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민의 긴 손가락이 허공에 멈췄다.“하 대표님, 어서 출발해요. 수아를 빨리 찾아야 해요.”하승민은 백미러로 지서현을 흘끗 보았다. 지서현은 뒷좌석에 앉아 계속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얼굴은 다소 창백했는데 맑고 깨끗한 얼굴이 더욱 투명해 보였다.지서현의 신경은 온통 엄수아에게 쏠려 있어 하승민을 힐끗 한 번 쳐다본 것이 전부였다.이제 두 사람은 하나는 앞에 하나는 뒤에 앉아 마치 남처럼 멀어진 사이가 되어버렸다.하승민은 시선을 거두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알았어.”...엄수아는 계속 울고 있었다. 너무 슬펐다.
검은 티셔츠와 검은색 긴 바지를 입은 소년이었다. 엄수아는 그가 진세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진세윤과 조군익은 세경대의 두 킹카로 불렸다. 조군익은 햇살처럼 밝고 잘생긴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많은 여학생들이 그의 팬이었다. 하지만 진세윤은 차가운 성격에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여학생들은 그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밤이 되면 여학생 기숙사에서는 그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엄수아는 진세윤을 바라보았다. 진세윤이 흉악범을 홱 잡아당기자 흉악범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음흉한 표정으로 욕설을 퍼부었다.“죽고 싶어. 감
진세윤은 위치를 알려주었다.“사람은 기절했어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포상금이나 제 계좌로 보내세요...”엄수아는 그가 누구에게 전화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얼른 그의 재킷을 입어 드러난 몸을 가리고는 택시를 짚고 일어나 진세윤에게 고마움을 전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멀리서 익숙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야! 수아야! 어디 있어?”지서현이었다.엄수아가 다시 뒤돌아보았을 때 진세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어쩜 저렇게 빨리 갈 수 있지? 고맙다는 인사도 직접 전하지 못했는데.’...하승민과 지서현이 찾
‘이 경찰관은 진세윤을 찾는 건가? 설마 아까 진세윤이 이 경찰에게 전화를 건 거였나?’엄수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갔어요.”경찰관은 더 묻지 않고 말했다.“빗방울 살인마는 저희가 데려갑니다. 내일 아가씨는 조서 작성에 협조해주십시오.”“알겠습니다.”엄수아가 대답했다.“지금 장마라 소나기가 곧 올 것 같으니 이런 날씨에 돌아가긴 위험합니다. 바로 앞에 휴게소가 있으니 가서 따뜻한 물로 씻고 옷 갈아입으세요. 감기 걸리지 마시고요.”경찰관은 친절하게 당부했다.하승민, 지서현, 엄수아는 다 젖은 데다 늦가
지서현은 맑고 투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붉은 입술을 살짝 올려 미소 지었다.“하 대표님 주변엔 사장님들이 많잖아요. 괜찮은 사람 있으면 소개 좀 해 주세요.”하승민은 그녀를 흘끗 보더니 시선을 돌리고 목에 맨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무덤덤하게 말했다.“괜찮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 줄게.”“고마워요. 하 대표님.”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재빨리 샤워를 마친 엄수아가 나왔다.“서현아, 얼른 들어가서 씻어.”지서현은 사양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씻은 사람은 하승민이었다. 그가 욕실에 들어갈 때쯤 지서
지서현과 엄수아는 한 이불 속에 폭 파묻힌 채 잠들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엄수아가 물었다.“서현아, 너 그런 남자 만나본 적 있어?”“어떤 남자?”엄수아의 머릿속에 짧은 머리의 잘생긴 얼굴이 떠올랐다.“차갑고 터프한데 싸움도 잘하고... 좀 무섭기도 한...”지서현은 옷걸이에 걸린 검은색 야구 점퍼를 바라보았다. 원래 엄수아가 입고 있었는데 조심스럽게 걸어 둔 걸 보니 엄수아를 구해 준 남자 옷인 게 분명했다.지서현은 웃으며 말했다.“진세윤 그 킹카를 말하는 거야?”엄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맞아.”
여자들의 감정은 참 단순했다. 진심에 진심으로 답하면 그만이었다.그러니 엄수아와 지유나는 평생 친구가 되긴 글렀다.하승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에서 따뜻한 수건을 가져와 지서현의 상처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이렇게 찜질하면 훨씬 나아질 것이다.하승민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때 휴대폰이 밝게 빛났다. 지유나에게서 온 문자였다.유명 브랜드에서 몰래 진행한 패션쇼에 나왔던 섹시 란제리 사진이었다.[맘에 들어?]지유나는 그에게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두 사람이 다시 만난 이후 지유나는 예전처럼 까탈스럽지 않고 훨씬 더 말을 잘
쿵!잠자던 하승민은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하승민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발로 차여 침대에서 떨어지다니. 그는 엄수아를 향해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막내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엄수아는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오빠, 서현이랑 이혼했으면서 왜 서현이를 안고 자는 거야?”막 잠에서 깬 하승민의 잘생긴 얼굴은 굳어 있었다. 엄수아의 말에 그도 깜짝 놀랐던 것이다.‘내가 지서현을 안고 잤다고?’“방금 오빠 손이 서현이 어깨를 감싸고 있었어. 품에 꽉 안고 자고 있었단 말이
다른 여학생이 말했다.“진세윤 아빠가 마약상이라던데?”양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어. 진세윤은 마약상 아들이야. 게다가 엄마는 눈이 안 보이고 중학생 여동생도 하나 있는데 집안 형편이 말도 아니래. 그런데 마약상 아버지, 눈먼 어머니, 공부하는 여동생, 망가진 진세윤. 이런 상황이 오히려 내 도전 의식을 자극하더라. 하하.”양지혜와 주변 여학생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진세윤의 가정을 비웃고 있었다.엄수아는 기분이 상했다. 그녀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예쁜 눈으로 양지혜 일행을 쏘아보았다.“그만 좀 웃으시죠?”엄수아의 갑작스
하승민은 답장하라고 명령했다.지서현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자기가 누군데 명령하는 거지? 회사 사장인가? 왜 그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지서현은 다시 한번 무시했다.운전석에 앉은 소문익이 웃으며 말했다.“서현아, 하 대표랑 이혼은 했지만 뭔가 깔끔하게 정리된 것 같지는 않네. 하 대표 그 녀석이 아직 너한테 미련이 남은 것 아니야?”지서현이 대답했다.“글쎄요.”소문익이 말을 이었다.“매장에서 내가 네 허리를 감싸 안았을 때 하 대표 눈빛이 내 손을 잘라버릴 듯하던데. 서현아, 네 가짜 남자친구 노릇하는 것도 쉬
지동욱과 강미화는 예비 사위 C 신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하지만 지예슬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C 신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 지예슬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여보세요, C 신?”하지만 차갑고 기계적인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이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없는 번호라고?’지예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기계적인 여자 목소리만 들려왔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이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지예슬은 곧바로 카톡을 열어
C 신이 여자라고?박경애와 지예슬은 얼어붙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서 물었다.“소문익 씨, 무슨 말씀이세요? C 신이 어떻게 여자예요? 저랑 사귀는 사람인데, 남자라고요!”소문익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저는 C 신과 아는 사이일 뿐만 아니라 친분도 두텁습니다. 제가 여자라고 하면 여자인 겁니다.”지예슬은 충격적인 소식에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요, 소문익 씨. 분명 거짓말이죠!”박경애 또한 믿고 싶지 않았다.“소문익 씨, 지금은 서현이 남자친구라고 해서 그런 말도
지유나도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녀는 지서현에게 도발적인 눈빛을 던진 후 탈의실로 들어가 치마를 입어보았다.곧 지유나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이윤희와 지예슬은 감탄했다.“유나야, 정말 아름답구나!”지유나는 레이스 치마를 입으니 아름다웠지만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허리가 너무 조였던 것이다.방금 탈의실에서도 숨을 꾹 참고 겨우 지퍼를 올렸다.지유나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하승민 앞에서 한 바퀴 돌았다.“승민 오빠, 나 예뻐?”하승민은 지유나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윤희가 칭찬을 쏟아냈다.“우리 유나가
지유나는 하승민에게 지서현이 입고 있는 치마를 사달라고 졸랐다.지서현에게 지기 싫은 승부욕은 그녀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지서현에게 주목이 쏠리는 게 싫었던 지유나는 그 치마를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했다.사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온천에 갔을 때도 지유나는 지서현의 옷을 빼앗으려 했었다.하승민은 지서현을 바라보았다.그때 소문익이 지서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입을 열었다.“하 대표님, 세상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규칙이죠. 안 그렇습니까?”하승민의 시선은 소문익의 손에 꽂혔다. 아까 소문익이 지서현의 어깨에
지유나, 지예슬, 그리고 이윤희도 마치 따귀를 맞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지서현은 하승민을 바라보았다.“하 대표님, 이제 제 말 믿으시겠죠?”그녀의 맑은 두 눈은 영롱하게 빛났고 소문익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에 하승민의 잘생긴 얼굴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워졌다.‘이 요망한 여자가! 소문익까지 자기 치마폭에 둘러싸다니, 정말 대단한 여자야!’“서현아, 너 쇼핑하러 온 거잖아. 어때? 마음에 드는 원피스 있어?”점원은 곧바로 레이스 원피스를 가져왔다. “이 원피스가 손님께 아주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지서현은 고
소문익이 왔다.지유나 일행은 어제 동연당에서 소문익을 만났었기에 오늘 다시 만나자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소문익은 지서현 옆으로 다가왔다.“서현아, 잠깐 전화 받느라 밖에 나갔었는데 무슨 일 있었어? 뭔가 재밌는 걸 놓친 것 같은데.”지서현은 붉은 입술을 끌어올렸다.“아니. 타이밍 딱 맞춰서 잘 왔어. 다들 내 남자친구인 당신을 보고 싶어 했거든..”지서현은 소문익에게 눈짓했다.소문익은 바로 눈치채고 지서현의 가녀린 어깨에 팔을 둘렀다.“이분들은?”지서현은 한 명씩 소개했다.“이분은 지씨 가문 어르신, 이윤희 씨, 지
지예슬은 곧바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서현아, 부러워할 것 없어. C신은 내 남자친구야. 우리 곧 결혼할 거라고.”지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재산이 열 배로 늘었다며? 그럼 그 돈은 어디 있어? 그 C신이라는 사람이 언제 준다고 했어?”박경애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게...”“말 안 했나 보네요. 돈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C신이 열 배든 백 배든 마음대로 말할 수 있겠죠. 아까도 말했지만 그 C신이라는 사람은 사기꾼이에요. 알아서들 하세요.”지예슬은 곧바로 화를 냈다. 남자친구가 C신이라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