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정은 서인에게 만족하지 못했지만,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여전히 마음이 동했고, 그래서 시험 삼아 물었다. “가게 전화예요? 당신의 샤부샤부 가게가 바쁘겠네요, 수익은 어떻게 되나요?”돈을 벌면 인정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괜찮아요!” 서인이 끄덕이자 인정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안했다. “식사 후에 같이 영화 보러 갈래요?”서인이 거절하려는 찰나, 옆자리에 앉은 임유진이 갑자기 전화를 들고 말했다. “안녕, 나 지금 집 아니고 밖에서 소개팅 중이야!”“상대방은 괜찮아 보이는데, 부자 같진 않아. 작은 샤부샤부 가게를 운영하고, 입은 옷 중에 명품 한 벌도 없어.”“날 속인 사람이 분명해!”“회원 카드를 빌려서 여기 와서 체면을 세웠는데, 만약 그가 계산할 돈이 없으면 정말 창피할 거야!”“아, 오늘 내 드레스에 웨이터가 국물을 튀었어. 이 드레스는 800만 원에 샀는데, 내가 1360만원을 달라고 했어. 이득이지?”“소개팅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헛수고는 아니었어!”인정은 쓱 하고 일어나 유진을 향해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봤다.서인은 유진이 혼자 말하는 것을 보며 놀랐고,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인정이 당황한 듯 서인에게 물었다. “왜 웃어요?”서인은 물을 마시며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제가 웃는 게 정인 씨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인정은 화가 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했고, 유진을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 누구야, 왜 내 말을 흉내 내?”인정의 말에 유진은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당신 말을 흉내 냈나요? 저는 제 친구에게 전화하고 있었어요!”“당신의 소개팅 상대는 어디 있나요?” 인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는데, 서인이 있어 방금처럼 오만하게 말할 수 없었다.그리고 유진은 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저 사람이랑 소개팅 중이에요, 당신 뒷 순서가 저라서, 안 되나요?”인정은 놀라서 서인을 바라보았지만 서인은 차분하게
정인정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서인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지금 그의 앞에서 사람들의 지적을 받으며 면박을 당하고 있어 매우 난처했다. 인정은 바닥에 구멍이라도 있으면 그 속으로 숨고 싶었다. 인정은 속옷만 입고 있었기 때문에 유진에게 드레스를 벗어줄 수는 없었다. 결국 휴대폰으로 받은 1360만 원을 돌려주며 유진을 힐끔 쳐다보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유진은 자리로 돌아와 핫 초콜릿을 한 모금 마시며 매우 만족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악독한 사람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이득을 보게 해서는 안 되었다.서인은 유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로 와!”“저 사람이 앉았던 자리에는 앉고 싶지 않아요, 아니면 본인이 여기로 오시던지.”유진이 투덜거리자 서인은 어쩔 수 없이 웃으며 일어나 유진의 곁으로 갔다.“뭐 먹을래? 내가 살게.” 서인이 메뉴판을 유진에게 건네며 말했다.“왜요? 고마워서요? 나중에 계산할 돈이 없으면 어쩌려고?” 유진은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있었고, 램프 빛 아래에서 유진의 눈동자는 장난기 가득하고 사랑스러웠다.“돈이 없으면 너를 여기 남겨두고 접시를 닦게 할 거야!” 서인이 의자에 기대며 반쯤 농담으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당신을 데리고 함께 남겨질 거니까!” 유진이 무심코 말하자 서인이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앙다물고 웃었다. “그럼 우리 둘이 같이 하면 더 빨리 빚을 갚을 수 있겠지.”유진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날 정원에서 그녀가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이후로, 유진은 서인을 피하면서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랬기에 그와 이렇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건 오랜만이었다.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삼촌이랑 소희도 위층에 있는데 같이 가서 북적거리는 분위기에 참여할까요?”“됐어! 소희의 친구들은 나랑 별로 안 친해.”서인은 시계를 보고 말했다. “너도 위로 올라가. 나는 가게로 돌아갈게.”“나도 안 올라갈래요.” 유진이 낮은
임유진은 순간 당황해서 뒤를 돌아봤다. 사람들 사이에서 서인이 한 손에는 커다란 팝콘 통을, 다른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유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주변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지만, 그 순간 유진의 눈에는 오직 그 서인만이 보였다. 크고 카리스마 있는 그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팝콘 통을 든 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의 마음은 갑자기 평온과 따뜻함이 맴돌았다. 아마 몇 년이 지나, 아니 몇십 년이 지나도 이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 같았다.서인은 휴대폰을 끊고는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팝콘을 그녀에게 건넸다. “여기.”유진은 팝콘을 받아 들고는 상황이 파악되었는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푸핫!”“왜 웃는 거야?” 서인이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리자 유진은 커다란 팝콘 통을 안고, 눈이 반짝거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별거 아니에요. 이제 표 검사할 테니까 줄 서요!”“그래.”서인은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응.”둘은 표를 늦게 예매했기 때문에 뒷자리밖에 남지 않았고, 보통 뒷자리는 연인들이 애정 행각을 벌이는 곳이었다. 그랬기에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커플들은 서로를 껴안기 시작했다. 서인은 시력과 청력이 모두 뛰어나서, 원치 않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코미디 영화였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었지만, 서인만은 진지한 표정이었다.유진은 원래 웃음이 많은 편이라, 더욱더 크게 웃어서 눈물까지 흘렸다. 그래서 영화가 절반 정도 지나서야 서인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유진은 생각에 잠긴 뒤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화장실 가고 싶어요?”유진이 가까이 다가오자, 서인은 그녀의 달콤한 향기를 맡았다. 그리고 그의 손은 의자 뒤에 살짝 구부려졌다. “아니.”“그럼 왜 안 웃어요?” 유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서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가 웃겨?”“…….”‘그래, 어떤 사람들은 웃음 포인트가 높은 거야.’할 말을 잃은 유진은 팝콘을 서인에게 건넸다
서인은 순간 멈칫했고,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 것 같았다. 주변은 고요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울리는 소리로 가득 차서 평온을 찾을 수 없었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또한, 서인은 임유진의 순수하고 고집스러운 눈빛을 보며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아직 어려.”“듣고 싶지 않아요!” 유진은 그의 말을 바로 끊었고, 눈빛은 더욱 단호했다.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말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했다면, 나는 당신을 좋아할 권리와 자유가 있어요.”“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걸 막을 수 없고, 나도 막을 수 없을 거예요.”차 안의 불빛은 어둡고, 서인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 아마도 유진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아 초조함만 가득 늘었다.“서인.” 유진이 다시 부르자, 서인은 본능적으로 돌아보았고, 유진이 갑자기 몸을 숙여 그의 뺨에 ‘쪽' 하고 입맞춤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서인은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빠르게 물러섰다. 유진은 눈이 초롱초롱해서 말했다.“오늘부터 당신 쫓아다닐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날 거부하지만 말아요!”유진은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와 불안한 눈동자는 유진의 긴장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말을 마친 후, 유진은 서인의 표정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빠르게 차에서 내려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바로 입구로 향했다.마당에 들어서도 유진은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 진정되지 않았고, 얼굴은 뜨겁고 화끈거리는 것이 아마도 벌겋게 달아올랐을 것이었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차 안은 어두웠기 때문에 서인이 그 모습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유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고,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혼자서 한동안 바보처럼 웃었다.유진은 나무 그늘에 숨어 마당 밖을 바라보았고, 서인의 차가 아직 그 자리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유진은 방금 행
임유민은 임유진의 당황한 뒷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분명 무슨 속사정이 있을 것이었다.……서인이 가게로 돌아왔을 때,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는 샤워하고 자기 방에서 누워 담배를 피웠다. 하지만 머릿속은 자꾸만 차 안에서 유진이 자신에게 고백했던 그 순간의 표정이 떠올랐다.서인은 소희에게 말할지 고민했다. 소희가 유진에게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서인의 눈에는 유진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잘못된 감정으로 보였다. 그랬기에, 유진을 샤부샤부 가게를 그만두게 권유할까 생각도 들었다.유진의 학업은 이미 끝났고, 성적도 우수해서 많은 회사가 유진에게 오퍼를 던졌다. 하지만 유진은 임씨 그룹으로 가지도 않고, 다른 회사에도 들어가지 않고 계속 샤부샤부 가게에 남아 있었다. 그랬기에 서인은 이에 대해서 유진과 얘기하고 싶었다.하지만 지난번 뒷마당에서 둘 사이가 어색하고 굳어진 후, 서인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계속 미뤄왔다.담배를 두 대 연달아 피운 후, 서인은 불을 끄고 잠을 자려고 했지만, 뒤척이다가 잠을 이루지 못했다.밖에서 이문과 오현빈이 카드놀이를 하며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에 열이 뻗쳤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 몇몇 사람들에게 말했다.“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다들 자러 가.”이문과 현빈 등 사람들은 다소 놀랐다. 평소에는 자정까지 놀았는데, 오늘은 11시가 되기도 전에 보스가 그들에게 잠자리에 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서인이 말했으니, 그들은 따를 수밖에 없어 서둘러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가자 서인도 문을 닫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밖은 이미 조용해졌지만, 서인은 여전히 졸음이 오지 않아 침대에서 몇 번을 뒤척였지만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담배를 다시 피우려고 불을 켜려는 순간,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이 갑자기 밝아졌다. 유진에게서 온 카톡에 서인은 얼른 앉아 메시지를 확인했다.[잠이 안 오는 게 불면증이 온 것 같아요
어둠 속에서 서인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느긋하게 담배를 피웠다. 불빛이 깜빡이고, 담배 연기가 어둠 속에서 퍼져나가며 서인의 실루엣을 흐릿하게 만들었다.그는 마치 큰 난제에 부딪힌 것처럼 보였다.자신이 친동생처럼 여겨온 여자애였고 소희와의 관계 때문에 말을 조심해야 했다. 그랬기에 어떻게 하면 유진을 포기하게 할 수 있을지 머리가 아팠다.……서인이 늦게 잠들었기 때문에, 다음 날 일어났을 때는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위층은 조용했고, 이문 등 사람들은 이미 아래층에서 영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서인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아래로 내려와 주방을 지나가다가 뒷마당에서 물을 뿌리는 소리와 유진의 목소리를 들렸다. 그러자 서인은 발걸음을 돌려 뒷마당으로 향했다.뒷마당에서 유진은 호스로 그녀의 장미에 물을 주고 있었다. 유진은 흰색 셔츠에 청바지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고, 물을 뿌리며 고양이랑 놀고 있었다. 아침 햇살 아래 물안개가 퍼지며 희미한 무지개를 만들었고, 그녀의 얼굴에는 순수하고 맑은 웃음이 가득했다.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본 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며, 얼굴에 화사한 웃음을 띠었다. “일어났어요? 아침 식사 사 왔으니까 먼저 먹어요.”서인은 유진과 할 말이 많았지만, 자기를 보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유진의 모습에, 하고 싶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고개를 돌려 고양이와 놀다가 물통을 정리하고 낙엽을 치우며 바쁘게 움직였다.그리고 서인은 유진을 방해하지 않고 잠시 서 있다가 떠났다.홀에서 이문 등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을 때, 서인이 다가오자 자리를 내주었다.“보스, 유진이 봤어요?” 오현빈이 웃으며 말했다. “아침 식사는 유진이가 사 온 거예요.”서인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일찍 일어나. 여자애 하나가 우리 몇 남자한테 아침 식사를 가져오는 건 말이 안 돼.”하지만 이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끼리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유진이가 계산적인 애도 아니고…….”이문이 말을 마치기도
이문이 말했다. “모르겠어, 오후에 나갔다가 밤중에야 돌아왔어.”현빈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보스 일에 우리가 끼어들 필요 없어. 우리 일만 잘하면서 보스를 화나게 하지 말자고.”현빈의 말에 이문과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서인은 담배를 위층에 두고 왔다는 걸 기억하고는 담배를 가져오려고 위로 올라가려 했다. 그런데 주방을 지나다가 갑자기 멈춰 섰고, 발걸음을 돌려 뒷마당으로 향했다.유진은 가위로 장미의 마른 가지와 잎을 자르고 있었고, 서인이 오는 것을 보자 그를 부르며 말했다. “서인 사장님, 저기 사다리 좀 옮겨 주세요.”서인이 벽 아래에 있는 사다리를 바라보았지만 움직이지 않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안전하지 않아, 그만두는 게 좋겠어.”그러자 유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두세 계단만 오르려고 해요. 위쪽 잎사귀 좀 자르려고요, 너무 무성하면 꽃이 잘 안 피거든요.”“필요 없어!” 서인은 여러 차례 거절하자 유진은 서인의 얼굴이 좋지 않은 것을 깨달았고, 웃음이 조금 굳었다. “무슨 일 있어요?”서인은 원래부터 차가운 기운을 풍기는데, 웃지 않을 때는 더욱 냉정하고 예측 불가능했다. 그는 한숨을 깊게 들이쉬며, 분위기를 조금 완화하려고 노력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사다리에 올라가지 마. 안전하지 않아. 뭔가 필요하면 이문이나 현빈에게 부탁해.”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걸어갔다.“서인!”유진이 그를 불러 세웠고, 빠르게 다가가 그의 소매를 잡았는데, 힘을 주었는지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화났어요?”“어제 제가 한 말 때문에?”서인의 큰 몸이 약간 굳었고, 목소리도 차갑고 단단했다. “아니야.”“그러면 어제는 괜찮았는데, 왜 그래요?” 유진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불안해하자 서인이 돌아섰고, 그림자가 유진을 덮쳤다. 그러고는 유진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임유진, 지금 날 놀리는 거야?”서인의 말에 유진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이에요?”“넌 여진구 회사에
임유진의 얼굴이 어둡게 변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걱정할 일 없어요. 당신은 저보다 여진구를 더 좋아하길 바라잖아요, 그래야 저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그러자 서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혀끝으로 어금니를 툭 치고는 말없이 있었다.“이제 사다리 좀 옮겨 줄 수 있어요?” 유진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묻자 서인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그녀를 위해 사다리를 옮겼다.유진은 앞서 걷는 서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갑자기 물었다. “근데, 왜 화났어요?”서인은 잠시 멈칫했지만, 침착하게 부인했다. “화난 적 없어.”하지만 유진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작게 중얼거렸다. “분명히 화났잖아.”서인은 몇 걸음 빠르게 걸으며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사다리를 장미 벽 아래에 놓고 서인은 위치를 잡아 안정되게 세웠다. “어떻게 잘라야 할지 말해, 내가 올라가서 잘라줄게.”“안 돼요, 다 잘라버릴 거예요.” 유진이 투덜거렸다. “제가 직접 할게요.”서인은 유진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유진이 사다리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며 불안해하다가, 아래에서 사다리를 붙잡아주었다.유진은 큰 가위로 불필요한 가지와 마른 잎을 잘라내며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며칠 후에 낙엽이 더 많아질 거예요. 내가 없을 때, 여러분이 수고해야 할 거예요.”서인이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유진은 높은 곳에 서서 햇살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고, 그의 시선을 눈부시게 했다.그 순간 그는 둘 사이의 간격을 더욱 분명히 깨달았다. 유진은 높은 곳, 햇살 아래에 있는 것처럼 보였고, 새벽의 태양처럼 생기 넘치고 반짝였다. 반면에 자신은 그림자 속에서 살아야 하는, 마른 낙엽처럼 쓸쓸하고 황량한 존재였다.서인은 눈을 내리깔고 나지막이 말했다.“괜찮아, 청소할게.”유진은 더 높이 올라가며 말했다. “이문이 하게 해요, 점점 더 살이 찌니까 운동 좀 시켜야 해요.”서인은 머리를 숙이고 그림자를 바라보며 넋 나간 사람처럼 대답했다. “알겠어.”“그리고, 제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