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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심장의 기억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3-25 09:38:53

재판이 끝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서울의 하늘은 흐렸고, 도시 전체가 비에 젖은 듯 눅눅했다.

수연은 여전히 병원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언론의 시선은 여전했지만,

그녀는 마치 그것들을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묵묵히 걸었다.

병원 복도는 길고, 냉랭했다.

하얀 형광등 아래로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지나치는 동료들이 조용히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그저 미소만 짓고 지나쳤다.

그녀의 표정엔 피곤이 묻어 있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엔 결심과 체념이 공존하고 있었다.

“차 교수님.”

낯익은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우혁이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단단했지만, 그 안에는 걱정이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괜찮아져야죠.”

“오늘은 무리하지 마세요. 기자들이 병원 입구에도 쫙 깔렸습니다.”

“알아요.”

그녀는 짧게 대답하며 수술실 복도로 향했다.

“수연 씨.”

그가 다시 불렀다. 그녀는 멈춰 섰다.

“그때 재판장에서 도연 씨가 했던 말, 전부 믿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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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288화. 라벤더의 약속

    햇살이 병원 건물의 유리벽에 부딪혀 반사될 때, 윤지아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오늘은 ‘라벤더 정원’ 개관식이 열리는 날이었다.몇 년의 시간 끝에 완성된 그 공간은 단순한 식물원이나 추모공간이 아니었다.그건 ‘두 사람의 약속’이 물리적인 형태로 세상에 남은, 살아 있는 증거였다.정원 입구에는 아직 봉인된 현판이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그녀의 시야에 환한 보라빛이 스며들 듯 번졌다.바람에 흩날리는 향기가 익숙했다.라벤더. 언제나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불러오는 향기.기념식 준비를 마친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였고,언론의 카메라가 세워지며 조명이 켜졌다.지아는 여전히 조용히 서 있었다.그녀의 손에는 오래된 펜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차수연이 썼던 펜.잉크는 거의 말라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늘 품고 다녔다.그 펜은 기억의 무게 를 지닌 물건이었다.“윤 원장님, 잠시 후 10분 남았습니다.”보좌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지아는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푸른 하늘 위로 얇은 구름이 떠 있었고, 그 틈으로 부드러운 빛이 쏟아졌다.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교수님, 대표님… 오늘은 당신들의 약속이 완성되는 날이에요.”정원은 병원 한가운데 자리했다.유리 온실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어디서도 볼 수 없는 따뜻한 구조였다.라벤더 화단은 빙 둘러 동그랗게 배치되어 있었고,중앙에는 작은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였다.그 의자는 그들 의 자리였다.의도적으로 이름표는 붙이지 않았다.누구의 자리라 규정하기보단,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상징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식이 시작되자 병원 관계자들과 언론, 환자 가족들,그리고 오랜 동료들이 자리를 채웠다.지아는 단상 앞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다.“라벤더 정원은, 단순히 한 병원의 상징이 아닙니다.이곳은 누군가를 위해 싸우고, 버티고,그리고 사랑했던 모든 사람의 흔적을 품은 공간입니다.”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손끝은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지아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287화. 잉크가 새긴 목소리

    가을비가 그친 병원 정원에는 낙엽이 절반쯤 물들어 있었다.윤지아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며칠째 이어지는 회의와 연구 일정 때문에 몸은 지쳤지만, 머릿속은 이상하게 또렷했다.그녀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뇌었다.끝난 이야기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일 수 있다.라벤더 프로젝트의 자료를 정리하던 중이었다.기록실 한쪽 서랍, ‘Private’이라 손글씨로 적힌 파일박스를 옮기다 무언가 작은 노트 하나가 떨어졌다.가죽 표지, 모서리의 미세한 균열, 그리고 볼펜으로 눌러 쓴 이름.차수연.그녀는 본능적으로 손끝이 떨렸다.표지를 열자, 안쪽에 잔잔하게 번진 잉크 자국이 있었다.‘201X년 3월, 봄비가 처음 내리던 날부터.’그 문장 하나로 이미 마음 한가운데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했다.지아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페이지를 넘겼다.그 안에는 의료 기록이 아닌, 한 사람의 온전한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오늘은 이상하게 그 사람의 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익숙하게 들리던 구두의 리듬이 사라지고 나니 복도는 너무 길다.그가 떠난 게 아니라, 내 하루에서 사라진 것 같다.”“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그 사람과의 대화뿐 아니라내 안의 목소리 하나가 사라지는 일이구나.”지아는 손끝으로 글자 자국을 천천히 따라갔다.잉크가 눌린 자리에 손톱이 걸렸다.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그 필압에서 느껴지는 건 고통보다도 다짐에 가까웠다.다음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나는 여전히 그가 심장 수술 때 쓰던 펜을 사용한다.그 펜은 잉크가 조금씩 새고 있지만, 그 새는 흔적이 마치 그 사람의 목소리 같다.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내 옆을 스친다.”그녀는 숨을 고르며 다음 장을 넘겼다.종이 한쪽이 반쯤 찢어져 있었고, 거기엔 짧은 문장이 남아 있었다.“나는 아직도 그를 ‘대표님’이라 부를까,아니면, 그가 마지막에 바랐던 대로 우혁 씨라고 불러야 할까.”지아는 속으로 답했다.둘 다 맞아요. 그건 존경과 사랑이 동시에 남아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286화. 목소리의 기억

    비가 내리던 새벽이었다.병원 복도의 조명은 절전 모드로 절반만 켜져 있었고, 복도 끝 자동문 근처의 불빛이 물방울을 따라 흔들렸다. 윤지아는 야간 당직을 마치고도 바로 집에 가지 않았다. 병동에서 내과 자료를 업데이트하다가 문득 기록실 한켠에 남겨둔 상자가 떠올랐다.며칠 전, 그 상자 속에서 강우혁의 편지를 찾았을 때 느꼈던 묘한 감각이 그녀를 다시 불렀다. 그때 그 편지는 시간의 냄새가 났다. 오래전 멈춘 시간이, 종이 한 장 안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그녀는 조용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복도의 공기는 축축했고, 환기구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이 묘하게 냉기와 향기를 함께 품고 있었다. ‘기록보관 2실’이라 적힌 문을 밀자, 먼지 냄새 대신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지아는 작은 스탠드를 켜고, 이전에 발견했던 박스를 다시 꺼냈다. 서류 사이에 끼워진 오래된 검은색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눈에 띄었다.라벨에는 서툰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Lavender α-3. Recording log (voice).”그녀는 숨을 멈췄다.“혹시…”지아의 목소리가 작게 흔들렸다.테이프의 케이스 안에는 노란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 있었다.“정상적인 연구 기록용이 아님. 테스트 중 대화 일부 포함 - W.”‘W.’이니셜 하나만으로도 지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강우혁.지아는 조심스럽게 병원 아카이브실의 구형 녹음기를 꺼냈다.카세트를 삽입하자, 짧게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스피커가 숨을 내쉬었다.그녀는 볼륨을 아주 낮게 돌려놓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테스트 로그, 시작합니다. 202X년 4월 14일, 오후 3시 12분.’그의 목소리였다.낮고 단정한 톤.논문 발표를 위해 조심스럽게 발음하는 듯한, 그 특유의 리듬. 지아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목소리가 공기 중을 따라 천천히 흘러들었다.‘라벤더 잎의 생장 주기는 오전 햇빛보다 오후의 간접광에서 더 안정적임을 확인.차 과장이 오전 세 번, 오후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285화. 라벤더의 향기가 말할 때

    침묵이 몇 초 이어졌다. 무대 뒤 스크린에는 라벤더 정원의 조감도가 떠 있었다. 흰 건물과 보랏빛 화단이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진 그림이었다.손 들기가 요청되자, 위원들의 표가 하나둘 올라갔다. 윤리팀장은 약간의 조건을 달았다. “개인 기록 공개는 엄격히 제한하되, 인용 문구는 기금 철학으로 축약해 사용.” 이사회 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원 통과. 박수는 크지 않았지만 길었다.단상에서 내려오는 길, 지아는 눈앞이 순간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대 조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고개를 돌리자, 강지안이었다.“잘하셨습니다.”“고맙습니다.”“오늘은…” 지안이 말끝을 고쳤다. “오늘은 그분들이 많이 웃으실 것 같네요.”지아는 대답 대신 미소로 응답했다. 말보다 미소가 정확할 때가 있다. 특히, 남겨진 사람들 사이에서는.저녁 회진이 끝나갈 무렵, 응급 호출 벨이 붉게 점멸했다. 내과 72병동, 11번. 지아는 반사적으로 뛰었다. 복도 끝의 침상 주변이 급히 정리되고 있었다.환자는 미만성 폐렴으로 입원해 있던 노인이었다.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 산소포화도 78%. 보조호흡근이 심하게 올라와 있었다.“비강 캐뉼라 5리터로 올리고, 네뷸라이저 준비하세요. 동맥혈가스 채취, 이동형 흉부 X-ray 호출. 양압 환기 준비할게요.” 지아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끊기지 않았다. 의식은 혼미했고, 청색증이 빠르게 번졌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천천히, 그런데 놓치지 말고.”환자의 흉곽이 들썩일 때마다 이명이 들렸다. 지아는 마스크를 바짝 밀착시키고 Ambu bag을 리듬 있게 눌렀다. 손끝 감각을 믿고, 환자의 흉벽 탄성에 호흡량을 조정했다. 모니터의 파형이 비로소 매끈하게 그려지기 시작할 때, 그녀는 바늘처럼 긴 숨을 내뱉었다.순간, 허공에서 라벤더 향이 스쳤다. 정말로 향기가 난 건지, 마음이 만든 환각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향기가 ‘괜찮아’라고 말하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284화. 라벤더의 언어

    기록실 문이 열릴 때마다 먼지에 햇살이 부딪혀 잘게 부서졌다. 오래된 서류철은 책등이 닳아 있었고, 누군가의 시간이 겹겹이 눌린 종이마다 손 때가 묻어 있었다. 윤지아는 흰 장갑을 낀 채 서가의 하단 칸을 비우고, 연도 스티커가 반쯤 벗겨진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과-연구 보관(비공개)’. 라벨의 글씨가 희미했지만, 묘하게 또렷하게 그녀의 시야를 잡아끌었다.철끈을 풀자 얇은 천이 덮여 있었고, 그 아래에서 작은 금색 클립에 묶인 봉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보리 색 종이의 테두리는 살짝 갈변되어 있었지만, 봉투 전면의 필체만큼은 너무도 살아 있었다.'차수연에게. 언젠가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을 수 있다면.'지아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문장의 리듬, 획의 눌림, 끝에서 작은 점처럼 찍히는 습관 의무기록 곳곳에서, 연구 보고서의 승인 서명에서, 그녀가 수없이 보았던 그 남자의 흔적이었다. 강우혁.봉인을 뜯기 전에, 그녀는 한 번 더 주위를 살폈다. 정오를 넘어선 햇빛이 사선으로 스며들고, 먼 곳에서 카트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낮게 울릴 뿐이었다. 지아는 봉투를 품에 안고 조용히 기록실 문을 닫았다.라운지의 사람 소리가 잦아들 무렵, 그녀는 빈 회의실로 들어갔다. 벽시계 초침이 일정하게 움직였고, 냉온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이 형광등 커버를 미세하게 떨게 했다. 의자에 앉아 봉투를 열었다. 종이 냄새 사이로 미약하게 라벤더 향이 섞여 있었다. 오래전 누군가의 손이 닿았다는 증거처럼.수연 씨.첫 줄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그 호칭 하나만으로도 편지의 시간은 현재가 되었다. 지아의 눈동자가 문장을 따라갔다.내가 이 글을 쓰는 순간은 연구실 시계가 오후 열한 시를 가리키는 때입니다. 오늘도 당신은 새벽 회진을 뛰고 와서 커피를 반 잔 남겼어요. 라벤더 잎만 손끝으로 만지다가 급히 수술장으로 가는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없으면 이 방의 공기는 조금 묵직해지고, 당신이 들어오면 환기창이 열리듯 가벼워집니다.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283화. 라벤더가 피던 날

    시간은 참 이상했다.그녀가 떠난 지 벌써 십오 년이 흘렀다.병원의 풍경은 많이 달라졌고, 복도엔 젊은 의사들의 활기가 넘쳤다.하지만 어느 계절,봄이 오면 여전히 병원 구석구석엔 은은한 라벤더 향이 맴돌았다.누구도 그 향의 시작을 모르지만, 모두가 그 향을 ‘차수연의 향’이라 불렀다.그날 아침, 한 여의사가 진료실 책상 위의 기록을 넘기며 말했다.“교수님, 이거 보세요. 예전 연구 기록인데요, 작성자 이름이 ‘강우혁’이에요.”젊은 의사, 윤지아. 그녀는 병원 내과의 새로운 담당 의사였다.날카로운 눈빛과 섬세한 손끝을 가진 그녀는환자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법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날,그녀는 낡은 파일 속에서 한 문장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손이 멈췄다.“사랑하는 사람에게 닿을 수 없을 때, 나는 그 사람의 손을 대신 잡아주는 일을 하겠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 문장을 따라 읽었다.묘하게, 그 문장엔 체온이 느껴졌다.마치 종이 속에서도 숨결이 살아 있는 듯했다.“이 연구, 혹시 라벤더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던 거 아세요?”지아의 선배가 덧붙였다.“그건 오래전, 차수연 선생님이 주도했던 임상 기록이에요.두 사람은… 함께 연구했었죠.”지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차수연.’그 이름은 의대 시절 교재 속에서도,의사들 사이의 존경 속에서도 늘 조용히 빛나던 이름이었다.며칠 후, 지아는 퇴근길에 병원 옥상으로 향했다.거기에는 오래된 화분들이 있었다.누군가 가끔씩 손을 보살피는 듯, 풀 한 포기 시들지 않고 고요히 살아 있었다.그녀는 라벤더 화분 앞에 멈춰 섰다.바람이 살짝 스쳤고, 보랏빛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이 향기…”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 향은 단순한 꽃의 향이 아니었다.어딘가 따뜻하고, 오래된 사람의 기억처럼 느껴졌다.그때, 지아의 휴대폰이 울렸다.[보호자: 강지안 님 면담 요청]그 이름을 보는 순간, 그녀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낯설지 않았다.‘강지안… 어디서 들은 적이 있지?’다음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79화. 기억의 그림자

    늦은 밤, 병원 기록실. 형광등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서류 더미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수연은 여전히 오래된 차트를 손끝으로 더듬고 있었다. 페이지마다 스며든 잉크 냄새가 낯설면서도 어쩐지 익숙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장면들은 분명히 현실의 파편인데, 이름을 붙이려 하면 흩어져 버렸다.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조여왔다. 그녀는 메스를 들고 필사적으로 움직이던 자신의 손을 떠올렸다. 심장이 멎어가는 환자, 절망 속에서도 끝내 맥박을 되살리던 순간. 그때 들려왔던 비명 같은 심전도 소리와 환자의 가슴이 다시 뛰던 울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48화. 침묵 속의 진실

    밤은 도시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지만, 병원 복도는 결코 잠들지 않았다.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 환자의 신음과 기계음이 뒤섞여 이어졌고, 긴급 호출을 알리는 경보음은 때때로 공기를 갈라냈다. 긴 하루가 저물었음에도 차수연의 어깨에는 피로 대신 긴장이 감돌았다. 그녀는 회복실 앞에서 한참 동안 서성이며 박준호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다.문틈 사이로 비친 그의 얼굴은 아직 창백했지만, 의식은 조금씩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 순간을 기다리던 듯 수연의 가슴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조여왔다. 다섯 해 전의 조각난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41화. 기억의 파편

    윤리위원회가 보류 결정을 내린 직후에도 병원 안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기자들은 퇴근하지 않고 로비와 정문 앞을 지키며 “차수연”이라는 이름을 연이어 외쳐댔다. 마치 그녀가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카메라가 불꽃처럼 터져 나올 기세였다.수연은 잠시 병원 뒤편 작은 휴게실에 몸을 숨겼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잔잔했지만, 마음속 파도는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또 흔들리면 안 돼. 오늘 환자를 살렸잖아. 그게 나야. 그게 내 자리야.’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도혁의 차가운 시선이 여전히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36화. 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

    병원 이사회 회의실. 고급스러운 샹들리에 아래, 길게 이어진 테이블 주위로 임원들이 앉아 있었다. 공기는 잔뜩 팽팽했고, 바깥에서는 여전히 기자들의 웅성거림이 벽 너머로 스며들었다.민도혁은 의자에 기댄 채 차갑게 미소 지었다.“이사회는 증거 없는 억측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차수연 교수의 복귀 문제는 이미 끝난 이야기예요. 오늘은 그를 공식적으로 제명하고, 면허 취소까지 권고할 겁니다.”임원들 사이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미 도혁의 손에 쥐어진 표가 많다는 뜻이었다.그러나 그 순간, 회의실 문이 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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