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은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만 있었지!”우청아는 쓰라린 아픔을 참으며 일어나 방을 떠났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을 때, 청아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정신이 몽롱한 채 밖으로 걸어가던 중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청아 씨!”청아가 고개를 돌려보니 고명기 부사장이었다. 뜻밖의 인물에 청아는 조금 놀랐다.“어떻게 여기 계세요?”이에 고명기가 청아를 훑어보며 말했다. “괜찮아요?”고명기의 말에 청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고명기는 청아가 또다시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돼 술자리가 끝난 후에도 떠나지 않고 여기서 청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에 청아는 감동했다.“괜찮아요, 감사합니다!”“청아 씨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아직 순수해요. 하지만 거절해야 할 것은 거절해야 하죠. 성수현 사장님 문제는 대처를 잘했고요.”그러자 청아는 감사의 말을 전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저와 장시원 사장님은 친구니까, 저를 해치지 않을 거예요!”“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고명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제 집에 갈 테니까 청아 씨도 일찍 들어가요.”“네!” 청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일터에서 이런 상사를 만난 것은 청아에게 큰 행운이었다.“아닙니다.” 고명기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청아가 호텔을 떠나 택시에 앉아 있을 때, 시원의 말들이 떠오르자 가슴이 아파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집에 돌아와 보니 이경숙 아주머니는 아직 잠들지 않았고, 우청아 몸에서 나는 술냄새를 맡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청아 씨,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힘들게 하지 마요. 잠깐 앉아서 쉬어요. 물 좀 갖다줄게요.”“괜찮아요, 이렇게 늦었는데 빨리 들어가세요!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오지 마세요.”이경숙 아주머니가 물을 가져다주며 청아의 얼굴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 있어?”청아가 물을 받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냥 좀
우청아는 장시원이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는 절대 기대하지 않았으며, 그런 꿈조차 꾸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시원의 말은 청아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예전에 했던 고백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그때 청아는 시원이 단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자신이 그를 처음으로 거절한 사람이기 때문에 시원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청아는 시원의 고통을 알았다. 시원은 청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복잡한 생각이 들자 청아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고집이 옳은 것인지, 자신이 시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둘에게 진정한 미래가 있을지 혼란스러웠다....다음 날시원이 호텔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아침 9시였고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더니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오랫동안 이렇게 많은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주름진 셔츠를 보며, 시원은 주성에게 전화를 걸어 옷을 가져오라고 했다.시원이 옷을 벗고 샤워하러 갔고, 몇 분 후 목욕가운을 입고 나왔을 때, 배강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배강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여기서.”이에 시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음?”배강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며 은근슬쩍 물었다. “방에 다른 사람 없어?”시원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꺼내며 배강을 힐끔 바라보았다. “귀신이라도 있을까봐? 들어가서 찾아볼래?”그러자 배강은 놀라며 말했다. “청아 씨 갔어?”청아의 이름에 시원이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손이 멈췄다. “우청아?”“응, 어젯밤 일부러 청아 씨 남겨서 널 챙겨달라고 했어. 너희 둘이 술기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랐는데, 정말로 갔다니!” 배강이 아쉬워했지만 시원의 얼굴색이 점점 어두워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한 번만 또 이러면, 너 운강으로 유배 보낼 거야!”“아, 알았어. 앞으로는 안 그럴게!” 배강이 농담처럼 말했다. “이게 내가 다 너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시원은 불붙지 않은 담배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차가운 표정으로 앉았
우청아는 일찍 일어나 만두를 삶고, 국을 끓이고는 소희에게 문자를 보내 식사에 함께하지 않겠냐고 물었다.식사 준비가 거의 다 됐을 때 요요도 깨어났다. 청아는 요요의 얼굴을 씻겨주고 옷을 갈아입혔으며, 소파에 앉아 요요에게 작은 땋은 머리를 해주었다.“엄마, 오늘 쉬는 날이야?” 요요가 큰 눈을 뜨고 귀엽게 물었다. 아마 이경숙 아주머니가 오지 않았으니 엄마가 쉬는 날인가 싶어 물어본 듯했다.“응, 밖에 나가 놀고 싶어?” 청아가 웃으며 묻자 요요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그럼 착하게 밥 먹고 나면 엄마랑 같이 놀이공원에 가자!”청아의 제안에 요요는 기뻐서 웃었고 눈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소희 이모랑 성연희 이모도 함께 가?”“소희 이모는 수업이 있어서 시간이 없어. 연희 이모도 자기 일이 있으니까, 오늘은 엄마랑 둘이 가야 해. 괜찮지?”“응!” 요요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아가 요요의 머리를 다 빗겨주고 식사하러 갔을 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는데 허홍연이였다.“엄마!”허홍연이 웃으며 말했다. “청아야, 오늘 쉬는 날이지? 오랜만에 집에 와. 오늘 엄마가 네가 좋아하는 반찬 만들어 줄게.”이에 청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안 돼요, 요요를 놀이공원에 데려가기로 했어요.”“그래?” 허홍연이 조금 머쓱해서 웃었다. “사실은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직접 만나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바쁘면 전화로 할게.”“네 이모 집 사촌이 장씨 그룹에서 일하고 싶은데 면접에 떨어졌어. 네가 사장이랑 사이가 좋으니까, 그쪽 인사부에 좋게 얘기 좀 해줄 수 있어?”“사실 사장 한 마디면 해결되는 일이잖아.”청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도와줄 수 없어요, 저 이미 회사 그만뒀어요.”“그만뒀어?” 허홍연이 놀라서 물었다. “언제?”“한 달 조금 넘었고 새 회사로 이직했어요.” 청아의 말에 허홍연은 조금 당황했다. “장씨 그룹처럼 좋은 직장을 어떻게 그냥 그만두니? 게다가 그만두기 전에 적어도 나랑 상의는 해야 하는
우청아는 휴대폰을 꽉 쥐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뱉지 못하고, 한참 동안 참고 있었다.청아는 자신의 가정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홍연 혼자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고등학교 때부터 여름 방학마다 일을 해서 학비를 벌었고, 대학에 가서는 가족에게 한 푼도 쓰지 않았다.2년 동안 외국에서 혼자 지내면서 가족이 그리웠다. 귀국 후 가족과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기를 바랐다. 허홍연이 아팠을 때, 청아는 최선을 다해 돌봤다. 외국에 있던 2년 동안 허홍연 곁에 있지 못한 것을 보상하고자 했다.근데 청아는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효도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처음에 허홍연과 허연이 청아를 속였을 때, 그녀는 진실을 알고 난 후 슬프고 상처받았지만 지금처럼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만 졌고, 마음도 점점 더 차가워졌다.이때 요요가 청아의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며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엄마, 무슨 일이야?”청아는 몸을 숙여 요요를 안았다. 청아의 눈에는 눈물이 없었고, 오직 슬픔만이 있었다. 이때 휴대폰이 다시 울려 봤더니 청아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가 이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나야!” 허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청아, 돌아왔어? 네가 돌아왔다고 해서 널 찾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마. 네가 나한테 빚진 돈 아직 4천만원이나 남았어. 언제 갚을 거야?”청아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고, 목소리는 조금 쉬었다. “지금 2천만원밖에 없으니까 먼저 줄게요.”“그래, 일단 2천만원 보내고 나머지 2천만원은 일주일 안에 줘. 급하게 써야 할데가 있어!”허연의 말에 청아는 미간을 찌푸렸다.“일주일 안에는 못 갚아요.”허연이 화를 내며 말했다. “우청아, 처음에 네가 3년 안에 1억을 다 갚겠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민다고?”“아직 두 달 남았고 오리 발 내미는 것도 아니에요. 전부 다 갚을 건데,
“그러다가 고급 디자이너가 될 거야!”이지현이 몇 걸음을 뛰어가며 화를 내며 말했다. “김민주 씨 디자인 초안 다 됐어요? 여기서 놀고 있으면서 부사장님한테 혼나고 싶나 봐요? 그리고 다른 분들도요!” 지현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회사를 다니는 디자이너인가요, 아니면 동네 마실 나갔다가 수다나 떠는 아주머니들인가요?”김민주 일행이 대꾸하려다가 우청아도 같이 있는 걸 보았다. 며칠 전 황대헌이 청아를 잘 챙기라고 했던 걸 생각하며, 말을 꺼내지 못하고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서 떠났다.“디자인할 때는 멍청이 같이 가만히 있으면서, 수다 떨때는 그 누구보다 집중해서 하시네요! 그럴거면 아예 수다 국가대표를 하시지 왜 여기에 있는거죠?” 지현이 청아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요!”하지만 청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무슨 일인데요?”그러자 지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말하면 청아 씨가 화낼까 봐 걱정되는데, 오늘 아침부터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수군대더라고요.”“지난 금요일 밤에 청아 씨가 장시원 사장님이 술에 취한 틈을 타서 방문을 두드렸다고, 그리고 밤새도록 안 나왔다고 하더라고요.”청아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덧붙였다. “난 물론 믿지 않지만요!”어이없는 얘기에 청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 소문을 누가 냈는지 사실은 알아보기 쉬워요. 그날 밤 호텔에 간 사람들은 몇 명 안 되니까, 누군지 감이 오는 사람이 있나요?” 지현의 질문에 청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요.”고명기는 가능성이 없고, 황대헌도 디자이너들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을 테니,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진도준이었다. 청아가 장씨 그룹 대형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후, 도준의 태도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소문이 도준에 의해 퍼진 것인지, 아니면 도준의 비서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그리고 청아가 도준을 찾아간다 해도, 도준은 분명히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어떻게 할 거예요?” 지현이 묻자 청아가 물을 따
“너무 긴장하지 마!” 배강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었다. “별거 아니고 그냥 금요일 밤에 우청아가 널 방으로 모시고 가는 걸 누군가가 보고, 그걸 가지고 청아를 비방하고 있어. 청아 씨한테 더러운 물을 끼얹고 있지.”장시원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진도준이야?”배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야.”그러자 시원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접어두고 일어나며 말했다. “나 콜드스프링에 한번 가볼게.”그가 몇 걸음 걷다가 마치 무언가를 떠올린 것처럼 멈춰 서며 배강을 돌아보았다. “네가 이 일을 처리해.”“청아 씨를 위해 직접 나서고 싶지 않은 거야?”배강의 말에 시원의 얼굴에 불쾌함이 스쳤다. “네가 청아에게 문제를 일으킨 거니까 네가 해결해. 해결 못 하면 돌아올 필요 없고.”그러자 배강이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내가 갈게. 콜드스프링을 뒤집어엎든, 청아 씨도 지키고 내 직장도 지킬 거야.”“떠들지 말고 빨리 가!” 시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배강은 시원이 속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마음 한구석에서는 시원의 상황을 이해가 돼 씁쓸해졌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어도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동정심이 생겼다. 이에 배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황대헌은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고 있어서 청아가 비난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황대헌의 비서가 배강이 찾아왔다고 전화를 받고서야 서둘러 돌아왔다.“배강 부사장님!” 황대헌이 조바심을 내며 말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미리 연락을 주지 않으셔서,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이에 배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청아 씨한테 문제가 생겼다고 들어서 한번 보러 왔죠.”“무슨 문제요?” 황대헌이 어리둥절해하자 비서가 서둘러 사무실에서 청아에 대한 찌라시들을 설명했다. 그러자 황대헌의 얼굴색이 급격히 변했다. “이 소문은 어디서 시작된 거야, 조사했어?”비서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있자 배강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그날 술자리에
진도준은 반박할 수 없었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그저 술에 취해 비서에게 몇 마디 투덜거렸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 번질 줄은 몰랐습니다.”그러자 황대헌이 말했다. “장시원 사장님이 배강 부사장을 직접 보내 조사하게 했어요. 아무리 저라도 당신을 지킬 순 없다는 뜻입니다. 회사 측에서 자르기 전에 자진사퇴 하세요.”원래라면 회사 내부에서 조사해 도준에게 경고나 감봉 정도로 끝났을 것이었다. 하지만, 배강이 사무실에 앉아 시원의 명예 문제까지 언급하면서 일은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도준은 눈을 크게 뜨고 황대헌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부사장님, 이건 너무하지 않나요! 많은 말들이 저로부터 나온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과장해서 퍼뜨린 건데요!”“하지만 배강 부사장이 해명을 요구하고 있는데, 제가 이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황대헌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어요. 이번 일은 아마 도준 씨 인생에 큰 교훈이 될 겁니다.”“저도 가능한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게 노력할게요.”콜드스프링 건축회사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일하며 고생 끝에 고급 디자이너가 된 도준은 단 한마디의 험담 때문에 해고될 처지에 놓이자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원해도 황대헌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고, 심지어 도준의 비서까지 함께 해고했다. 도준을 해고한 후, 황대헌은 디자인 부서에 가서 말했다. “금요일 밤, 장시원 사장님을 위한 식사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청아 씨가 장시원 사장님을 챙겨드린 건 사실입니다.”“하지만, 저와 고명기 부사장이 청아 씨와 함께 호텔을 떠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건 고명기 부사장도 증명할 수 있고요.”“소문들은 모두 고의로 날조된 것입니다. 제가 다시 이 문제에 대해 누군가의 뒷담화를 듣게 된다면, 그 사람을 바로 해고시킬 겁니다.”모두가 조용히 듣고 있었고, 도준이 해고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에 무분별하게 소문을 퍼뜨린 사람
“어떻게 된 거예요? 황대헌 부사장님이 이번에 이렇게 신속하게 처리해서 진도준을 해고하셨는데, 왜 기분이 안 좋은 거예요?” 이지현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우청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핸드폰을 집어 들며 장시원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망설이는 순간, 핸드폰 화면이 저절로 밝아지며 낯선 번호의 전화가 걸려 왔다. 청아는 잠시 당황해하다가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우청아 씨 맞으신가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약간의 초조함이 느껴졌다.“네, 맞습니다. 누구신가요?” 청아가 물었다.“저는 우임승 씨의 동료인데요, 지금 사고를 당하셔서 지금 병원에서 응급처치 중입니다.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남자가 급하게 말하자 청아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무슨 일이죠?”“병원 주소를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빨리 오세요. 오시면 자세한 얘기를 나누죠!” “알겠습니다.” 청아는 전화를 끊고, 슬그머니 올라오는 공포를 억누르며 일어나서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청아는 택시를 타고 강성대병원으로 향했다. 길을 가는 내내 머리는 멍했고, 몸은 발끝부터 차가워져서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청아는 응급실로 달려갔다.우임승은 아직 응급 처치 중이었고, 밖에서는 몇몇 회사 책임자와 우임승의 동료들이 지키고 있었다.“아빠!” 청아가 달려가며 당황스럽게 물었다. “우리 아빠 어떻게 된 거예요?”회사의 책임자인 강래원이 다가왔다. “우청아 씨 맞나요?”청아가 불안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강래원이 말했다. “저희 회사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했어요. 당신 아버지께서 불을 끌려고 안으로 들어가셨다가 다치셨습니다. 지금 응급처치 중이에요.”청아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무릎을 꿇을 뻔했다. 다행히 옆 사람들이 청아를 붙잡아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래원은 사람을 시켜 청아에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여기 앉아서 잠시 기다리세요. 무슨 일이 생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
“여진구 제대로야. 임씨 집안 딸이랑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공신 되는 거지. 할아버지도 계속 웃고만 계시잖아. 아이, 우린 왜 그런 복이 없을까.”“네가 저 아가씨랑 결혼했으면, 진구 대신 네가 후계자 됐겠지.”누군가 농담을 건네자. 여인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말했다.“너희는 저 여자가 뭐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내 눈엔 그냥 싸구려야. 한쪽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 노릇하려 들고, 한쪽으론 구씨그룹 사장한테 붙어먹고 있다니까?”순간 주변이 조용해졌고, 다른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그거 어떻게 알아?”“내가 봤다니까, 거짓말일 것 같아? 할아버지 생신 잔치 때, 임유진이 구은정이랑 서로 잡고 끌고 하는 장면 내가 직접 목격했어.”인후는 비웃듯 말했다.“진구는 그걸 모르고 좋아 죽고 있겠지. 이미 유진한테 다른 남자가 생긴 줄도 모르고.”이에 사람들 사이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저 아가씨는 겉으론 참 청순해 보였는데, 의외네.”인후는 유진이 자신을 무시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고, 진구에 대한 질투도 더해져 그의 말은 점점 도를 넘었다.“겉으로 고상하고 순해 보이는 애들이, 뒤로는 더 음란한 거 몰라? 저런 여자가 제일 문란하게 노는 법이지.”“쾅!”갑작스레 문이 거칠게 열렸고, 인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한 주먹이 얼굴을 가격했다.그 한 방에 코뼈가 부러지고, 머릿속은 울려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아찔했다.문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살기 서린 기운을 뿜어내며, 냉혹한 기세로 여인후를 주먹질하고 발길질했다.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여씨 집안 사촌 형제들도 함께 맞았다. 차례차례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유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옆방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과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방향을 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멍하니 굳어버렸다.바닥엔 네댓 명이 쓰러져 있었고, 은정은 여인후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날 밤, 여씨 집안의 한 어르신이 귀국해, 강성의 모 유명 5성급 호텔에서 가족 만찬이 열렸다.임유진은 여진구와 함께 도착했다. 메인 테이블은 여씨 직계 가족들로만 채워져 있었고, 무려 30명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탁이었다.진구의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은 그의 큰할아버지였다. 회장님의 친형으로, Y국에서 거주하다 이번에 가족을 데리고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 가족 모임은 여씨 집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다.유진은 처음에는 단순히 가족들끼리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한 것도 분위기만 맞춰주면 될 줄 알았다.하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 진구는 유진을 이끌고 바로 메인 테이블로 향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한혜란 여사와 여순호도 유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여순호는 직접 자신의 큰형에게 유진을 소개하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우리 진구가 신뢰하는 아가씨야.”그러고는 자기 옆자리에 의자를 추가해 유진이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 앉게 했다.물론 유진은 임씨 집안의 딸이라는 명확한 신분이 있긴 하지만, 이토록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을 보며, 진구와 유진의 관계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 머릿속에서 확정된 분위기가 되었다.순식간에 파티장 안은 칭찬과 축하, 아첨의 말들로 가득 찼고, 진구와 동년배의 친척 중 몇몇은 눈에 띄게 부러움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유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자리는 단순한 가족 식사가 아니었다. 이에 유진은 재빨리 핸드백을 챙겨 나갈 구실을 찾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호텔 복도 쪽으로 나와서야 숨을 돌린 유진은 진구에게 따졌다.“선배 왜 말 안 했어요? 오늘 선배 큰할아버지 귀국한 날이고, 집안 전체가 다 모이는 행사였다는 걸요. 처음부터 알았으면 나 안 왔을 거예요.”“할아버지가 꼭 널 데려오라고 했어.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이었지.”진구는 웃으며 말했으나, 유진은 고개
정현준은 업무 능력은 있었지만, 결국 남녀 문제로 스스로 무너졌다.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 정리되자 여진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가족 모임 있어. 같이 가자.”그러자 유진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가족 모임에 내가 왜 가요?”이에 진구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가 널 보고 싶대. 지난번 생신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면서, 꼭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어.”사실 진구는 오늘 저녁, 유진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유진은 진구의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몇 시에 가면 돼요?”“저녁 7시쯤. 내가 호텔로 데려다줄게.”“그래요.”진구는 미리 소혜와 시양의 해고를 결정해 두었기에, 두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인력을 미리 배치해 두었고, 업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유진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하나둘 들어와 그녀에게 사과를 전했다.“팀장님, 저희가 소혜 씨한테 휘둘려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앞으론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게요.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어요.”“눈으로 본 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그깟 사진 몇 장으로 괜한 오해 했네요.”...유진은 담담하게 모두의 사과를 받아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고, 전 이 일로 누구 미워하지 않아요. 앞으로 일에만 집중하죠.”유진의 대인배적인 반응에 부서 내에서의 평판은 확 올라갔다. 유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뢰와 존재감을 동시에 확보했다.더 이상 누구도 진구 라인이라는 말로 그녀의 실력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준이 사직과 업무 인수인계를 하러 다시 회사에 오게 된다면, 자신이 예전에 소혜에게 했던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타협이 안 되면, 뿌리째 잘라낸다는 그 말, 소혜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현준도 이와 얽히고설켜 끝내 유진이 베어내야 할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업무를 마치기 전, 진구는 방연하에게 메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