럼 거칠고 폭력적으로 맥박치고 있었다. 그 무자비한 박동이 엘리제의 둔부를 통해 전신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칼릭스…… 하아, 손아귀 힘이 너무 강해요.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아요.”엘리제가 그의 단단하고 넓은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그녀가 입은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드레스는 목끝까지 촘촘하게 은색 단추가 채워져 있어 레이스가 턱밑까지 감싸 안고 있었지만, 남자의 거친 호흡이 깃을 타고 내려올 때마다 맨살 위로 소름 끼치는 열기가 전해졌다. 목을 죄어오는 굵은 은색 사슬과 핏빛 루비 초커가 그의 악력에 들려 올라가며 엘리제의 가느다란 목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진 그의 맨손가락이 초커의 날카로운 테두리를 따라 피부를 파고들 듯 강하게 짓눌렀다.“황제의 눈빛이 네 쇄골 라인이 시작되는 그 깃 끝에 머물렀다.”칼릭스의
황궁의 정오를 알리는 거대한 청동 종소리가 제국의 심장부를 무겁게 울렸다.블레이크 공작 부부를 마중하기 위해 열린 황실 안동의 귀빈 대기실은 대연회장과는 또 다른 의미로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감돌고 있었다. 사방의 벽면을 가득 채운 순금 문양의 휘장들과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백색의 불빛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웠고, 바닥에 깔린 붉은 벨벳 카펫은 발소리 하나조차 완벽하게 집어삼키며 은밀한 정적을 자아내고 있었다.“공작부인 전하, 예복의 선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드리겠습니다.”황실 최고위 하녀장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엘리제의 드레스 자락을 매만졌다.칼릭스가 직접 골라 입힌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예복은 레이스가 목끝까지 촘촘하게 짜여 있어 단 한 치의 살결도 밖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완벽한 폐쇄성이 엘리제의 가느다란 목선과 유려하게 떨어지는 골반의 곡선을 노골적으로 부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목을 옥죄듯 감싸 안은 블레이크 가문의 핏빛 루비 초커는, 그녀가 제국의 구원자이기 전에 오직 한 사내의 지독한 소유물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사슬과 같았다.엘리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얕은 숨을 내쉬었다.단추를 목끝까지 채운 드레스는 주방의 화구 열기를 견디던 전생의 가운보다 훨씬 더 답답하게 심장을 조여왔다. 하지만 그 답답함의 진짜 원인은 옷이 아니었다. 드레스룸에서부터 마차, 그리고 이 황궁의 복도를 걸어오는 내내 자신의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움켜쥔 채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던 남자의 파괴적인 독점욕 때문이었다.스윽.그때, 대기실 안쪽의 대리석 기둥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완벽하게 재단된 검은색 황실 제복을 입은 칼릭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제국의 검이자 북부의 지배자다운 오만한 아우라가 공간을 단숨에 압도하자, 황실 하녀들은 공작의 서슬 퍼런 기운에 질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칼릭스의 투명하면서도 깊은 보랏빛 눈동자가 엘리제에게로 향했
황궁 귀빈실의 높은 창문 틈새로 아침 햇살이 가늘고 길게 조각되어 쏟아졌다.수도 위를 수놓은 창백한 새벽안개가 황금빛 태양에 녹아내리는 시간이었지만, 두꺼운 암막 벨벳 커튼이 드리워진 침실 내부만큼은 여전히 어둡고 진득한 밤의 열기가 고스란히 정체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순백의 실크 드레스 자락,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공작의 제복 훈장들, 그리고 벽난로 안에서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의 매캐한 잔향이 방 안의 밀도를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으음…….”엘리제는 얕은 신음을 삼키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전신을 지독하게 난도질하는 듯한 뻐근한 통증이 척추 마디마디를 타고 밀려왔다. 단 한 치의 자비도 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던 지난밤의 흔적이었다. 온전한 감각을 되찾은 괴물이 십수 년의 굶주림을 보상받겠다는 듯 탐욕스럽게 탐닉해 온 결과물은 엘리제의 하얀 피부 위로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었다.그녀가 몸을 미세하게 뒤틀자마자, 허리를 빈틈없이 옭아매고 있던 거대하고 단단한 팔뚝에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갔다.“더 누워 있어라.”낮고 잠긴, 짐승의 르누아르 같은 목소리가 엘리제의 귓가를 긁어내렸다.칼릭스는 언제나처럼 소리도 없이 눈을 뜬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 위로 흘러내려 야성적인 분위기를 더했고, 실크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의 넓고 탄탄한 어깨와 흉판에는 엘리제가 쾌감에 겨워 가늘게 긁어내린 손톱자락 자국이 붉게 선을 그리고 있었다.거울처럼 투명해진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오직 엘리제 한 사람만을 담은 채 기묘한 포만감과, 여전히 가시지 않은 지독한 독점욕으로 일렁였다.“칼릭스, 날이 벌써 다 밝았어요. 황실 시종들이나 하녀들이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 팔 좀 놓아주세요.”엘리제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손을 올렸으나, 칼릭스는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붙잡아 자신의 입술 앞으로 가져갔다.검은 장갑을 벗어 던진 그의 맨손 지문이 엘리제의 가느다란 손
황궁의 온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창백한 달빛은 두 사람의 엉킨 그림자를 은밀하게 비추고 있었다.온실 안을 가득 채운 진득한 장미 향은 엘리제의 가쁜 숨결과 뒤섞여 기묘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차가운 대리석 돌벽에 등이 밀착된 엘리제는 전면에서 저돌적으로 밀려드는 칼릭스의 거대한 신체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칼릭스는 그녀의 두 손목을 조리대 벽 위로 거칠게 잡아 내리누른 채, 마치 사냥감을 온전히 가두어둔 맹수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칼릭스…… 하아, 사람들이 언제 이곳으로 들어올지 몰라요. 제발 이 손 좀……”엘리제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다그치려 했으나, 칼릭스의 투명한 눈동자에 서린 열망은 이미 이성의 끈을 아슬아슬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더 깊숙이 숙여, 엘리제의 새하얀 목덜미와 핏빛 루비 초커가 닿아 있는 그 예민한 경계선을 사정없이 입술로 핥아 내렸다. 쪽, 소리와 함께 질척한 점막의 마찰음이 온실의 정적을 집요하게 깨부수었다.“흐읏……! 아, 칼릭스……!”엘리제의 입술 사이로 참지 못한 신음이 튀어 나왔다. 거칠게 살을 파고드는 남자의 맨손 악력과, 전신을 불덩이처럼 달구는 배덕감이 그녀의 척추 뼈마디를 타고 뇌수까지 일직선으로 치솟아 올랐다.모든 미각과 감각을 회복한 칼릭스에게 엘리제라는 존재는 이제 단순히 맛을 느끼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원색을 뛰어넘어, 자신의 피와 살을 통째로 지배하는 지독한 마약이자 유일한 구원이었다.칼릭스는 엄지손가락으로 엘리제의 붉게 퉁퉁 부어오른 입술 점막을 강하게 비벼대며, 가쁜 숨을 그녀의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말했을 텐데, 엘리제. 세상이 선명해질수록 내 식욕은 너 하나만을 향해 폭주한다고. 저 연회장에 서 있는 천박한 놈들이 네 어깨와 등을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제국 전체를 불태워버리고 싶었다.”그의 목소리는 짐승의 낮은 으르렁거림처럼 뇌리를 긁어내렸다. 칼릭스는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엘리제의 허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