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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Author: 적매화

제1화

Author: 적매화
조선의 어느 음력 12월 28일.

차가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오전에 시작했던 빨래를 간신히 마친 김단은, 얼어붙어 감각을 잃은 파랗게 질린 손을 닦을 틈도 없이 세답방의 나인에게 불려갔다.

“어서 가보게. 진산군댁에서 자네를 데리러 왔네.”

나인의 말에 김단은 자리에 얼어붙었다.

진산군댁, 그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였다.

한때 그녀도 그 댁의 귀한 여식으로 15년을 자랐었다.

3년 전, 자기가 진짜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정2품 진산군댁의 안주인인 정부인 임씨와 같은 해에 출산했던 유모는 임종 직전, 죄책감이라도 들었는지 자기가 두 아이를 바꿨다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김단은 그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부부가 자신의 친딸, 임원을 상봉한 것에 감격스러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모녀와 부녀의 모습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5년간,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을 한 번도 친부모가 아니라고 의심한 적 없었다.

진산군은 안색이 어두워진 김단에게 앞으로도 이 집안의 여식으로 남아 임원의 언니로서 살아가도 좋다고 했다. 임씨도 그녀를 친딸처럼 대하겠다고 약조했다.

하나, 궁궐에 들어 공주자가의 유리그릇을 깨트린 임원을 발견한 부부는, 임원의 몸종이 김단을 모함할 때조차 임씨 부부는 망설임 없이 수양딸이었던 김단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웠다.

공주는 분에 겨워 그녀를 세답방의 무수리로 쫓아냈으나, 한때 부모님이었던 그들은 임원의 옆에 서서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날, 김단은 그들이 자신의 부모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멍하니 서서 뭐 하시오? 그 댁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나인의 독촉 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세답방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희미한 햇살이 비친 문 쪽에서 홀로 고고히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마주한 김단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랫동안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가슴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은 듯 저릿했다.

그 사내는 임학이었다.

그녀가 15년간 오라버니로 알고 지냈던 그였다.

한때는 그녀를 위해 저 멀리 제주까지 가 그토록 구하기 힘들었던 야명주를 구해왔던 오라버니였고, 자신의 친누이 때문에 그녀를 2층에서 밀쳐버린 사람이다.

그간 묵혀왔던 서러움과 억울함이 순식간에 밀려왔지만,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마음을 억누르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와 마주 선 김단은 담담한 목소리로 예를 갖춰 말했다.

“쇤네, 도련님께 인사 올립니다.”

사실 임학은 세답방을 오기 전 그녀의 조우하게 될 상황을 머릿속에 그렸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김단은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며 억울한 심정을 토로해야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잔뜩 토라져 오라비를 만나려 하지 않아야 했다.

하나, 모든 예상이 빗나갔다.

김단은 무표정한 얼굴로 예를 갖춰 그에게 인사했다.

어릴 때부터 오라비인 자기가 금지옥엽, 애지중지 키운 쌀쌀맞고 고집스러운 누이는 없었다.

사뭇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임학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으나, 두 주먹을 움켜쥐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조모님께서 널 많이 그리워하신다. 중전마마께서 네 나이를 고려하셔서 이곳을 떠날 수 있도록 윤가 하셨다.”

다소 차갑게 말한 것이 신경 씌었던 임학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 오라비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고개를 떨군 김단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오라버니와 돌아가자는 말을 소녀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를 것입니다.’

이곳으로 쫓겨났던 순간부터, 그녀는 매일 오라버니가 와서 자신을 데려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날이 바뀌고, 해가 변하면서 기다림은 어느새 절망감으로 변했고 그녀는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한데, 이렇게 갑자기 그토록 기다리던 오라버니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자신의 손을 잡은 임학을 뿌리친 그녀는 뒤로 한 발 물러서며 예를 갖췄다.

“중전마마와 큰 마님의 은혜에 감읍하옵니다.”

공손한 말투와 태도가 너무 낯설고 괴리감이 들었던 임학은 손을 거두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버님께서 네 신분을 빼앗지 않으셨다. 비록 이곳에서 고된 일을 하긴 했으나 넌 여전히 진산군의 여식이니라. 결코 노비가 아니다.”

자기 손으로 키운 누이를 결코 노비로 생각한 적 없었다.

하나, 김단은 그의 말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3년 동안, 아침 해가 동산에 떠서부터 질 때까지 끝없는 빨래를 했고 손끝은 어느새 피가 고여 물러터져 고여있었다.

세답방의 상궁은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구박하거나 때렸다.

이곳에선 그녀는 무수리, 노비보다 더 미천한 존재였다.

‘신분? 호적?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김단을 말없이 바라보던 임학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집에 뭐든 다 있으니, 굳이 채비를 할 필요도 없겠구나. 이 길로, 집으로 돌아가자. 조모님께서도 많이 기다리셨다.”

말을 마친 임학이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갔고 김단은 묵묵히 그의 뒤를 쫓았다.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전처럼 투정을 부리지도 않는 그녀의 모습에 임학은 이유 모를 분노가 차올랐다.

심기가 거슬린 그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으나, 전에 임학에게 밀쳐 아래로 떨어지면서 발을 다치게 된 그녀는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 궐문에 다다를 즈음, 이미 마차에 올라탄 임학이 보였다.

마차를 끌고 온 사람은 진산군 관저의 마부로 그녀도 아는 낯이었다.

마부는 그녀에게 인사를 한 뒤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아씨, 오랜만이옵니다.”

김단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며 마차 안에 타는 대신, 마부의 옆자리에 앉았다.

마부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어찌 여기 앉으시는 겁니까?”

김단이 머리를 저으며 대꾸했다.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오.”

갑자기 마차 안에서 튀어나온 다리는 그대로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버렸다.

임학이 화가 난 목소리로 외쳤다.

“어쩐지 처음부터 태도가 아니꼽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면, 계속 세답방에서 빨래나 하거라!”

바닥에 고꾸라진 김단은 아픈 발목을 움켜쥐며 얼굴을 찌푸렸다.

임학은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그것도 아니면 나 보라고 일부러 이러는 것이냐? 누구 덕에 15년을 복에 겨워 살았는데, 이까짓 고생도 못 참겠더냐?”

“마차에 그리도 타기 싫은 것이면, 어디 걸어오거라. 걸으면서 네가 지금 어떤 처지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거라! 감히 누구한테 성질을 부리는 것이냐! 그 꼴을 조모님께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거라.”

말을 마친 임학은 문을 닫으며 마부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가자!”

마부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김단을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이 출발했다.

김단은 무덤덤하게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이미 3년 전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그녀는 더는 이런 일로 상처를 받지 않았다.

한숨을 길게 내쉰 그녀는 바닥을 힘겹게 짚고 일어서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녀의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길쭉한 손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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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김단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들어온 큰 마님의 병세가 악화하였다.임씨 부인의 말대로 큰 마님의 건강은 예전 같지 않았다.금일 무리를 해서인지 눕자마자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다행히 큰 마님을 모시고 있던 몸종이 미리 의원을 불러왔고 침소에 누운 그녀에게 침을 놓기 시작했다. 한 시진이 훌쩍 지나서야 그녀는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김단은 처음 보는 모습에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큰 마님은 당황한 김단에게 손짓을 했다.김단은 혹여 자신 때문에 그녀의 병세가 악화할까 봐 눈물을 참으며 곁으로 다가갔다.“많이 놀랐느냐?”부드러운 목소리에 김단은 코를 훌쩍이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무병장수하시겠다고 약조하셨잖아요.”하지만 큰 마님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아 보였다.“이 할미도 오래오래 네 곁에 남아 널 지켜주고 싶구나.”큰 마님은 불현듯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 할미가 너에게 좋은 혼 자리를 알아봐도 되겠느냐?”건강이 그리 악화되지 않았을 때, 이 집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을 때, 손녀를 위한 좋은 혼사를 찾아주는 게 그녀가 김단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그 뜻을 모를 리 없었던 김단이었지만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소녀는 조모님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3년간 그녀는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15년간 함께한 가족도 하루아침에 버리는 마당에 피도 섞이지 않은 부군에게 자신의 일생을 맡길 수 없었다.이번 생은 조모님의 곁을 지키기로 결심했다.조모님이 세상을 뜨면 이 집을 나가 홀로 살기로 했다.절에 들어가 수행을 하는 게 이 집안 사람들과 얽히는 것보단 나았다.큰 마님도 그녀의 성정을 모를 리 없었다.한번 결심한 일은 누가 뭐라 해도 할 성정이기에 큰 마님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아꼈다.김단은 큰 마님이 잠들 때까지 곁을 지키다가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그녀가 별당으로 들어가자마자 숙희가 다가왔다.“아씨, 둘째 아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임원이?’미간을 살짝 찌푸린 김단에게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9화

    그녀의 질문에 임원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임원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아니오. 그런 적 없소. 그때 공주자가의 유리잔을 깨트린 게 나인 것은 맞지만, 낭자를 모함한 것은 내 몸종이오…”그녀는 억울한 듯 말했다.문에 비스듬히 기댄 임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한데 3년 전에는 왜 진실을 고하지 않은 것이오?”말문이 막힌 임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김단이 조롱어린 어투로 말했다.“낭자가 유리잔을 깨트렸다고 중전마마와 공주자가께 고하면 됐을 터인데, 왜 하지 않았소?”당황한 임원은 자리에서 휘청거렸다.“무, 무서웠소. 처음 궐에 들어 중전마마와 공주자가를 뵙는 자리에서 내 죄를 고하는 것이 두려웠소. 하여…”“이제 와서 왜 이런 말을 하오?”김단은 임원의 말을 중도에서 가로챘다.어떤 말로든 3년 전의 일을 무마시킬 순 없었다.임원은 흐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낭자가 날 용서만 해준다면 원하는 건 전부 돌려줄 수 있소. 아버님과 오라버니에게도 말씀해 낭자의 오해를 풀겠소. 매화당도 돌려주겠소. 그리고, 그리고 장군님도 돌려주겠소.”김단은 그제야 임원이 여기까지 찾아온 까닭을 눈치챌 수 있었다.김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내 분명히 말했소. 낭자의 부모님이고 낭자의 오라버니요.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분이오. 매화당은 내 비록 좋아하긴 하나, 대감의 심혈이 깃든 곳이니 낭자의 것이어야 하오. 만일 이곳이 탐난다면 알려주게. 낭자 말 한마디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소.”임원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오. 낭자와 거처를 다투려고 온 것이 아니오.”“알고 있소.”김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장군님 때문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소.”잘못을 빌러 왔다고는 했지만 결국은 남자 때문이었다.임원의 속내를 알아차린 김단의 말에, 임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3년 전, 세답방에 가기 전부터 낭자의 혼처였네. 내 비록 지금 여기에 묶고 있긴 하나 그것 또한 조모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 때문이오. 하물며 난 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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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83화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82화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81화

    김단은 며칠 동안 정성을 다해 맹영지의 상태를 호전시켰건만 민태훈의 갑작스러운 악행으로 인해 그간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맹영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해독제를 찾는 일도 어려워질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영의정 저택에 더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곁에 있던 몸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맹가 사람들에게 전하거라. 내가 맹영지를 데려가겠다고 말이다.”몸종은 놀란 눈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지금 맹영지를 민대감한테서 떨어뜨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나 김단이 그녀를 데려가겠다는 사실을 민가 사람들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김 의원님께서 몰래 모셔가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김단은 냉정하게 대답했다.“네가 도와준다 한들 민가 사람들에게 들키게 된다면 너의 신분으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서 민가 사람들을 불러오거라. 누구든 상관없다. 내가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이다.”몸종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예.”얼마 지나지 않아 맹영지의 뜰은 소란스러워졌다. 조정에서 전하와 정무를 논의 중인 영의정 대감을 제외하고 민가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였다.특히 민태훈은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와 김단에게 따지려 하였다. 그러나 그가 방에 들어서기도 전에 안에서 날아온 은침이 그의 허벅지를 정확히 찔렀다.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지며 신음을 토했다.민가의 큰 마님은 몇몇 마님들의 부축을 받으며 도착하였다.맹영지의 뜰에 도착한 그녀가 본 장면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장손이 땅에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즉시 분노를 터뜨리며 지팡이로 땅을 세차게 내리쳤다.“어디 이런 무례한 의원이 다 있단 말이오? 감히 우리 영의정 저택에서 사람을 해치다니! 이 자를 당장 붙잡거라! 내가 직접 궐에 데려가 이 무엄한 짓이 누구의 명령인지 따져 물을 것이다!”영의정 저택의 병사들은 즉시 명령에 따라 방으로 돌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방 안에서 또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80화

    김단은 다시금 영의정 저택을 찾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맹영지를 문병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서원공주한테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탓이었을까?김단이 몇 차례 영의정 저택에 들렀음에도 불구하고 민태훈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김단이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전에 맹영지 방에서 나오는 그를 마주치게 되었다.김단은 무의식중에 얼굴빛이 굳어졌다. 그 바람에 마땅히 올려야 할 예까지 잊고 말았다. 민태훈은 그런 김단의 무례한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김 의원은 공주님을 모시더니 자기 위치를 잊은 것이오? 어찌 본관을 보고도 예를 갖추지 않는단 말이오?”김단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했다.“민 대감을 뵙습니다.”민태훈은 코웃음을 치더니 발걸음을 옮겨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그가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김단은 급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속에 품었던 우려가 결국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맹영지는 침대 구석에 웅크린 채 두 팔로 어깨를 감싸안고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생기를 잃었고 옷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김단은 섣불리 다가갔다가 맹영지를 놀라게 할까 두려워 선뜻 가까이 가지 못했다.그때 맹영지의 몸종 하나가 탕약 한 사발을 들고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맹영지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란 나머지 손에 든 약그릇을 떨어뜨리고 말았다.그 소리에 맹영지는 격렬하게 반응하며 소리쳤다.“때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제발…”몸종은 그 자리에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맹영지를 안아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더욱 격렬하게 저항하며 몸종을 때리고 할퀴었다.이 광경을 본 김단은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들어 맹영지한테서 몸종을 떼어내고 그녀의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시켜 버렸다.그러자 몸종은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모두 다 소인의 불찰입니다. 큰 며늘 아씨께서 과자를 드시고 싶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엌으로 가 준비를 하던 참이었는데 그 사이에 대감님께서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79화

    김단은 여전히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모를 것이다.세상 사람들은 남의 고통을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남의 불행 앞에서도 해맑게 웃을 수 있는 것이겠지.그때 소정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도련님을 걱정하고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진산군 댁의 의원과 그렇게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을 리 없잖아요.”김단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뭐 어떻게 되었든, 도련님께서는 낭자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방금 약을 마시고 잠들었는데 잠결에 부르는 이름도 낭자였거든요. 예전에는 사이좋은 남매였는데... 지금 이렇게 되어버린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도련님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피를 나눈 사이인데 꼭 이렇게 멀어져야만 하나요?” “소정원 낭자.”김단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결 단호하고 날이 서 있었다.생각보다 묵직한 음성에 소정원은 당황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김단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허리춤에서 작은 손목 염주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것은 소한 장군님의 물건입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그분에게 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이 염주는 그녀가 시간 날 때마다 손수 꿰어 만든 것이었다. 소정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이게 정말 소한 오라버니의 것이 맞나요? 제 기억으로는 큰 오라버니도 비슷한 염주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서요.”김단은 작게 눈썹을 찌푸릴 뿐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소정원이 다시 물었다.“그런데 한이 오라버니 물건을 왜 낭자가 가지고 있는 겁니까?”그 물음에는 짙은 의문과 약간의 의심이 담겨 있었다.김단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낭자,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시오. 제 실수로 소한 장군님의 염주를 끊어버렸소. 그에 대한 보상으로 손수 꿰어 만든 것일 뿐이오.”소정원은 그제야 고개를 끄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78화

    소정원은 순간 당황했다. 김단이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진산군 앞에서 친히 임학에게 약을 먹이라니...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보여줘라는 뜻 아닌가?그녀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으나 무의식적으로 약그릇을 받아들고 있었다.김단은 몸을 돌려 진산군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진산군께서는 모르시겠지만 도련님을 깨운 건 소정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진산군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그게 정말이냐?”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임학과 소정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그럼 너희 둘은...”소정원의 두 뺨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고 임학에게 약을 먹이던 손마저 긴장으로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부자연스러운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는 임학의 눈에는 따스함이 서려있었다. 그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자 소정원의 얼굴은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장면을 말없이 바라보던 김단과 진산군은 눈치껏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그러나 밖으로 나온 진산군의 얼굴빛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보다 못한 김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이제 눈을 뜨셨고 거기에 좋은 인연까지 맺게 되셨으니 기뻐해야 할 일 아닙니까?”현재 진산군의 집안 사정을 헤아려봤을 때 혼인과 같은 경사로 액운을 풀 수만 있다면 더없이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진산군의 미간에는 여전히 주름이 깊게 잡혀있었다.“소정원 낭자가 싫다는 게 아니다. 다만 너도 알지 않느냐? 우리 집안은 소씨 가문과 이미 두 번이나 혼례를 맺으려다 결국...”그는 임학과 소정원도 안 좋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김단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번은 다릅니다. 그 두 번의 혼사는 모두 거짓이었잖아요.”애초에 김단과 소하의 혼사는 거짓된 약조에 불과했다. 허울뿐인 인연인데 어찌 아름다운 결말이 따를 수 있겠는가?진산군은 김단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마침내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77화

    그 기억은 아마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김단 역시 그 일을 떠올렸다. 그날 임학은 소정원의 치맛자락에 붙은 불을 끄느라 여념이 없어 김단을 챙겨주지 못했었다.김단은 그것도 모르고 등불회장 한가운데서 임학을 찾아 헤맸고 결국 소한이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 때문에 김단은 오랫동안 임학에게 서운함을 품고 있었다.왜 말도 없이 사라졌냐고 여러번 따져 물었지만 임학은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감정이 싹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소정원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그때부터였습니다. 도련님만 떠올리면 괜히 웃음이 나고 그러더군요.”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임학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깜짝 놀란 그녀는 즉시 은침을 꺼내 임학의 두정혈에 찔렀다.은침의 자극이 신경을 자극하자 임학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정원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임학 도련님...”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중상을 입고 막 깨어난 임학은 눈꺼풀을 드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그는 가장 먼저 소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자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임학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는 미약하게나마 소정원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그 모습을 본 소정원은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깨어나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임학은 말할 기운이 없어 대답하지 못했지만 시선은 어느샌가 김단에게로 옮겨졌다.그녀는 침대 곁에 앉아 있었기에 소정원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방금 전 꿈속에서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그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마른 목구멍에서 겨우 한 마디를 뱉었다.“단아...”“방금 깨어났으니 말을 아끼세요.”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임학을 내려다보며 차분하게 얘기했다.“저는 약을 달이러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76화

    그러다 문득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김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큰 아가씨, 소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소 아가씨? 소정원을 그러는 것일까? 김단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김단은 긴가민가하며 문을 열었고 마당에는 어린 시절 자신의 경쟁자였던 소정원이 서 있었다.두 사람은 그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임학 때문일 것이다. 김단은 조심스레 그녀를 방 안으로 들였다.“사실 일찍 오고 싶었는데 오라버니들이 말리셨습니다. 임학 도련님의 상태가 너무 위중해서 제가 와봤자 방해만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에야...”그녀는 말을 흐리며 침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더니 다시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임학 도련님은… 지금은 어떠세요?”김단은 살짝 웃으며 얘기했다.“맥박은 안정되었고 상처도 서서히 아물고 있소.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깨어나질 않소.”그 말을 들은 소정원의 이마가 즉시 찌푸려졌다. 김단은 그녀가 임학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김단은 부드럽게 말했다.“도련님을 좀 봐주시오. 나는 물 한 잔 가져오겠소.”김단이 찻잔을 들고 물을 따르는 순간 소정원의 외침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김단 낭자! 어서 와서 보세요!”갑작스럽게 들리는 큰 목소리에 김단은 놀라 물을 흘리고 말았다.하지만 김단은 물 따위는 신경 쓸 틈도 없이 황급히 침대 옆으로 뛰어갔다.김단은 임학에게 무슨 큰일이 생긴 줄 알았다.하지만 소정원은 임학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거 보세요. 도련님께서 울고 계십니다.”임학의 눈가에는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김단은 그가 혼수상태에 빠졌기에 자신이 했던 말은 들리지 않을 거라 믿었다.하지만 그의 눈물을 보니 어쩌면 김단이 방금 전에 했던 모든 말들, 즉 그를 향한 분노와 원망, 그리고 그 간절한 바람들이 그의 가슴을 울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정원은 어리둥절해하며 나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75화

    그는 소한의 거침없는 기질이 가끔 부러울 때도 있었다.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편할까?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자신이 소한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방식대로 소한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삼일 뒤, 김단은 평소처럼 임학의 상태를 보기 위해 진산군 댁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승이 임학의 맥을 짚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스승님, 어떻습니까?”그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독은 이미 다 해독되었고 맥도 안정적이오. 그래서 호흡도 고르고 안색도 며칠 전보다 훨씬 좋아졌소. 그런데 이상하오. 이쯤 되면 일어나야 하는 게 정상인데 말이지...”김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진맥해보았을 때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깨어나야 할 시점인데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는 임학을 바라보며 스승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모습을 본 김단은 조심스레 물었다.“스승님께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신가요?”그는 김단을 한 번 바라보더니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직접 겪은 적은 없지만 예전에 약왕곡 주인께서 비슷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소.”그의 목소리는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이어졌다.“만약 어떤 이가 스스로 죽음을 간절히 바란다면 아무리 육신이 다 나았다 해도 정신은 죽음의 문턱에 머물러 있다고 했소. 우리가 온 힘을 다해 끌어내려 해도 본인이 거부하면 방법이 없다는 뜻이오.”지금 임학이 바로 그런 상태였다.김단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그녀의 시선은 다시금 임학의 얼굴로 향했다.까무잡잡한 피부와 앙상한 빰이 병사의 길을 걸었던 그의 지난 세월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화려한 옷을 입고 도련님이라는 소리를 듣던 진산군 댁의 장남은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왔다.“낭자, 잠시 이 아이를 봐주시오. 나는 약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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