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네가 왜 여기 있어?”기현주는 정우진이 은유라와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가까이 다가간 후에야 정우진 곁에 있는 사람이 신시아인 것을 보자 안색이 굳어졌다.“여사님, 안녕하십니까?”신시아가 정중히 인사했다.“대표님을 모시고 집에 돌아온 거예요.”말을 마친 뒤 정우진에게 고개를 숙였다.“대표님, 다른 일 없으시면 먼저 가보겠습니다.”“응.”정우진은 콧속으로 짧게 내뱉은 뒤 신시아의 차가 떠나기도 전에 먼저 별장 안으로 걸어갔다.기현주는 신시아에게 두어 마디 야단을 치려 했다. 앞으로 정우진과 단둘이 있는 일을 줄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두 사람이 바로 제 갈 길을 가자 아무 말도 못 한 채 몸을 돌려 정우진을 쫓아갔다.“너와 유라, 결혼식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해야겠다.”“엄마가 은씨 가문 분들과 상의해서 하시면 돼요.”정우진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신발을 갈아신고는 곧바로 계단을 향해 올라갔다.기현주는 계단 입구에 서서 정우진을 불러 세웠다.“양가가 함께 상의해야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너 언제 시간 되니?”“엄마가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정우진이 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전 일이 바빠서요.”“일을 핑계로 삼을 생각 마라!”기현주가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평생에 한 번 있는 일인데 대충 넘어갈 생각하지 마!”정우진이 허리를 계단 난간에 기대자 머리 위에 있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그의 몸을 비췄다. 그러자 온몸에서 후광이 뿜어져 나와 거침없는 아우라를 풍겼다.“두 번째예요.”“지난 일이잖아! 왜 또 그 여자 얘기를 꺼내는 거야!”화가 난 기현주는 가슴이 들썩였다.“그때 일은 없었던 걸로 해!”정우진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러니까 신시아가 지금 그에게 이렇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그 2년간의 결혼 생활을 없었던 일로 여기는 셈이었다.정우진은 입술을 꽉 앙다물었다.“시간 언제 돼? 은씨 가문 사람들이랑 같이 밥 먹고 결혼식 세부 사항을 논의해야지?”
“은유라, 내가 말했지, 나를 건드리면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고. 더 빨리 죽고 싶으면 마음껏 해봐.”은유라가 코웃음을 쳤다.“하루라도 박씨 가문 체면 유지하고 싶으면 내 말 잘 들어, 정우진과의 우정을 유지하고 싶다면 나 협박하지 마!”이를 악문 박도영은 아무 감정이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정우진은 널 사랑하지 않아, 평생.”그 순간, 은유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너와 무슨 상관인데!”은유라가 이를 갈며 말했다.“내가 시킨 일은 어떻게 됐어? 언제쯤 신시아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 알 수 있냐고?”박도영이 손을 들어맞은 쪽 뺨을 문질렀다.“진료 기록을 다른 의사 앞으로 옮겼어. 나도 어쩔 수 없네.”“뭐?”은유라의 표정이 굳어졌다.“미래의 정씨 가문 사모님, 수완이 만만치 않잖아. 다른 의사한테서 다시 내 손으로 옮길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겠어?”박도영이 비꼬는 어조로 말하자 은유라가 한마디 했다.“하선재 눈앞에서 너를 그 안에 집어넣는 것도 이미 하늘의 별 따기였어. 그런데 그걸 또다시 할 수 있다고 생각해?”“하선재?”박도영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연극, 제대로 하는구나. 하선재까지 끌어들이다니.”“함부로 말하지 마. 내 연락이나 조용히 기다려.”은유라는 담배꽁초를 박도영의 몸에 던지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박도영은 은유라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 담당자’였다. 어떻게든 박도영을 최대한 이용해 먹어야 했다.떠나는 은유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박도영의 시선은 마치 혹한기에 얼어붙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하지만 은유라가 쥐고 있는 것을 생각하자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려 차로 걸어갔다....고요한 차 안, 반쯤 내려져 있는 창문으로 바람이 휙휙 불어왔다.정우진은 미간을 짚은 채 검은 눈동자로 창문에 비친 신시아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윤기 나는 검은 생머리에 하얀 살결은 보고만 있어도 눈이 호강할 정도였다. 신시아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요즘 신시아와 단둘이 있
신시아가 놀란 듯 박도영을 바라보았다.‘정우진 같은 남자가 감정도 없이 결혼을 할까?’처음에 그녀와도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을 뿐이니...박도영의 질문은 하나 마나 한 것이 아닌가?“술 취했으면 집에 가서 자, 여기서 헛소리하지 말고.”정우진은 대답을 회피하며 박도영의 외투를 집어 그의 머리 위로 던졌다.“먼저 간다.”말을 마친 뒤 먼저 룸을 나가자 신시아도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따라나섰다.박도영은 머리 위의 외투를 잡아 내리며 룸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한마디 한 뒤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세 사람이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룸 안이 텁텁한 연기와 술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어 신시아는 숨쉬기가 힘들었다.두 사람은 마치 연기와 술 항아리에 몸을 담갔다 나온 듯 냄새가 온몸에서 진동했다.신시아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난 뒤 구석으로 몸을 움츠렸다.“정우진 곁에 몇 년 있었어요?”박도영이 엘리베이터 벽에 기댄 채 뒤돌아 신시아를 바라보았다.정우진도 그녀를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5,6년 정도 됐나...”“5년 7개월입니다.”신시아가 고개를 숙여 답했다.“그럼 본인 입장에서 말해봐요, 정 대표가 은유라한테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박도영은 이 화제에 상당히 흥미가 있는 듯했다.반면 정우진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미간도 어느새 잔뜩 찌푸렸다.“당연히 있죠.”신시아의 말에 박도영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감정이 있다면 왜 이렇게 몇 년이나 지나서야 결혼을 하는 걸까요?”더 이상 대답할 생각이 없었던 신시아는 일부러 박도영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정우진도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러자 좁은 공간은 한동안 쥐 죽은 듯한 적막에 휩싸였다.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우진 오빠, 박도영!”엘리베이터 밖에서 은유라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팔에 검은 에르메스 백을 걸친 채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정우진의 팔을 붙잡아 그를 엘리베이터 밖으로 끌어냈다.그제야 신시아가 곁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다만 박
채 선생님은 신시아의 배가 전혀 티가 나지 않자 몇 번이고 다시 당부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신시아는 김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정우진을 마주친 일에 대해 말했다.“하늘도 무심하시지, 너한테 별 난관을 다 겪게 하려고 작정했나 봐! 그런데 정우진이 산부인과 의사한테 무슨 일로 간 거야? 설마 산부인과 병이라도 있는 거야?”김지원은 통화하는 내내 가슴이 철렁했다.운전하던 신시아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네 집으로 갈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가는 길에 사 갈게.”“밀크레이프 케이크 하나랑, 그리고...”김지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통화가 끊겼다.정우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와 신시아는 바로 받았다.“여보세요? 대표님.”“밤 10시에 나 데리러 소울로 와.”전화기 너머로 정우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습니다.”소울은 경원에서 가장 큰 사치 향락 공간으로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대부분 신분과 지위가 만만치 않았다.하지만 정우진은 업무가 매우 바빠 그런 곳을 별로 가지 않았다.신시아가 밤에 정우진을 데리러 소울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들은 김지원은 정우진이 인간도 아니라고, 한밤중에 사람을 괴롭힌다고 욕했다.“높은 월급은 쉽게 받는 게 아니야.”신시아는 이런 생활 리듬에 익숙해져 있었다.다만 오늘 채 선생님의 말을 떠올리자 배 속의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끼니마다 최대한 많이 먹으려 했지만 바쁜 업무 때문에 워낙 소모가 커서 태아에게 충분히 영양을 공급하지 못하고 있었다.“박도영 선생님 꽤 잘생겼더라.”김지원이 인터넷에서 박도영의 자료와 사진을 찾아보고는 신시아에게 물었다.“실물은 어땠어?”“내가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야.”신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 말로 하자면 비쩍 마른 개 같은 스타일이야.”김지원은 남자들을 여러 종류로 분류했다.늑대 같은 개, 강아지, 비쩍 마른 개, 맹수 같은 개......종류들이 하도 많아서 신시아는 외우지도 못할 정도였다.“난 마른 개가 좋아.”김지원이 망설임 없이 말
“아니에요.”신시아는 깔끔하게 부인했지만 심장은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정우진이 물끄러미 신시아를 응시했다.“아는 사이야?”서른 살 전후인 박도영은 흰 피부에 가느다란 눈매, 가르마까지 있는 머리는 정말 스타일리시하기 그지없었다.마르고 약해 보이는 체형 때문에 정우진 옆에 서면 더욱 가냘파 보였다.목소리 또한 맑고 듣기 좋았으며 부드럽고 세심한 유형으로 꽤 친근감이 있었다.신시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대표님, 지원이 출산 후 6개월 검진 예약을 하러 왔어요. 그분의 담당 의사가 퇴직하셔서 박도영 선생님께 예약을 잡으라고 하더라고요.”김지원도 신시아와 같은 산부인과 의사가 담당했기에 함께 박도영에게 인수인계되었다.박도영이 정우진과 신시아를 번갈아 보자 정우진이 간결하게 박도영에게 신시아의 신분을 설명했다.“내 부하직원이야.”“그렇구나.”박도영이 바로 대답했다.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정우진은 그제야 신시아에게서 시선을 옮겼다.“먼저 갈게.”이 말은 박도영에게 한 것인지 신시아에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다만 정우진이 가겠다는 말에 신시아는 재빨리 옆으로 비켰다.“안녕히 가세요.”고개를 숙인 채 시선은 남자의 곧고 긴 두 다리만 바라봤다.정우진이 멀어진 후에야 시선을 거두고 박도영을 바라보았다.“박 선생님, 정 대표님이랑 아는 사이예요?”고개를 끄덕였던 박도영은 이내 다시 저었다.“아니요. 그냥 공통으로 아는 사람이 있는 정도예요.”신시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김지원의 서류를 박도영에게 건넸다.“선생님, 이건 제 친구의 진료 기록이에요. 받아주세요.”서류를 받아 든 박도영은 신시아의 손에 또 한 부가 있는 것을 보았다.“이건...”“한 부 더 출력했어요.”신시아가 웃으며 말했다.“기록 이관 부탁드립니다. 저는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진료 기록을 가방에 넣고 박도영에게 깍듯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한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하지만 병원
간호사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주임 의사 선생님이 해외에서 오신 분이라 워낙 유명하셔서 많은 분들이 검진을 오세요. 기록을 일찍 이관하시면 선생님이 우선적으로 진료를 봐주셔서 다음 산부인과 검진 때 예약이 안 되는 문제도 피하실 수 있어요.”경원 병원은 국내에서 으뜸가는 병원이라, 의사마다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신시아가 처음 산부인과를 찾았을 때도 암표상을 통해 예약했다. 나중에 산부인과 검진 기록을 등록하고 내부적으로 예약을 할 수 있게 된 후에야 조금 수월해졌다.“그럼 기록 이관 예약을 잡아주세요. 이관할 때 미리 알려주시고요.”“내일 시간 괜찮으시면 내일 오시면 돼요. 내일 오전에 선생님이 이관 처리를 위해 특별히 시간을 내셨어요.”내일은 수요일이라 오전에는 회의가 없었다. 구창 그룹과의 프로젝트도 정상 궤도에 있어 휴가를 낼 수 있었다.신시아는 내일 가겠다고 말한 뒤 정우진에게 휴가 신청을 내기 위해 퇴근 전에 꼭대기 층 사무실을 찾았다.사무실 문을 두드리자 남자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문을 밀고 들어간 신시아는 정우진이 창가에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흰색 와이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리고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상태였다. 파란 핏줄이 팔뚝 위에 또렷하게 드러났다.뒤돌아보며 신시아에게 기다리라는 듯 손짓하자 신시아는 사무실 중앙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돌아왔으니 한 번은 봐야지. 내일 저녁에 내가 자리를 만들어서 환영 파티를 해주마.”“그럼 오전에 너한테 한 번 들를게, 그리고 저녁에 다시 보자.”정우진은 책상 앞으로 돌아와 컴퓨터에 있는 일정표를 확인했다.내일 오전에는 회의 일정이 없어,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전화를 끊고 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대표님, 내일 오전에 개인 일이 있어서 반차를 내고 싶습니다.”말을 마친 신시아는 정우진의 눈빛이 꽤나 차가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정우진은 그녀가 장건우를 만나러 가는 건지 묻고 싶었다.하지만 입술만
신시아는 하선재와 진지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점심을 들고 방으로 돌아가면서 메시지를 보냈다.[하 대표님,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저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지 말아 주세요.]몇 초 지나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신 비서, 나야!”하선재의 목소리였다.신시아는 일어나려다 다시 앉아 메시지를 보냈다.[식사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메시지로 이야기하시죠.]문밖은 조용해졌고, 곧 답장이 왔다.[내가 안 밀어 넣어도 은유라는 신 비서를 가만 안 둘 거야. 걱정하지마 마. 내가 신 비서를 지켜줄게
신시아는 호흡이 흐트러졌다. 손이 떨려 면봉이 하선재의 입안을 찌르고 말았다.“읍, 퉤퉤!”하선재는 약상자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대로 몸을 숙여 쓰레기통에 몇 번이고 뱉어냈다.신시아는 재빨리 감기약을 주워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따뜻한 물을 한 잔 떠왔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입 좀 헹구세요.”하선재는 미지근한 물을 받아 입을 헹궜다. 다시 감기약을 찾으려 했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친구가 며칠 전에 두고 간 거예요.”신시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자리에 앉았다. 행여나 그가
하지만 신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묵인이니까.그녀는 정우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 깊은 씁쓸함 때문에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저는 백영 그룹을, 그리고 대표님을 배신할 이유가 없습니다.”은유라가 비웃음을 날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설명할 기회를 주는 거지 억지 부리라는 게 아니잖아요!:다만 신시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선은 오직 정우진에게만 머물러 있었다.마음은 이미 절망으로 가득했지만 정작, 이 순간이 닥치자 그녀도 모르게 작은 희망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정우진이 자
“제가 왜 유라를 방관하겠어요? 절대 유라 홀로 남겨지는 일은 없습니다.”정우진은 기현주의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엄마는 일단 이사회에 어떻게 설명하실지 고민해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진상을 밝히면 그때 가서 어떻게 대처하실지 말이에요.”“뭐?”기현주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집으로 돌아온 신시아는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휴대폰을 꺼내 어젯밤 하선재의 친구 요청을 수락했다.하선재는 곧바로 이모티콘 하나를 보내왔다.이에 신시아가 음성 통화를 걸었다.“대표님, 기사 보셨죠? 지금 백영 그룹에서 제가 대표님께 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