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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가져온 꽃

Author: 유월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8-21 07:17:52

“눈을 감아.”

낮은 목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렸다.

“이번에는 내가 널 지킬 테니까.”

콰아아아앙——!

세상이 무너졌다.

흰 꽃밭이 흔들리고.

멀리 있던 신전의 기둥이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검은 균열이 하늘을 가르며 벌어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자신을 끌어안은 남자의 체온.

단단한 팔.

귀 가까이에서 울리는 심장 소리.

쿵.

쿵.

쿵.

세이아의 심장도.

같은 박자로 뛰었다.

쿵.

쿵.

쿵.

‘이상해.’

처음 보는 사람이다.

분명.

처음이어야 했다.

그런데.

왜 이 품이 이렇게 익숙하지?

왜.

이 사람이 자신을 놓치면 안 될 것처럼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낯설지 않은 거지?

세이아는 남자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

한겨울의 호수처럼 차갑고 깊은 눈동자.

그런데 지금은.

차가움보다 두려움이 더 짙었다.

마치.

한 번 잃어 본 사람을.

다시는 잃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당신…….”

세이아가 입을 열었다.

“누구예요?”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대답을 듣기 전에.

콰아아아아——!

검은 빛이 쏟아졌다.

남자가 세이아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

“세이아.”

낮고 다급한 목소리.

“눈 감아.”

세이아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무언가가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다.

가볍고.

부드러운 감촉.

꽃잎.

그것을 확인할 틈도 없이.

의식이 끊어졌다.

“……!”

세이아는 눈을 번쩍 떴다.

헉.

숨이 거칠게 터져 나왔다.

익숙한 천장.

연한 크림색의 벽지.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

그리고.

자신의 침실.

한동안.

세이아는 침대 위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가슴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쿵쿵쿵쿵.

그녀는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꿈.”

분명 꿈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랐다.

지나치게 선명했다.

감각도.

향기도.

목소리도.

특히.

자신을 끌어안았던 남자의 체온까지.

세이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기억을 더듬었다.

은빛 머리카락.

푸른 눈.

새하얀 꽃밭.

무너진 신전.

검은 균열.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던 남자.

“드디어.”

세이아가 작게 따라 말했다.

“다시 만났군.”

다시.

그 단어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대체 언제 봤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귀족 사교계에서도.

황궁에서도.

북부나 남부의 귀족 명단에서도.

기억에 없는 사람.

물론 세이아가 모든 귀족 얼굴을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정도로 눈에 띄는 남자를 봤다면.

적어도 한 번쯤 기억했을 것이다.

은발.

푸른 눈.

그렇게 흔한 조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 얼굴.

“…….”

세이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잘생겼다.

굉장히.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세이아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정신 차리자.”

그녀는 꿈의 여행자였다.

수없이 많은 사람의 꿈을 보았다.

꿈속에서는 얼굴이 현실보다 과장되거나.

기억에 없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남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세이아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왼손.

손가락이 조금 말려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꼭 쥐고 있는 것처럼.

“…?”

그녀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펼쳤다.

사락.

하얀 꽃잎 하나가.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세이아의 몸이 굳었다.

“…….”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얀 꽃잎.

손톱보다 조금 큰.

가늘고 부드러운 꽃잎.

아주 희미하게.

꿈속에서 맡았던 꽃향기가 남아 있었다.

세이아는 한동안 꽃잎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손끝으로 그것을 건드렸다.

부드러웠다.

실제 꽃잎.

꿈의 잔재가 아니다.

마력으로 만든 환영도 아니었다.

“…말도 안 돼.”

세이아가 중얼거렸다.

꿈속의 물건은 현실로 나올 수 없다.

꿈은.

현실의 기억과 감정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그 안의 물건까지 현실로 가져올 수는 없다.

적어도.

세이아가 알고 있는 꿈은 그랬다.

그녀는 꽃잎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 마력을 끌어올렸다.

보랏빛 빛이 손끝에 맺혔다.

꿈의 잔재를 확인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

“흔적을 보여 줘.”

빛이 꽃잎을 감쌌다.

잠시.

아무 변화도 없었다.

세이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상한데.”

한 번 더.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마력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꽃잎 표면 위로 아주 희미한 은빛이 번졌다.

“…은빛?”

세이아의 보랏빛 마력과는 전혀 다른 색.

그런데.

은빛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안쪽.

아주 미세하게.

금빛이 섞여 있었다.

은빛과 금빛.

꿈속에서 자신을 끌어당겼던 거대한 빛과 똑같았다.

세이아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너.”

꽃잎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대체 뭐야.”

당연히.

꽃잎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익숙한 목소리.

세이아가 급히 꽃잎을 손안에 감췄다.

“들어와.”

문이 열렸다.

전속 시녀 마리가 세면 도구와 아침옷을 들고 들어왔다.

“일어나셨군요.”

“응.”

“오늘은 생각보다 늦게 일어나셨어요.”

세이아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이미 꽤 높이 떠 있었다.

“몇 시야?”

“아홉 시를 조금 넘었습니다.”

“…….”

평소보다 두 시간은 늦었다.

세이아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내가 그렇게 오래 잤어?”

마리가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주무신 건 새벽이었잖아요.”

“새벽?”

“네.”

“내가?”

“새벽 다섯 시쯤 돌아오셨잖아요.”

세이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돌아와?”

“시계탑에서요.”

“…….”

아.

맞다.

세이아는 새벽까지 수도의 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꿈을 발견했다.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갔고.

그 뒤.

어떻게 현실로 돌아왔지?

기억이 없었다.

“아가씨?”

마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

세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손안에 감춘 꽃잎이.

이상할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다.

“꿈이 좀 이상했어.”

“또 남의 꿈에 들어가셨어요?”

마리의 얼굴에 바로 걱정이 떠올랐다.

세이아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라니.”

“지난번에 꿈속에서 길 잃은 아이 데리고 나오다가 하루 종일 주무셨잖아요.”

“그건.”

세이아는 잠시 생각했다.

“사고였지.”

“아가씨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세요.”

“이번에는 진짜야.”

마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님께 말씀드릴까요?”

“안 돼.”

너무 빠른 대답이었다.

마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세이아는 자연스럽게 웃었다.

“아버지 괜히 걱정하시잖아.”

“걱정하실 만한 일을 안 하시면 됩니다.”

“마리.”

“네.”

“너 요즘 아버지랑 말투가 닮아 간다?”

마리가 미소 지었다.

“영광이네요.”

“…이 집에는 내 편이 없어.”

“백작 부인께서는 편이실 수도 있죠.”

“어머니한테 말하면 바로 귀걸이 세 개 더 달아 주실걸.”

“그럼 얌전해지시겠네요.”

세이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아주 작게 입술을 내밀었다.

마리가 웃음을 참으며 옷장을 열었다.

“아침 식사 준비되어 있어요.”

“아버지도?”

“네. 오늘은 오전 회의가 늦어져서 아직 계세요.”

“어머니는?”

“함께 계십니다.”

세이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라면 반가웠을 텐데.

오늘은.

왠지 아버지 얼굴을 보면.

꿈 이야기를 들킬 것 같았다.

“안 내려가면?”

마리가 즉시 대답했다.

“백작님이 올라오십니다.”

“…역시 내려가자.”

아침 식당.

은빛 식기가 정갈하게 놓인 긴 식탁.

따뜻한 빵.

버섯 수프.

달걀 요리.

잘 익은 과일.

그리고.

맞은편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남자.

세이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빵을 집었다.

“…왜.”

에드윈 룬 트리비아.

트리비아 백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세이아.”

“응.”

“오늘 새벽.”

세이아의 손이 빵 위에서 멈췄다.

“…응.”

“수도 경비대에서 이상한 보고가 올라왔다.”

세이아가 빵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무슨 보고?”

“성벽 경비병 열일곱 명이.”

에드윈이 천천히 말했다.

“정확히 같은 시각에 잠들었다더군.”

“…그런 일이?”

“황궁 관리들 열두 명도.”

“세상에.”

“새벽 시장의 상인들까지.”

“피곤했나 봐.”

에드윈은.

아무 말 없이 딸을 바라보았다.

세이아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시선을 받아냈다.

잠시.

식탁 위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옆에 앉아 차를 마시던 세이아의 어머니가 작게 웃었다.

“여보.”

“왜?”

“그렇게 보면 세이아가 먼저 눈을 피할 것 같아요?”

에드윈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렇죠?”

“그래서 더 답답한 거요.”

세이아가 빵에 잼을 바르며 말했다.

“왜 나라고 생각해?”

“내가.”

에드윈이 말했다.

“너를 키운 지 스물세 해다.”

“나는 스물세 살인데?”

“그러니까.”

에드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스물세 해 동안 네가 사고를 치기 직전의 표정과.”

“사고를 친 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표정을 봐 왔다는 뜻이다.”

세이아는 잠시 생각했다.

“지금은 어느 쪽인데?”

“후자.”

“정확하네.”

에드윈이 이마를 짚었다.

“세이아.”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세이아도 따라 웃으려던 순간.

손안에 숨겨 둔 꽃잎이.

아주 희미하게.

쿵.

뛰었다.

“…!”

세이아의 얼굴이 굳었다.

착각인가?

꽃잎이 어떻게 뛴다고.

그러나.

다시.

쿵.

손바닥 안에서.

심장처럼.

아주 작게.

세이아는 본능적으로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어머니가 그녀를 바라봤다.

“세이아?”

“응?”

“괜찮니?”

“왜?”

“표정이.”

“아.”

세이아는 웃었다.

“배가 조금 아픈가 봐.”

에드윈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어디가?”

“…아버지.”

“치유사를 부르지.”

“아니.”

“마리!”

“아버지.”

세이아가 단호하게 불렀다.

에드윈의 입이 닫혔다.

“그 정도 아니야.”

“확실하니?”

“응.”

“왜 아프지?”

“빵을 빨리 먹었나 봐.”

어머니가 조용히 물었다.

“아직 한 입도 안 먹었는데?”

“….”

세이아가 빵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었다.

에드윈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무슨 일 있지?”

역시.

이 집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세이아는 잠시 고민했다.

꽃잎을 보여 줄까.

아니면.

조금 더 혼자 확인할까.

그때.

손바닥 안의 박동이 멈췄다.

세이아는.

천천히 손가락을 쥐었다.

“아버지.”

“말해.”

“나중에.”

에드윈의 얼굴이 굳었다.

“세이아.”

“정리되면 말할게.”

“무슨.”

“약속해.”

세이아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위험한 일이면 바로 말할게.”

에드윈은.

오랫동안 딸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지못해 숨을 내쉬었다.

“오늘 안으로.”

“응.”

“밤까지 미루지 말고.”

“알았어.”

어머니도 덧붙였다.

“우리한테 혼날 것 같아서 숨기는 거면 더 혼날 거야.”

세이아가 웃었다.

“어머니까지.”

“특히 내가.”

“…알았어.”

평범한 가족의 대화.

그런데도.

세이아는 이상하게 안심됐다.

꿈에서 느꼈던 그 낯선 감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식사를 마친 뒤.

세이아는 자신의 방이 아니라.

가문의 서고로 향했다.

트리비아 저택의 서고는.

일반 귀족가의 도서실과는 조금 달랐다.

겉으로 보이는 책장은 평범했다.

역사서.

마법서.

가문 기록.

그러나.

가장 안쪽.

백작가 직계혈족의 마력에만 반응하는 작은 문 뒤에는.

트리비아의 비밀 기록이 보관되어 있었다.

세이아가 손바닥을 문 위에 올렸다.

보랏빛 문양이 나타났다.

달칵.

문이 열렸다.

안쪽.

빛 하나 없는 좁은 공간.

세이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탁.

벽에 달린 마도등이 하나씩 켜졌다.

책장에는.

수백 년 동안 트리비아가 남긴 기록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세이아는 손안의 꽃잎을 꺼냈다.

여전히.

멀쩡했다.

시들지도 않았다.

“꿈의 물건이 현실로 넘어온 사례.”

그녀가 중얼거리자.

보랏빛 마력이 책장 사이로 퍼졌다.

몇 권의 책이 스스로 빠져나왔다.

휙.

휙.

탁.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세이아는 첫 번째 책을 펼쳤다.

《몽계의 이론》

두 번째.

《트리비아 역대 능력자 기록》

세 번째.

《꿈과 현실의 경계》

세이아의 손이 멈췄다.

“이거네.”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사락.

사락.

그러다.

한 구절에서.

손이 멈췄다.

『꿈은 현실을 모방하나 현실이 될 수 없다.』

다음.

『몽계에서 만들어진 것은 몽계의 경계를 넘지 못한다.』

그리고.

『만일 꿈속의 물건이 현실에 남는다면.’

세이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뒤.

글자가 지워져 있었다.

“…뭐야.”

종이가 찢어진 것도 아니었다.

잉크가 번진 것도 아니었다.

문장 자체가.

아예 사라진 것처럼.

공백.

세이아는 마력을 흘려보냈다.

보랏빛 빛이 종이 위를 훑었다.

그 순간.

희미한 글자가 떠올랐다.

『그곳은 꿈이 아니다.’

세이아의 몸이 굳었다.

“…뭐?”

글자가 다시 사라졌다.

세이아는 바로 마력을 더 흘려보냈다.

그러나.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꿈이 아니다?”

그러면.

자신이 들어갔던 곳은 대체 무엇이었지?

그 남자는.

왜 그곳에 있었고?

왜 자신을 알았으며?

왜.

다시 만났다고 했을까.

세이아의 시선이 꽃잎으로 향했다.

은빛.

금빛.

그리고.

자신의 것과는 다른.

아주 오래된 마력.

“아버지에게.”

말해야 하나.

세이아는 잠시 고민했다.

결국.

책을 덮었다.

“그래.”

혼자 확인할 수 있는 선은 넘었다.

이 정도라면.

에드윈에게 보여 주는 게 맞다.

세이아는 꽃잎을 작은 수정함에 넣었다.

그리고.

서고를 나섰다.

에드윈의 집무실 앞.

세이아가 문을 두드리려던 순간이었다.

안쪽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차가운 음성.

“…지난 두 달 동안 마흔세 명이다.”

세이아의 손이 멈췄다.

마흔세 명?

“전부 같은 증상입니까?”

에드윈의 목소리.

“그래.”

“치유사는?”

“육체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마법은?”

“저주도 아니다.”

잠시.

침묵.

그리고.

낯선 남자가 말했다.

“전부.”

낮은 목소리가 조금 더 가라앉았다.

“잠든 채 깨어나지 않는다.”

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

잠든 채.

깨어나지 않는다.

그건.

꿈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이 문을 열었다.

“아버지.”

집무실 안.

에드윈이 고개를 들었다.

“세이아?”

그리고.

창가에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햇빛을 머금은 은빛 머리카락.

한겨울의 호수처럼 서늘한 푸른 눈.

검은 제복.

넓은 어깨.

그리고.

“….”

세이아의 걸음이 멈췄다.

손에서.

수정함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말도 안 돼.

꿈속에서는.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조금 달라 보였다.

분위기도.

지금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하지만.

얼굴은.

분명했다.

그 남자였다.

자신을 끌어안았던 사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던 사람.

“드디어.”

“다시 만났군.”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그대로 되살아났다.

세이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자 역시.

세이아를 보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

푸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시선이.

세이아의 얼굴에서.

귀로 내려갔다.

자수정 귀걸이.

그리고.

다시.

세이아의 눈으로.

잠시.

너무 긴 침묵이 흘렀다.

에드윈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아니.”

남자가 즉시 대답했다.

세이아도.

거의 동시에 말했다.

“처음 봅니다.”

에드윈의 눈썹이 올라갔다.

둘 다.

그렇게 말하면서.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가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한 걸음.

세이아를 향해 다가왔다.

꿈과는 달랐다.

여기는 현실이었다.

꽃밭도.

신전도.

검은 균열도 없다.

그런데.

남자가 가까워질수록.

세이아의 심장이.

꿈속에서와 같은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쿵.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

그도 느낀 듯했다.

그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

세이아의 손안.

수정함 속 꽃잎이.

은빛으로 빛났다.

남자의 손등도.

아주 순간적으로.

희미한 빛을 냈다.

세이아가 숨을 삼켰다.

“당신…….”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왜.”

낮은 목소리.

꿈속에서 듣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분명 같은 목소리였다.

“내 꿈에 있었지?”

세이아의 보랏빛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손안의 수정함에서.

하얀 꽃잎이.

심장처럼.

한 번.

뛰었다.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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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전.세이아는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차가운 밤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벨로아의 밤은 유난히 고요했다.평소라면 늦은 시간까지 여관에서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상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야 할 마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무 소리도 없었다.사람들은 모두 문을 잠근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검은 장막이 드리운 북쪽 하늘에서는 달빛조차 내려오지 않았다.마을 전체가 거대한 그림자 아래 갇힌 것 같았다.세이아는 침대 위에 이불을 둥글게 말아 올렸다.누군가 밖에서 보면 사람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뒤 여행용 망토를 걸쳤다.허리에는 작은 단검을 찼다.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무기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아무것도 들지 않고 적이 부른 장소로 향하는 것보다는 나았다.세이아는 마지막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카일이 문밖에 서 있었다.그가 떠나는 발소리도 들었다.그런데 이상했다.카일은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었다.특히 세이아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했다면 더욱 그랬다.‘아직 복도에 있는 건 아니겠지.’세이아는 조용히 기척을 살폈다.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기사들의 발소리도.카일 특유의 묵직한 마력도 없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창틀 위로 올라섰다.방은 여관 이층이었다.바닥까지 거리는 높지 않았다.세이아가 손끝을 움직이자 보랏빛 마력이 창 아래로 길게 늘어났다.빛은 투명한 계단이 되어 허공에 떠올랐다.세이아는 소리 없이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발이 땅에 닿는 순간 계단은 빛가루가 되어 사라졌다.망토의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북쪽의 버려진 종탑.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위치를 알 수 있었다.멀리 검은 장막 아래로 오래된 탑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탑 위에는 금이 간 종이 매달려 있었다.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종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세이아는 마을의 좁은 골목을 따라 걸었다.집집마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가끔 커튼 틈 사이로 사람의 눈이 보였다.그러나

  • 당신의 밤에 들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날개는 그의 동생이었다

    “적어도 질투는.” 카일의 손이 세이아의 뺨을 감쌌다. 거칠게 검을 잡아 온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옅은 굳은살이 박여 있었는데, 정작 그녀의 피부에 닿는 손길은 지나칠 만큼 조심스러웠다. “온전히 내 감정인 것 같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세이아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카일의 엄지가 뺨 아래를 느리게 스쳤다. 턱선. 그리고 입술에서 손가락 하나 떨어진 곳까지. 그 짧은 움직임만으로도 이상하게 숨이 얕아졌다. “…전하.” “왜.”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세이아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왜 손은 안 떼십니까?” 카일의 시선이 자신이 만지고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떼야 하나?”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보통이 아닌 모양이군.” “그건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세이아가 웃었다. 그러나 카일은 웃지 않았다. 푸른 눈이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눈. 코. 그리고. 입술. 그곳에서 시선이 아주 잠깐 멈췄다. 세이아는 이제 그 시선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또 보시네요.” “뭘.” “제 입술.” 카일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예전이라면 부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래.” 너무 쉽게 인정했다. 세이아가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왜.” 카일이 물었다. “보면 안 되나?” “…안 된다고는 안 했습니다.” “그럼 됐군.” 그의 손이 뺨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세이아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데. 막상 손길이 떨어지고 나니. 조금 아쉬웠다. 그 사실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공 전하.” “왜.” “꿈에서 돌아오고 난 뒤로 조금 뻔뻔해지신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르겠군.” “설마 저라고 하시려고요?” “당신 말고 누가 있지?” 세이아가 피식 웃었다. “배우는 속도가 너무 빠른데요.” “좋은 스승을 만났으니까.” 세이아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 “수업료는 비쌉니다.” “내겠다고 했잖아.” “무엇으로요?”

  • 당신의 밤에 들어가겠습니다   적어도 질투는 내 감정이다

    마차 유리창에 붙어 있던 검은 깃털이.사락.천천히 재로 변했다.기다리고 있습니다.핏빛으로 번졌던 글씨도 뒤따라 흐려졌다.두 번째 날개가.마지막 한 획까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세이아와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덜컹.마차가 어두운 길을 달렸다.밤은 깊었고.수도를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는 사람 사는 불빛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오직 마차 앞에 매달린 마도등만이 희미한 빛을 뿌렸다.세이아는 창문에서 천천히 시선을 거뒀다.그리고.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카일이 아직 잡고 있었다.조금 전.‘누구도 먼저 보내지 않는다.’그렇게 약속하며 맞잡은 손.은빛 날개 문양은 이미 희미해졌지만.체온은 그대로였다.세이아가 손가락을 조금 움직였다.카일의 시선이 바로 내려왔다.“왜.”“아직 잡고 계셔서요.”“놓으라고 했나?”“아니요.”“그럼.”카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그대로 있지.”세이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대공 전하.”“왜.”“꿈에서 돌아오고 나서 조금 달라지신 것 같은데요.”“뭐가.”“예전 같으면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순간 먼저 놓으셨을 것 같아서요.”카일의 엄지가.자신도 모르게 세이아의 손등을 한 번 쓸었다.그리고.움직임이 멈췄다.두 사람 모두 그것을 느꼈다.“….”“….”세이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이것도 기억 때문입니까?”카일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모른다.”“정말요?”“그래.”“아까부터 전하께서는 모르는 게 너무 많으시네요.”“당신은 다 아나?”“적어도.”세이아가 그의 손을 조금 들어 보였다.“제가 잡고 싶은 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죠.”카일의 눈빛이 미세하게 변했다.세이아는 그 반응을 보고 웃었다.“왜요?”“아니.”“또요?”“당신이.”그가 잠시 말을 골랐다.“생각보다 거리낌이 없군.”“전하한테만 그런 것 같습니다.”카일의 손에.아주 조금 힘이 들어갔다.세이아가 눈을 깜빡였다.“전하?”“그런 말.”낮은 목소리였다.“쉽게 하

  • 당신의 밤에 들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날개가 기다리는 곳

    “꿈의 주인이 오고 있다.”마흔세 명.잠들어 있던 북부 병사들이 동시에 눈을 뜨고.같은 말을 했다.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검게 물들어 있었다.에드윈이 전령이 가져온 서신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침실 안에는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세이아는 카일의 손등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은빛으로 빛나던 날개 문양 아래.검은 깃털 하나가 떠 있었다.작았다.그러나.불길할 정도로 선명했다.“아버지.”“보고 있다.”에드윈이 가까이 다가왔다.“대공 전하.”“말씀하십시오.”“손을 조금만.”카일이 손을 내밀었다.에드윈이 마력을 흘려보냈다.보랏빛 빛이 검은 깃털을 감쌌다.순간.치이익——!“……!”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에드윈이 급히 손을 뗐다.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반응했어요.”“그래.”“아버지 마력에?”“아니다.”에드윈의 시선이 세이아에게 향했다.“네게.”“…저한테요?”“내 마력이 이 문양을 건드리는 순간.”그가 낮게 말했다.“안쪽의 힘이 네 쪽으로 움직였어.”세이아는 잠시 카일의 손을 바라보았다.그러다.손을 뻗었다.“잠깐.”카일이 즉시 손을 뒤로 뺐다.세이아가 눈썹을 올렸다.“왜요?”“위험할 수 있다.”“그래서 만져 보려는 겁니다.”“말이 앞뒤가 안 맞는군.”“전하께서 위험하다고 피하기 시작하면 오늘 해 뜨기 전에 북부는 못 갑니다.”“세이아.”“그리고.”그녀가 손바닥을 내밀었다.“아까도 말씀드렸죠.”“뭘.”“전하 혼자 지키는 건 금지라고요.”카일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그건 아직 설명하지 않았지.”“지금부터 설명하면 되겠네요.”“나는 설명보다 네가 손을 거두는 쪽이 좋다.”세이아가 피식 웃었다.“싫은데요.”그리고.이번에는 묻지 않았다.카일의 손목을 잡았다.“세이아.”그 순간.쿵.두 사람의 심장이 동시에 뛰었다.검은 깃털이 번쩍였다.파아아앗——!“……!”세이아의 시야가 뒤집혔다.⸻사아아아—은빛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세이아가 눈을 떴다.“…

  • 당신의 밤에 들어가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군.』검은 존재의 목소리가 꽃밭 전체에 스며들었다.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무엇을.”검은 안개 속.여섯 장의 날개가 천천히 펼쳐졌다.검게 썩은 깃털 사이로 황금빛 눈동자들이 하나둘 떠올랐다.하나.둘.셋.기분 나쁠 정도로 많은 눈이.모두 세이아를 향했다.『당신이.』낮은 웃음.『첫 번째 날개를 직접 죽였다는 것을.』순간.바람이 멎었다.세이아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꽃잎이 떨어지는 소리도.하늘이 갈라지는 소리도.바로 옆에 서 있는 카일의 숨소리조차.오직.한 문장만이 머릿속에 남았다.내가.첫 번째 날개를.죽였다.“…뭐라고?”세이아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검은 존재가 웃었다.『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군.』“헛소리하지 마.”이번에는 카일이었다.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은빛 검끝이 검은 존재를 향했다.『첫 번째 날개.』“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카일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내 이름은 카일이다.”검은 존재의 고개가 기이하게 꺾였다.『이름.』킥킥.금속 긁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역할보다 이름을 먼저 말하는군.』“그래서?”『이번에는 꽤 다른 모양이야.』카일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검을 들었다.그 순간 세이아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잠깐만요.”카일이 돌아봤다.세이아는 검은 존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방금 말.”그녀가 천천히 물었다.“무슨 뜻이지?”『어느 부분을 묻는 거지?』“내가.”세이아의 손끝이 조금 굳었다.“첫 번째 날개를 죽였다는 말.”카일의 표정이 굳었다.“세이아.”“확인해야 합니다.”“저것이 진실을 말한다고 누가 보장하지?”“아무도요.”세이아가 대답했다.“그래도 듣기는 해야죠.”검은 존재가 즐거운 듯 웃었다.『역시.』“뭐가?”『그 눈은 같군.』세이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누구랑.”『과거의 당신과.』순간.머릿속에.장면 하나가 번쩍였다.피로 물든 손.은빛 검

  • 당신의 밤에 들어가겠습니다   꿈속의 당신은 나를 기억한다

    『찾았다.』낮고 기이한 목소리가 울렸다.그 순간.수정함 안에서 피어난 새하얀 꽃이 크게 흔들렸다.사락.은빛 꽃잎 사이로 금빛이 번졌다.세이아와 카일은 동시에 굳었다.방금 들린 목소리는.에드윈의 것도.카일의 것도.물론 세이아의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분명.바로 곁에서 속삭인 것처럼 선명했다.『찾았다.』다시.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세이아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아버지.”“나도 들었다.”에드윈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세이아의 손은 아직 카일의 손 안에 있었다.조금 전까지 하나로 이어져 있던 은빛 날개 문양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그리고.쿵.두 사람의 심장이 동시에 뛰었다.세이아가 눈을 내리깔았다.맞잡힌 손.커다란 카일의 손 안에 자신의 손이 완전히 들어가 있었다.이제는 놓아도 될 텐데.이상하게.둘 다 먼저 손을 떼지 않았다.“대공 전하.”“왜.”“언제까지 잡고 계실 겁니까?”카일의 시선이 두 사람의 손으로 내려갔다.“네가 먼저 놓지 않았는데.”“전하께서 먼저 잡으셨잖아요.”“네가 가까이 대라고 했다.”“아버지가 그랬죠.”“결국 네 손이다.”세이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원래 이렇게 말이 많으셨습니까?”“당신 앞에서는 그런 모양이군.”세이아가 잠시 말을 잃었다.너무 아무렇지 않게 나온 대답이었다.카일도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에드윈이 낮게 헛기침했다.“내가.”두 사람이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여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면 좋겠군.”세이아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을 뺐다.“잊은 적 없어요.”“그래 보이지 않았다.”카일도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나.세이아의 손끝에는 아직도 그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이상했다.평소라면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잡거나 허리에 팔을 두르는 순간부터 먼저 경계했을 것이다.그런데 카일에게는.놀라기는 해도.싫다는 생각이 늦게 들었다.아니.정확히는.싫지 않았다.그 사실이 더 문제였다.세이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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