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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저는 맞선 대타일 뿐입니다
대표님, 저는 맞선 대타일 뿐입니다
Author: YuIm

1화. 오늘은 이 기획안입니까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5 07:52:49

윤채이가 남의 이름으로 할 일은 딱 하나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남자에게, 다시는 만나기 싫은 여자로 남는 것.

성공하면 오천만 원의 빚이 사라졌다. 실패해도 월요일에는 출근해야 했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문제가 될 줄은, 아르덴호텔 라운지의 남자가 고개를 들기 전까지 몰랐다.

***

금요일 오후, 회의실 화면에는 웃는 고객의 얼굴이 떠 있었다.

“반응은 좋습니다. 체험 신청도 늘었고요.”

이현수 과장이 다음 장을 넘기려 하자 채이가 손을 들었다.

“설치 취소 문의도 같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화면 아래에 가려졌던 표를 열었다. 민재가 급하게 프로젝터 선을 건드려 화면이 한번 꺼졌다. 누군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채이는 출력물을 가운데로 밀었다.

“여기 파란색 칸이요. 신청할 때 무료라고 생각했는데 설치 조건에 따라 비용이 생긴다는 걸 나중에 안 분들입니다.”

“그건 상세 안내에 있잖아.”

“네. 그런데 신청 버튼보다 아래에 있어서 안 읽는 거죠.”

현수가 볼펜으로 표를 짚었다.

“버튼 위로 올리면 신청이 줄 수도 있어.”

“설치 직전에 취소하면 기사님 일정하고 상담 시간이 같이 나갑니다. 신청 수만 남고 실제로 써본 사람은 없어져요.”

김은정 팀장이 팔짱을 풀었다.

“그럼 어디까지 바꾸자는 거야?”

채이는 준비해 온 종이를 한 장 더 냈다. 작은 식기세척기 옆에 설치 공간, 추가 비용, 회수 신청 방법을 같은 크기로 놓은 화면이었다.

“고객이 결제 전에 알았으면 좋았겠다는 내용을 신청 전에 보여주려고요. 일주일만 비교해 보면 어떨까요?”

팀장은 맨 위에 날짜와 검토 의견을 적었다.

“초안 올려. 유나 씨가 문구 보고, 현수 과장이 운영 쪽 확인하고.”

“네.”

채이가 종이를 챙기는 동안 휴대폰이 여섯 번째 울렸다. 화면의 이름은 윤세리였다.

회의실을 나와 파일을 팀 공유 폴더에 올렸다. 제목 뒤에 초안과 작성 날짜를 붙이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언니, 나 일하는 중이야.”

“그 일 월급으로 우리 아빠 돈 언제 갚을 건데?”

귀에 대고 있던 전화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오늘 저녁에 잠깐 와. 너한테 좋은 일이야.”

***

세리가 내민 종이에는 숙부의 서명이 있었다.

채무 면제 확약서. 채무자 윤채이. 금액 오천만 원.

채이는 종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지 않고 마지막 줄까지 읽었다. 어머니 수술비와 회복하는 동안의 생활비로 빌린 돈이었다. 카드 두 장과 예금을 먼저 비웠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랐다. 숙부는 차용증을 써야 서로 편하다고 했고, 채이는 그때 고맙다는 말을 세 번 했다.

“정말 숙부가 아시는 거야?”

“아빠가 사인한 거 안 보여? 내일 나 대신 나가서 혼담만 깨면 돼.”

“그냥 언니가 안 만나겠다고 해.”

“우리 아빠 거래처랑 얽혔어. 내가 싫다고 하면 아빠 체면이 뭐가 돼.”

채이는 다시 조건을 읽었다. 상대가 혼담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하면 면제한다. 참석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상대가 계속 만나자고 하면?”

“그렇게 안 만들면 되지. 넌 일할 때 말 잘하잖아.”

세리가 쇼핑백을 발끝으로 밀었다. 안에는 붉은 원피스와 금색 귀고리가 있었다. 채이 취향과는 멀었다. 발목이 불편할 만큼 굽이 높은 구두도 들어 있었다.

“대표라며. 이름이 뭔데?”

“바빠서 대리인만 줄줄이 보내던 사람이야. 이번엔 본인이 나온대. 사진은 못 받았어.”

“이름은 받았을 거 아니야.”

“비서가 예약해놨어. 아르덴 라운지, 두 시, 윤세리. 직원한테 그거 말하면 돼.”

세리는 대답 대신 채이의 귀 옆으로 귀고리를 대봤다.

“다정하게 웃지 마. 돈 많이 쓴다고 해. 일도 결혼하면 그만두고 싶다고 하고.”

“언니는 왜 그렇게까지 싫은데?”

“무서운 사람이래. 결혼할 집 회사까지 다 들여다본대. 피곤하잖아.”

소파 옆에 쌓인 쇼핑백에 법인카드 영수증이 붙어 있었다. 세리가 채이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발로 쇼핑백을 안쪽으로 밀었다.

“못 하겠으면 말아. 아빠도 이번 달엔 돈 들어올 데가 있어야 한댔어.”

채이는 휴대폰을 켰다. 어머니가 보낸 사진에는 베란다에서 핀 작은 꽃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다음 치료일에 반차를 내지 말라는 문자가 붙어 있었다. 혼자 다녀올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은행 앱의 잔액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어제 봤고, 오늘은 월급날이 아니었다.

“원본 줘.”

채이가 손을 내밀었다.

“맞선을 깨면 오천만 원 전액. 내가 듣기로는, 이 아니라 글씨대로 할 거야.”

세리는 잠깐 입술을 삐죽였다가 종이를 넘겼다.

“그럼. 가족끼리 속이겠어?”

***

토요일 호텔 화장실에서 채이는 귀고리 한쪽을 다시 걸었다. 무거워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딸랑거렸다. 거울 속 여자는 일주일 전 편의점에서 할인 도시락을 집던 자신과 꽤 달랐다.

그래도 이름까지 바뀌는 건 아니었다. 삼십 분만 버티면 된다. 휴대폰에는 세리의 지시가 새로 와 있었다.

밥 먹을 때 직원한테 좀 까칠하게 굴어. 그런 거 남자들이 싫어해.

채이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맞선남에게 미움을 사는 일과 일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건 다른 일이었다. 안내 직원이 예약 이름을 확인했다.

“윤세리 님, 이쪽입니다.”

채이는 타인의 이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구두 뒤축이 발꿈치를 긁자 직원이 그녀에게 보폭을 맞췄다.

창가 테이블에는 검은 수트 차림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휴대폰을 뒤집어 놓는 손, 잔을 옆으로 비켜두는 동작, 누군가 오는 순간 정확히 올라오는 시선. 채이는 멈췄다.

태주이노베이션 대표이사 서도진.

엊그제 전사 메일 맨 위에 있던 이름. 자신의 보고서에 ‘분모를 다시 확인할 것’이라는 의견을 남긴 사람. 작년 말 실무 보고 자리에서 잘못 잡힌 상담 인력 감축안을 두고 십 분 동안 질문했던 사람.

남자가 일어났다.

“앉으시죠.”

그가 모를 수도 있었다. 직원이 수백 명이었다. 그 보고 때 채이는 안경을 썼고, 오늘은 귀가 곧 떨어질 정도로 화려했다. 사람이 귀고리에 가려 보이지 않는 기적도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채이는 앉다가 무릎으로 테이블 다리를 쳤다. 찻잔이 달그락거렸다.

“괜찮습니까?”

“아유, 네. 이런 데 의자가 좀 불편하네요.”

평소보다 반 음 높은 목소리가 나왔다. 직원이 메뉴를 건네자 채이는 끝쪽에 적힌 가격부터 봤다. 세리가 말한 ‘제일 비싼 거’는 두 사람의 주말 장보기 비용을 합친 것보다 비쌌다.

“저는…… 이 디저트 세트요.”

“차는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카페인 없는 걸로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는 왜 했어. 채이는 지나가는 직원의 앞치마 끈이 의자에 걸리지 않도록 의자를 당겨주다가 눈을 감았다. 망치는 데도 재능이 필요했다.

도진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저, 미리 말씀드릴 게 있어요.”

채이가 등을 폈다.

“결혼하면 일은 안 할 거고요. 집안일도 못 해요. 품위 유지비가 월 삼천만 원은 필요한데요.”

발끝이 구두 안에서 오그라들었다. 도진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삼천만 원.”

“최소요. 그리고 주말에는 늦잠을 자니까 아침 식사 같은 건 기대하시면 안 돼요.”

아침 식사. 고르고 골라 낸 결격 사유가 아침 식사였다.

도진이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 소리가 금요일 회의실에서 들었던 볼펜 소리처럼 선명했다.

“견적은 받았고요.”

채이는 손가락에 힘을 줬다. 그가 거절하기만 하면 됐다. 월요일에 마주치지 않도록 층계를 쓰면 될 일이다.

도진의 입가가 움직였다.

“윤 대리, 오늘은 이 기획안으로 밀고 가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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