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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8화 — 열지 못한 상자

Author: 운디네J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1-04 18:18:00

재민에게서 다음 날 아침 문자가 왔다.

기타는 안 바꿀게요.

나는 전화해도 되겠느냐고 답했다. 잠시 뒤 전화기가 울렸다.

“혹시 바꾸고 싶은 마음이 다시 들면 어떡하죠?”

“기타는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판매점에도 보관 조건을 물어볼게요.”

“아뇨. 그냥 이걸로 연습하려고요. 첫날부터 마음에 든 건 아니지만.”

“손에 안 맞으면 조정할 수도 있답니다. 줄을 바꾸기도 하고요.”

“맞춰서 쓸게요. 어머니가 고른 물건이라서가 아니라 제가 이제 이걸 치고 싶어서요.”

“그럼 악기점에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래도 가끔 그만두고 싶으면 안 되는 걸까요?”

“그날은 쉬세요. 기타를 갖고 있는 것과 매일 치는 건 다른 일이잖아요.”

재민은 그제야 웃었다. 악기점 주인은 필요한 때 줄을 갈러 오라고 했다. 얼마나 잘 치는지는 묻지 않았다.

남은 물건을 옮기러 다시 간 날, 재민은 넥타이를 매지 않고 문을 열었다. 현관 수건 상자는 없어져 있었다. 기타 옆에는 인터넷에서 산 받침대가 놓였다.

“조립하는 데 더 오래 걸렸어요.”

재민이 바닥의 설명서를 주워 접었다. 나리는 가져갈 상자의 끈을 확인했고 나는 차에 실을 순서를 정했다. 재민은 마지막으로 뚜껑을 열어봤다. 한 상자에서 국자를 꺼낸 재민이 서랍 앞에 섰다.

“이건 안 가져가실 거예요?” 내가 물었다.

“남겨둘게요. 엄마가 매일 쓰던 거라서요.”

“목록에 표시하겠습니다.”

“아, 나중에 바꾸면 안 될까요?”

“그때 다시 정하면 됩니다. 오늘은 집에 두시는 걸로 적을게요.”

재민이 국자를 서랍에 넣었다. 나리는 수정한 칸을 보여줬다.

일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빈 자리에 먼지가 길게 남았다. 재민은 걸레를 가져와 장식장이 있던 벽 아래를 닦았다. 나는 사진틀을 식탁 위에 세웠다.

“그 사진도 가져가요.”

재민이 말하다 손을 멈췄다.

“아니, 제가 가져간다는 말이에요.”

그가 웃었고 나도 웃었다. 처음처럼 모두 버리라고 하지는 않았다.

확인서에 서명을 받은 뒤 나리가 봉투를 건넸다. 영수증과 남긴 물건 목록, 보관 기간이 적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재민은 기타 대금 영수증만 꺼내 사진틀 뒤에 넣었다.

손이 멈췄다. 종이에는 닿지 않았다. 재민이 뒷판을 닫는 것을 보고 나서야 빈 장갑을 주머니에 넣었다.

“어머니가 늘 거기 넣으셨다면서요.”

“네. 여기 있던 이유를 이제 알겠어요.”

그가 사진틀을 안았다. 내가 모르는 이유까지 알아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나는 더 묻지 않고 작별 인사를 했다.

차로 돌아오는 길에 나리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편의점에서 산 새 작업 장갑이었다.

“창고에 있는데.”

“가방에도 넣어둬요. 그때 찢어지면 바로 갈아 끼울 수 있게.”

나는 봉투를 받았다. 그녀는 먼저 차에 타서 창문을 조금 열었다. 햇빛이 운전석에 들자 눈을 가늘게 뜨고 손바닥으로 가렸다.

내가 조수석의 차양을 내렸다가 잘못 내렸다는 걸 깨달았다. 나리가 웃었다.

“내 쪽이요.”

나는 손을 뻗어 운전석 차양을 내려줬다. 그녀의 머리 위를 지나던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나리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시동을 걸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나리가 빈 식탁을 봤다. 점심시간이 지난 뒤였다. 나는 배달 앱을 열었다.

“그때 말한 밥, 오늘 어때요.”

“지금 시키는 건 점심이고요.”

그녀가 장부를 내려놨다.

“나는 퇴근하고 먹자는 뜻이었는데.”

손가락이 화면 위에 멈췄다. 나리는 내 얼굴을 보다가 먼저 물컵을 가져갔다. 나는 꺼지려는 휴대전화 화면을 한 번 더 눌렀다.

“그럼 저녁에요.”

“오늘 말고 날짜 잡아요. 오늘은 약속 있어요.”

“네.”

너무 빨리 대답한 것 같아 덧붙일 말을 찾았다. 나리가 달력을 가리켰다. 나는 빈 날짜 하나를 짚었고, 그녀는 휴대전화에 적었다.

내 자리의 물컵은 아직 따뜻했다. 나는 병원 예약을 달력에 적고, 나리가 건넨 다음 의뢰 목록을 펼쳤다. 지역 모임에서 맡긴 물건을 반환하는 일이었다.

의뢰 목록에는 꽃집과 식당 이름도 있었다. 물건을 받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미리 가져오지는 말라고 했어요.”

나리가 말했다.

“받을 분들하고 먼저 얘기해야죠.”

나는 목록을 맨 위로 올려놓았다. 재민이 처음에 모두 버리라고 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날 그 말대로 상자를 닫았다면 기타의 영수증도 다른 종이들 사이에 묻혔을 것이다.

나리가 외투를 챙겼다. 나는 식탁의 빈 용기를 모았다.

“내일은 제가 먼저 출근할게요.”

“예약한 날 잊지 말고요.”

“병원 예약이요?”

“그것도요.”

나는 그제야 저녁 약속도 잡아뒀다는 걸 기억했다.

“저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무 외우려고 하지는 말고 달력에 넣어둬요.”

“나리 씨는 그런 걸 잘 안 잊네요.”

“잊어요. 그래서 적는 거예요.”

그녀는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찬오 씨, 오늘은 퇴근하고 혼자 무거운 거 옮기지 마요.”

“금방 나갈 겁니다.”

“그 말은 지난번에도 들었어요.”

나리가 먼저 퇴근한 뒤, 나는 창고 선반에서 오래전 가져다 놓은 플라스틱 상자를 꺼냈다. 열지 않겠다고 미뤄왔던 아버지의 것이었다.

도태수.

아버지 이름이 적힌 종이가 뚜껑에 붙어 있었다. 모서리의 테이프가 누렇게 말려 올라갔다. 나는 이름을 가린 먼지를 손바닥으로 닦았다.

휴대전화 연락처에서 아버지를 찾았다. 번호를 지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동안 잊고 있었다. 통화 버튼에 손가락이 닿을까 봐 화면을 껐다.

마지막 전화도 받지 않았다. 일이 핑계였다. 전화는 한 번뿐이었다.

장갑을 벗고 걸쇠를 들었다. 목록에는 지갑, 열쇠, 봉투, 공구가 있었다. 손을 대면 어떤 순간이 덮쳐올지 몰랐다.

걸쇠가 반쯤 들린 채 멈췄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리였다. 나는 상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무릎으로 받쳤다.

“아직 사무실이에요?”

“네.”

“불 켜져 있길래요. 가방 두고 와서 돌아왔어요.”

유리문 너머에서 나리가 손을 들었다. 나는 상자를 선반에 놓고 문을 열어줬다. 그녀는 가방을 들고 나오다가 선반 쪽을 봤다.

“무거운 거예요?”

나는 대답을 고르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고 내 옆으로 왔다.

“그럼 혼자 들지 말아요.”

“나리 씨. 아버지 전화 이야기, 듣고 싶었죠?”

“네. 하지만 제가 들으려고 상자를 여는 건 아니에요.”

“열었다가 제가 겁먹으면요?”

“그럼 닫으면 돼요. 내가 결정 대신 해주진 않을게요.”

나리는 뚜껑의 이름을 읽었지만 묻지 않았다. 손을 뻗어 기다렸다. 나는 들고 있던 걸쇠를 도로 내렸다. 잠기는 소리가 창고 안에서 유난히 크게 났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상자 한쪽을 비워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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