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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인가연
은유라가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임정현은 한창 비행기 티켓을 예매 중이었다.

“오빠는요? 비행기 티켓은 왜 예매해요?”

“휴식실에 계세요. 지사에 급한 일이 생겨 대표님께서 급히 출국하셔야 합니다.”

임정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은유라가 가방에서 여권을 꺼냈다.

“내 것도 같이 예매해줘요. 따라갈 테니까.”

“네?”

임정현이 당황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에 은유라는 당연하다는 식으로 대꾸했다.

“왜요? 우진 오빠한테 직접 확인이라도 받으라고요?”

지난 반년, 정우진이 가는 곳엔 늘 은유라가 있었다.

임정현은 씁쓸하게 그녀의 여권을 받아 들었다.

사무실 한쪽에 뜯겨진 봉투가 보였는데 정우진이 안에 든 물건을 이미 가져간 모양이었다.

은유라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잠시 후, 정우진이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서류 가방을 든 채 밖으로 나왔다.

그는 신시아가 남긴 사직서를 읽지도 않고 대충 침대 옆에 두었다가 짐을 정리하던 와중에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

신시아는 인터넷으로 임신 중 주의사항을 검색하다가 뜬금없는 금융 뉴스 알림창을 보게 되었다. 정우진의 출국 소식이었다.

연말 회사 업무가 한창인 시기에 은유라를 데리고 해외라니.

매체들은 그들이 결혼 준비를 위해 예식장을 둘러보러 간 것이라며 연일 떠들썩했다.

지난 반년 동안 그들에 관한 스캔들이 끊임없이 쏟아졌지만 신시아는 단 한 번도 기사를 클릭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었다.

반년을 도망쳤으나 한 달 전 정우진을 마주했을 때 끝내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다시 침대를 공유하고 말았다.

이제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떠날 사람인데 차라리 일찍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고 하루라도 빨리 단념하는 게 나을 테니까.

그녀는 기사를 클릭하고 사진을 확대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핑크색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팔꿈치에는 여자의 핸드백까지 걸친 채였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여자 화장실 앞, 딱 봐도 은유라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백영 그룹의 실세이자 정씨 가문의 장남, 그리고 유일한 후계자 정우진.

이 중 어떤 수식어를 내세워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인데, 단 한 번도 신시아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남자가 사람들로 붐비는 여자 화장실 앞에서 연인을 기다리고 있다니.

비록 몰래 찍은 사진이었지만 정우진은 어느 각도에서도 굴욕 없이 완벽한 모습이었다.

타고난 골격 자체가 수려한 탓인지 각기 다른 각도에서 찍힌 모든 사진에서 그만의 귀티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액정 너머로도 남자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신시아는 휴대폰을 끄고 아랫배에 손을 얹은 채 맞은편에 놓인 1.5미터짜리 소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우진과 혼인신고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던 날, 그가 직접 차를 몰고 그녀를 데리러 왔었다.

집까지 올 줄은 몰랐던지라 신시아는 샤워를 막 끝내고 짐을 정리하던 참이었다.

얇은 옷차림에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그녀의 모습은 남자의 자제력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그 소파 위에서 두 사람은 두 번째 사랑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곳에서 나눈 유일한 기억이자 마지막 기억이 되어버렸다.

신시아는 입술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댄 채 잘게 깨물었다.

그간의 연봉은 꽤 높은 편이었다. 차곡차곡 모아둔 돈이 넉넉했기에 당분간 일을 하지 않더라도 아이와 둘이서 살아가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앞으로는 아이에게 더 나은 삶을 선물하기 위해서 분명 더 노력할 것이다.

며칠을 기다렸지만 신시아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업무를 핑계 삼아 본사로 달려갔다. 인사팀에 있는 지인을 통해 사직 처리 절차가 어디쯤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하필이면 인사팀에서 연말 부서 회의 중이라 정오가 지나야 끝날 예정이었다.

지사 일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터라 신시아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야 했다.

이제 막 몸을 돌렸는데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새언니! 우리 드디어 만났네요.”

정우진보다 세 살 어린 친여동생 정다슬이 나직이 외치며 그녀를 이끌고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센서등이 밝아지자 신시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보다 반 뼘은 더 크면서도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애교를 부리는 한 여자아이였다.

“나 우진 씨랑 이혼했으니 새언니라 부르지 말아요. 우리 서로 나이대도 비슷하니 앞으론 편하게 이름 불러요, 다슬 씨.”

어느덧 입사 일 년 차,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오는 동안 신시아는 알게 모르게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정다슬은 그런 그녀를 유독 아꼈다.

“이혼했어도 내 눈엔 영원한 우리 새언니에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언니를 얼마나 찾으시는지 모르죠? 오늘 무조건 나랑 같이 집에 가야 해요. 지금 바로 반 차 내고 올게요!”

정다슬이라면 정말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신시아가 재빨리 그녀를 잡아당겼다.

“연말이라 회사도 정신없을 텐데 이때 반 차 냈다가는 자칫 정규직 전환 심사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요.”

“언... 아니, 시아 씨, 제발 돌아와 줘요. 돌아와서 딱 한 번만 얼굴이라도 비춰주라고요, 네?”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신시아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럼 저녁에 잠깐 들를게요.”

정우진과의 결혼 생활은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나무랄 데가 없었다.

처음 정우진이 비밀 결혼을 제안했을 때, 신시아는 그가 집안 어른들에게조차 비밀로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혼인신고를 마치자마자 이 남자는 그녀를 정씨 가문 본가로 데려갔다.

정우진의 아버지는 아들의 독단적인 행동에 무척 불쾌해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끝내 신시아를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대놓고 괴롭히지는 않는 냉담한 태도로 일관했다.

반면 정우진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녀를 유독 아꼈다. 매주 한 번씩 꼬박꼬박 본가를 찾을 때마다 두 분에게서 친부모 못지않은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을 것이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두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어차피 정우진은 없을 테니까.

“진짜죠? 정말 가는 거죠?”

정다슬이 몇 번이나 전화하고 메시지를 보내며 본가에 가자고 졸랐을 때, 그녀는 번번이 거절했었다.

“나 놀리는 거 아니죠?”

신시아는 웃으며 그녀의 옷에 달린 리본을 정리해주었다.

“내가 언제 사람 속인 적 있어요?”

말을 뱉고 나서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살면서 거짓말이라곤 한 적이 없지만, 이번만큼은 정우진에게 엄청난 거짓말을 해버렸다.

만약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당장 ‘처형’당할 수준의 거짓말이었다.

“오케이! 그럼 지금 바로 할머니, 할아버지께 전화 드릴 거예요.”

성격이 단순한 정다슬은 신시아와 정우진이 이미 이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안 믿었다.

‘더 이상 본가로 드나들지 말아야 하는데... 됐다, 이번 한 번만 가는 거야.’

신시아는 본사에서 나와 지사로 향하던 길에 평소 두 어르신이 좋아하시던 백 년 떡집에 들러 간식거리를 샀다.

저녁 7시,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질 무렵 드넓은 정씨 저택은 환하게 불을 밝혔다.

정우진의 할머니 권미희가 버럭 호통을 치자 별장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 못난 녀석이! 굴러들어 온 복을 제 발로 차버려? 세상에 너 같은 애가 어디 있다고. 인생 어떻게 살려고 저러는지, 쯧쯧.”

이혼 후 권미희는 신시아에게 전화를 걸어 정우진을 호되게 꾸짖은 적이 있었다.

지금 본가에 앉아 또다시 모든 잘못을 정우진 탓으로 돌리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신시아는 마음 한구석이 찔려왔다.

“할머니, 이혼은 정말 제가 먼저 꺼낸 거예요.”

결혼 생활 중에도 본가에 올 때마다 어르신들은 정우진을 꾸짖으며 그녀를 챙겼고 덕분에 시부모의 눈총을 사곤 했다.

이혼한 지금도 여전히 자신을 위해 손자를 나무라시다니... 신시아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오빠가 잘했으면 언니가 이혼했겠어요?”

정다슬은 과일 접시를 내려놓으며 거들었다.

신시아가 제발 좀 그만하라고 그녀에게 곁눈질했다.

이때 초조해하는 신시아의 모습을 본 정우진의 할아버지 정태석이 대뜸 화제를 돌렸다.

“시아야, 지사 생활은 적응할 만 해?”

“네, 할아버지.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두 분도 건강 유의하세요.”

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권미희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을 이어갔다.

“왜 이렇게 야위었어? 일이 너무 바쁜 거 아니야? 부서 옮기면 안 될까? 월급은 그대로 받고 업무만 줄이라 해. 이혼할 땐 왜 재산 분할도 안 받은 거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권미희가 친할머니인 줄 알 정도였다.

정우진 재산의 절반이면 신시아가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막대한 액수였다.

이미 이혼은 성립되었으니 두 분은 정우진을 몇 번 더 나무라다가 이내 신시아의 근황과 정다슬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갔다.

화기애애하게 웃음꽃이 필 무렵, 정원에서 불현듯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신시아가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자 더없이 익숙한 부가티 한 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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