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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대타는 끝났습니다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5 07:53:50

채이는 귀고리부터 뺐다. 한쪽을 가방에 넣고 다른 쪽도 빼자, 테이블 너머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을 때 도진은 이미 평소 얼굴이었다.

“윤세리 씨는 일 분 만에 퇴근했군요.”

“죄송합니다. 그쪽은 출근도 안 했어요.”

대답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지금 농담을 할 처지는 아니었다.

“언제 아셨어요?”

“예약 확인할 때부터 보였습니다.”

“그럼 앉으라고 하지 마시지.”

너무 작은 소리였지만 도진은 들은 모양이었다.

“서서 월 삼천만 원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채이는 찻잔을 자신에게로 당겼다. 따뜻한 잔을 잡으니 손끝에 다시 감각이 왔다.

“설명드릴게요. 그렇지만 먼저, 회사에는 제 잘못으로만 말씀해 주세요. 팀에서는 아무도 몰라요.”

“회사에 무슨 말을 한다고 했습니까?”

“안 하신다고도 안 하셨잖아요.”

도진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채이는 가방을 열어 확약서를 꺼냈다. 자신이 궁한 사정을 대표에게 보여주게 될 줄 알았으면, 세리의 집에서 한번 더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아니, 같은 조건이라면 결국 왔을 것이다. 그게 더 창피했다.

“언니가 맞선을 망치면 빚을 없애주겠다고 했어요. 제가 직접 빌린 돈이고요.”

“윤세리 씨와는 무슨 사이입니까?”

“사촌이에요. 돈을 빌려주신 분은 숙부고요.”

그의 시선이 확약서 끝에 머물렀다.

“참석 보수가 아니군요.”

“네. 혼담이 끝나야 해요.”

“그러면 윤세리 씨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길 이유가 없는데요.”

“본인은 잘못한 사람으로 남기 싫은가 봐요.”

채이는 말하고 나서 종이를 거뒀다. 세리의 사정까지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대표 앞에서 친척을 길게 흉보고 싶지도 않았다.

직원이 디저트를 가져왔다. 작은 접시 세 개 위에 계절 과일과 케이크가 나란히 놓였다. 채이는 ‘죄송합니다’ 대신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주문한 음식을 받는 일까지 사과할 필요는 없었다.

“안 드십니까?”

“지금도 먹어도 되나요?”

“음식에는 잘못이 없으니까요.”

도진이 포크를 집었다. 채이도 가장 작은 케이크 끝을 잘랐다. 긴장이 풀리지 않은 혀에도 맛은 분명했다. 이런 걸 먹으면서 해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평생 딸기 케이크를 싫어하게 될 것 같았다.

“저를 속이려고 온 건 맞습니까?”

그의 질문에 채이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네. 대표님인 줄은 몰랐지만, 누가 나오든 이름을 속이려고 온 건 맞아요. 그건 변명 안 할게요.”

“일하면서도 필요하면 같은 선택을 합니까?”

채이는 등을 바로 세웠다.

“안 합니다.”

“어째서죠?”

“제가 오늘 잘못했다고 제 보고서의 숫자까지 거짓말은 아니니까요. 확인하셔도 돼요.”

말끝이 단단해졌다. 도진은 그제야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접시 위에 놓았다.

“작년 말에 상담 인력을 줄이면 절약한 인건비보다 해지 고객을 다시 데려오는 비용이 커진다고 했죠.”

채이는 눈을 깜빡였다.

“그때 자료를 기억하세요?”

“제 질문에 답하느라 회의가 십 분 길어졌으니까요.”

“질문은 대표님이 하셨는데요.”

도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 책임이네요.”

그 말에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놓였다. 누구의 책임인지 따지는 남자가 자신의 것까지 남에게 밀지는 않는다는 점이. 채이는 포크를 다시 들지 않았다.

“회사 일과 이 일은 나눠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럴 겁니다. 다만 오늘 일을 사라진 것으로 만들 수는 없어요.”

“알아요. 사과드리고, 언니한테는 실패했다고 말할게요.”

그녀는 가방을 닫았다. 오천만 원이 없어지는 일은 없었다. 호텔까지 온 교통비와 자신의 얼굴값만 잃었다. 그래도 해고 얘기가 없다는 것으로 오늘은 충분했다.

“윤채이 씨.”

일어나려던 채이가 멈췄다. 대리라는 말이 빠지자 오히려 더 낯설었다.

“제가 결혼을 해야 할 사정도 들어보겠습니까?”

도진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할아버지께서 올해 예정했던 지분 증여를 미루고 계십니다. 제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요.”

“결혼하면 일을 더 잘하는 것도 아닌데요.”

“같은 말을 했습니다. 설득에는 실패했고요.”

그가 실패했다는 말을 두 번쯤 더 듣고 싶었다. 채이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더 당황스러웠다.

“지분 때문에 결혼하시면 상대가 싫어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목적을 숨기지 않을 생각입니다.”

도진은 찻잔 옆으로 손을 모았다.

“앞으로 일 년 동안 하루온 재출범을 마무리하고 사업 성과로 후계 검증도 받아야 합니다. 집안에서 계속 혼담을 넣으면 일보다 그쪽 일정이 늘겠죠.”

“그 기간만 조용하게 지내고 싶으신 거예요?”

“저와 같은 방향을 보는 배우자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채이는 저도 모르게 빈 옆자리를 봤다. 누가 한 사람 더 와서 이 말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라고 해주면 좋겠다.

“연애는요?”

“지금 약속할 수 있는 건 정직한 조건입니다.”

“굉장히 안 설레네요.”

“거짓말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바쁜 남자의 결혼 계획을 들어주는 것과 그 계획에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저한테 하시는 얘기죠?”

“네.”

“대표님, 저 방금 맞선에서 사기 치다 걸린 사람인데요.”

“연기를 못하더군요.”

“그건 판단 근거로 좀 약하지 않아요?”

이번에는 도진이 분명히 웃었다. 눈가가 움직이자 회의실에서 본 얼굴과 달라졌다. 채이는 자신이 상대를 웃겼다는 사실보다 그 표정이 낯설지 않다는 데 더 신경이 쓰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오늘 결정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채이의 종이가 들어간 가방을 한번 보았다.

“숫자와 조건을 확인하고, 틀린 부분은 제 앞에서도 고치자고 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눈치를 보면서도 직원에게 화풀이하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고요.”

“그 정도로 결혼을 정하진 않잖아요.”

“윤채이 씨도 저를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채이는 가방의 지퍼를 다시 열었다가 닫았다. 자리를 뜨는 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혼담을 끝내고 돌아가면 남는 것은 원래의 빚과 원래의 생활이었다. 눈앞의 제안은 말도 안 됐지만, 자신이 확인해야 할 조건이 있다는 말만은 마음에 걸렸다.

“제가 거절하면요?”

“내일은 일요일이고, 월요일에는 출근하면 됩니다.”

“보고서 반려하시면서 오늘 일 생각하시면 안 돼요.”

“반려할 이유가 있는 보고서는 반려합니다.”

“그건 알아요.”

이제야 채이는 포크를 들어 남아 있던 딸기를 먹었다. 맛있었다. 하필 이런 날 먹기 아까울 정도로.

도진은 지갑에서 개인 연락처가 적힌 명함을 꺼내 테이블 가운데 놓았다. 밀어붙이지 않고 그녀가 가져가기를 기다렸다. 채이는 명함에 손을 얹었다.

“조건을 보내주시면 읽어는 볼게요. 읽는다고 하겠다는 건 아니고요.”

“그렇게 알아두겠습니다.”

그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화면에는 ‘회장님’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도진은 전화를 받지 않고 뒤집었다. 채이는 문득 자기도 세리에게 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럼 언니한테는 뭐라고 하죠?”

“사실대로요.”

“맞선이 망했는지 안 망했는지도 모르겠는데요.”

도진이 명함을 잡은 그녀의 손끝에서 시선을 올렸다.

“대타는 끝났습니다.”

채이는 그 다음 말을 이미 짐작하면서도 숨을 멈췄다.

“지금부터는 윤채이 씨에게 결혼을 제안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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