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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승진은 빼주세요

مؤلف: YuIm
last update تاريخ النشر: 2026-10-05 07:53:59

일요일 아침, 채이는 컵라면에 물을 붓고 결혼 조건을 읽다가 먹을 때를 놓쳤다. 면은 식었고 메일은 뜨거웠다. 첫 장에 적힌 숫자 때문이었다.

보수 총 이억 사천만 원. 체결 시 일억 이천만 원, 이후 매월 일천만 원씩 열두 차례. 주거와 가족 행사에 필요한 의상비는 별도.

채이는 계산기를 켰다가 껐다. 더할 필요도 없었다. 숙부의 돈을 갚고도 치료비를 준비할 수 있었다. 원룸 보증금을 지키기 위해 적금을 깨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다음 장을 읽자 입안이 말랐다. 경력 개발 기회 우선 검토.

채이는 그 문장 아래에 붉은 줄을 그었다.

***

약속 장소는 호텔 안의 작은 회의실이었다. 식사도 꽃도 없고 물과 필기구만 있었다. 채이에게는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도진은 그녀가 가져온 출력물을 보고 의자를 빼주었다.

“안 드셨습니까?”

“뭘요?”

“점심. 표정이 좋지 않아서요.”

“조건 보고 배가 불러서요.”

“그런 표정은 아닌데.”

채이는 종이를 테이블 위로 밀었다.

“이거부터 빼주세요. 승진 우선 검토, 해외 사업 참여 지원.”

도진의 눈길이 붉은 줄을 따라 움직였다.

“직장 생활을 계속하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계속하고 싶으니까 빼달라는 거예요.”

그는 펜을 들었다가 그대로 내려놓았다. 채이는 손가락으로 다음 문장을 짚었다.

“제가 캠페인을 잘하면 잘해서 기회를 받고 싶어요. 못하면 못해서 떨어지고요. 여기에 쓰면 아무리 일해도 다 결혼 덕이 되잖아요.”

“둘 사이에만 남는 계약입니다.”

“저는 알잖아요.”

그 말이 나온 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채이는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싶어 물을 마셨다. 그렇지만 줄을 지울 생각은 없었다.

도진이 자신의 문서에도 같은 문장을 그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삭제하겠습니다.”

예상했던 설득이 없었다. 채이는 준비해온 두 번째 설명을 접었다. 그가 고친 문장 옆에 날짜를 적는 모습을 잠깐 바라봤다.

“이건 제가 값을 깎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돈은 필요해요. 저도 잘 알아요.”

“필요한 대가를 받는 일까지 변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채이는 종이 아래쪽을 펴서 다음 항목으로 넘겼다. 조금 전까지 저도 모르게 굳어 있던 어깨에 힘이 풀렸다.

“기간이 일 년이면 그날 자동으로 남남이 되는 건 아니죠?”

“법적인 혼인과 역할에 대한 약정은 별개입니다. 관계를 정리할지는 그때 서로 확인해야죠.”

“그러면 ‘만료 시 이혼한다’처럼 읽히는 문장도 바꿔주세요. 제가 갑자기 길에서 쫓겨나는 건 싫거든요.”

“주거 정리에 필요한 시간도 정합시다.”

도진이 펜을 움직였다. 채이는 그의 손이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다음 장을 꺼냈다.

“그리고 가족 행사. 모든 행사에 참석은 못 해요. 회사 일정도 있고 엄마 병원도 있어요.”

“미리 일정을 공유하겠습니다.”

“당일 통보 안 돼요. 회식도 퇴근 직전에 말하면 싫은데, 제사는 더 싫어요.”

그의 입가가 움직였다.

“제사는 예정에 없습니다.”

“그럼 첫 번째로 합의됐네요.”

이번엔 채이도 조금 웃었다. 조건이 하나씩 구체적인 생활로 바뀌니,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적어도 질문할 수 있는 범위로 내려왔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 도착하자 다시 손이 멈췄다.

‘부부로서 자연스러운 태도를 유지한다.’

자연스럽다는 말처럼 불친절한 말도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예요?”

도진이 문장을 읽었다.

“가족 앞에서 지나치게 어색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뜻입니다.”

“대표님한테 자연스러운 거랑 저한테 자연스러운 건 다르잖아요.”

“원하는 기준을 말해보세요.”

채이는 펜 뚜껑을 열었다. 회사에서 수정 의견을 다는 것처럼 쓰려 했지만 첫 단어부터 얼굴이 달아올랐다.

“가족 행사에서 손잡는 건…… 미리 말하면 가능해요.”

도진의 시선이 종이에서 올라왔다.

“손잡는 건.”

“복창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채이는 종이에 ‘사전 합의한 범위’라고 썼다.

“그 외에는 의무가 아니에요. 같은 집에 산다고 같은 방을 쓰는 것도 아니고요. 스킨십도, 그…… 나머지도.”

“싫은 일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말이 너무 쉽게 돌아왔다. 채이는 오히려 펜을 멈췄다.

“나중에 그 돈 받고 이것도 못 하냐고 하면 안 돼요.”

도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그녀를 보더니 문서 맨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신체 접촉 거부는 계약 위반이 아니다. 이렇게 쓰죠.”

그가 종이를 돌려주었다.

채이는 글씨를 읽었다. 선이 반듯하고 글자 사이가 조금 넓었다. 당연한 말을 굳이 쓰지 않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 남자는 그녀가 불안해하는 자리에 실제 문장을 남겼다.

“종료 얘기를 꺼내도 회사에서 불이익 없다는 내용도요.”

“넣겠습니다.”

“그건 대표님 말만으로는 불안해요. 누가 확인할 수 있어야 해요.”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인 관계는 비서실장과 준법 담당자에게 신고할 겁니다. 업무 평가에서 제가 관여하지 않도록 필요한 절차도 정하죠.”

“동료들한테는요?”

“윤채이 씨가 원하는 범위를 먼저 듣고 싶습니다.”

채이는 잠시 창밖을 보았다. 회사 바로 옆 호텔인데도, 창문 밖 사람들은 전혀 다른 주말을 보내는 것 같았다.

“결혼했다는 사실은 말할게요. 반지까지 숨기면서 거짓말을 늘리고 싶진 않아요. 남편이 누구인지는…… 아직 안 말하고 싶고요.”

“그렇게 하죠.”

“대표님 가족한테는 제 이름을 제대로 말씀해주세요. 윤세리로 살 생각은 없어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도진이 두 문서를 나란히 놓았다. 붉은 줄과 검은 글씨가 섞여 있었다. 처음의 매끈한 제안보다 지금의 종이가 더 믿을 만했다.

“독립적으로 계약 검토를 받을 사람은 정했습니까?”

“찾아볼 거예요. 대표님 쪽 변호사 말고요.”

“좋습니다. 검토가 끝나기 전에는 서명하지 마세요.”

채이는 가방 속으로 문서를 넣었다. 밖으로 나가면 다시 원룸이고, 병원 예약이고, 월요일에 제출할 초안이었다. 갑자기 가진 것이 늘어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질문을 해도 판이 엎어지지 않는 경험을 한 탓인지 발밑이 조금 단단해진 기분이었다.

도진이 문 앞에서 멈췄다.

“이제 점심 드시겠습니까?”

채이는 시계를 봤다. 어느새 세 시가 가까웠다. 배에서 작은 소리가 났고, 두 사람이 동시에 못 들은 척했다.

“그건 계약 조건이에요?”

“식사 제안입니다.”

“그럼 받아들일게요. 비싼 데 아니어도 돼요.”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채이는 처음으로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말했다.

“뜨거운 국수요. 아침을 좀 망쳐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도진이 휴대폰으로 근처 식당을 찾았다. 화면을 그녀 쪽으로 돌리는 동작이 뜻밖에 서툴렀다. 누군가의 점심을 비서에게 부탁하지 않고 직접 고르는 일이 드문 사람 같았다.

채이는 화면을 들여다보다 그의 소매에 닿을 뻔한 손을 거뒀다.

“거긴 문 닫았어요. 일요일엔 이쪽 골목으로 가야 해요.”

“안내 부탁합니다.”

대표를 앞에 두고 걷는 대신 채이가 먼저 걸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도진이 옆에 섰다.

“윤채이 씨.”

“네?”

“방금 수정한 조건대로라면, 이런 자리에서 손을 잡는 건 안 되는 거죠?”

채이는 그를 올려다봤다. 놀리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표정은 진지했다.

“가족 행사가 아니잖아요.”

“확인했습니다.”

그가 한 걸음 비켜섰다. 넓어진 틈만큼, 이상하게 그의 존재가 더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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