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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작가: 인가연
신시아는 보육원 출신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케이스였다. 우수한 성적 덕분에 국내 최고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고 그곳에서 정우진을 만났다.

수많은 부잣집 도련님들 사이에서 그는 단연 눈에 띄었다.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그녀의 시선을 단번에 장악한 사람이 바로 정우진이었다.

신시아는 지난 2년간의 결혼 생활과 밤마다 나누었던 그 뜨겁던 순간들만으로 평생을 버틸 추억이라 치부하려 했다.

그런데 하필 배 속에 아이가 생겨버렸다.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혈육을 차마 지울 수는 없었다.

정우진이 아이를 빼앗아갈까 봐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론 그가 혹시 은유라의 눈치를 보느라 아이의 존재조차 부정하지 않을까 하는 요행을 바라기도 했다.

그런데 결국...

신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평평한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정우진이 그날 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만반의 준비를 다 해야 한다.

그가 모르는 곳에서 몰래 아이를 낳으면 괜찮지 않을까?

설령 들킨다 해도 이번 일을 겪었으니 다음부턴 진짜 아이가 생겼다 해도 찾아오지 않겠지...

연말, 백영 그룹의 연간 보고회 날.

본사로 향하는 신시아의 손에는 연간 업무 보고서와 함께 사직서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경원에서, 그리고 정우진 곁에서 가능한 가장 먼 곳으로!

회의 시간은 9시 10분, 하지만 9시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우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까 들어올 때 봤는데 은유라 씨가 대표님 사무실에 있더라고요.”

다른 지사 책임자가 나직이 말했다.

“대표님 왜 늦으시나 했더니 은유라 씨 챙기느라 바쁜 모양이네요.”

정우진은 늘 일 중심이었고 시간 약속에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은유라의 등장이 그의 그 철저했던 원칙마저 깨뜨려버렸다.

신시아는 그제야 진정한 편애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회의실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살짝 걷어내고 틈새로 맞은편의 대표이사실을 훔쳐보았다.

대표이사실의 커튼은 반쯤 닫혀 있었다. 온통 짙은 회색으로 정돈된 실내, 그 사이로 은은하게 비치는 선명한 보랏빛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때 정우진의 비서였던 신시아에게 그 공간은 누구보다 익숙한 곳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그림 하나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의자에 앉은 정우진과 책상에 기댄 은유라,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나직이 웃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은밀하고 친밀한 광경을 이루고 있을지도...

신시아가 백영 그룹에 들어온 건 오직 정우진 때문이었다.

그저 그의 곁을 맴도는 작은 존재로 남으려 했건만 어느새 이렇게 깊숙이 얽혀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그 깊은 늪에 빠진 건 오직 그녀뿐인지도 모른다. 정우진에게 그녀는 그저 스쳐 가는 인연에 불과할 테니까.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신시아는 편애는커녕 어떠한 특별한 대우도 받지 못했다.

목숨 걸고 정우진의 곁에 머물려 했던 지난 시간은 과연 옳았던 걸까?

그와 몸을 섞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다행이다 싶다가도 곧이어 밀려오는 건 지독한 후회뿐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먹먹하게 차올랐다.

“각자 보고를 시작하시죠. 회의는 전체 녹화되며 대표님께서 나중에 다시 보실 겁니다.”

임정현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에 신시아도 황급히 커튼을 내리고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각 지사의 이사들이 보고를 이어갔다. 정우진이 빠지자 보고는 놀랍도록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원래 세 시간 예정이었던 회의가 두 시간 만에 끝났다

“이제 연회장으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대표님도 곧 합류하실 예정입니다.”

임정현은 각 지사에서 올라온 연간 보고서들을 하나씩 챙겼다.

신시아의 보고서까지 건네받던 순간, 그녀가 임정현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임 비서님, 이것 좀 대표님께 전해주실래요?”

그녀는 사직서를 봉투에 담았다. 본래 직접 전해줄 생각이었지만 은유라가 대표이사실에 있었기에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직접 주시지 그러세요.”

임정현은 정우진의 수행비서이고 신시아는 한때 정우진의 비서였다. 두 사람은 전부터 자주 손발을 맞춰온 사이였으며 무엇보다 임정현은 회사 안에서 유일하게 두 사람의 결혼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정우진의 사무실 쪽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노크하고 들어가 봐요. 어차피 업무 관련이잖아요.”

회의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틈으로 대표이사실 안의 광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은유라는 정우진의 의자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밀착한 거리에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각진 정우진의 얼굴에는 어느덧 부드러움이 깃들었다. 금테 안경 너머 평소 냉철하기만 했던 눈동자에도 오롯이 애정만이 흘러넘쳤다.

임정현은 이미 반년 넘게 이런 광경을 봐왔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신시아는 처음 보는 장면인지라 숨이 턱 막혔다.

이혼하고 인사발령을 받아서 정우진에게서 멀어지면 그를 향한 마음도 조금씩 옅어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다른 여자와 이토록 밀착해 있는 그를 직접 목격하자 심장에 바늘이 촘촘히 박힌 듯 찌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아니요, 괜히 방해만 될 것 같네요. 임 비서님이 대신 전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임정현은 봉투를 건네받으며 덤덤히 대꾸했다.

“별말씀을요.”

그는 신시아가 아마 정우진과의 관계를 의식해 일부러 거리를 두는 거라고 여겼다. 이혼 후 스스로 전근을 신청한 데 이어 이제는 사적인 만남조차 피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또 봬요, 임 비서님.”

신시아는 서류 가방을 챙겨 들고 임정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연회는 참석하지 않을게요.”

연회장에 가서 정우진과 은유라가 다정하게 붙어 있는 꼴을 지켜볼 바에야 일찍 집에 가서 인수인계 서류를 정리하는 편이 나았다.

정우진은 보통 갑작스러운 사직 신청이라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면 승인해 주는 편이었다.

연말 휴가까지 남은 2주면 그가 후임자를 구해 인수인계까지 마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신시아는 떠날 곳을 다시 구상해야 했다. 경원을 벗어나 어디로 가야 할까?

백영 그룹의 지사가 없는 곳, 정우진이 절대 발을 들일 일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한다.

임정현은 보고서들과 신시아의 사직서를 정우진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대표님, 회의록은 정리되는 대로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신 비서님, 아니 신 이사님이 대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정우진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서류 더미를 훑었다.

맨 위에 놓인 [신시아] 이름 석 자가 단출하게 적힌 봉투가 시야에 들어오자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얘 지금 어디야?”

임정현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이미 떠나셨습니다.”

정우진이 손을 뻗어 봉투를 집어 들고 막 뜯으려던 찰나, 은유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나 화장실 좀.”

다만 그녀는 화장실이 아닌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년 전, 정우진이 갑작스레 결혼했을 때 대외적으로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지만 은유라의 어머니와 정우진의 어머니가 워낙 막역한 사이였기에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은유라는 귀국하고 나서야 어머니를 통해 정우진의 결혼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작 알았더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해외에 머물지도 않았을 텐데...

다행히 그녀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정씨 가문으로부터 정우진과 신시아가 이혼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였다.

비록 이혼했다지만 은유라는 전설처럼 떠도는 ‘전처’라는 여자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비서 출신으로 정우진의 아내 자리에 올랐다니 예쁘고 똑똑하고 유능하긴 하겠지.

하지만 근본 없는 출신이라 결말이 정해져 있던 관계였다.

그 여자가 제법 눈치 있게 이혼 후 전근을 신청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방금 임정현에게 건넨 봉투를 보니 신시아가 결코 순순히 물러날 인물은 아닐 듯싶었다.

은유라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지만 이미 엘리베이터가 내려간 뒤였다.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대체 그 봉투 안엔 뭐가 들었을까?

연애편지? 선물? 고백 카드? 아니면 손편지?

생각할수록 그녀의 발걸음만 더욱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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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패딩 자락을 끌어당겨 아직 평평한 배를 가렸다.“했어요 출근. 올해는 유독 추위를 타네요. 나이를 먹었나 봐요.”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제 노트북이 필요하신가요? 그럼 차에서 가져올게요.”“내 거 써.”정우진이 노트북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잠금 화면에 남녀의 뒷모습이 담긴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띄워져 있었다.신시아는 한눈에 알아봤다. 남자는 정우진이고 여자의 실루엣을 보아 은유라와 닮아 있었다.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곧장 파일을 열어 기계적으로 회의록을 작성하기 시작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4화

    거실에 있던 몇 사람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정우진의 어머니 기현주가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왔다.쉰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그녀의 몸매는 30대처럼 완벽하게 관리되어 있었다.그녀는 빨간 숄 하나만 어깨에 걸친 채 영하 10도에 달하는 바깥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님을 맞으러 나섰다.눈이 부시던 헤드라이트가 꺼지자 신시아는 비로소 정우진과 함께 차에서 내리는 은유라를 똑똑히 보게 됐다.평소 신시아 앞에서는 고고하게 거리만 두던 기현주가 은유라에게는 제 팔짱을 흔쾌히 내어주고 있었다.정우진은 입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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