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검은 병은 작았다.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의 크기. 황실 주방에서 흔히 쓰는 향신료 병과 모양이 비슷했고, 라벨도 평범했다. 그러나 엘리제는 그 병을 조리대 위에 올려놓자마자 속이 불편해졌다. 병 안의 액체는 거의 투명했다. 다만 빛에 비추면 아주 희미하게 푸른 기가 돌았다. 그리고 달고 차가운 냄새. 리아나 황후의 마지막 식단 기록에서 맡았다는 르시앙의 말이 계속 귓가에 남았다. 칼릭스는 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차가웠지만, 손끝은 굳어 있었다. 엘리제는 그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제가 먼저 건드리지 않습니다." 칼릭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좋다." "진짜로요. 약속 지킵니다." "믿겠다." 그 짧은 대답이 이상하게도 무거웠다. 엘리제는 병 옆에 유리그릇 세 개를 놓았다. 하나는 물, 하나는 닭 육수, 하나는 구운 보리 물. 같은 양, 같은 온도. 반응을 보려면 조건을 맞춰야 한다. 마리는 기록판을 들고 준비했다. 베른은 조용히 옆에서 도구를 정리했다. 이번에는 공작가 주방장이 황궁 임시 검수실에 직접 들어왔다. 본선 참가자에게 보조를 허용하는 규정이 있던 덕분이었다. 르시앙은 문가에 서 있었다. 그는 황실 수석 요리사였다. 이 검수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엘리제는 그에게 물었다. "마지막 식단 기록에서 이 냄새를 맡았다고 했죠. 정확히 어디서요?" "기록 원본은 황실 주방 보관실에 있었습니다. 리아나 황후가 마지막으로 드신 수프의 재료 목록이었지요." "거기에 검은 병이 적혀 있었어요?" "아니요. 이름은 달랐습니다." "뭐였죠?" 르시앙은 잠시 침묵했다. "밤이슬 추출액." 엘리제는 낮게 웃었다. "이름은 참 예쁘게 붙이네요." "당시에는 보양 향료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요?" 르시앙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은…… 그 이름을 믿지 않습니다." 칼릭스가 낮게 말했다. "검수해라."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합니다." *** 첫 번째는 물이었다. 엘리제는 검은 병의 액체를 아주 작은 유리막대 끝에 묻혀 물에 떨어뜨렸다. 한 방울도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적은 양. 그러나 물의 향이 변했다.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약했지만, 끝이 둔해졌다. 물 특유의 깨끗한 냄새가 사라지고, 부드러운 단향이 남았다. 마리가 기록했다. "물 반응. 본향 소실. 단향 상승. 끝향 둔화." 두 번째는 닭 육수. 액체를 아주 조금 섞자, 육수의 잡내가 사라졌다. 겉보기엔 좋아 보였다. 베른이 미간을 찌푸렸다. "향이 정돈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죠. 그래서 위험해요." 엘리제는 유리그릇을 가까이 가져갔다. "잡내가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가 못 맡게 된 겁니다." 칼릭스가 물었다. "먹으면." "먹으면 입안이 부드럽다고 느낄 거예요. 처음에는. 그런데 계속 먹으면 맛의 끝이 흐려지고, 불쾌함을 덜 느끼게 되겠죠." "불쾌함을 덜 느끼게 한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엘리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마지막 수프. 그 뒤로 사라진 미각. 칼릭스는 검은 병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세 번째는 구운 보리 물이었다. 엘리제는 아주 적은 양을 섞었다. 구운 곡물의 따뜻한 향이 흐려졌다.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건 안 돼." 마리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셰프님?" "구운 향까지 죽여. 이건 단순한 보양 향료가 아니야. 맛의 끝을 지우는 물질이에요." 베른은 낮게 말했다. "사람이 불쾌함을 느끼지 못하게 하면, 상한 것도 삼킬 수 있겠군요." "네. 그리고 슬픔이나 분노도 비슷하게 눌릴 수 있어요." 르시앙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서 공작 전하께……" 말을 끝내지 못했다. 칼릭스가 그를 보았다. "말해라." 르시앙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전하께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검수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칼릭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제는 그를 보았다. 분노할 줄 알았다. 그런데 칼릭스는 아주 조용했다. 조용해서 더 아팠다. "공작님." 그가 그녀를 보았다. "지금 뭐가 느껴져요?" 칼릭스는 검은 병을 보았다가 천천히 답했다. "분노." "좋아요." "그리고……" 그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두려움." 엘리제의 숨이 멈췄다. 칼릭스가 두려움이라는 말을 했다.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도 낯선 듯 잠시 침묵했다. "다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까 두렵다." 엘리제는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여기는 검수실이다. 사람들이 있다.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말이 먼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손. 단단하게 굳은 손. "그럼 붙잡아요." 칼릭스의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무엇을." "지금 느끼는 거요. 분노든, 두려움이든. 사라지지 않게." "네가 도와줄 건가." "셰프니까요." 그녀는 일부러 가볍게 웃었다. "잃어버린 맛 찾는 건 제 전문입니다." 칼릭스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손을 뒤집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리의 펜이 멈췄다. 베른은 고개를 돌렸다. 르시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제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손을 빼지 않았다. 칼릭스가 낮게 말했다. "그럼 놓치지 마라." 그 말은 미각에 대한 것이었을까. 감정에 대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에 대한 것이었을까. 엘리제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 *** 검은 병은 신전 봉인함에 보관하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병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르시앙은 황실 주방 보관 기록을 가져왔다. 밤이슬 추출액이라는 이름은 오래된 기록에서 드문드문 등장했다. 리아나 황후의 마지막 수프. 북쪽 별궁 실험 식단. 황실 의관단 보양 처방. 모두 같은 방향이었다. 맛의 끝을 지우는 것. 감정의 반응을 눌러버리는 것. 마리는 기록을 정리하다가 낮게 말했다. "이게 계속 음식에 들어갔다면…… 사람들은 자기가 무뎌지는 줄도 몰랐겠네요." "응."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무서운 건 그거야. 독처럼 아프면 피할 수 있는데, 이건 편안하게 만들거든." 베른이 말했다. "편안함으로 사람을 길들이는군요." 르시앙은 그 말에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도 그런 식탁을 만들어왔을 것이다. 고급스럽고, 부드럽고, 완벽한 접시. 사람들이 반박하지 못하는 맛. 엘리제는 그에게 말했다. "후회는 나중에 하세요. 지금은 목록부터 뽑아요." 르시앙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목록입니까." "밤이슬 추출액이 들어간 식단 전부. 황실 주방 기록, 의관단 처방, 미식회 재료 목록까지." "황실 내부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수석님이 해야죠." 르시앙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작게 웃었다. "당신은 정말 사람을 몰아붙이는군요." "몰아붙여야 말하잖아요." "저도 먹여 말하게 할 생각입니까?" "필요하면요." 르시앙은 고개를 숙였다. "하겠습니다." 칼릭스가 그를 낮게 내려다보았다. "늦지 않게." 르시앙의 표정이 굳었다. "예, 공작 전하." 엘리제는 그 둘 사이의 공기를 보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기에도 묘한 질투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칼릭스 쪽은 거의 확실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놀릴 상황이 아니었다. 정말 상황이었다. *** 그날 밤, 엘리제는 공작가 임시 숙소의 작은 주방에서 새로운 재활식을 만들었다. 검은 병의 반응을 확인한 이상, 칼릭스의 미각과 감정이 다시 흔들릴 가능성을 대비해야 했다. 그녀가 선택한 건 기억의 소금이었다. 아주 약한 소금. 구운 보리 가루. 산미 열매 껍질을 말려 만든 가루. 혀끝에 닿으면 짠맛과 산미가 아주 짧게 올라와 감각을 붙잡는 처방이었다. 칼릭스는 조리대 앞에 앉아 있었다. "내가 환자인가." "네." "단호하군." "오늘 두려움까지 말했으니 고위험 환자입니다." 칼릭스는 잠시 생각했다. "두려움을 말하면 위험한가." "아니요. 말하지 않으면 더 위험해요." 엘리제는 작은 숟가락 끝에 기억의 소금을 아주 조금 올렸다. "혀끝에만. 삼키지 말고." 칼릭스는 그녀가 내민 숟가락을 보았다. "네가 먹여주는 건가." 엘리제의 손이 멈췄다. 처형장 위의 기억이 떠올랐다. 네가 먹여라.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그때는 목숨을 위해 떨리는 손으로 고기를 내밀었다. 지금은 그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감각을 붙잡기 위해 소금을 내민다. 엘리제는 작게 웃었다. "계약 조항이잖아요. 하루 한 끼 직접 시식." "이건 식사가 아니다." "재활식도 식사입니다." 그녀는 숟가락을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칼릭스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아주 조금 고개를 숙여 소금을 혀끝에 받았다. 짧은 침묵. 엘리제는 숨을 죽였다. "어때요?" 칼릭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선명하다." "좋아요." "그리고……" 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네 손이 떨리지 않는다." 엘리제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사형 직전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위험하다." "맞아요." "그런데 왜 웃지." 엘리제는 잠시 생각했다. 왜 웃었을까. 두려워도 웃는 버릇은 전생부터 있었다. 하지만 지금 웃음은 조금 달랐다. 혼자 버티기 위한 웃음이 아니라, 누군가와 같이 위험을 보고 있다는 안도에 가까웠다. "혼자가 아니라서요." 말하고 나서 엘리제는 자신이 너무 솔직했다는 걸 깨달았다. 칼릭스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렇다면 좋은 맛인가." 엘리제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네." "어떤 맛이지." 그녀는 아주 작게 답했다. "단맛에 조금 가까운 것 같네요." 칼릭스는 한참 그녀를 보았다. "그렇군." 그는 기억의 소금이 담긴 작은 병을 손에 쥐었다. "그럼 잊지 않겠다." 엘리제는 괜히 조리도구를 정리했다. 이 남자는 기억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 못 한다. 아니, 어쩌면 이제 구분하기 시작한 건지도 모른다. 그때 문밖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마리가 들어왔다. "셰프님, 공작 전하. 르시앙 경에게서 전갈입니다." 엘리제는 고개를 들었다. 마리는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황실 주방 기록 일부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위에 적힌 문장. 리아나 황후 마지막 수프. 밤이슬 추출액 외 추가 재료 있음. 엘리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추가 재료?" 마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이…… 월영초입니다." 칼릭스의 손이 굳었다. 기억의 소금 병이 그의 손 안에서 작게 흔들렸다. 엘리제는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숨 쉬어요." 칼릭스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내 어머니의 마지막 수프에." "네." 엘리제의 목소리는 낮았다. "드디어 이름이 나왔어요." 검은 병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제 진짜 독초의 이름이 식탁 위로 올라왔다.제국 북부의 거대한 설산을 집어삼킬 듯 무섭게 몰아치던 동토의 새벽바람이 마침내 잔인한 비명을 거두고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블레이크 공작성의 가장 높은 탑 위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자, 수십 년간 얼어붙어 있던 성벽의 성에들이 투명한 보석처럼 부서지며 눈부신 황금빛을 사방으로 반사해 내기 시작했다. 길고 길었던 황궁의 더러운 암투도, 마차 안과 귀빈실을 거쳐 이곳 공작가의 대침실까지 이어지던 파괴적이고도 농밀한 탐닉의 밤도 마침내 잿빛 안개 속으로 완전히 녹아내린, 지독하리만치 평화로운 아침이었다.그러나 오직 두 사람만의 숨소리와 맥박으로 가득 찬 공작의 대침실 내부만큼은 여전히 시간이 완전히 정지한 듯, 낮고 진득한 열기가 고스란히 정체되어 있었다.사방으로 어지럽게 흩어진 순백의 예복 실크 조각들과 뜯겨 나간 은색 단추들, 지난밤의 격렬했던 신체적 마찰을 증명하듯 기괴하게 뒤틀린 채 젖어 있는 침대 시트, 그리고 공간을 가득 메운 짙은 샌달우드 향과 달콤한 무화과 향의 잔향이 뇌리를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방 안의 밀도는 여전히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으음…….”엘리제는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리며 가녀린 신음을 입술 사이로 흘렸다.전신을 지독하게 난도질하는 듯한 뻐근한 통증이 척추 뼈마디 하나하나를 타고 무겁게 밀려왔다. 단 한 치의 자비도, 단 한 순간의 유예도 없이 그녀의 살결을 탐닉해 들어왔던 칼릭스의 잔인한 소유욕이 남긴 흔적이었다. 전생의 강서진으로서 그 어떤 혹독한 주방의 노동과 폭군 같은 선배들의 압박도 버텨냈던 그녀였지만, 모든 감각을 회복한 북부의 괴물이 밤새도록 쏟아부은 원초적인 집착을 받아내는 것은 차원이 다른 파멸적인 피로였다.그녀가 몸을 미세하게 움직이려 하자마자,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움켜쥐고 있던 거대하고 단단한 팔뚝에 소름 끼칠 정도로 강한 악력이 다시금 들어왔다.“깨웠나.”낮고 진득하게 잠긴, 낮의 태양마저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서늘하고도 뜨거운 목소리가 엘리제의 뒷덜미를 거칠게 긁어내렸다.칼릭
수도에서 북부의 심장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밤의 질주가 마침내 끝을 고했다.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블레이크 공작성의 거대한 대문이 육중한 쇳소리를 내며 열렸고,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마필들의 더운 숨결을 흩날리며 안뜰 정중앙에 멈춰 섰다. 북부의 한밤동을 지배하는 동토의 차가운 바람이 마차 외벽을 사정없이 때려대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지만, 그 서늘한 냉기조차 마차 내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지독하고 끈적한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달각.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칼릭스는 무릎 위에 늘어져 있던 엘리제를 단 한 순간도 바닥에 디디게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두꺼운 모피 망토로 그녀의 전신을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아침에 드레스룸에서 그토록 정성스럽게 채웠던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예복은 이미 마차 안에서 벌어진 난폭한 탐닉으로 인해 단추가 전부 뜯겨 나가고 옷깃이 처참하게 찢어진 상태였다. 다른 하녀들이나 성 안의 기사들에게 아내의 노출된 살결과 자신이 새겨놓은 붉은 낙인들을 단 한 자락도 보이지 않겠다는 괴물의 철저한 구속이자 독점욕이었다.“공작 전하를 뵙습니…….”성 문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과 하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으나, 칼릭스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본관의 대리석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살기와 제압감은 전장으로 향하는 총사령관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서슬 퍼런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엘리제는 그의 단단한 목덜미에 두 팔을 감아쥔 채, 모피 망토 안쪽의 은밀한 어둠 속에서 가쁜 숨을 골랐다. 셔츠 자락 틈새로 느껴지는 그의 우람한 가슴팍 근육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채 터질 것처럼 거칠게 맥박치고 있었다.복도를 지나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해 허락된 성의 가장 깊숙한 안동, 공작의 대침실 문이 열렸다. 칼릭스는 발끝으로 문을 부서질 것처럼 거칠게 닫아걸었다.쿵! 철컥.육중한 참나무 문이 닫히고 묵직한 금속 걸쇠가 완전히 잠기는 순간, 엘리제는 비로소 자신들이
황제와의 숨이 막힐 듯한 공식 오찬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고, 황궁 안동의 깊숙하고 창백한 대리석 통로를 지나 마침내 블레이크 공작가의 대형 마차 문이 닫히는 순간.장내를 압박하던 화려하고 가식적인 금빛 세계는 완벽하게 차단되었고, 마차 내부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호흡할 수 있는 지독하리만치 은밀하고 거대한 어둠의 장막이 내려앉았다. 마차 바퀴가 수도의 거친 돌길을 짓이기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둔탁한 소음이 정적을 흔들었으나, 그 소음마저 마차 안을 가득 채운 칼릭스의 파괴적인 살기와 소유욕 앞에서는 한 자락의 먼지처럼 흩어질 뿐이었다.철컥, 철컥.마차가 코너를 돌 때마다 육중한 차체가 크게 흔들렸지만, 칼릭스는 엘리제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 채 그녀의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강하게 껴안고 있었다.그는 오찬이 진행되는 내내, 그리고 황제가 엘리제에게 호의 어린 손을 내밀며 “조련”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던 그 찰나의 순간부터 이성의 끈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완벽하게 재단된 검은색 제복 상의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심장 박동은 평소의 침착함을 완전히 잃은 채, 폭주하는 마법 엔진처럼 거칠고 폭력적으로 맥박치고 있었다. 그 무자비한 박동이 엘리제의 둔부를 통해 전신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칼릭스…… 하아, 손아귀 힘이 너무 강해요.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아요.”엘리제가 그의 단단하고 넓은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그녀가 입은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드레스는 목끝까지 촘촘하게 은색 단추가 채워져 있어 레이스가 턱밑까지 감싸 안고 있었지만, 남자의 거친 호흡이 깃을 타고 내려올 때마다 맨살 위로 소름 끼치는 열기가 전해졌다. 목을 죄어오는 굵은 은색 사슬과 핏빛 루비 초커가 그의 악력에 들려 올라가며 엘리제의 가느다란 목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진 그의 맨손가락이 초커의 날카로운 테두리를 따라 피부를 파고들 듯 강하게 짓눌렀다.“황제의 눈빛이 네 쇄골 라인이 시작되는 그 깃 끝에 머물렀다.”칼릭스의
황궁의 정오를 알리는 거대한 청동 종소리가 제국의 심장부를 무겁게 울렸다.블레이크 공작 부부를 마중하기 위해 열린 황실 안동의 귀빈 대기실은 대연회장과는 또 다른 의미로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감돌고 있었다. 사방의 벽면을 가득 채운 순금 문양의 휘장들과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백색의 불빛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웠고, 바닥에 깔린 붉은 벨벳 카펫은 발소리 하나조차 완벽하게 집어삼키며 은밀한 정적을 자아내고 있었다.“공작부인 전하, 예복의 선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드리겠습니다.”황실 최고위 하녀장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엘리제의 드레스 자락을 매만졌다.칼릭스가 직접 골라 입힌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예복은 레이스가 목끝까지 촘촘하게 짜여 있어 단 한 치의 살결도 밖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완벽한 폐쇄성이 엘리제의 가느다란 목선과 유려하게 떨어지는 골반의 곡선을 노골적으로 부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목을 옥죄듯 감싸 안은 블레이크 가문의 핏빛 루비 초커는, 그녀가 제국의 구원자이기 전에 오직 한 사내의 지독한 소유물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사슬과 같았다.엘리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얕은 숨을 내쉬었다.단추를 목끝까지 채운 드레스는 주방의 화구 열기를 견디던 전생의 가운보다 훨씬 더 답답하게 심장을 조여왔다. 하지만 그 답답함의 진짜 원인은 옷이 아니었다. 드레스룸에서부터 마차, 그리고 이 황궁의 복도를 걸어오는 내내 자신의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움켜쥔 채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던 남자의 파괴적인 독점욕 때문이었다.스윽.그때, 대기실 안쪽의 대리석 기둥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완벽하게 재단된 검은색 황실 제복을 입은 칼릭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제국의 검이자 북부의 지배자다운 오만한 아우라가 공간을 단숨에 압도하자, 황실 하녀들은 공작의 서슬 퍼런 기운에 질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칼릭스의 투명하면서도 깊은 보랏빛 눈동자가 엘리제에게로 향했
황궁 귀빈실의 높은 창문 틈새로 아침 햇살이 가늘고 길게 조각되어 쏟아졌다.수도 위를 수놓은 창백한 새벽안개가 황금빛 태양에 녹아내리는 시간이었지만, 두꺼운 암막 벨벳 커튼이 드리워진 침실 내부만큼은 여전히 어둡고 진득한 밤의 열기가 고스란히 정체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순백의 실크 드레스 자락,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공작의 제복 훈장들, 그리고 벽난로 안에서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의 매캐한 잔향이 방 안의 밀도를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으음…….”엘리제는 얕은 신음을 삼키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전신을 지독하게 난도질하는 듯한 뻐근한 통증이 척추 마디마디를 타고 밀려왔다. 단 한 치의 자비도 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던 지난밤의 흔적이었다. 온전한 감각을 되찾은 괴물이 십수 년의 굶주림을 보상받겠다는 듯 탐욕스럽게 탐닉해 온 결과물은 엘리제의 하얀 피부 위로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었다.그녀가 몸을 미세하게 뒤틀자마자, 허리를 빈틈없이 옭아매고 있던 거대하고 단단한 팔뚝에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갔다.“더 누워 있어라.”낮고 잠긴, 짐승의 르누아르 같은 목소리가 엘리제의 귓가를 긁어내렸다.칼릭스는 언제나처럼 소리도 없이 눈을 뜬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 위로 흘러내려 야성적인 분위기를 더했고, 실크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의 넓고 탄탄한 어깨와 흉판에는 엘리제가 쾌감에 겨워 가늘게 긁어내린 손톱자락 자국이 붉게 선을 그리고 있었다.거울처럼 투명해진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오직 엘리제 한 사람만을 담은 채 기묘한 포만감과, 여전히 가시지 않은 지독한 독점욕으로 일렁였다.“칼릭스, 날이 벌써 다 밝았어요. 황실 시종들이나 하녀들이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 팔 좀 놓아주세요.”엘리제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손을 올렸으나, 칼릭스는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붙잡아 자신의 입술 앞으로 가져갔다.검은 장갑을 벗어 던진 그의 맨손 지문이 엘리제의 가느다란 손
황궁의 온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창백한 달빛은 두 사람의 엉킨 그림자를 은밀하게 비추고 있었다.온실 안을 가득 채운 진득한 장미 향은 엘리제의 가쁜 숨결과 뒤섞여 기묘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차가운 대리석 돌벽에 등이 밀착된 엘리제는 전면에서 저돌적으로 밀려드는 칼릭스의 거대한 신체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칼릭스는 그녀의 두 손목을 조리대 벽 위로 거칠게 잡아 내리누른 채, 마치 사냥감을 온전히 가두어둔 맹수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칼릭스…… 하아, 사람들이 언제 이곳으로 들어올지 몰라요. 제발 이 손 좀……”엘리제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다그치려 했으나, 칼릭스의 투명한 눈동자에 서린 열망은 이미 이성의 끈을 아슬아슬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더 깊숙이 숙여, 엘리제의 새하얀 목덜미와 핏빛 루비 초커가 닿아 있는 그 예민한 경계선을 사정없이 입술로 핥아 내렸다. 쪽, 소리와 함께 질척한 점막의 마찰음이 온실의 정적을 집요하게 깨부수었다.“흐읏……! 아, 칼릭스……!”엘리제의 입술 사이로 참지 못한 신음이 튀어 나왔다. 거칠게 살을 파고드는 남자의 맨손 악력과, 전신을 불덩이처럼 달구는 배덕감이 그녀의 척추 뼈마디를 타고 뇌수까지 일직선으로 치솟아 올랐다.모든 미각과 감각을 회복한 칼릭스에게 엘리제라는 존재는 이제 단순히 맛을 느끼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원색을 뛰어넘어, 자신의 피와 살을 통째로 지배하는 지독한 마약이자 유일한 구원이었다.칼릭스는 엄지손가락으로 엘리제의 붉게 퉁퉁 부어오른 입술 점막을 강하게 비벼대며, 가쁜 숨을 그녀의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말했을 텐데, 엘리제. 세상이 선명해질수록 내 식욕은 너 하나만을 향해 폭주한다고. 저 연회장에 서 있는 천박한 놈들이 네 어깨와 등을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제국 전체를 불태워버리고 싶었다.”그의 목소리는 짐승의 낮은 으르렁거림처럼 뇌리를 긁어내렸다. 칼릭스는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엘리제의 허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