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는 손을 데이비드의 머리에 얹었다.그리고 소희의 손길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데이비드는 얌전히 땅에 엎드려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이에 설희가 질투났는지 땅에 엎드린 채로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가서는 소희의 손바닥 쪽으로 머리를 내밀었다.그러자 옆에 있던 데이비드가 머리로 설희를 밀어냈고, 설희는 바로 발을 들어 데이비드의 머리에 짓눌렀다. 그렇게 두 마리의 개는 다시 한데 뒤엉켜 잔디밭에서 굴러다녔다.임구택이 소희를 꼭 껴안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소희의 귀가에 대고 말했다.“어때, 당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지? 난 데이비드보다는 덜 무서워, 그러니까 천천히 나를 받아주는 데에 노력해 봐,”임구택의 칠흑 같은 눈빛은 소희를 집어삼키려는 블랙홀 마냥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어두웠다.그는 손으로 부드럽게 소희의 얼굴을 한번 어루만지고는 고개를 숙여 소희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보배야.”너무 오랜만에 불러보는 호칭.심지어 임구택은 소희가 이 호칭을 거부할까 봐 평소에 함부로 부르지도 않았다.그리고 소희가 거부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임구택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소희에게 키스를 했다.산속의 바람이 너무 상쾌하여 소희의 마음을 기분 좋게 어루만졌는지 소희는 의외로 임구택의 키스를 거부하지 않고 천천히 눈을 감아 임구택의 키스에 반응을 해주었다.그렇게 임구택의 키스는 점점 뜨거워졌고, 칠흑 같은 두 눈은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을 담고 소희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한참 후, 임구택이 동작을 멈추고 소희에게 물었다.“당신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거 맞지?”임구택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는 바람에 아직 뜨거운 키스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소희는 초롱초롱해진 두 눈으로 멍하니 임구택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그러는 소희의 모습에 마음이 간질간질해난 임구택은 소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소희의 허리를 감싸 안고 키스했다.비록 두 사람이 갑작스레 찾아온 거라지만 점심은 여전히 엄청 푸짐했다. 심지어 임씨 아저씨는 특별히 산 아래 디저
오씨 아주머니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소희에게 저녁에 무엇을 먹고 싶냐고 물었다.이에 소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저녁은 됐습니다, 저희 곧 돌아가야 되거든요.”“내일 아침 일찍 여기서 떠나도 시간에 맞춰 유민에게 수업을 해줄 수 있어.”임구택도 소희에게 남기를 권했지만 소희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지금 돌아가자.”임구택은 소희와 함께 청원에 남고 싶었지만 강요하지 않고 소희의 뜻에 따랐다.오씨 아주머니는 소희가 가겠다는 말에 바로 직접 만든 디저트를 전부 종이봉투에 포장해 소희에게 건네주었다.“작은 사모님, 이 디저트들은 길에서 드세요.”“고마워요.”오씨 아주머니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드러내며 임구택을 향해 말했다.“도련님, 시간이 되면 자주 작은 사모님을 데리고 돌아오세요. 다음에는 미리 전화하시고요, 제가 좀 더 넉넉하게 준비할 수 있게.”“그럴 게요.”임구택이 덤덤하게 대답하고는 소희 손에 들린 디저트 봉투를 받아 들고 소희와 함께 청원을 떠났다.그렇게 차가 청원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와중에 소희는 사이드 미러를 통해 오씨 아주머니와 임씨 아저씨가 개 두 마리를 데리고 별장 문 앞에 서서 그들이 떠나가는 차를 쳐다보고 있는 걸 보게 되었다.그러다 차가 산에서 내려온 후, 임구택이 고개를 돌려 소희를 향해 물었다.“저녁에 뭘 먹고 싶어?”“당신 안 바빠?”저녁 시원한 산바람을 쐬고 있던 소희가 웃으며 대답했다.“아까 통화하는 걸 들으니까 술자리가 있는 것 같던데, 가서 일 봐. 난 집으로 돌아가 요요랑 이 디저트들을 먹을 거야.”“당신을 위해서라면 난 모든 술자리를 취소할 수 있어.”“아니야, 나도 오늘 일찍 돌아가 쉬고 싶어. 완성해야 할 디자인 원고도 두 장이나 남았고.”“알았어.”없는 시간을 짜내서라도 소희와 붙어있고 싶은 임구택이었지만 결국 소희에게 강요하지도 못하고 그녀의 뜻에 따랐다.운해 거리에서 경원주택단지로 돌아가는 길은 그런대로 순조로워서 한 시간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소희가 차에서
그렇게 한참 소희를 품에 안고 나서 심명이 한숨을 내쉬었다.“이제야 진정되네.”소희가 손을 뻗어 심명을 밀었다.“언제 돌아왔어? 왜 전화는 안 하고?”“방금 돌아온 지 한 시간도 안 돼.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주려고 전화 안 한 거고.”심명이 여전히 요염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소희의 턱을 잡았다.“어디 보자, 살이 빠졌나.”“안 빠졌어.”소희가 자신의 턱을 잡고 있는 심명의 손을 밀어버리고는 눈썹을 찌푸린 채 말했다.“그렇게 건들건들한 태도로 말하지 마.”“어떻게 금방 돌아온 사람한테 이렇게 냉정할 수가 있어? 내가 외국에서 잘 지냈는지는 묻지도 않고. 난 너와 이현의 일을 알게 된 후 바로 비행기를 타고 서둘러 돌아왔단 말이야.”심명이 불만이 많은 사람 마냥 콧방귀를 한번 뀌고는 투정을 부렸고, 그 모습에 소희가 덤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다 지나갔어.”“그래? 난 어제야 국내 뉴스를 접하게 되어서 몰랐네. 그래서 이현이라는 여인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데?”묻고 있는 심명의 얼굴은 얼음장 마냥 차가웠다.“몰라, 요즘 이현에 대한 소식이 없어.”“이현이 널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는데, 임구택이 설마 그냥 그렇게 그 여인을 살려뒀어?”“아니, 이현이 나보다 더 비참해.”소희가 덤덤하게 대답하면서 디저트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고개를 돌려 심명을 향해 말했다.“일은 이미 지나갔으니 너 절대 소란을 피우지 마.”“걱정마, 아무것도 안 해. 내가 왜 임구택을 대신해 난장판을 치워야 하는데?”심명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정말 임구택에 관한 일이라면 전혀 끼어들고 싶어하지 않는 표정이었다.그러고는 소희를 따라 식탁 쪽으로 다가가서는 소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어서 옷 갈아입어, 우리 나가서 밥 먹자.”“안 가, 너도 오랫동안 청아를 보지 못했잖아. 그냥 아래층으로 내려가 청아랑 같이 밥 먹자.”“싫어, 나 너랑 같이 먹을 거란 말이야. 나 내일 아침이면 또 일찍 오주로 돌아가야 해. 네
“장시원은 요요가 그의 아이라는 걸 아직 몰라.”“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알게 되면 일은 더 귀찮아질 뿐이야.”“남 걱정은 그만하고, 네 일이나 신경 써.”눈썹을 찌푸린 채 청아와 요요를 걱정하고 있는 소희의 모습에 심명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이에 소희가 순간 뜨끔해져서는 물었다.“내가 무슨 신경 쓸 일이 있다고 그래?”하지만 심명은 고개를 돌려 소희를 한번 쳐다보고는 소리 없이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렇게 파티 현장에 도착한 후, 심명은 어디서 청첩장을 구해왔는지 직원에게 건네주고는 소희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파티 주체인이 심명을 알고 있었는지 바로 다가와서는 열정적으로 심명과 인사를 나누었다.그러다 이야기를 다 나눈 후 심명은 소희의 손을 잡고 사방을 돌아다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심명이 또 예쁜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물론 그가 사귀었던 여자 친구 중에 예쁘지 않았던 여인은 없었다.한참 후, 소희가 창문틀에 기대어 눈썹을 올린 채 심명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바로 네 목적이었어?”심명이 소희에게 술 한 잔을 건네주며 의아해서 되물었다.“무슨 목적?”“시치미 떼지 마.”방금 심명을 따라다니며 이미 적지 않은 술을 마셨지만, 소희는 여전히 심명이 건네준 칵테일을 받아 한입에 원샷했다. 그러고는 의외로 통쾌하게 심명을 향해 말했다.“괜찮아, 오늘은 네가 하고 싶은 걸 다 해, 내가 허락해줄 게.”술이 들어간 후의 소희는 더 이상 평소처럼 무뚝뚝하지 않았다. 오히려 술 기운이 살짝 올라 초롱초롱해진 두 눈은 왠지 모르게 깜찍한 게 사람의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했다.그리고 그러는 소희의 모습에 심명이 앞으로 다가가서는 고개를 숙여 소희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갑자기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데?”심명의 물음에 순간 눈동자에 난해한 빛이 스쳐 지난 소희는 결국 심명의 시선을 피해 두 눈을 아래로 드리웠다.그리고 이때, 연회장 안의 불빛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은은한
등불은 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고, 연회장 중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며 오가고 있었지만 임구택은 여전히 단번에 인파 속에서 소희를 알아보았다.그리고 화려한 옷차림을 한 소희가 눈동자에 웃음을 머금고 심명의 품에 기대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에 임구택의 눈빛은 순간 얼음장 마냥 차가워졌다.그녀를 위해 뜨겁게 뛰고 있던 심장도 점점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돌아가 디자인 원고를 마저 그려야 한다던 사람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모습으로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춤을 추고 있었으니.‘나와 함께 있을 땐 종래로 저렇게 꾸민 적이 없었으면서, 심명과 파티에 참가한다고 정성껏 치장하고 심지어 화장까지 한 거야? 그래서 심명이 나보다 더 중요하다는 건가?’‘아직 마음 속의 응어리가 풀리지 않아서 계속 나를 받아주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른 원인이 있었네. 역시 내가 너무 순진했어.’마음 속의 화가 먼저인지 아픔이 먼저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임구택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발걸음을 멈춘 채 얼음장 마냥 차가워진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심명과 웃으며 춤을 추고 있는 소희는 눈썹마저 같이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임구택은 차가운 심연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렇게 한 곡이 끝나고 심명은 소희를 데리고 물러났다.“배고프지? 뭐 좀 먹으러 가자.”술을 많이 마신 데다 춤까지 추었더니 어느새 술기운이 솟구쳐올라와 소희는 위가 쓰리기 시작했다.“가자.”소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심명이 소희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그렇게 연회장에서 나와 바깥 공기를 마시고 나니 소희는 순간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웃으며 심명을 향해 말했다.“우리 여기에 좀 앉아있자.”“어디 불편해?”“아니, 그냥 좀 앉아있고 싶어서.”“그래.”심명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소희와 함께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맞은편에는 분수가 물을 뿜고 있었고, 밤바람이 분수의 수증기를 감싸고 소희의 얼굴을 기분 좋게 쓰다듬었다.“취
소희는 순간 목이 메어왔다.그리고 그러는 소희의 표정을 보며 심명이 낮은 소리로 소희를 향해 말했다.“그럼 한 가지만 약속해줘.”“뭘? 말해 봐.”“조금 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 한마디도 하지 마.”심명이 농담 섞인 눈빛으로 소희를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이에 소희가 눈썹을 올린 채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뒤쪽에서 먼저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만 하지 그래?”너무나도 귀에 익은 소리라 소희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소리 없이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나서 고개를 돌렸다.임구택이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얼음장 마냥 차가워진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고 있었다.“디자인 원고를 그려야 한다며? 왜 여기에 있는 건데?”소희가 막 대답하려고 입을 여는데 옆에 있던 심명이 갑자기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소희의 귀가에 대고 말했다.“방금 약속한 일, 잊지 마.”이에 소희가 심명을 한번 흘겨보고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심명, 장난 그만 쳐.”소희의 두 눈에는 이미 경고의 빛이 섞여 있었지만 심명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소희의 허리를 감쌌다. 그러고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임구택을 바라보았다.“여기서 다 만나네요, 임 대표님.”임구택은 심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전히 소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눈동자 깊은 곳에는 노여움과 슬픔이 묻어 있었다.“오후에는 나와 키스하고, 저녁에는 또 다른 남자의 품에 앉아 있고. 소희, 너 정말 너무 대단하네. 난 단지 네가 나를 다시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줄 알았는데, 나와 심명 사이에서 적합한 사람을 고르고 있는 거였네? 그래서, 결정은 났어?”“당연히 나를 선택했죠. 방금 소희가 나와 참회하고 있었는 걸요, 임 대표님과 너무 가까이 가지 말았어야 했다면서. 심지어 미안하다고 사과도 했어요. 그리고 난 이미 소희를 용서했고.”심명의 해맑게 웃으며 임구택 앞에서 약 올리고 있는 모습에 소희가 바로 고개를 돌려 심명을 노려보았다.너무 지나치지 말라고 경고하고
소희와 함께 차에 올라탄 후 심명은 바로 차에 시동을 걸지 않고 고개를 돌려 소희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화 났어?”“아니, 네가 즐겁게 놀았으면 됐어.”“나한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야? 나 때문에 임구택을 화나게 해도 개의치 않아하는 걸 보니 네 마음 속에서 내가 임구택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네?”심명이 해맑게 웃으며 소희를 향해 물었고, 그러는 심명을 바라보며 소희가 덤덤하게 되물었다.“그만하면 안 될까?”심명이 두 손으로 소희의 어깨를 잡고 자신을 향해 돌렸다. 그러고는 소희와 두 눈을 마주진 후 작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화내지 마, 자기야. 이번이 마지막이야. 앞으로 난 아마 두 번 다시 이렇게 통쾌하게 임구택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할 거야.”“너무 유치한 거 아니야?”“임구택이 우리 아빠에게 무엇을 약속했는지, 아빠가 임구택과 공모하여 나를 오주까지 보내 버렸어. 내가 이런 억울함까지 당했는데 임구택을 그냥 곱게 놔둘 리가 없잖아. 사소한 원한도 반드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은 너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돼.”소희가 듣더니 어처구니없어 한숨을 쉬었다.“그래서 네가 이번에 돌아온 게 바로 구택 씨를 화나게 하기 위해서야?”“그럴 리가. 진짜 네가 보고싶어서 돌아온 거야. 임구택을 화나게 하는 건 겸사 겸사인 거고.”그러다 심명이 갑자기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고 무거워진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 녀석이 너를 그렇게 고생시켰는데, 이대로 너를 다시 그 녀석에게 돌려주자니 너무 달갑지 않았어.”“심명…….”소희는 순간 멍해졌다.‘심명이 모든 걸 눈치채고 있었어!’“네가 언젠가는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갈 거라는 걸 나도 진작 알고 있었어. 그래도 너무 빨리는 돌아가지 마. 그 녀석이 쉽게 너를 얻었다가 또 예전처럼 너를 아끼지 않고 함부로 상처를 줄까 봐 걱정이 돼.”쓸쓸함과 슬픔이 섞여 있는 심명의 두 눈을 바라보며 소희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뻐근하여 무슨 말을 해야
“걱정 마, 요요가 자주 네 얘기를 해.”심명이 듣더니 순간 기분이 좋아져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너보다는 양심이 있네.”“…….”“자,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한 번만 안아줘.”심명이 소희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그리고 웃음을 머금고 있는 심명의 두 눈을 바라보며 소희도 천천히 손을 내밀어 심명을 안았다.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검은색 차 안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꼭 껴안은 채 떨어질 줄 모르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임구택은 심장이 마치 날카로운 칼에 베이고 있는 것 마냥 아파나 숨도 잘 쉬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내가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이 장면을 봐야 하는 거지?’‘난 대체 어느 정도까지 더 비굴해져야 하는 거지?’‘이러고도 만회할 기회가 있는 건가?’‘난 분명 모든 존엄과 자부심을 내려놓고 또 모든 포악한 기운을 거둔 채 심명이 내 머리위에 올라타 시비 거는 걸 허용했고, 소희의 마음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해도 다 받아들였는데.’‘그런데 왜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소희를 잡지 못한 거지?’눈앞의 장면에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던 임구택은 심지어 자신이 퍼부었던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그러면서 그는 또 계속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았다.한 사람의 마음이 도대체 어디까지 아플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한참 후, 심명이 드디어 소희를 놓아주었다.“올라가 봐. 오늘은 푹 쉬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응. 조심해서 가, 오주에서 몸 잘 챙기고.”“알았어.”심명이 매혹전인 웃음을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고, 차에서 내린 소희는 다시 한번 심명을 향해 손을 흔들고 나서야 천천히 주택단지로 들어갔다.그렇게 소희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심명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백미러를 통해 뒤쪽에 세워져 있는 차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한번 드러내고 차에 시동을 걸어 경원을 떠났다.집으로 돌아온 소희는 바로 씻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전혀 잠이
구은서의 말은 애절했고, 눈물 가득한 얼굴은 누가 보아도 가련했다. 구은태는 자신이 이십 년 넘게 아끼고 사랑해온 딸을 바라보며 격했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임유진과 구은정은 눈빛을 마주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서선영 모녀를 끝장내야 한다는 예감이 동시에 스쳤다. 다시는 숨 쉴 틈을 줘선 안 된다.유진이 입을 열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몇 명의 경찰이 들어왔다. 방 안 상황을 본 경찰들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차분히 물었다.“서선영 씨는 누구시죠?”서선영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참이라 얼굴에 눈물이 범벅된 채로 당황스럽게 대답했다.“저예요. 무슨 일이죠?”경찰은 단호하게 말했다.“현재 한 유괴 사건에 연루되셔서, 저희와 함께 경찰서로 가주셔야겠네요.”“유, 유괴 사건이요?”서선영은 얼이 빠진 듯 말을 더듬었고, 은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경찰이 왜 여길 찾아온 거지?’‘분명히 손기수를 시켜 장말숙 가족에게 절대 신고하지 말라고 위협했고, 따로 사람도 붙여 감시하게 했는데, 분명 신고는 없었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경찰이?’유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때가 왔고,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서선영 모녀에게서 도망칠 구멍조차 허락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이에 구은태도 놀라 물었다.“유괴라니, 무슨 소리죠?”경찰은 구은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지금 서선영 씨께서 유괴 사건에 관련된 정황이 있어 조사 차 동행을 요청드려요. 협조 부탁드릴게요.”은태는 다시 서선영을 바라보았다.“또 뭘 꾸민 거야, 이 악마 같은 여자가.”은태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서선영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은정이 나섰다.“같이 가죠. 조금 전까진 은서가 우리 가족이라며 감쌌잖아요? 가족이면 함께 있어야죠.”그 말에 구은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언가 아주 불길한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원래 오늘 구씨 파티가 끝
서선영은 곧장 구은태에게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여보!”구은태는 휘청였지만 몸을 간신히 지탱했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꺼져, 이 악독한 년!”서선영은 힘없이 문 쪽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구은서가 들어왔다. 방 안의 참혹한 광경을 본 은서는 당황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구은태는 핏발 선 눈으로 서선영을 가리키며 외쳤다.“네 엄마한테 물어봐. 대체 뭘 한 건지!”은서는 아버지의 분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은정을 모함한 일이 들킨 건 아닌가 싶어 애써 표정을 감추고 서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서선영은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그때, 구은태는 갑자기 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서선영을 바라보고 물었다.“사실대로 말해. 은서, 이 애가 정말 내 딸이 맞아?”“맞아요!”서선영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은서는 당신 딸이에요. 그건 정말 확실해요!”“좋아. 지금 제대로 말 안 했다가 내가 친자 검사로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땐 죽여버릴 거야!”구은태는 분노로 이를 갈며 말하자, 서선영은 흐느끼며 소리쳤다.“정말이에요! 제 목숨 걸고 맹세해요. 제가 거짓말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아요!”그제야 은서는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건 은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였다.은서는 구은정에게 맞아 쓰러져 있는 최이석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어떤 장면이 뇌리를 스쳐갔고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서선영은 엉금엉금 기어가며 구은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여보, 제가 배신하고 잘못한 건 맞아요. 하지만 은서는 정말 당신 딸이에요. 그렇게 똑똑하고 예쁜 아이잖아요.”“당신도 얼마나 예뻐했어요. 은서 봐서,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그제야 은서는 모든 걸 직감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그러나 임유진은 이를 꽉 물고 단호하게
최이석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있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곧장 도망치려는 듯 문을 열었는데, 그 문 너머에는, 구은정의 날렵하고도 위압적인 실루엣이 서 있었다.은정은 말없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발을 들어 최이석의 가슴팍을 걷어찼다.“컥!”이석은 뒤로 넘어지며 카펫 위에 엎어졌다.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지만, 그 울음은 진짜인지 연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그때, 숨을 거칠게 내쉬며 구은태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철저히 일그러져 있었고, 그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그리고, 구은태는 서선영 앞에 멈춰서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서선영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뺨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서선영은 그 충격에 그대로 몸이 비틀어졌고, 얼굴을 감싸 안으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이 더러운 년!”구은태는 서선영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고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반대쪽 뺨을 갈겼다.“제가 잘못했어요. 한순간, 제가 정신이 나갔었어요.”서선영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구은태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그녀의 두 볼은 이미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대체 너희 둘, 언제부터 이런 짓을 벌인 거야!”구은태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그 순간, 최이석이 조롱 섞인 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섰다.“솔직히 말해줄까요? 서선영이 당신 만나기 전부터 벌써 나랑 자고 있었어요. 회사 들어간 이후로는 매주 만나서 몸 섞었고요.”“입 닥쳐!”서선영은 미쳐 날뛰듯 소리쳤지만, 최이석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구은태만을 노려봤다.“저 여자는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요. 사랑한 건 당신 지갑뿐이고요. 30년 전, 당신이 술 마시고 덮쳤다고 생각했죠?”“웃기지 마요. 전부 미리 짜놓은 대본이었으니까. 그때 은서가 생겼고, 도망친 척하면서도 사실 계속 강성에 있었어요.”“당신 바로 곁에서, 우릴 속이고 있었던 거죠. 참, 당신 원래 부인 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는 줄 알아요?”“서선영이 일부러 임신한 배를
구은서는 서선영보다 훨씬 더 잔인했기에, 임유진은 점점 불안해졌다.“혹시 그 애까지 다치게 되는 건 아닐까요?”이번 일은 유진이 먼저 제안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은서가 장말숙을 압박하기 위해 그 손자를 납치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그럴 일 없어.”그러나 구은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는 절대 다치지 않을 거야.”유진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고, 은정은 이어서 설명했다.“장말숙은 처음부터 독을 품은 호랑이와 손잡은 셈이지. 이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은서가 장말숙의 손자를 납치했다는 건 이미 그 집안을 완전히 조사해 놓았다는 뜻이야.”“내가 강성을 떠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아이를 이용해서 조종하려 했을 거야.”“그런데 네가 먼저 움직여준 덕분에 우린 미리 조치할 수 있었고, 결국 아이도 지켜냈지.”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봤다.“예전과 완전 딴사람이 된 것 같아요. 위로까지 이렇게 부드럽게 하다니?”은정은 애옹이를 옆으로 밀어내고 유진을 품에 끌어당겼다.“질문 하나 해도 돼? 너는 서인을 좋아해, 아니면 구은정을 좋아해?”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둘 다 같은 사람 아닌가요?”은정은 묵직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잖아.”유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중얼거렸다.“사실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어. 다른 건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차이였을 뿐이죠.”그리고 고개를 들며 은정의 눈을 마주 봤다.“내 말 맞죠?”이에 은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예전의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촉촉히 빛나는 눈으로 미소 지었다.“아니요. 오히려 시언 사장님이 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는 그게 정말 고맙거든요.”은정의 눈빛이 깊고 짙어졌다. 가슴이 저릿할 만큼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차올랐다. 은정은 고개를 숙여, 유진에게 입을 맞췄다.“유진아. 난 늘 널 사랑했어.”은정은 언제나 유진만을 마음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