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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Author: 적매화
그녀의 질문에 임원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임원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오. 그런 적 없소. 그때 공주자가의 유리잔을 깨트린 게 나인 것은 맞지만, 낭자를 모함한 것은 내 몸종이오…”

그녀는 억울한 듯 말했다.

문에 비스듬히 기댄 임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데 3년 전에는 왜 진실을 고하지 않은 것이오?”

말문이 막힌 임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단이 조롱어린 어투로 말했다.

“낭자가 유리잔을 깨트렸다고 중전마마와 공주자가께 고하면 됐을 터인데, 왜 하지 않았소?”

당황한 임원은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무, 무서웠소. 처음 궐에 들어 중전마마와 공주자가를 뵙는 자리에서 내 죄를 고하는 것이 두려웠소. 하여…”

“이제 와서 왜 이런 말을 하오?”

김단은 임원의 말을 중도에서 가로챘다.

어떤 말로든 3년 전의 일을 무마시킬 순 없었다.

임원은 흐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낭자가 날 용서만 해준다면 원하는 건 전부 돌려줄 수 있소. 아버님과 오라버니에게도 말씀해 낭자의 오해를 풀겠소. 매화당도 돌려주겠소. 그리고, 그리고 장군님도 돌려주겠소.”

김단은 그제야 임원이 여기까지 찾아온 까닭을 눈치챌 수 있었다.

김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분명히 말했소. 낭자의 부모님이고 낭자의 오라버니요.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분이오. 매화당은 내 비록 좋아하긴 하나, 대감의 심혈이 깃든 곳이니 낭자의 것이어야 하오. 만일 이곳이 탐난다면 알려주게. 낭자 말 한마디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소.”

임원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낭자와 거처를 다투려고 온 것이 아니오.”

“알고 있소.”

김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장군님 때문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소.”

잘못을 빌러 왔다고는 했지만 결국은 남자 때문이었다.

임원의 속내를 알아차린 김단의 말에, 임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3년 전, 세답방에 가기 전부터 낭자의 혼처였네. 내 비록 지금 여기에 묶고 있긴 하나 그것 또한 조모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 때문이오. 하물며 난 더는 임씨 성을 쓰지 않소. 이 집안에서 나는 그저 외부인이오. 그러니 두 집안의 혼약에 내가 나설 자리는 없지.”

“그리고 방금 조모님이 계시던 자리에서 내 뜻을 분명하게 밝혔소. 내 더는 장군님께 마음이 없소. 염탐하러 온 것이면 헛걸음한 것이네.”

“염탐하러 온 것이 아니오.”

임원이 다급히 해명했다.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려 온 것이네. 다만…”

사실 임원은 그녀의 진심을 염탐하려는 마음도 품었었다.

오늘 소한의 태도는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자신이 아닌 김단을 원할까 봐 조급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찌 되었든 내 뜻은 명확히 밝히었소. 조모님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그저 이곳에서 돌보는 것뿐이네.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소.”

김단은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혔다.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곳에서 조모님을 제외한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임원은 입술을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 그녀의 얼굴에 김단은 자기도 모르게 이 장면을 임학이 목격했더라면 망설임 없이 자신을 연못에 밀어 넣었을 것이라 여겼다.

차가운 날씨에 얼음물에 빠지면 고뿔에 걸려 며칠 고생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임원을 당장 돌려보내고 싶었다.

“다른 일이 없으면 이만 돌아가시오. 멀리 나가지 않겠소.”

임원은 자신을 쫓아내는 김단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쉬시오, 이만 물러가겠소.”

말을 마친 임원은 그녀에게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갔다.

임원이 나가자, 밖에 있던 숙희가 들어왔다.

숙희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임원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아씨, 둘째 아씨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눈이 빨갛던데, 울었던 것입니까?”

“그리도 궁금하거든 직접 물어보거라.”

숙희는 물러서지 않았다.

“쇤네는 아씨의 몸종입니다. 쇤네가 어찌 둘째 아씨를 찾아가 물을 수 있겠습니까?”

순간, 걸음을 멈춘 김단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숙희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네 주인이 이리로 보낸 목적을 내 모르는 것이 아니다. 내 너를 난처하게 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내 사람이라고 그만 말하거라. 네가 내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세답방에서 모두가 그녀의 적이었다. 그렇기에 남들에게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깜짝 놀란 숙희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혔다.

사실 김단도 이 말을 하면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눈 좀 붙여야겠구나. 나가서 일 보거라.”

말을 마친 김단은 미간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겨진 숙희는 홀로 들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내 옷소매로 눈물을 닦은 숙희는 세답방에서 온갖 고생은 한 자기 아씨가 사람에게 거리 두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저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그 힘든 곳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고 장담했다.

숙희의 씩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씨, 편히 쉬십시오. 쇤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숙희의 우렁찬 외침에 김단은 마음속 한편이 울렁거렸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왔다.

임원 때문에 복잡했던 심경이 한결 나아졌다.

이부자리에 누운 지 얼마 안 되어 밖에서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큰일 났소! 둘째 아씨께서 물에 빠지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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