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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불 끄지 마요

Author: 유니버쓰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21 03:29:42

침실 문턱이 국경선처럼 느껴졌다.

세아는 서류철을 가슴에 끌어안고 한 발도 떼지 못했다. 안쪽에서 도헌이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고 있었다. 어깨선을 따라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풀렸다.

"거기서 밤샐 거야?"

“……제1조는 '곁에 둔다'였습니다. 침대에 눕는다는 말은 없었어요.”

"꼼꼼하네."

"계약서니까요."

도헌이 낮게 웃었다. 소매 단추를 풀던 손이 멈췄다. 그가 한쪽 소매를 천천히 접어 올렸다. 드러난 손목뼈 위로 시계 줄이 헐겁게 흘러내렸다.

세아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벽지의 무늬를 세었다.

방은 생각보다 소박했다. 큰 침대 하나, 어두운 조명, 그리고 협탁 위에 수북이 쌓인 수면제 약통들. 뚜껑이 열린 채 굴러다니는 것도 있었다. 전부 비어 있었다.

“……이걸 다 드셨어요?”

"다 먹었지. 안 들어서 문제였고."

"이러다 큰일 납니다."

"그래서 당신이 온 거 아닌가."

도헌이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가운데 불빛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깊게 팠다. 낮의 대표는 사라지고 지친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규칙을 하나 더 말해 줄게."

"또 있어요?"

"계약서엔 안 썼어. 쓰면 우스워질 것 같아서."

그가 시선을 들었다.

"불은 켜 두지 마. 어두워야 해.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이 있어서, 밝으면 더 심해."

세아는 대답을 잃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이 남자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뭐가 보이는데요.”

“3조.”

"과거는 안 묻는 거요."

"기억하네."

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들어가 스탠드 스위치에 손을 댔다.

딸깍.

방이 어둠에 잠겼다. 창밖의 도시 불빛이 커튼 틈으로 가느다란 선을 그었다. 그 빛 속에서 도헌의 윤곽만 겨우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워."

“…….”

"오해하지 마. 눕기만 해."

세아가 침대 반대편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가능한 한 멀리. 매트리스가 낮게 꺼지며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거리를 남겼다.

"그렇게 멀리 있으면 소용없어."

"소용이 없다니요."

"당신이 가까이 있을 때 졸렸던 거야. 옆에 있어 줘."

“…….”

"한세아."

이름이 어둠 속에서 낮게 불렸다. 세아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오히려 방어선이 흔들렸다.

세아는 천천히 몸을 눕혔다. 등을 돌린 채, 이불 위에 겨우 걸치듯이.

침묵이 길었다.

시계 초침 소리. 서로의 숨소리. 그리고 매트리스를 타고 건너오는 아주 미세한 온기. 닿지 않는데도 느껴졌다. 그가 거기 있다는 것이.

“……세아.”

"네."

"이름 불러도 되나."

“……계약서에 그건 없는데요.”

"그러니까 허락받는 거야."

조항을 지키는 사람처럼, 그는 선을 넘기 전에 먼저 물었다. 세아는 그게 이상하게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거칠게 굴었다면 차라리 쉬웠을 텐데.

“……마음대로 하세요.”

"고마워."

짧은 대답 뒤에 이불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도헌이 몸을 돌려 눕는 기척이었다. 이제 그의 숨이 세아의 뒷목에 닿을락 말락 했다. 따뜻하고 느렸다.

세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사람은 아버지의 원수일지 모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숨이 막히는 걸까. 증오 때문일까. 아니면.

"세아."

“……또 뭐요.”

"손 좀 빌려줘."

"네?"

"잡겠다는 게 아니야. 이불 위에 올려놓기만 해. 내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세아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 천천히, 정말 천천히 손을 뒤로 뻗었다. 이불 위에 손등을 내려놓았다.

잠시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다 손가락 끝에 무언가 닿았다. 그의 손끝이었다. 잡지도 않고 깍지를 끼지도 않았다. 새끼손가락 하나가 그녀의 손날에 겨우 얹혔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온몸의 신경이 그 한 점으로 쏠렸다.

“……차갑네요, 손.”

"당신은 따뜻하다."

속삭임이 어둠에 녹았다.

"이래서였나 보다."

“……뭐가요.”

"졸렸던 이유."

그의 숨이 점점 길어졌다. 고르게, 깊게. 세아의 새끼손가락 옆에서 그의 손이 서서히 힘을 풀었다.

잠든 것이었다. 3년 만에.

세아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가슴이 이상하게 아팠다. 복수를 위해 들어온 방에서, 원수일지도 모르는 남자가 제 손끝 하나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안 돼. 정신 차려.'

'제13조. 먼저 마음을 주는 쪽이 진다.'

그 조항을 쓴 사람은 자신이었다.

세아는 조용히 일어나려 했다. 이 방에서 나가 서재를 뒤질 수 있는 첫 기회였다. 이불을 걷고 발을 바닥에 내렸을 때.

“……가지 마.”

잠꼬대였다. 손목이 붙잡혔다. 강하지 않았다. 놓으면 빠질 만큼 약한 힘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뿌리칠 수 없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세아의 숨이 멎었다.

도헌이 잠결에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눈썹이 찌푸려지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제가 막았어야 했는데. 제가…….”

"대표님?"

"한도식 회장님을…… 제가……."

세아의 몸이 얼어붙었다.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잠꼬대 속에서 도헌이 부른 이름이.

도헌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쥐었다. 마치 매달리듯이.

“……용서하지 마. 제발, 용서하지 마.”

세아는 그 자리에 굳은 채 어둠을 응시했다. 심장이 시끄럽게 울렸다. 분노인지, 혼란인지,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만 확실했다.

이 남자는 알고 있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 자신의 손목을 놓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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