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
“오늘은 무슨 재미난 일을 해볼까.”
어스름한 새벽. 태양이 떠오르기 전의 수도는 언제나 가장 아름다웠다. 거리를 밝히는 수백 개의 마도등이 아직 밤을 붙잡고 있었고, 성벽 위에서는 경비병들이 변함없이 창을 세운 채 순찰을 돌고 있었다. 황궁의 집무실에서도 몇몇 창문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밤새 서류를 붙잡고 씨름하는 관리들. 곧 시작될 하루를 준비하는 상인들. 누군가는 나라를 위해 일하고. 누군가는 백성을 위해 고민하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풍경을 수도에서 가장 높은 시계탑 위에 앉아 내려다보는 한 여자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흠.” 금빛 머리카락이 새벽바람을 타고 길게 흩날렸다. 휘이이잉— 찬 공기가 볼을 스쳐 지나가자 여자는 기분 좋은 듯 눈을 가늘게 접었다. 세이아 룬 트리비아. 트리비아 백작가의 장녀. 사교계에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조용하고 겁 많은 영애라는 소문이 붙어 있는 여자. 그리고.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가진 여자. 바람에 흩날리는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자수정이 박힌 귀걸이가 은은하게 빛났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장신구였다. 조금 값비싸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나 볼 법한 귀걸이. 하지만 세이아에게 이것은 장신구가 아니었다. 족쇄였다. 동시에. 그녀의 목숨을 붙들어 주는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세이아가 손끝으로 귀걸이를 천천히 돌렸다. 차갑고 매끄러운 자수정의 감촉. 어릴 적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몸에 지니고 살아온 물건이었다. 잠을 잘 때도. 식사를 할 때도. 외출할 때도. 언제나.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너무 얌전히 사는 것도 건강에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세이아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올라갔다. “조금만 놀아 볼까.” 달칵. 작은 소리와 함께 귀걸이가 귀에서 빠졌다. 순간. 콰아아아아—! 억눌려 있던 마력이 폭발하듯 몸 밖으로 터져 나왔다. 보랏빛 빛무리가 세이아를 중심으로 거대한 파동처럼 퍼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새벽 공기를 흔들었다.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도 없이 부드럽게 떠올랐다. 막혀 있던 강물이 단숨에 터져 나온 것처럼 마력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내달렸다. 손끝까지. 발끝까지. 심장 깊숙한 곳까지. 세이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후우…….” 좋았다. 언제나. 이 순간만큼은. 무겁게 몸을 누르던 족쇄를 벗어던지고 진짜 자신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트리비아의 피를 이은 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강한 정신계 마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문제는 그 힘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이었다. 통제하지 못한 마력은 타인을 해치기 전에 먼저 주인의 정신을 집어삼켰다. 운이 좋으면 며칠간 정신을 잃는 것으로 끝났다. 운이 나쁘면 미쳐 버렸고. 더 나쁘면. 죽었다. 그래서 트리비아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억누르는 아티팩트를 몸에서 떼지 않았다. 특히 여자들은 더욱 철저했다. 이상하게도 트리비아의 능력은 대대로 여성에게 훨씬 강하게 발현되었으니까. 그리고 세이아는. 그중에서도 유독 강했다. 너무 강해서 어린 시절부터 몇 겹이나 되는 봉인을 몸에 걸어야 했을 정도로. 세이아가 눈을 떴다. 보랏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그녀는 수도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다들.” 붉은 입술 끝에 미소가 맺혔다. “조금만 더 주무세요.” 탁.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세상이 멈춘 것처럼 고요해졌다. 성벽 위에서 창을 들고 있던 경비병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어……?” 그는 벽에 등을 기대더니 그대로 꾸벅 고개를 떨궜다. 황궁의 집무실에서는 밤새 서류를 읽던 관리가 펜을 놓쳤다. 툭. “잠깐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책상 위로 엎어졌다. 창문을 닫던 하녀도. 마굿간에서 말을 돌보던 마부도. 새벽 장사를 준비하던 상인도. 하나둘.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도시를 채우던 작은 소음들이 차례차례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수도 전체가 잠들었다. 세이아는 두 손을 허리에 올렸다. “좋아.” 완벽했다. 적어도 잠시 동안은. 누구도 그녀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트리비아의 능력을 잘못 알고 있었다. 세뇌. 환각. 정신 지배. 사람의 의지를 마음대로 바꾸는 저주받은 힘. 세상은 트리비아를 그렇게 기억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트리비아가 다루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아니었다. 꿈이었다. 잠든 사람의 꿈으로 들어간다. 악몽을 부순다. 깊숙이 묻힌 기억을 찾는다. 꿈속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때로는 길을 잃은 사람에게 현실로 돌아가는 길을 보여 준다. 아주 강한 힘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꿈과 꿈 사이의 경계마저 걸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숨겨야 했다. 수백 년 전. 한 황제가 트리비아의 능력을 탐냈다. 처음에는 황실을 위해 힘을 사용하라고 요구했다. 트리비아가 거절하자. 소문이 퍼졌다. 트리비아는 사람의 정신을 지배한다. 황제조차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다.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 근거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가 두려워한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 트리비아 사람들은 끌려갔다. 고문당했고. 죽었다. 가문의 어린아이들까지 목숨을 위협받았다. 뒤늦게 진실이 밝혀지고 황실에서 공식적인 사죄가 내려왔지만. 이미 너무 많은 피가 흐른 뒤였다. 살아남은 트리비아 사람들은 웃으며 사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는 세상을 믿지 않았다. 더 강해졌다. 더 철저하게 숨었다. 자신들의 힘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다시는 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가문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세이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섯 살에는 자신의 꿈에서 빠져나오는 법을 배웠다. 일곱 살에는 타인의 꿈에 들어갔다 돌아오는 법을 익혔다. 열 살에는 악몽을 부수는 법을. 그 이후에는 꿈 안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시간의 흐름을 바꾸고. 수많은 꿈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십수 년. 어느 순간부터 세이아에게 꿈은 두려운 장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보다 자유로운 곳이었다. 현실의 세이아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트리비아 백작가의 장녀. 가문의 비밀을 지켜야 하는 후계자.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능력자. 하지만 꿈에서는.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밤에서. 또 다른 사람의 밤으로. 꿈과 꿈 사이를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오래된 트리비아의 기록에는. 그렇게 꿈의 경계를 걸을 수 있는 자를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었다. 꿈의 여행자. 세이아는 그 이름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영애도. 후계자도 아닌. 그저. 꿈과 꿈 사이를 걷는 사람. 그것이 가장 자신다운 이름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럼.” 세이아가 허공으로 손을 내밀었다. “오늘의 여행을 시작해 볼까.” 팅. 작은 빛 하나가 떠올랐다. 이어. 팅. 팅. 팅. 수십 개. 수백 개. 어느새 셀 수조차 없이 많은 빛의 구체가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마치 하늘에 있던 별들이 세이아의 손이 닿는 곳까지 내려온 것 같았다. 하지만. 별이 아니었다. 잠든 사람들의 꿈. 한 사람당 하나씩 만들어지는 꿈의 결정체. 세이아는 시계탑 난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허공으로 발을 내디뎠다. 툭. 떨어지지 않았다. 발끝 아래로 보랏빛 파문이 번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세이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늘을 걸었다. 꿈과 꿈 사이를. 자신의 정원을 산책하는 사람처럼. 구체들은 저마다 다른 색을 품고 있었다. 옅은 푸른빛. 평범한 꿈. 붉은빛. 악몽. 따뜻한 연둣빛. 행복했던 기억. 짙은 보랏빛. 쉽게 놓지 못한 미련. 그리고. 아주 희미한 회색빛. 곧 깨어난 뒤 잊게 될 꿈. 꿈에도 색이 있었다. 사람마다 삶이 다르듯. 꿈 역시 모두 달랐다. 세이아는 가장 가까이에 떠 있는 푸른 구체를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톡. 순간. 장면 하나가 눈앞에 펼쳐졌다. 젊은 남자가 넓은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그보다 조금 앞에서는 어린 시절의 가족들이 웃으며 손짓하고 있었다. “빨리 와!” “형!” 남자가 웃으며 그들을 뒤쫓았다. 조금 쓸쓸하지만. 따뜻한 꿈이었다. 세이아는 말없이 손을 거두었다. 장면이 사라졌다. 다음. 연둣빛 구체. 톡. 이번에는 어린아이가 커다란 용의 등에 올라타 있었다. “더 높이!” 용이 구름을 뚫고 솟구쳤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세이아가 피식 웃었다. “귀엽네.” 이런 평범한 꿈을 보는 것도 좋아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장면일지 몰라도. 그 사람의 마음 한구석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하고 싶었던 것. 그리운 것. 두려운 것. 잊고 싶은 것. 꿈은 생각보다 솔직했다. 그래서 세이아는 가끔 사람보다 꿈을 보는 것을 더 좋아했다. 꿈은 적어도.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세이아의 걸음이 멈췄다. “……?” 향기가 났다. 꽃향기 같았다. 아니. 조금 달랐다. 꿀처럼 달콤하면서도 새벽 이슬처럼 맑았다. 그리고 그 안에. 아주 희미하게. 차가운 겨울 숲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세이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향기?” 이상했다. 꿈 안이라면 모를까. 꿈과 꿈 사이의 경계에서는 원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분명했다. 세이아는 눈을 감았다. 향기가 흘러오는 방향을 찾았다. 저쪽.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수백 개의 꿈 사이를 지나갔다. 그런데. 갈수록 이상했다. 주변의 꿈이 하나둘 줄어들었다. 마치. 다른 꿈들이 무언가를 피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세이아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조금씩 사라졌다. 본능이 경고했다. 이상하다. 그만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감각이 그녀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조금만 더. 이쪽으로. 그리고. 쿵. 세이아의 발이 멈췄다. “…뭐야?” 심장 소리였다. 쿵. 또 한 번. 자신의 심장이 아니었다. 아주 멀리. 꿈들의 끝에서. 누군가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느리고. 지쳐 있고. 이상할 정도로 외로운 박동. 그런데. 쿵. 세이아의 심장이. 그 뒤를 따라 뛰었다. 세이아가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왜.” 다시. 저쪽에서. 쿵. 세이아의 가슴도. 쿵. 같은 박자. 마치. 서로를 확인하는 것처럼. 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 “이건 또 뭐야.” 꿈과 현실을 오랫동안 오간 그녀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세이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발견했다. “…저건.” 다른 꿈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빛. 구체라고 부르기에도 어려웠다. 은빛과 금빛이 뒤섞인 빛무리가 구름처럼 몽글몽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후우— 부풀어 올랐다가. 스르륵. 다시 가라앉았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세이아는 그 앞에서 완전히 멈춰 섰다. 평범한 꿈이 아니다. 그건.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꿈을 보았다. 악몽도. 예지에 가까운 꿈도. 죽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꿈도. 기억을 집어삼키는 위험한 꿈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처음이었다. 꿈 하나라기보다는. 하나의 세계 같았다. 세이아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꿈의 여행자에게도 지켜야 할 규칙은 있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꿈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경계가 보이지 않는 꿈은 건드리지 않는다. 그리고. 꿈이 먼저 여행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면. 절대 가까이 가지 않는다. 세이아는 빛을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호기심이 아무리 많아도.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 ‘세이아.’ “…!” 몸이 굳었다. 세이아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빛은 그대로였다. “누구야?” 대답은 없었다. 그녀의 보랏빛 눈이 가늘어졌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침묵. 세이아는 잠시 빛을 바라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대답 안 하면 갑니다.” 그 순간. 쿵. 거대한 꿈 안쪽에서. 또다시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지 마.’ 세이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뭐?” ‘제발.’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세이아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마치. 이 말을 오래전에도 들어 본 것처럼. “…당신 누구야?”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대신. 달콤한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차가운 겨울 숲. 막 내린 눈. 그리고. 흰 꽃. 세이아의 눈앞에. 순간적으로 장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새하얀 꽃밭. 무너지는 기둥. 피. 은빛 머리카락. 누군가. 자신을 품에 안고 있었다. “…!” 장면은 너무 빠르게 사라졌다. 세이아가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뭐였지? 자신의 기억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꿈의 주인이 보고 있는 장면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했다. 세이아는 거대한 빛을 바라보았다. 돌아가야 했다. 정말로. 그런데. 왜. 저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지? 왜. 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지 않고 돌아서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세이아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정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는 있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본능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이성도 같은 말을 했다. 그런데. 호기심은 언제나. 세이아의 가장 큰 장점이자 가장 큰 문제였다. 한 걸음. 세이아가 빛을 향해 다가갔다. “좋아.” 또 한 걸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거대한 빛 바로 앞에 섰다. “얼굴 정도는 보고 가야겠어.”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빛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톡. 닿았다. 잠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응?” 세이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 순간. 스르륵. 빛의 표면이 물처럼 일렁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푹! 새하얀 손 하나가 안쪽에서 튀어나왔다. “…!” 커다란 남자의 손. 그 손이. 세이아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차가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익숙했다. 세이아가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놓—”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확! 손이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잠깐!” 발밑이 사라졌다. 세상이 뒤집혔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너졌다. 수천 개의 꿈이 소용돌이치며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푸른 꿈. 붉은 악몽. 누군가의 웃음. 울음. 기억. 절규. 빛. 어둠. 모든 것이 한꺼번에 뒤섞였다. 세이아의 몸이 끝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이건……!”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꿈의 길을 찾아야 했다. 주인의 의식을 확인하고. 경계를 찾아. 출구를— “…없어?” 세이아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길도. 출구도. 꿈의 경계도. 처음이었다. 세이아가. 남의 꿈에서 길을 찾지 못한 것은. 그녀는 꿈의 여행자였다. 남의 꿈에서 길을 찾는 일은. 숨을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여긴 어디야……?” 그 순간. 추락이 멈췄다. 사뿐. 발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풀. 세이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꽃밭이 있었다. “….” 세이아의 숨이 멎었다. 하늘에 닿을 듯 솟아 있는 흰 기둥. 멀리. 절반쯤 무너진 거대한 신전. 그리고. 꽃밭을 가득 채운. 이름 모를 흰 꽃. “방금.” 세이아가 낮게 중얼거렸다. 봤다. 꿈에 들어오기 직전. 순간적으로 보았던 장면과 똑같았다. 그때. 꽃밭 끝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세이아가 고개를 들었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 새하얀 옷. 큰 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희미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세이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푸른 눈. 한겨울의 호수처럼 서늘한 눈동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분명. 처음이어야 했다. 그런데. 쿵. 심장이 크게 뛰었다. 왜. 알고 있는 것 같지? 남자의 푸른 눈이. 세이아를 발견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감정이 그 안을 스쳐 지나갔다. 놀람. 안도. 그리움. 그리고. 너무 오래 참아 온 사람에게서만 보일 법한. 깊은 슬픔. 세이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자의 입술이 움직였다. “세이아.” “…!” 분명하게. 자신의 이름이었다. 세이아의 얼굴이 굳었다. “당신.” 한 걸음.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누구예요?” 남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세이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정말로 자신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그러다. 아주 천천히. 웃었다. 차가워 보이던 얼굴이. 그 미소 하나로 완전히 달라졌다. 세이아는. 이유도 모른 채 가슴이 아팠다.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세이아가 다시 물러났다. 그 순간. 그는 멈췄다. 더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까.” 세이아는. 내밀어진 손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 이름을.”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압니까?” 남자의 눈이 흔들렸다. “기억하지 못하는군.” “무엇을요?” “….” “저를 압니까?” 긴 침묵. 남자가.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과거형. 세이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뜻이죠?” 그의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너는.” 남자가 말했다. “나를 알고 있었어.” 세이아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래.” 남자는 이상할 만큼 순순히 인정했다. “지금의 너에게는.” “말이 안 되겠지.” “그럼 설명하세요.” “아직.” “아직?” 그가 세이아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나도 확신할 수 없어.” 세이아는. 그 대답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한 가지는.” 남자가 말했다. 세이아가 멈췄다. 그의 푸른 눈이. 조금씩 젖어 들었다. “확실해.” “뭡니까?” 남자의 입술 끝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세이아의 심장이 뛰었다. 쿵. “다시 만났군.” “…다시?”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콰아아앙——! 멀리. 무너진 신전에서 거대한 굉음이 터졌다. 세이아가 고개를 돌렸다. 신전의 흰 기둥 하나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 한가운데. 쩌저적——. 검은 균열이 생겼다. 남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안 돼.” “뭐가요?” 균열이 조금씩 벌어졌다. 그 틈에서. 검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흰 꽃들이. 한 송이씩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남자가 세이아를 향해 달려왔다. “세이아!” “잠깐—!” 그가 세이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몸이 단단한 품 안으로 끌려갔다. “뭐 하는—” 세이아의 말이 멈췄다. 향기가 났다. 차가운 겨울 숲. 막 내린 눈. 그리고. 흰 꽃. 자신을 이곳까지 이끌었던 바로 그 향기. 이 사람이었다. 세이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남자의 심장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쿵. 쿵. 쿵. 그리고. 세이아의 심장도. 같은 박자로 뛰었다. 쿵. 쿵. 쿵. “….” 이상했다. 처음 안겨 보는 품이었다. 분명 그래야 했다. 그런데. 왜. 너무 익숙하지? 왜. 이렇게 편안하지? 남자의 손이. 세이아의 뒷머리를 감쌌다. “눈을 감아.” “…뭐라고요?” 낮은 목소리. 순간. 세이아의 머릿속에. 아주 짧은 장면 하나가 번쩍였다. 무너진 신전. 피. 자신을 품에 안은 은발의 남자. 그리고. 같은 목소리. ‘눈을 감아.’ 세이아의 숨이 멎었다. “당신…….” 남자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는.” 푸른 눈이. 세이아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간절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내가 널 지킬 테니까.” 콰아아아아아앙——! 세상이 무너졌다. 검은 균열에서 터져 나온 빛이. 꽃밭 전체를 삼켰다. 세이아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끌어안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의식이 끊겼다. ⸻ 그날 밤. 수많은 사람의 꿈을 자유롭게 걸어 다니던 세이아 룬 트리비아는. 처음으로. 자신을 알고 있는 꿈을 만났다. 그 꿈의 주인이 누구인지. 왜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 왜 처음 보는 남자의 품이 그토록 익숙했는지. 왜 그의 심장과 자신의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었는지. 세이아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남자 역시 알지 못했다. 자신이 열다섯 해 동안 반복해서 보아 온 꿈속의 여인이. 그날 처음으로. 자신의 꿈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다만. 오랫동안 닫혀 있던 어떤 문이. 두 사람의 만남을 기다렸다는 듯. 아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꿈의 여행자의. 가장 길고 위험한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전.세이아는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차가운 밤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벨로아의 밤은 유난히 고요했다.평소라면 늦은 시간까지 여관에서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상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야 할 마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무 소리도 없었다.사람들은 모두 문을 잠근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검은 장막이 드리운 북쪽 하늘에서는 달빛조차 내려오지 않았다.마을 전체가 거대한 그림자 아래 갇힌 것 같았다.세이아는 침대 위에 이불을 둥글게 말아 올렸다.누군가 밖에서 보면 사람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뒤 여행용 망토를 걸쳤다.허리에는 작은 단검을 찼다.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무기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아무것도 들지 않고 적이 부른 장소로 향하는 것보다는 나았다.세이아는 마지막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카일이 문밖에 서 있었다.그가 떠나는 발소리도 들었다.그런데 이상했다.카일은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었다.특히 세이아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했다면 더욱 그랬다.‘아직 복도에 있는 건 아니겠지.’세이아는 조용히 기척을 살폈다.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기사들의 발소리도.카일 특유의 묵직한 마력도 없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창틀 위로 올라섰다.방은 여관 이층이었다.바닥까지 거리는 높지 않았다.세이아가 손끝을 움직이자 보랏빛 마력이 창 아래로 길게 늘어났다.빛은 투명한 계단이 되어 허공에 떠올랐다.세이아는 소리 없이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발이 땅에 닿는 순간 계단은 빛가루가 되어 사라졌다.망토의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북쪽의 버려진 종탑.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위치를 알 수 있었다.멀리 검은 장막 아래로 오래된 탑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탑 위에는 금이 간 종이 매달려 있었다.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종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세이아는 마을의 좁은 골목을 따라 걸었다.집집마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가끔 커튼 틈 사이로 사람의 눈이 보였다.그러나
“적어도 질투는.” 카일의 손이 세이아의 뺨을 감쌌다. 거칠게 검을 잡아 온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옅은 굳은살이 박여 있었는데, 정작 그녀의 피부에 닿는 손길은 지나칠 만큼 조심스러웠다. “온전히 내 감정인 것 같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세이아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카일의 엄지가 뺨 아래를 느리게 스쳤다. 턱선. 그리고 입술에서 손가락 하나 떨어진 곳까지. 그 짧은 움직임만으로도 이상하게 숨이 얕아졌다. “…전하.” “왜.”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세이아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왜 손은 안 떼십니까?” 카일의 시선이 자신이 만지고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떼야 하나?”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보통이 아닌 모양이군.” “그건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세이아가 웃었다. 그러나 카일은 웃지 않았다. 푸른 눈이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눈. 코. 그리고. 입술. 그곳에서 시선이 아주 잠깐 멈췄다. 세이아는 이제 그 시선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또 보시네요.” “뭘.” “제 입술.” 카일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예전이라면 부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래.” 너무 쉽게 인정했다. 세이아가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왜.” 카일이 물었다. “보면 안 되나?” “…안 된다고는 안 했습니다.” “그럼 됐군.” 그의 손이 뺨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세이아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데. 막상 손길이 떨어지고 나니. 조금 아쉬웠다. 그 사실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공 전하.” “왜.” “꿈에서 돌아오고 난 뒤로 조금 뻔뻔해지신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르겠군.” “설마 저라고 하시려고요?” “당신 말고 누가 있지?” 세이아가 피식 웃었다. “배우는 속도가 너무 빠른데요.” “좋은 스승을 만났으니까.” 세이아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 “수업료는 비쌉니다.” “내겠다고 했잖아.” “무엇으로요?”
마차 유리창에 붙어 있던 검은 깃털이.사락.천천히 재로 변했다.기다리고 있습니다.핏빛으로 번졌던 글씨도 뒤따라 흐려졌다.두 번째 날개가.마지막 한 획까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세이아와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덜컹.마차가 어두운 길을 달렸다.밤은 깊었고.수도를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는 사람 사는 불빛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오직 마차 앞에 매달린 마도등만이 희미한 빛을 뿌렸다.세이아는 창문에서 천천히 시선을 거뒀다.그리고.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카일이 아직 잡고 있었다.조금 전.‘누구도 먼저 보내지 않는다.’그렇게 약속하며 맞잡은 손.은빛 날개 문양은 이미 희미해졌지만.체온은 그대로였다.세이아가 손가락을 조금 움직였다.카일의 시선이 바로 내려왔다.“왜.”“아직 잡고 계셔서요.”“놓으라고 했나?”“아니요.”“그럼.”카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그대로 있지.”세이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대공 전하.”“왜.”“꿈에서 돌아오고 나서 조금 달라지신 것 같은데요.”“뭐가.”“예전 같으면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순간 먼저 놓으셨을 것 같아서요.”카일의 엄지가.자신도 모르게 세이아의 손등을 한 번 쓸었다.그리고.움직임이 멈췄다.두 사람 모두 그것을 느꼈다.“….”“….”세이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이것도 기억 때문입니까?”카일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모른다.”“정말요?”“그래.”“아까부터 전하께서는 모르는 게 너무 많으시네요.”“당신은 다 아나?”“적어도.”세이아가 그의 손을 조금 들어 보였다.“제가 잡고 싶은 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죠.”카일의 눈빛이 미세하게 변했다.세이아는 그 반응을 보고 웃었다.“왜요?”“아니.”“또요?”“당신이.”그가 잠시 말을 골랐다.“생각보다 거리낌이 없군.”“전하한테만 그런 것 같습니다.”카일의 손에.아주 조금 힘이 들어갔다.세이아가 눈을 깜빡였다.“전하?”“그런 말.”낮은 목소리였다.“쉽게 하
“꿈의 주인이 오고 있다.”마흔세 명.잠들어 있던 북부 병사들이 동시에 눈을 뜨고.같은 말을 했다.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검게 물들어 있었다.에드윈이 전령이 가져온 서신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침실 안에는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세이아는 카일의 손등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은빛으로 빛나던 날개 문양 아래.검은 깃털 하나가 떠 있었다.작았다.그러나.불길할 정도로 선명했다.“아버지.”“보고 있다.”에드윈이 가까이 다가왔다.“대공 전하.”“말씀하십시오.”“손을 조금만.”카일이 손을 내밀었다.에드윈이 마력을 흘려보냈다.보랏빛 빛이 검은 깃털을 감쌌다.순간.치이익——!“……!”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에드윈이 급히 손을 뗐다.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반응했어요.”“그래.”“아버지 마력에?”“아니다.”에드윈의 시선이 세이아에게 향했다.“네게.”“…저한테요?”“내 마력이 이 문양을 건드리는 순간.”그가 낮게 말했다.“안쪽의 힘이 네 쪽으로 움직였어.”세이아는 잠시 카일의 손을 바라보았다.그러다.손을 뻗었다.“잠깐.”카일이 즉시 손을 뒤로 뺐다.세이아가 눈썹을 올렸다.“왜요?”“위험할 수 있다.”“그래서 만져 보려는 겁니다.”“말이 앞뒤가 안 맞는군.”“전하께서 위험하다고 피하기 시작하면 오늘 해 뜨기 전에 북부는 못 갑니다.”“세이아.”“그리고.”그녀가 손바닥을 내밀었다.“아까도 말씀드렸죠.”“뭘.”“전하 혼자 지키는 건 금지라고요.”카일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그건 아직 설명하지 않았지.”“지금부터 설명하면 되겠네요.”“나는 설명보다 네가 손을 거두는 쪽이 좋다.”세이아가 피식 웃었다.“싫은데요.”그리고.이번에는 묻지 않았다.카일의 손목을 잡았다.“세이아.”그 순간.쿵.두 사람의 심장이 동시에 뛰었다.검은 깃털이 번쩍였다.파아아앗——!“……!”세이아의 시야가 뒤집혔다.⸻사아아아—은빛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세이아가 눈을 떴다.“…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군.』검은 존재의 목소리가 꽃밭 전체에 스며들었다.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무엇을.”검은 안개 속.여섯 장의 날개가 천천히 펼쳐졌다.검게 썩은 깃털 사이로 황금빛 눈동자들이 하나둘 떠올랐다.하나.둘.셋.기분 나쁠 정도로 많은 눈이.모두 세이아를 향했다.『당신이.』낮은 웃음.『첫 번째 날개를 직접 죽였다는 것을.』순간.바람이 멎었다.세이아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꽃잎이 떨어지는 소리도.하늘이 갈라지는 소리도.바로 옆에 서 있는 카일의 숨소리조차.오직.한 문장만이 머릿속에 남았다.내가.첫 번째 날개를.죽였다.“…뭐라고?”세이아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검은 존재가 웃었다.『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군.』“헛소리하지 마.”이번에는 카일이었다.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은빛 검끝이 검은 존재를 향했다.『첫 번째 날개.』“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카일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내 이름은 카일이다.”검은 존재의 고개가 기이하게 꺾였다.『이름.』킥킥.금속 긁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역할보다 이름을 먼저 말하는군.』“그래서?”『이번에는 꽤 다른 모양이야.』카일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검을 들었다.그 순간 세이아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잠깐만요.”카일이 돌아봤다.세이아는 검은 존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방금 말.”그녀가 천천히 물었다.“무슨 뜻이지?”『어느 부분을 묻는 거지?』“내가.”세이아의 손끝이 조금 굳었다.“첫 번째 날개를 죽였다는 말.”카일의 표정이 굳었다.“세이아.”“확인해야 합니다.”“저것이 진실을 말한다고 누가 보장하지?”“아무도요.”세이아가 대답했다.“그래도 듣기는 해야죠.”검은 존재가 즐거운 듯 웃었다.『역시.』“뭐가?”『그 눈은 같군.』세이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누구랑.”『과거의 당신과.』순간.머릿속에.장면 하나가 번쩍였다.피로 물든 손.은빛 검
『찾았다.』낮고 기이한 목소리가 울렸다.그 순간.수정함 안에서 피어난 새하얀 꽃이 크게 흔들렸다.사락.은빛 꽃잎 사이로 금빛이 번졌다.세이아와 카일은 동시에 굳었다.방금 들린 목소리는.에드윈의 것도.카일의 것도.물론 세이아의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분명.바로 곁에서 속삭인 것처럼 선명했다.『찾았다.』다시.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세이아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아버지.”“나도 들었다.”에드윈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세이아의 손은 아직 카일의 손 안에 있었다.조금 전까지 하나로 이어져 있던 은빛 날개 문양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그리고.쿵.두 사람의 심장이 동시에 뛰었다.세이아가 눈을 내리깔았다.맞잡힌 손.커다란 카일의 손 안에 자신의 손이 완전히 들어가 있었다.이제는 놓아도 될 텐데.이상하게.둘 다 먼저 손을 떼지 않았다.“대공 전하.”“왜.”“언제까지 잡고 계실 겁니까?”카일의 시선이 두 사람의 손으로 내려갔다.“네가 먼저 놓지 않았는데.”“전하께서 먼저 잡으셨잖아요.”“네가 가까이 대라고 했다.”“아버지가 그랬죠.”“결국 네 손이다.”세이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원래 이렇게 말이 많으셨습니까?”“당신 앞에서는 그런 모양이군.”세이아가 잠시 말을 잃었다.너무 아무렇지 않게 나온 대답이었다.카일도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에드윈이 낮게 헛기침했다.“내가.”두 사람이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여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면 좋겠군.”세이아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을 뺐다.“잊은 적 없어요.”“그래 보이지 않았다.”카일도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나.세이아의 손끝에는 아직도 그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이상했다.평소라면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잡거나 허리에 팔을 두르는 순간부터 먼저 경계했을 것이다.그런데 카일에게는.놀라기는 해도.싫다는 생각이 늦게 들었다.아니.정확히는.싫지 않았다.그 사실이 더 문제였다.세이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